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특별 소개 >
‘붓다빅퀘스천(Buddha Big Question)은 월광 불광 500호 발간 기념으로 시작하여 4년째 성공적으로 이어지고 있다.
지난 5월 7회째를 맞이하여 자현스님, 성태용 전 건국대교수, 권오민 교수 등 3명의 강연자와 200명의 청중이참 석하여 열띤 호응을 받았다.
여러 개의 박사 학위를 따신 것으로 유명한 불교계의 공신(공부의 신), 자현 스님은 <불교공부의 혁신>이라는 제목으로 공부를 정말 하고 싶어 취미처럼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성태용 전 건국대 교수님은 <일상의 삶이 곧 수행현장!>이라는 주제로 불자가 알아야 할 불교의 핵심과 계를 지키는 것의 중요성 등을 말씀해주셨습니다. 이번 호에서 권오민교수의 강연을 강민지 선생이 요약 정리한 글을 소개한다.
<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 강연 요약 >
"10년 전, 불교신문에서 100회 동안 깨달음에 대한 토론을 했는데, 나중에는 '더 이상 깨달을 것이 없다'는 쪽으로 가기도 했다. 저는 오늘 깨달음에 관해서 무엇을/왜/어떻게 이 3가지를 말할 것이다.
깨달음의 의미를 이야기해본다. 불교의 용어들이 대부분 한자다. 그런데 깨달음만 한글이다. 그래서 깨달음이 오히려 신비화 된 듯하다. 깨달음은 인도 말로 <붓디>다. <알다>라는 뜻이다. (내가 손에 쥔) 이것이 마이크라고 안다는 것이다. 보리(菩提)도 안다는 말이고, '각(覺)'도 안다. '오(悟)'도 안다. 동아시아로 오면 '해오(解悟)'도 있고, '증오(證悟)'도 있다. '증(證)'도 깨달을 증이다. '해(解)'는 판단력과 앎의 능력이다.
일체지의 '지(智)'도 안다는 말이다. 정견의 '견(見)'도 안다는 말이다. 세간해의 '해(解)'도 안다는 말. 명행족의 '명(明)' 도 안다는 말이다. 깨달음은 <안다>는 말이다.
우리집 아이는 3살에 한글을 깨달았다고 누군가 말한다. 깨달음이 너무 추상적이고 어려운 말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부처님의 앎에는 물론 수식어가 붙는다. 정각(正覺)이라고, <정>자가 붙는다. 더 붙이기도 한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수식어다. 부처님의 앎은 세간지는 아니다. 그러나 '각 (覺)'이란 <안다>는 말이다.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 (깨달음의 대상)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았고,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
제가 불교철학에서 가장 성스럽게 생각하는 말이 ‘소지(所知)’다. 인도말로는 Jñeya, '알려진 것'이다. 알아야 하는 것은 '응지(應知)'다. 원어는 같다. 진리를 알았다고 할 때, 기독교도 진리를 말하고, 마호메드도 진리를 말한다. 같은 진리는 아니다. 불교에서 진리는 뭘까. (청중 한 분의 답: 영원한 것은 없다) 무상은 삼법인에 들어간다. 삼법인에는 진리라는 말이 안 들어간다. 사성제에 진리가 들어간다. 부처님은 사성제를 깨달았다.
그런데 어떤 분은 반야바라밀, 진성, 일심 등을 깨달았다고 한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뭘까에서 혼동이 벌어진다. 어떤 곳에 가면 자성(自性)을 찾으라 하고, 어떤 곳에서는 자성이 없다고 한다. 9세기에 규봉 종밀의 도서라는 책에서, 마명과 용수는 부처님의 경전을 널리 폈지만, 한 명은 '공'이라 하고 다른 한 명은 '성'이라 하여 종의를 달리했다. 혜능과 신수는 돈과 점으로, 마조는 모두가 진리, 하택은 바른 지견만을 진실이라 했다. 또 어떤 경전을 두고 누구는 진실이라하고, 누구는 방편이라 했다. 동아시아에서는 삼승방편 일승진실이라하고, 해심밀경에서는 삼승진실 일승방편이라고 반대로 말한다. 모든 삼라만상이 깨달을 수 있나, 그렇다고도 하고 아니라고도 한다.
