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달의 명상 >
잘 먹어야
해탈(解脫)한다
글 | 법현스님
무상법현(無相法顯);스님
- 서울 열린선원 선원장
- 일본 나가노 아즈미노시 금강사 주지
-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 매화처럼>,
<그래도,가끔> 지은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먹는 것, 숨 쉬는 것, 잠자는 것, 싸는 것이다. 그 가운데 먹는 것은 의지와 함께 생활을 이어가는 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것으로 생각해왔다. 하지만 사회 속에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면 대개는 거의 저절로 해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를 벗어나 출가를 했을 경우에는 조금 달라지기는 하지만 거의 비슷하다. 초기불교 또는 테라와다불교에서는 얻어먹는 탁발을 생활화했다. 대승불교 또는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벗어난 불교에서는 다른 종교 또는 생활환경의 차이에 의해 생산과 취사행위를 통해 식사(공양)를 해결해왔다.
우리가 먹는 밥은 그저 단순히 식욕 해결의 수단이 아니다. 우리 마음을 담고 있는 그릇인 몸을 튼튼하게 지키고 가꿔나가 궁극에 이루고자 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하는 의미 있는 물질이다. 그래서 밥이 좋아야 몸이 좋고, 몸이 좋아야 마음이 좋고, 마음이 좋아야 꿈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아함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중생은 밥이 있어야 해탈을 얻고 밥이 없으면 죽는다.”고 하셨다, 이는 우리 중생의 몸과 마음이 뗄 래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웅변으로 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흔히 ‘밥’이라 하면 이로 씹고 삼켜서 소화시키는 음식만을 생각하기가 쉽다. 밥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 단식段食으로 씹어서 먹는 보통의 밥이다,
둘째, 촉식觸食으로 촉감으로 먹는 밥이다.
셋째, 사식思食으로 생각이나 사상으로 먹는 밥이다.
넷째, 식식識食으로 인식작용으로 먹는 밥이다.
이러한 네 가지 밥의 구분을 통해 부처님이 일러주시려는 가르침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늘 먹는 밥과 함께 눈·귀·코·혀·몸·뜻의 여섯 가지 감각기관 모두가 같이 바르게 만족하는 밥을 먹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운 모습은 눈의 밥이요,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는 귀로 먹는 밥이고,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갖는 것은 생각으로 먹는 밥이다.
한 톨의 밥알이라도 고맙게 생각하고 맛있게, 이 한 알의 밥이 내게 오기까지 애쓰신 모든 이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먹는다면, 그 속에 네 가지 뜻이, 나아가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 담겨 있다. 밥 이야기를 하기 위해 컬럼을 하나 소개한다.
“우리들의 한 끼 밥상을 위해 온 우주가 동원된다는 말이 있다. 햇빛과 바람과 비가 협력해 곡식과 채소를 키워냈다. 촉촉한 봄비와 여름의 천둥번개, 초가을의 태풍까지 대자연의 사랑이 있었고 그 작업내용은 우리가 먹는 쌀 한 톨 한 톨에 새겨져 있는 것 아닌가? 거기에다 여름내 땀 흘려 일한 농부와 바닷바람 맞으면 일한 어부의 정성이 모든 것을 있게 했다. 도시에 사는 우리는 너무 자주 그들의 수고를 잊는다.
그뿐이 아니다. 우리가 편안히 앉아 밥을 먹는 저 건너 부엌에는 밥상을 차려주는 아짐씨들이 있다. 뚝배기계란찜이 넘치지 않게 앞으로 뒤로 가스불을 조절하는 아짐씨, 불 앞에서 일하느라 솟아난 땀방울을 훔친다. 날렵한 손놀림으로 반찬을 그릇에 담아 커다란 쟁반에 가짓수대로 차려내는 아짐씨, 음식을 나르고 밥상을 치우고 닦는 아짐씨까지, 하나같이 수수한 차림새를 하고 있는 중년의 그녀들, 각자 맡은 일에 몰두해 있어 그저 덤덤한 얼굴 표정을 하고 있다. 집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수 천 수 만 번 밥상을 차려냈을 그녀들, 무심한 듯 나물을 조물조물 무치고 파, 마늘 듬뿍 넣은 양념간장으로 고등어를 조려내는 그녀들의 노동으로 바로 우리의 즐거운 점심 밥상이 차려진 것이다. 이 총체적 수고로움 앞에 어찌 감동 없이 밥숟가락을 들 수 있을까? 더구나 누군가를 비난하고 원망하거나 심지어 저주까지 하면서 밥숟가락을 드는 것은 전혀 합당하지 않다. 혼자서든 여럿이든 맛있고 즐겁게 먹는게 밥상에 임하는 우리들의 자세여야 한다.“ 이 글은 서울 셀렉션 박 어진기획실장이 2010.1.16일자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내용의 일부이다.
