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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불 교 사

미국역사와 함께 보는 미국불교사 5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19.02.26|조회수199 목록 댓글 0


『미국이 만난 불교(The American Encounter with Buddhism』 제3장 비전秘傳 불교도, 합리적 불교도, 낭만적 불교도

 

미국불교사 5

1893년 시카고 종교회의

 

미국불교사에서 1893년에 있었던 시카고 종교회의는 가장 중요한 행사라고 평가를 받는다. 이 시카고 종교회의를 미국불교사의 출발이라고 하는 주장은 현재까지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이 종교회의는 콜롬부스가 1492년 아메리카 대륙 발견 400주년 기념하기 위해 열린 시카고 만국박람회 때문에 열린 회의였다. 만국박람회가 물질물명의 총합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정신문명의 전시장으로서 시카고 종교회의가 열린 것이다. 이 종교회의는 대 성공을 거두었고 그 후 100년 후인 1993년 시카고에서 이 종교회의를 기념하기 위해 불교계에서 달라이 라마, 숭산스님, 도안스님, 삼우스님, 법타스님, 불타사 주지 홍선스님을 비롯한 전 세계 수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 대성황을 이루었다.

 

당시의 미국 상황

 

만국 박람회와 백화점

 

자연의 축복과 더불어 미국인들을 계급의식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데에 기여한 소비문화는 19세기 중반에 어떤 모습이었을까? 가장 현저한 소비주의 과시의 구경거리로 박람회와 백화점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박람회는 제국주의 위용을 과시하는 진열장이었다. 영국은 이미 18515월부터 10월까지 141일간 세계 최초의 국제박람회인 런던 만국박람회를 통해 세계 만방에 국력을 과시한바 있었다.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왕자의 적극적인 후원 하에 하인드파크에서 열린 런던 박람회엔 34개국이 참가했으며, 총 입장객은 604만 명에 달했다. 이 박람회에선 크리스털팰리스(Crysal Palace,수정궁)’, 싱어가 만든 미싱, 콜트가 만든 피스톨이 각광을 받았다. 특히 30만 장의 유리가 사용된 크리스털팰리스는 건축학의 경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기하학의 첨단을 과시했다.

이에 자극받은 미국은 1853년 뉴욕만국박람회를 개최했다. 52600 제곱미터 넓이의 전시장에서 열린 이 박람회엔 150만 명의 관람객이 몰려들어 대성황을 이루었다. 오티스(Elisha Otis, 1811~1861)의 엘리베이터가 출품돼 인기를 모은 뉴욕 박람회는 기술진보, 국제무역, 대중문화 진흥에 큰 구실을 했다. 뉴욕 박람회에 이어 열린 1855년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에선 나폴레옹 3세가 마치 나폴레옹 1세가 환생한 것 같은 복장을 하고 나타났는데, 이는 파리 만국박람회가 영국을 경제적으로 추월하기 위한 야심에서 기획된 것임을 말해준다. 파리는 1900년까지 총 다섯 차례 박람회를 개최하면서 현대적인 도시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박람회 공화국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박람회에 재미를 붙인 나라는 프랑스나 영국보다는 단연 미국이었다. 1876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독림 100주년 만국박람회의 규모는 당시로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955000제곱미터의 면적에 모두 167동의 건물이 들어서고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1922)의 전화기, 숄즈의 타자기, 싱어의 최신 재봉틀, 폴먼(Pullman Company)의 침대차가 등장해 관람객을 매료시키는 동시에 국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인디언은 예외였다. 백인들은 인디언의 원시성과 야만성을 강조함으로써 백인문화의 우월성을 과시하고자 개화된 인디언 부족들의 박람회 참가를 의도적으로 저지했다. 미국은 만국박회의 성과에 재미를 붙여 시카고의 콜럼버스박람회(1893), 샌프란시스코의 켈리포니아 동계박람회(1894), 애틀란타의 면화박람회(1895), 오마하의 트랜스미시시피박람회(1898), 버펄로의 팬아메리카박람회(1901)를 잇달아 개최한다.

----미국불교사 산책 3, 강준만 저에서 옮김

 

 

18825월 조미수호조약 체결.

188210월 뉴욕에서 선교사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s)한국, 그 은둔의 나라(Corea, the Hermit Nation')발행. 미국 개신교 선교부의 선교전략 수립에 큰 참고서 역할. 그리피스는 일본의 조선 침략을 조선인들을 위한 행위라고 한 친일인사.

 

1884년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이 조선 입국. 선교사로 첫 번째 조선 입국.

18854월 장로교 목사 호러스 언더우드, 감리교 목사 헨리 아편젤러,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 이들은 188412월 미국을 출발하였다.

18859월 페놀로사와 비글로우는 일본에서 천태불교의 계를 받았다.

 

18865월 조지아주 애틀란타에서 의사인 존 팸버톤이 코카콜라 발명.