이런 복잡한 사상체계로 인해서, 동아시아의 불교를 전체적으로 일람해보자고 해서 교상판석(敎相判釋)을 했다. 부처님의 일대법문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서로 달라서 종파가 생겼다. 화엄교판과 천태교판이 있다. 화엄교판은 완전한 뜻을 드러낸 경전을 화엄경이라 하고, 나머지는 불완전하다고 하고, 천태교판은 또 다르게 말한다. 서로 골이 생겼을 것 같지만, 그 당시의 사람들은 자신의 것을 완전한 것이라 하고, 나머지는 방편이라고 했다. 그런데 요즘은 다른 경전을 아예 배척한다. 기독교를 따라가는 것 같다.
불교 성전은 몇 가지일까. 8만4천가지라고 하고, 무진장 많다. 어디에 의지할지 종잡기가 어렵다. 생로병사가 괴롭다. 어떤 경은 오온성고(五蘊盛苦)라고 하고, 반야심경의 첫 문장에서는 오온개공(五蘊皆空)이니 오온은 픽션이라고 한다. 전혀 상반된 이야기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놀랍게도,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나만을 믿으라고 하지 않고, 돌아가시면서 <나는 그대들의 의지처가 아니다. 그대는 오직 그대 자신과 법에 의지하라>고 한다.
대개 ‘사의(四依)’라고 하는데, 4가지 의지처가 있다. 사람에 의지하지 말고 법에 의지하라. 이때 사람은 부처님이다.
'말/불요의(不了義)/식(識)'에 의지하지 말고, '뜻/요의(了義)/지(智)'에 의지하라고 한다. 말이 아니라 뜻에 의지할 것.
완전한 말(요의)에 의지할 것. 분별[식(識)]에 의지하지 말고, 체험을 통한 완전한 인식[지(智)]에 의지하라고 한다.
어떤 법에 의지해야할까. 4대 교법이라는 것이 생겼다. 어떤 법문을 (1)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것이라고 말한 경우 (2) 대다수의 박식한 장로들로 구성된 승가로부터 직접 들은 것이라고 말한 경우 (3) 경과 율과 논모(論母, 해설)를 지닌 다수의 장로비구로부터 (4) 혹은 그러한 한 명의 장로비구로부터 직접 들은 것이라고 말한 경우, 이를 인정도 거부도 말고, 그의 말을 잘 듣고 단어와 문장을 잘 파악한 다음, 경에 포함되어 있는지, 율을 드러내는지, 법성에 위배되지 않는지를 검토하여 만약 그렇지 않다면 비불설로 판단하여 버려야 하고, 그러하다면 불설로 취해야 한다.
경전은 오직 부처님의 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제자들도 말하고, 잡아함경 후반부는 아귀들이 설하기도 한다. 불설(佛說)의 정의가 생긴다. 경에 포함되어 있고, 율을 드러내며, 법성에 어긋나지 않으면 불설이다. 동아시아에서 편찬된 경전이 매우 많다. 목록만 한 권이 된다. 그런데 요즘 오리지널 말씀, 부처님의 직설이라고 하여, 니까야만 원음이고 나머지는 사설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편협한 관점이다.
왜 깨달아야 할까?
(청중들의 답: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 맞다. 인도에서는 생사의 괴로움을 업에서 찾는다. 무지에서 비롯된다. 번뇌 중에서 가장 본질적인 번뇌는 무지(無知)다. 미혹(迷惑), 무명(無明)이라고도 한다. 12연기는 혹(惑, 무명)과 업(業, 행)과 사(事, 현실)의 구조를 말한다. 삼세에 걸친 윤회다. 오온성고로 오온 자체가 괴로움이다. 대승 불교에서는 사실 괴로움이 없다. 조견오온개공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오온이 괴로움이라고 했는데, 대승은 중생들이 분별하는 것이고, 이것을 아는 것이 '반야바라밀다'라고 했다.
불교는 우리가 괴롭기 때문에 깨달아야한다고 말한다.
구사론에 이런 말이 나온다. '하사(下士)'는 낮은 단계의 범부.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 항상 자신의 즐거움만을 추구한다.
가장 즐거운 곳이 어딜까? 인천(사람과 하늘 세계)이다. 불교에서는 인간계나 하늘에 태어나려면 선업을 닦아야 한다. 하사는 더 좋은 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한다. '중사(中士)'는 괴로움의 소멸만을 희구할 뿐 즐거움은 희구하지 않으니, 괴로움의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고집멸도 사성제에 대한 무지를 끊음으로서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이른바 소승이다. '상사(上士)'는 항상 자신은 괴로워도 다른 이의 안락과 아울러 다른이의 괴로움의 영원한 소멸을 부지런히 추구하는 대승보살의 길이다.