나는 밥이 되고 싶다. 나는 밥이다. 2009년 선종(善終)하신 김 수환추기경의 이 말은 참 음미할 것이 많은 느낌 있는 말이다. 선종은 쉽게 말해 돌아가셨다는 말의 천주교식 표현인데 이것은 어느 종교, 어느 나라 말 할 것 없이 뉘앙스가 비슷하다. 유교의 고종명(考終命),불교의 열반(涅槃),천주교의 선종(善終)이 그것이다. 《書經(서경)》<周書(주서)> 洪範(홍범)편에 나오는 5복의 하나인 고종명과 부처님 이야기를 담은 아함경이나 열반경 등에 나오는 평화로운 경지인 열반, 그리고 잘 마침이라는 뜻의 선종은 이미지상으로도 뜻으로도 잘 어울린다. 아무튼 김 수환 추기경이 남긴 ‘나는 밥이다. 밥이 되고 싶다.’는 말은 부처님이 말한 ‘중생은 먹이로 해탈한다.’는 말과 잘 어울린다. 부처님의 말씀을 담아놓은 초기경전인 아함경에 나와 있는 말이다.
밥을 먹기 앞서 발원문을 하도록 만들어본 것이 있다. 옛날 태고종에서 불교의 생활화를 위해 불교성전을 만들고 한글의식을 준비할 때 만든 것이다. 불교성전은 <신편불교성전>이라고 해서 뇌허 김동화박사가 교리발달사적 편제에 의해 편집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현재까지 만들어진 불교성전 가운데 가장 잘 만들어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나 어렵다는 평가도 동시에 받고 있는 불교성전이다. 함께 포교활동과 생활화를 위해 만든 발원문이 공양발원문이다.
공양 전 발원문: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스며있고 한 알의 곡식에도 만인의 노고가 담겨있습니다. 이 음식으로 주림을 달래고 몸과 마음을 바로 하여 사회대중을 위해 봉사하겠습니다.”
공양 후 발원문:
“이르는 곳마다 부처님 도량이 되어 다같이 불도를 이룹시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
요즘은 종단 또는 불교신행단체에서 형편에 맞게 만들거나 가다듬어서 이용하기도 한다. 나는 처음 만든 이 발원문을 활용하고 있다. 밥 한 끼 먹는 데에다가 무슨 의미를 그렇게 두어야 하느냐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먹는 것은 꽤나 중요한 일이며 수행의 부분이기도 하다. 부처님은 어떤 활동을 하드라도 생각 속에서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신다. 인도 고어로 사띠(sati) 속에서 일상생화를 하라는 가르침이다. 사띠는 마음이 이리저리 쪼개지지 않고 마음 전부가 어떤 일 또는 명상대상에 집중된 상태를 말한다. 비유하자면 첫사랑에 반한 사람이 생각하지 않으려 해도 생각이 떠오르며 모든 행위 이전 이후와 행위중에도 그 사람이 떠올라 행위를 하지 못할 정도처럼 집중된 상태를 말한다. 대승불교의 간화선 수행에 의하면 화두를 든다고 표현하는데 화두를 처음에는 들지만 나중에 화두가 들려지면 잠자는 꿈속에서도 화두가 성성하다고 이야기 하는 상태와 비슷하다. 밥을 먹을 때 천천히 씹으며 밥알 통째로 꿀꺽 삼키지 말고 구성 성분의 작은 알갱이까지 나누어서 혀로 느끼면서 씹으라는 가르침을 주신다. 급하게도 말고 느리게도 말며 그것이 나에게 온 과정까지 살피면서 씹어 삼키라고 하는 것이다. 사띠 속에서 씹고 삼키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발원문에서처럼 밥의 과정과 앞으로의 효능에 관해 사유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밥을 너무 많이 먹거나 급하게 먹어서 나는 탈도 생기지 않는다. 오히려 갈락토스에서 느껴지는 단맛이 먹는 즐거움까지 잔잔하게 느껴질 것이다. 잘 먹어야 해탈한다는 말은 그래서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