 

1887년 켈리포니아 산타크르즈에서 필란지 다사(Philanngi dasa)‘The Buddhist Lay'라 는 잡지를 발행하기 시작하여 7년간 발행

1889312일 정토진종 스님 카가히 개인자격으로 호놀룰루에 도착. 노동자 실태파악.

1893년 세계종교회의  

1893년 찰스 슈트라우스(Charles Strass) 1893년 종교회의가 끝나고 나서 불교에 귀의했다.

1894년 폴 카루스가 붓다의 복음서(the Gospel of Buddha)를 발행하였다. -

1896년 정토진종 공식적 포교당 하와이 파후라 마을에 건립

1897D.T. 스즈키 미국에 도착.

18975월 샌프란시스코에서 달르마팔마 주관으로 미국에서 처음으로 석가탄신일 행사.

18987월 일본 정토진종 불교포교단이 공식적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도착. 7.30일 불교청년 연합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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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D,Z.스즈키의 최초 번역서인 마명대사의 대승기신론 출판. 폴카루스에 의해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400주년

 

1892년은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40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했다. 인디언의 비참한 운명과는 달리, 18921012신대륙 발견 400주년을 맞아 시카고와 뉴욕 등에서 성대한 기념행사가 열렸다. 뉴욕에서는 5일 동안 가두행진, 불꽃놀이, 육군과 해군의 시가행진이 벌어졌다. 100만 인파가 몰려든 가운데 지금은 콜럼비스 광장이라 명명된 센트럴파크 한 귀퉁이에서는 콜럼버스를 기념하는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또한 공립학교 학생들은 전미 학교축전에서 아메리카 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는 국기 게양식을 거행하며 난생 처음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기도 했다(이어 1897~190531개 주가 국기모독금지법을 제정한다).

 

그러나 아메리카는 이제 더 이상 열려 있는 땅은 아니었다. 인디언 이외에도 다른 인종과 민족을 차별하는 새로운 배타주의가 등장해 미국을 닫힌 공간으로 변질시켰다. 1892년 저널리스트 토머스 베일리 올드리치(Thomas Baily Aldrich, 1836~ 1907)[월간 애틀랜틱(Atlantic Monthly)]에 쓴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의 문은 넓게 열려져 아무런 방벽도 없이 방치되어 있다. 그 문을 통해 잡다한 거친 무리들이 몰려온다. 볼가강에서 온 사람, 중앙아시아의 스텝 지역에서 온 사람, 황해에서 온 무례한 사람, 시리아인, 튜턴인, 켈트인, 슬라브인, 구세계의 가난뱅이와 잡동사니들이 몰려 들어온다. 그들과 함께 낯선 신과 낯선 의식도 들어온다. 그들은 호랑이와 같은 정열을 가지고 무서운 발톱을 뻗고 있다. 길거리와 골목에서 들리는 이상한 말소리는 우리 분위기와 다른 위협의 소리이고, 옛날 바벨탑에서 들렸던 바로 그 소리들이다.”

이 주장은 결코 소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1894년 이민제한 연맹(the Immigration Restriction League)이 창설되는 것이 그걸 잘 말해준다. 나중에 윌슨 행정부에서 법무장관을 지낼 찰스 워런(Charles Warren, 1868~1954)등 뉴잉글랜드 명문가 출신들이 주동이 된 가운데 하버드대학 총장인 퍼시벌 로웰을 포함한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대거 참여했고, 헨리 케벗 로지(Henry Cabot Lodge,1850~1924)가 이들의 정치적 대변자 노릇을 했다. 이들의 주장은 이민자들이 미국의 도시를 망쳐놓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미국인을 초기이민과 새로운이민으로 구분하고, 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후자는 너무 저질이라는 것이다.

초기 이민자, 즉 구이민자는 앵글로색슨계나 게르만계로 주로 개신교를 믿는 북.서유럽 출신인 반면, 이민자는 슬라브계나 라틴계로 주로 카톨릭. 그리스 정교. 유대교 등을 믿는 동.남유럽 출신이었다. 신이민 입국자수가 처음으로 구이민 입국자수를 웃돈 것은 1891년부터 1900년까지 10년간으로, 이 기간 중 구이민자는 164만 명, 신이민자는 192만 명이 입국했다. 이어 1901년부터 1910년까지의 입국자수는 구이민자가 191만 명인 반면, 신이민자는 623만 명에 이르게 된다.

 

시카고 만국박람회

 

신대륙 발견 400주년행사는 1893년까지 이어졌다. 미국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189351일부터 1030일까지 47개국이 참가한 시카고 만국박람회를 개최했다. 1890년 인구규모에서 필라델피아(104만 명)를 제치고 미국 제2의 도시로 떠오른 시카고(110만 명)엔 무려 2,100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이 박람회는 콜럼버스를 영웅으로 추앙하는 콜럼버스 엑스포였다. 국가에 충성을 맹세하는 국기에 대한 맹세(충성맹세)’가 이 박람회의 개최를 기념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나는 국기와 국기가 상징하는 공화국에, 만인을 위한 자유와 정의를 위해,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국가에, 나의 충성을 맹세합니다.”

