CAFE

··· 불교 게 시 판

초기 불교와 대승불교의 교리상의 차이점

작성자해공|작성시간19.01.25|조회수1,116 목록 댓글 1

  세부적인 교리를 보면 상좌부 불교와 대승불교는 큰 차이가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대승불교를 티벳불교와 중국, 한국, 일본의 북방불교로 보면 상좌부 불교와 적어도 다음 9가지에 대한 견해가 다르다.

1. 깨달은 자는 다시 태어나는가?

상좌부 불교: 깨달은 자인 아라한과 부처님은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 궁극의 깨달음을 이룬 자는 다시 태어남이 없다.
대승불교: 깨달은 자는 자유로이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선사들은 깨닫고 나서 자유로이 다시 태어남을 강조하는 경우가 있으며, 티벳불교는 일부 법맥의 깨달은 스승은 다시 태어나 깨달음의 맥을 잇는다고 한다.


2. 깨달음과 열반[빠알리어로 닙바나, 산스크리트어로 니바나]은 무엇인가?

상좌부 불교: 성위4[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가 깨달음이며 각 과는 닙바나[열반]를 체험해야만 일어난다. 하지만 엄밀한 깨달음은 아라한과 뿐이다. 석존[석가모니 부처님]께선 자신이 아라한과를 얻기 전까지는 "깨달았다"고 하지 않으셨음을 초전법륜에서 5비구에게 강조하셨다.
대승 불교: 보살 10지를 넘어서 구경각을 이룬다. 돈오점수, 점수돈오, 돈오돈수 등 깨달음에 대한 다양한 주장과 학설이 있다. 니르바나[열반]에 대한 설명은 종파별로 제멋대로이며 그나마 명확하지 않고 열반 자체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는다. "열반은 해서 무엇하리. 열반을 버리고 계속 다시 태어나 중생교화 해야지."가 뛰어난 경지다.


3. 부처와 보살[빠알리어로 보디삳따, 산스크리트어로 보디삳바]은 무엇인가?

상좌부 불교: 아라한도 깨달은 이이고 부처님도 깨달은 이이지만 두 존재는 다른 점이 있다. 이 세상에 아라한은 많을 수 있지만, 새로이 불법을 펴는 정등각자(正等覺者) 부처님은 우주의 한 시대에 한 분 뿐이다. 부처님이 없는 공겁(空劫) 시대도 있다. 보디삳따[보살]는 이러한 부처님이 아라한과를 얻기 전에 바라밀을 닦는 수행자일 때의 이름이다. 따라서 보디삳따는 반야심경에서처럼 깨달음의 설법을 하지 않는다. 또한 4아승기 십만 대겁 동안 바라밀을 닦아야 하므로 부처님에게 깨달음의 설법을 듣고 한 생에 깨닫는 일도 없다. 보다삳따는 공겁을 지나 스스로 닙바나를 체험하고 아라한과의 깨달음을 스스로 이루어 부처가 되어 잊혀진 불법을 새로이 펴야 한다. 따라서 보디삳따가 설법하거나 부처님께 깨달음의 법을 듣는다고 하는 경전은 다 위경이며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다.(http://cafe.daum.net/vipassana/5nU/679)
대승불교: 부처는 깨달은 이라는 뜻이다. 모든 존재가 부처가 될 수 있다. 한 세상에 수많은 부처가 있을 수 있다. 보디삳바[보살]는 다양한 뜻으로 쓰이고 있으며 모든 수행자를 총칭하는 이름이 될 수도 있다.


4. 핵심교리가 4성제 8정도인가? 3법인, 4법인인가?

상좌부 불교: 석존께서 친히 하신 말씀에 따라 4성제 8정도가 있는 것이 불교다. 8정도에는 스님의 경우 계율이 포함된다. 스님은 아플 때가 아니면 오후에는 음료수 외의 음식을 먹지 않으며, 스님은 대처(帶妻)를 하지 않는다 등의 구체적인 계율을 지키는 것이 불교다. 4성제와 8정도를 부차적인 것으로 보거나 다른 교리를 핵심교리라고 내세워, 스님들이 계율을 지키지 않는 종교는 불교가 아니다.

대승불교: 티벳불교에선 제행무상(諸行無常), 제행개고(諸行皆苦),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4법인이 핵심교리이고 4성제 8정도는 부차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다(Dzongsar Jamyang KhyentseWhat Makes You Not a Buddhist3쪽 참조). 반야심경은 명백히 "무고집멸도"라고 하며 4성제를 부정하고 있다.


5. 공즉시색(空卽是色)인가?

상좌부 불교: 아니다. ()[무아(無我)]인 것은 물질, 마음, 마음부수, 닙바나로 실제로 있는 것 네 가지 다이다. 그러므로 공은 물질에 한정되지 않는다. 색즉시공(色卽是空)은 논리적으로 맞으나 공즉시색은 논리적 오류다.
대승불교: 그렇고 말고. 공이 곧 물질이고, 물질이 곧 공이야. 열반이 곧 윤회고, 윤회가 곧 열반이지.


6. 6(六識)은 동시생멸인가?

상좌부 불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는 말룬꺄뿓따경(Malunkyaputta Sutta)과 바아히야경(Bāhiya Sutta)에서 볼 때 보는 것만 있고, 들을 때 듣는 것만 있다고 하셨다.