단혹별고(斷惑別苦). 무지를 끊고 고를 떠난다. 왜 깨달아야 하느냐면, 사성제를 깨닫든, 인과법을 깨닫든, 반야바라밀다를 깨닫든, 괴로움을 끊기 위해서다.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
깨달음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만, 진짜 단순하다. 중아함에 나오는 내용인데, 정견(正見)은 두 가지 인연에 의해서 생겨나니, 첫째는 외적인 것으로서 다른 이로부터 법음(法音)을 듣는 것이며, 둘째는 내적인 것으로서 참답게 사유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보리수 나무 아래서 견도(見道)에 이르렀다. 견도의 4단계가 있는데, 친근선사(親近善士), 청문정법(聽聞正法), 여리작의(如理作意), 인락현료(忍樂顯了)이다. (1) 선사와 친근해지는 것. 주석서에 의하면 선사는 부처님과 불제자다. (2) 정법을 듣는 것. (3) '여리'는 바른 생각을 품고, 들은 바를 참답게 생각하는 것. (4) 들은 바를 받아들여서(=인)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기를 원하는 것이다.
불교 수행의 핵심은 누가 뭐래도 3학(三學, 계정혜)이다. 다 배우면 무학(無學)이다.
동아시아의 불교는 선정(禪定)을 중시한다. 불교의 모든 교리는 구사론과 성유식론에서 형성되는데, 여기서 선정을 이렇게 정의한다. 4성제나 공성과 같은 관찰해야 할 경계대상에 전념하는 것. 이것이 선정의 본질이며, 그리하여 올바른 판단, 즉 지혜의 토대가 되는 것, 이것이 선정의 작용이다. 선은 적어도 불교학에서 지혜의 토대다. 지혜를 일으키려면 선정을 닦아야 한다.
지혜에는 종류가 많고, 잘 들으면 생겨난다. 판단력이다. 계정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혜(慧, prajñā, 프라즈냐)’다.
관찰해야 할 경계대상에 대해 올바로 판단하는 것. 이것이 지혜의 본질이며, 그리하여 의심을 끊는 것이 지혜의 작용이다.
'간택(簡擇)'이라고도 한다.
번뇌는 결단력으로 끊는다. 담배를 끊는 것도 그렇다. 결단력이란 추호도 의심이 없는 것이다. 끊는다고 하면, 세간에서는 칼을 떠올린다. (수행처의 이름으로) 심검당(尋劍堂)이 있다.
칼을 찾는 집이다. 칼은 지혜의 상징이다. 지혜의 정의가 간택이라고 한역에서 말하는데, 원어가 pravicaya이고, 분별적 이해, 탐구, 검토 등의 뜻이다. 한국 불교에서는 이런 분별적 이해를 금기시한다. 분별은 떠나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신문에 실린 달라이라마의 말이 있다.
“불교의 가르침은 맹신이 아닌 비판적 분석이기에
단순히 경전을 외우기보다 이치를 따지며
불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
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 달라이라마
여기 해당하는 것이 '혜(慧)'다. 비판적 사유라는 것이 요즘 철학을 대신한다. 사물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다. 판단의 능력이 지혜다. 법장이 화엄 교판에서 성전에 근거해서 5교의 체계를 확립시키고, 정리(논리, 이치)에 따라서 10종을 나누었다. '종'은 말씀이고 뜻이다. 진실의 근거는 논리다. 불교에서는 논리를 중시했다.
규봉 종밀의 도서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다만 불타말씀에 의지할 뿐, 헤아려 생각[比度]하지 않으면
깨닫는 것도 다만 부박한 믿음[汎信]에 지나지 않아 자신에게
아무런 이익도 없다." - 도서 / 규봉 종밀 저
열반을 또다른 말로, '택력(擇力)'이라고 한다. 판단에 의해서 번뇌를 끊는 것이다.
부처님의 다섯가지 공덕이 있다. 오분법신(五分法身), 계(戒), 정(定), 혜(慧), 해탈(解脫), 해탈지견(解脫知見)이다.
불교에서 왜 깨달아야하는가, 해탈을 위해서다. 계와 정은 혜를 위한 것이고, 혜에 의해서 해탈하는 것이다. 깨달음으로 속박과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해탈이 끝이 아니고, 그 다음으로 해탈한 것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의 정등각(正等覺)이 무엇이냐 하면,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로 내 번뇌를 다 끊었다고 알고,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 것을 아는 것이다. 부자라도 자신이 부자임을 모르면 부자가 아니다. 해탈하고, 해탈한 것을 아는 것이 부처님이다.
