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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10월호] [나의 금강경 공부 18] 업(業)대로 태어난다 / 조성내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1.10.06|조회수48 목록 댓글 0

< 부루나 칼럼 >

 

 

 

[나의 금강경 공부 18]


업(業)대로 태어난다

 

 

 


글 | 조성내
(법사, 컬럼비아 의대 임상조교수)

 

 

 

 

 

<금강경>제6분;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한 부처님이나 두 부처님이나 셋·넷·다섯 부처님만 착한 마음의 바탕(善根)을 튼튼히 심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한량없는 천만부처님의 처소에서 거룩한 마음의 바탕을 튼튼히 한 사람이니, 이 글귀를 듣고 한 생각에 거룩한 믿음을 내느니라.”
제14분; 
“수보리야,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몸을 베이고 찍길 적에, 내가 그때에 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 없었으니라. 
수보리야, 또 기억해보니, 여래가 과거에 오백생 동안 인욕선이 되었을 때가 있었노라.“
제17분;
“실로 어떤 고정된 법이 있어서 최상의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연등부처님께서는 나에게 수기(授記)를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이 다음 세상에 반드시 부처를 이루리니, 그 이름을 ’석가모니‘라고 하리라”라고 하셨느니라. 왜냐하면 여래하고 하는 것은 모든 법이 여여(如如)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니라.”

 


도 깨침은 전생에서부터
불교에서는, 삶이 태어나면서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다. 시작이 없는 먼 과거부터,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하면서 살아온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무한정하게 생과 사를 윤회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불교에는 업을 믿고 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신·구·의(身口意), 1 행동하고 2 말하고 그리고 3 생각하는 것 자체가 업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좋은 집안에, 총명하고 건강하게 태어난 아이가 있다. 이것은 우연하게 총명하게 태어난 것이 아니다. 다 전생에서부터 자기가 쌓아온 좋은 업 때문인 것이다. 
위에서 보다시피, 부처님도 전생에 수많은 부처님을 섬기면서 착한 마음의 바탕을 심어놓았다. 그리고 가리왕에게 몸이 찢겨가면서까지 인욕정진을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연등부처님으로서 이 세상에서 반드시 부처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받았다. 다 부처가 될 준비를 전생에서 해놓았기에, 현생에 태어나서 부처가 된 것이다. 전생에 쌓아온 업이 없었다면, 부처가 6년 고행했다고 해서 부처가 되지는 않는다. 전생의 업이 부처로 하여금 부처 되게끔 수행하도록 했었기에, 부처는 현생에서 6년 고된 수행을 닦았었다. 그리고 현생에서 부처가 되었다. 
가령 하늘에서, 빗방울이 한강에 떨어졌다. 한강에 떨어진 빗방울은, 가는 도중에 증발되거나 혹은 사람이 마시지 않는 한, 서해로 흘러들어가게끔 돼 있다. 부처도 마찬가지로, 일찍 죽지 않는 한, 혹은 심하게 병들지 않는 한, 부처는 부처가 되게끔 운명적으로 태어났었던 것이다. 사람이란 업대로 태어난다.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업이 하라는 대로, 사람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탄생불

 


부처의 탄생
다음은 <우리말 팔만대장경, 10쪽>에 적어진 것을 여기에 적어보겠다.

늦게 귀여운 태자를 얻는 ‘슈도오다나’(부처의 아버지)는 기쁨에 넘쳐 먼저 나라에서 이름 높은 예언자 아시타 선인을 불러서 태자의 상을 보도록 했다.
 아시타 선인은 태자를 안고 그 골상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문득 눈물을 떨어뜨렸다. 숫도오다나가 그 까닭을 물었다. 아시타는 대답하였다. “이 왕자는 서른두 가지 대장부의 몸매와 여든 가지 미묘한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이 세속에 있으면 전륜성왕이 되어 온 천하를 통치할 것이요, 세속을 떠나 도를 닦으면 반드시 큰 도를 깨달아 부처가 되어 널리 중생을 건지오리이다. 그런데, 태자는 반드시 집을 떠나 부처가 될 것이 온데, 나는 나이가 늙어 부처님의 법을 듣지 못하게 될 것이므로 슬퍼하나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태자의 이름을 ‘싯달타’라고 명명했다. 곧 “모든 것이 죄다 바로 성취된다.”라는 뜻이다.