What the Buddha taught(Gordon Fraser)의 24쪽에서, 마치 영혼처럼 똑같은 식(識)이 보고 듣고 느끼고 인과의 결과를 받으며 윤회한다고 믿는 사아띠(Sāti)에게, 석존께서는 ‘이 어리석은 사람아’라고 석존께서 줄 수 있는 최대의 면박을 주며, ‘내가 식(識)이 조건 때문이 일어난다고, 다시 말해 조건 없이는 식(識)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느냐?’, ‘눈과 보이는 것을 조건으로 식(識)이 일어나면 안식(眼識)이라 불리고, 귀와 들리는 것을 조건으로 식(識)이 일어나면 이식(耳識)이라 불리고,.... 마음과 마음 대상을 조건으로 식(識)이 일어나면 의식(意識)이라 불린다’(Mahātaṇhāsaṃkhya-sutta, Majjhima-nikāya I (PTS ed.), p. 256 ff)고 분명히 설파하신다. 즉 똑같은 불변의 식(識)이 눈으로 보면 안식(眼識)이 되고, 귀로 들으면 이식(耳識)이 되고...마음 자체 내의 대상을 알면 의식(意識)이 되는 것이 아니다. 촛불의 불꽃이 일정량의 연료와 산소를 조건으로 하나의 불꽃이 일어나 사라지고, 그 다음 연료와 그 다음 산소를 조건으로 다음 불꽃이 일어나 사라지는데, 앞의 불꽃과 뒤의 불꽃은 서로 다른 연료와 산소를 조건으로 한 서로 다른 불꽃이며, 앞 불꽃과 뒤의 불꽃이 만난 적도 없듯이, 안식(眼識) 일어나 사라지고, 이식(耳識)이 일어나 사라지지만, 안식과 이식이 동시에 존재하거나 동시에 생멸한 적이 없다. 한 번에 육식 중 한 식(識)만 생멸하며, 여러 개의 식(識)이 동시에 생멸하거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위빳사나의 고차원적인 지혜를 통해서 안식(眼識)이 일어나 사라지고, 그 다음에 의식(意識)이 일어나 사라지고, 그 다음에 이식(耳識)이 일어나 사라지고... 하는 식으로 한번에 6식 중 한 식(識)만 생멸함을 직접 알아차리기 전까지는 잘 믿기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http://cafe.daum.net/vipassana/5nV/296 ; http://cafe.daum.net/vipassana/5nV/297 )

대승불교: 대승불교의 지도자들은 동시에 보고 들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다.


7. 오온(五蘊)은 차례로 일어나는가?

상좌부 불교: 초기불교에서는 오온이 동시에 발생한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해서 말할 필요조차 없다(초기불교입문(초기불전연구원): 72).

대승불교: 대승불교의 지도자들은 오온의 뜻이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으며, (), (受), (), (), ()의 차례로 일어난다고 말하는 경우도 있고, 반야심경에선 명백히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이라하여 오온을 부정한다.


8. 6(六識)인가? 8(八識)인가? 10(十識)인가?

상좌부 불교: 모든 조건 지어진 것은 6(六識) 안에 있다. 6식 외에 다른 식()은 없다.
대승불교: 8(八識)도 있고, 10(十識)도 있지.


9. 위빳사나[(많이 쓰는 표기법으론) 위빠사나], 사마타 vs. 비빠샤나, 샤마타

상좌부 불교: 상좌부 불교에서 "위빳사나," "사마타"라고 부르는 것과 대승불교에서 "비빠샤나," "샤마타"라고 부르는 것은 전혀 다르다. 빠알리어에서 산스크리트어로 바뀔 뿐 아니라 뜻 자체가 전혀 달라진다. 빠알리어의 사마타는 표상(니미따nimitta)를 대상으로 하여 표상에 집중하여 삼매를 계발하는 수행이다(초기불교입문 (초기불전연구원): 193). 빠알리어 위빳사나 (vipassanā)는 관념으로 조립한 전체상과 부분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있는 그대로 해체하여 본다는 의미이다(초기불교입문 (초기불전연구원): 40-43)(행선과 좌선 참조관념 해체)

위빳사나(vipassanā)는 경전에서는 현재 일어나는 현상들을 바로 거기서(Each presently arisen state) 통찰한다(vipassati)”(131Bhaddekaratta Sutta~134Lomasakangiyabhaddekaratta Sutta, Majjhima-Nikāya; The Middle Length Discourse of the Buddha(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95): 1039; 아비담마 길라잡이 2(초기불전 연구원 2017): 272)에서 위빳사띠(vipassati)라는 동사로 등장한다. vi-분리해서, 해체해서,’ passati보이는 그대로 본다(sees), 못 본 것을 발견한다(find), 알아차린다(understands)’의 뜻이 있다. 문맥과 어원으로 볼 때 위빳사나는 현재 일어나는 몸과 마음의 현상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을, 조립된 관념을 통해서가 아니라 관념으로 조립되기 이전에 원래의 해체된 상태 바로 거기서 나타나는 그대로(as and when it comes), 알아차림이다. 현재의 현상을 관념으로 조립해서 이해하지 않고, 현재의 현상이 나타나는 그대로, 현재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바로 거기서, (관념으로 조립하고 구성하는 시간 지체나 왜곡 없이) 바로 알아차림에 위빳사나 수행의 핵심이 있다.

대승불교: 티벳불교의 한 유파에선 샤마타는 호흡을 중심으로 몸과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법이며, 비빠샤나는 샤마타 수행을 통해 자발적으로 깨어있음이 확장되는 상태이다.(http://cafe.daum.net/vipassana/5nU/667 )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해공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9.02.16 나무위키에서 첨삭한 부분을 중심으로 글을 증보하였습니다. 나무위키의 "상좌부 불교"(https://namu.wiki/w/%EC%83%81%EC%A2%8C%EB%B6%80%20%EB%B6%88%EA%B5%90 )를 보시면 대승 쪽의 변호와 비판도 볼 수 있습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