지혜를 어떻게 얻느냐가 문제다. 지혜가 그냥 생기지는 않는다. 어쩌면 '생이지지(生而知之)'로 태어날 때부터 갖출 수도 있겠다. 전생에 복이 많았던 거라고 생각한다. 너무 지혜가 많고 아이큐가 좋으면 이 생이 괴롭다고 하기도 하더라. 불교의 원론적인 얘기는 이렇다. <문사수(聞思修)>다.
첫 번째는 청문(聽聞)이다. 듣는 것이다. 들으면서 성취되는 지혜다. 여기서 새롭게 생각할 부분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해방 때 문맹률이 90%대였다. 당연히 책을 못 본다. 그래서 들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지금은 문맹률이 거의 0이니까, 듣는 것만큼 읽는 것이 중요하다. 지혜는 아는 것이다. 일단 알아야 한다. 제가 교학자라서 첫째로, 듣는 것이 중요하다.
두 번째는 사택(思擇), 사유(思惟)다. 한 귀로 들어와서 나가기 전에 음미도 해보고 사유한다.
세 번째는 수습(修習)이다. 수습사원의 수습과 같은 말이다.
몸에 배게 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몸에 밸까? 반복이다. 사유를 반복하는 것이다. 사유수라고도 번역한다. 사유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유를 반복하려고 하면 잘 안 된다. 마음이 산란하다. 그래서 수습에 선정이 수반된다.
저는 이 설명을 자전거 타기나 운전에 비유한다. 운전을 하려면 먼저 교재를 보고 이해를 한다. 이해가 안 되면 원리를 생각해보고, 그런 다음 바로 운전을 못 한다. 비유적으로, 청문에 의지하는 것은 마치 튜브에 의지해서 헤엄치는 것과 같다고 한다. 들은 말로 지혜가 발동되는 것이다. 둘째는 튜브를 잡기도 놓기도 하는 단계, 마지막은 완전히 홀로 수영하는 것이다. 10년을 운전하면 깜빡이, 엑셀, 브레이크를 생각하지 않고도 쓴다.
공성(空性)은 말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세계를 말로 들어서 알 수 없으므로 수습, 체험을 통해서 아는 것이다.
무엇을 어떻게 깨달을 것인가. 불교의 여러 종파나 학파에서 5단계로 수행 단계를 설정한다. 자량위(資糧位)는 준비단계다. 가행위(加行位)는 본격적인 준비단계다. 견도위(見道位)는 10지에 해당한다. 환희지다. 견도위는 깨달음이고, 통달위(通達位)라고도 한다. 이지적인 번뇌, 알지 못해서 생겨나는 번뇌, 무명, 의심 등을 끊는다. 수도위(修道位 또는 修習位, 수습위)에서는 습득한 지를 반복하고, 무학위(無學位 또는 究竟位, 구경위)는 모든 번뇌를 끊은 상태다. 문사수, 청문과 사유와 수습은 자량위와 가행위에서 수행되어지는 것들이다. 견도위는 이미 깨달음의 세계다.
불교공부, 무엇이 문제인가?
다음 내용(발표자료)은 없다. 같이 이야기해보려고 제목만 달아두었다. 불교공부에서 무엇이 문제일까? 혹시 이에 대해 이야기해볼 분이 있으신가? (청중들의 답: 사람마다 너무 다르다)
어떤 종지가 있으면, 진리체계의 마지막에 해당되는 교리를 불교 종단에서 편찬해야 할 것이다. 어떤 분이 윤회를 믿느냐고 저에게 물어보았다. 상반된 견해가 있다. 최근에는 불교의 바탕이 무자성인데, 자성을 찾는 것은 사견이라고 말한다. 본각(本覺)은 부처님 직설도 아니고, 흰두교의 영향이라고 말한다. 불교도들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불교는 방편설이므로, 모두가 거기에 이르는 길이다. 다양성이 불교의 생명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진리와 경전이 생긴다. 불교성전 편찬은 굉장히 오래된 숙원사업이다. 공통으로 볼 만한 경전은 편찬되지 않았다.
수행 방법도 여러 가지다. 닦을 것이 없다는 것은 마조 도일 계통의 진리관이다. 행주좌와(行住坐臥) 진실 아닌 것이 없다. 지혜의 종교라면, 이때 지혜는 비판적인 분석과 판단이다.
달라이라마도 비판적인 분석을 말했다. 불교 교리를 자신의 처지에 맞게 생각해봐야 한다. 자신의 삶에 받아들여야 한다.
주어진대로 믿는 것을 규봉 종밀은 부박한 믿음이라고 했다.