부처는 부처로 태어나셨다
위에서 보시다시피, 부처는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부처가 되셨다. 전생에 부처는, 현생에 부처가 되도록 업을 이미 만들어놓으셨다. 전생에 지어놓은 업 때문에, 부처는 태어나자마자, 부처가 되기 위한 삶을 살아야만 했었다. 업은 싯달타가 자라면서 부처가 되게끔 했던 것이다. 
다음은 부처가 되기 전의 부처 이름은 싯달타였다. 다음은 <우리말 팔만대장경>(11쪽)에 써진 것을 여기에 적어보겠다.

“봄 농사철이었다. 왕 숫도오다나는 태자와 모든 샤캬족의 동자들과 함께 들에 나아가 백성들이 밭가는 광경을 구경하였다. 그 때 파리한 농부들이 보습 메인 소를 몰고 땀을 흘리며, 소를 채찍질하면서 밭을 갈아엎고 있었다. 이때에, 보습 날에 찢기어 다치고 끊어진 땅 속의 벌레들을 까막·까치가 재빨리 날아들어 쪼아 먹는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태자는 홀로 나무 밑에 고요히 앉아 생각하였다. ‘모든 생명들은 다 같이 제가 살기 위하여 세상에 난 것인데, 어째서 국왕은 백성을 부려먹고, 농사짓는 백성은 소를 부려먹고, 약한 놈의 생명은 밭가는 보습에 찢기고, 또 날래고 힘센 날짐승에게 쪼아 먹히고·····.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참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그래서 한동안 생각에 잠겨 일어나기를 잊었다.”

보통 어린 아이들은 뛰어놀고 재미있게 노는데, 싯달타는, 어렸을 때부터, 삶의 고통에 대해 사색하면서 자랐다. 이것도 다 부처되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이다. 싯달타는 19세에 결혼했다. 그래도 아마 아내하고 재미있게 살려고 하지 않고, 사색을 거듭해오고 있었다. 29세에 출가를 했는데, 하여튼 출가 전에, 그는 궁전의 동서남북, 네 개의 문 밖을 나가보았다. 첫 문밖에서 ‘늙은 사람’을 보았다. 둘째 문 밖에서는 ‘병든 사람’을 보았다. 다음 문밖에서는 ‘죽음’을 보았다. 마지만 문에서는 사마나(사문)을 보았다. 사마나는 싯달타에게, “사람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 나고 죽음에서 벗어나는 도를 닦고 있노라”라고 말해주었다. 
얼마 되지 않아서, 29세 때에, 싯달타는 궁정을 떠나 산속으로 들어가서 도를 닦는다. 전생에 지어놓은 업, 현생에서 부처가 되기 위해서, 이런 행위가 다 싯달타로 하여금 어렸을 때부터 삶에 대해 사색하게 하였고, 4개의 문 박에서 노병사를 보게 되었고 그리고 도를 닦아가는 사마나를 만나게 된 것도, 다 우연(偶然)이 아니라, 업에 의해서, 이미 결정되어진 삶의 과정이었다고 볼 수가 있다.

내가 여기서 숙명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숙명이라는 것은 살아가면서 자기의 운명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가령 거지가, 자기의 운명은 거지로 태어났다. 나는 거지로 태어났기에 그냥 거지로 계속 살아가겠다. 하고 생각한다면, 이 거지는 자기의 운명을 숙명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거지가, 나는 거지라는 운명으로 태어났지만, 내가 앞으로 노력해서,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자기의 운명을 도전해가는 것, 이게 바로 운명론자인 것이다. 운명론자들은 자기의 노력 여하에 따라 자기의 운명이 어느 정도 바뀐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령 싯달타는, 궁정의 어여쁜 여자들하고 향락을 즐기고, 왕위를 계승해서 왕으로서 살다가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싯달타는 도를 닦기 위한 고된 삶을 택했다.
 불교에서는 숙명은 부정한다. 하지만 운명은 긍정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우리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가 바꾸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가령, 전생에 10선을 행하면서 보시도 많이 해서 좋은 복덕을 많이 쌓아놓았다. 그 복덕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왕도 되고 대통령도 된다. 그런데 선정(善政)을 베풀지 않고, 독재자가 되어 국민을 억압하고, 국민을 죽이고, 거짓말하고, 국민의 재산을 빼앗고··· 이처럼 못된 짓을 하게 되면, 전생에 쌓아놓은 복덕이 다 하면, 다음에는 권좌에서 쫓겨나든가, 혹은 죽은 후에 지옥이나 축생으로 태어날 수도 있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자기가 저질은 행위에 대한 응당한 과보를 받는다는 것, 이게 인과응보인데, 인과응보를 믿고 있는 게 불교이다.

 

수자타 탑


업과 싯달타
부처는 이미 전생에서부터 오늘날의 부처가 되게끔 태어났었다. 그런데 왜 부처는 6년 동안 고행을 해야만 했었나? 업이 싯달타로 하여금 숲속에 들어가 수행하게끔 했다. 부처는 먹지를 못하고, 몸은 극도로 쇠약해지고, 동시에, 몸이 쇠약해지니까, 정신력도 약해지고·····, 이때 부처는 깨달았던 것이다. 몸을 학대하는 수행을 하다가는, 도도 깨치기 전에 죽어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쳤던 것이다. 그래서 심한 육체적인 수행은 중단하기로 했다. 
때마침 우루벨라 촌장 딸 수자타는, 나무신(樹神)에게 공양을 바치고 있었다. 나무신에게 공양을 바치는 중, 수자타는 좌선하고 있는 부처를 발견한다. 그리고 나무신 대신, 부처에게 유미죽을 바친다. 부처는 기력을 회복한다. 그리고 새벽별을 보고서 도를 깨친다. 사람들은 말한다. 부처가 연기법(緣起法)을 깨쳤다고.
내 생각으로는, 수자타도 아마 전생에 부처하고 어떤 인연을 맺어놓았을 것이다. 부처가 수자타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바로 그때 수자타는 나타났다. 그녀의 나타남은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다 전생에 맺어진 어떤 인연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부처로 하여금 빨리 회복되게끔 도와주었던 것이다.  
부처가 아무리 전생에 부처의 도를 다 닦아놓았다고 해도, 현생에서 오욕향락에 빠지고, 도를 닦지 않았더라면, 도를 깨칠 수는 없는 것이다. 업이 부처로 하여금 6년의 고행 수행을 하게 했다. 그리고 깨치게 했던 것이다, 
여러분들도 다 알고 계시겠지만, 하늘에 있는 조그맣게 보이는 달이, 달의 인력이, 저 거대한 바닷물을 끌어당기고 밀어주고···, 밀물·썰물을 일으킨다는 것을 다 알고 계실 것이다. 달의 인력이 바닷물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전생에 진 업, 그리고 현생에 지어지고 있는 업이 합쳐서 부처로 하여금 도를 깨치게 했던 것이다. 업이 사람의 운명을, 많은 부분, 좌우하고 있는 것 같다. 

 


현생에 지은 업
사람들은 전생의 업만 생각하는 데, 현생의 업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면, 고등학생이 밤낮 없이 열심히 공부를 한다. 좋은 실력을 쌓아놓는다. 이 실력이 바로 업이다. ‘좋은 업’이다. 반면에 어느 고등학생은 공부를 전연 하지 않는다. 매일 놀기만 한다. 실력이 없다. ‘실력 없음’이 바로 ‘나쁜 업’이다. 명문대에 들어가느냐 혹은 안 들어가느냐는 학생 자신에게  달려 있는 게 아니다. 학생이 만들어놓은 업에 따라, 학생이 만들어놓은 업(실력)이 명문대에 입학하게 하느냐 혹은 낙방하게 하느냐를 결정하는 것이다. 
다른 예를 들어보겠다. 신문에서 보는 뉴스이지만, 어떤 사람이 살인을 했다. 살인이라는 행위가 ‘나쁜 업’을 만들어놓았다. 그 당시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그 범인은, 살인을 한 후부터는, 교회에도 나가고, 사회에 봉사활동도 하고, 주위사람으로부터 아주 좋은 평을 받으면서 살았다. 10년 후에, 그는 체포되었다. 그가 성실하게 살아왔었던 그가 체포된 원인은, 10년 전에 그가 살인을 해서 만들어놓은 ‘나쁜 업’ 때문이었다. 업이 그 사람의 삶을 조조하고 있는 것이다.
 