동아시아 불교 전통에서는 비판적 분석을 하는 것을 사량분별이라고 치부한다.
저는 교학자로서 우리에게 진짜 중요한 것은 사량분별(思量分別)이 아닌가 한다. 부처님 말씀인 경전들을 사량분별해야 한다. 경전이 너무 많아서 정리가 필요하고, 번역해야 한다.
한역대장경으로 번역이 되어 있지만, 읽기가 쉽지 않다. 요즘은 청문보다 독서인데, 읽을 만한 경전이 번역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읽기에 너무 어렵고, 제공되지 못한다. 경전과 바로 소통해야 하는데, 현재 우리의 불교는 각자의 정서를 통해 해석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래서 개인에게 오는 메시지가 불확실하다.
결론 (전체 요약)
불교는 깨달음을 추구하는 종교다.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인도말 그대로 하면 <아는 것>이다. 부처님의 앎은 단순히 언어를 통해 아는 것은 아니고, 무상정각이라는 큰 앎이다. 왜 깨달아야 하는가. 본질적으로 <괴롭기 때문>이다.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 <진리>다. <불교의 진리관은 너무 다양>하다.
개론서를 통하든, 그 중에서 <선택>을 해야하는데, <개개인이 해야> 옳다. 진리는 전통을 통해서 주어져 있다. 종단이라면 그것을 선택하여 종지로 선택한다. 혹은 요즘 개별 사찰에서도 종지를 선택하더라. 수많은 진리 중에 <선택>을 해야 한다. 그 과정은 교상판석이다. 그걸 불교신자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지혜의 함양은 <듣고, 생각하고, 수습>하는 것이다.
집중하는 능력과 기술이 필요해서 선정을 한다. 선정을 통해 반복해서 사유한다."
[질문] "화엄경에 보면, 한 마음이 청정하면 온 우주가 청정하다하고, 믿음이 모든 공덕의 어머니라는 말씀이 있는데, 그 말씀이 강의 중에는 없었다. 저는 40년간 불교공부를 하면서 이말들을 사랑하고, 나부터 종이 떨어진 것을 줍기라도 하고, 나답게 살아가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믿음'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린다."
[답] 규봉 종밀은 8세기에 살았던 분이고, 비판적으로 분석 없이 믿는 것을 부박한 믿음이라고 했는데, 부박한 믿음, 이익이 없는 믿음은 어떤 것일까. 불교의 믿음은 기독교의 믿음과 다르다. 믿음에 해당하는 불교 용어는 딱 2가지가 있다. 인도말로 첫째는śrad'dhā, 뜻은 <맑음>이다. 마음이 맑고 청정해지는 것이고, <의심이 해소되어 진실이 보이는 것>이다. 둘째는 OOOO, 뜻은 <확신>이다. 바른 믿음이다. 확신의 믿음은 초월자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은 아니다. 확신하려면 <자신의 식견과 지식>이 있어야 한다.
저는 논과 경을 공부하는 불교학자라서 현실과는 좀 떨어진 이야기일 수 있다. 이런 확신을 모든 사람이 갖기란 상당히 어렵다.
불교 안에서 오로지 이지적인 탐구를 통해서만 해탈이 가능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실천을 강조하는 정토나 염불과 같은 측면도 불교 안에 있다. 제가 아는 바, 불교의 믿음은 무조건적인 믿음은 아닐 것이다. 마음이 맑아진 상태와 확신이다.
<끝>
권오민 교수님의 명료한 말씀 잘 들었습니다. 깨달음을 '아는 것'이라고 한 마디로 정의해주신 것이 저의 불교 공부와 수행의 기준을 잡아주는 흔들림 없는 기반이 될 듯합니다. 바로 이런 저의 상황이 외부로부터 법문을 듣고, '의심이 해소'되어 마음이 맑아지고 '확신'이 생기는 경우가 되겠습니다. 권 교수님이 쓰신 여러책들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읽어보고 싶네요. 열정적이고 좋은 강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붓다빅퀘스천 참가후기는 여기서 마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두, 행복하시기를요. _()_
글쓴이(강민지)
강민지: 동국대학교 선학과를 석사 수료
하였다. 잠실 불광사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여, 불광출판사, 지하철 풍경소리,
불교상담개발원, 한국불교심리치료학회
등에서 일했다. 청년불교 공부모임인 절
오빠절언니, 붓다클래스 등을 도반들과
함께 만들었고, 불교 명상이 세상에 올바
로 잘 쓰이기를 서원하며 매일을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