내 몸뚱이의 주인은 나인가? 혹은 나가 아닌가? 
젊었을 때 나는 건강했었다. 그래서 건강에 대해 걱정 없이 살아왔었다. 그런데 늙어지고 보니, 특히 은퇴를 하고 보니, 가끔 허리가 아프다, 무릎이 종종 아프다. 혈압은 예전부터 높았었다. 그래서 내 몸뚱이한테, “야, 내 몸뚱이야, 내가 너의 주인이다. 내가 너의 주인이니까, 너의 주인인 내 말을 들어야 할께 아니겠는가. 자, 무릎아, 그만 아파, 알았어?” 나의 오른손 손가락이 관절염 때문에 아프다. “손가락아, 그만 아파라, 너의 아픔 때문에 내가 고통이 많다. 이제는 그만 아파, 알겠어?” 그런데 내가 주인인데도 몸뚱이가 내 말을 안 듣는다. 이상하다? “왜 내 말을 안 듣지?” 항상 의심을 품어왔었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 골프를 친다. 걸어서 골프를 치면 무릎이 아프다. 걷기가 불편하다. 몸에서 기운이 싹 빠져버린 것 같이 피곤을 느낀다. 그래서 내가 내 몸뚱이에게, “자, 이제 그만 피곤 하라. 힘을 내라!” 하고 명령했다. 그런데 몸뚱이는 내 말을 듣지 않는다. 왜 내 말을 듣지 않을까?


누구한테 항의를  

내 몸은 내 몸인데도
내 말을 안 듣는다

책을 읽는데 글자가 안 보인다
야, 눈들아, 너희들 뭣들 하니?
글자를 읽게 해다오
눈들은 내 말을 안 듣는다
할 수 없어서 안경을 맞춘다
안경이 있어 책을 읽는다

이빨이 아프기에 이빨을 뺀다
이빨아, 더 이상 아프지 말라
아프지 말라고 했으면 더 이상 안 아파야 하지 않겠는가
이빨은 계속 아프다
아프기에 빼다 보니
지금은 틀니로 밥을 먹는다
 
내 몸의 주인은 나인데
내 몸뚱이가 나의 말을 안 들으니
아, 답답하고 억울하다
이 심정을 부처에게 상의해보고 싶다

이 몸뚱이가 내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이 몸뚱이의 주인은 내가 아니란 말인가? 내가 아니라면 누가 도대체 이 몸뚱이의 주인일까? 


내 삶의 운전자는 누구인가?  

자동차는 알고 있다
누가 운전하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 나는 모른다
누가 나의 삶을 운전하고 있는지를
 
내가 태어날 때 자의적으로 태어난 게 아니고
타의적으로 태어났다
내 직업도 내 배우자도 내가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다
 
내가 성공하고 싶어서 성공한 게 아냐
나도 몰래 성공되어지고 있는 거야
내가 실패하고 싶어서 실패한 게 아냐
나도 몰래 실패되어지고 있는 거야

건강하고 싶어서 건강한 게 아니야
나도 몰래 건강해져 있는 거야
병들고 싶어서 병든 게 아냐
나도 몰래 병들어지고 있는 거야
늙고 싶어서 늙어지는 게 아냐
나도 몰래 늙어지고 있는 거야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죽고 싶지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죽어지지 않는다
 
내 삶을 내가 직접 운전하고 싶은데
내 몸 내가 내 마음대로 움직이고 싶지만
나 아닌, 그 무언가가 내 몸을 대신 운전하고 있단 말이야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얼마나 기가 찬 일인가!
누가 내 삶을 조종하고 있는가?
무엇이 내 삶을 조절하고 있는가?
내가 죽기 전에 알고 싶은 데···

내 삶을 조절하고 조종하는 이가 누구인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다음 호에서 알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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