클리블랜드 대통령은 시카고에서 1,600킬로미터나 떨어진 백악관에서 금으로 만든 전신키를 눌러 박람회장에 전깃불을 밝혔다. 30만 명의 인파가 열광하는 광경을 한 리포터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이와 동시에 청중들은 일제히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질렀다. 오케스트라는 할렐루야 합창곡을 힘차게 불렀다. ---- 호수의 전기분수대는 하늘을 향해 물줄기를 뿜어 올렸다. ----호수의 배 위에서는 대포알이 발사되었다. ----눈앞에 무엇인가가 드러났다. 콜럼버스가 최초로 아메리카 해안을 항해했을 때 탔던 두 척의 도금 모형선박이었다.”

조선은 역사상 최초로 이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참가했다. 조선의 참여를 주선한 미국공사 알렌은 조선관이 태극기를 게양하는 동시에 이곳에서 조선은 중국의 속국이 아니라 독립국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또한 국악인 10명을 대동해 개최기간 동안 조선 고유의 궁중아악을 연주하게 함으로써 조선이 독자적인 문화국임을 국제적으로 알렸다.

그러나 애틀란타의 에모라대학 유학 중 박람회를 방문했던 윤치호의 1893928일자 일기엔 모든 건물 위에 참가국들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는데 한국 국기만이 없었다라고 개탄하고 있고, [뉴욕헤럴드]지에는 고종이 헐값인 한국의 폐품수집물들을 모아서 배편으로 성급하게 시카고로 보내서 출품하게 했다는 악의적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시카고 만국박람회는 미국 역사학계의 기념비적인 논문이 발표된 행사이기도 했다. 미국사에서 프런티어가 가지는 의미를 포착했던 토크빌의 미국 방문으로부터 60여년이 지난 1893712일 시카고 만국박람회를 기념하는 미국역사학회의 연차대회에서 위스콘신 출신 젊은 역사학자 프레더릭 잭슨 터너가 발표한 [미국 역사에서 프런티어의 의미]라는 논문이 바로 그것이다. 1890프런티어의 종언선언에 자극받아 쓴 터너의 논문은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이후 미국사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터너의 주장은 프런티어 사관(史觀)’, ‘프런티어 이론으로 불리게 되는데, 그 요점은 미국 역사의 중심축은 서부의 역사이며 서부에 펼쳐진 광활한 개방지(free land)에서 신분과 지위에 상관없이 누구나 새로운 삶을 개척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하면서 미국 민주주의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뿌리를 유럽에서 찾던 이전 설명과 결별한, 미국판 지정학(geopolitics) 이론이자 주체사상이었다. 미국사학의 독립선언이기도 했다. 터너의 주장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미국사 산책 4, 강준만 저에서 옮김

 

 

시카고 만국박람회와 조선의 참가

  

사진1. 1893년 시카고 박람회에 처음 참가하여 출품을 전시하였던 조선 전시관 한옥전경. 기와집 지붕에는 태극기가 게양되어 있고 전시관 서쪽편에는 진열대, 가마 등이 보인다. 

 

1492년 콜롬부스의 미대륙 발견 4백주년 기념으로 1892년에 준비를 시작하여 이듬해 189351일부터 1030일까지 6개월간 47개국이 참가한 콜롬비아 세계박람회(Columbia Exposition)가 열렸다. 화이트 시티(White City)라는 이름까지 가진 방대하게 설계된 박람회 현장은 현재의 시카고 산업과학박물관에서 시작하여 그 남쪽 젝슨공원(Jackson Park) 인근 57번가와 67번가 일대였습니다. 세계 최초로 발명한 지퍼가 출품되기도 했던 이 세계적인 콜롬비아 박람회는 콜롬부스 후손을 초청한 연인원 27백만명이 입장했던 거대한 국제적 행사였다.

 

   이 역사적인 1893년 시카고 박람회는 한민족 유사이래 다국가들이 참가하는 국제 행사에 최초로 조선 조정의 대표단이 참가한 행사였다. 조선정부가 최초로 파견한 대표인 정경원(鄭敬源, 1841-1898)을 찾아온 사람들은 뜻밖에 현지 시카고에서 나타난 박용규와 서병규라는 두 명의 시카고 코리안들이었다. 이들은 뚜렷한 신분과 역사적 기록을 가진 최초의 현지인 코리안 동포의 행적을 가진 해외동포역사의 효시로 평가되어 마땅하다는 의견이 있다.

   시카고 박람회 출품대원으로 파견되어온 정경원이 고종에게 올린 어전보고 서신(1893년 음력 318: 양력 53)에서 당시 시카고 박람회에서 만나 6개월간 현지 고용까지 된 이들 시카고 사람들인 박용규(朴鎔圭) 서병규(徐丙珪)에 대한 <高宗實錄>의 기록과 정경원의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는 당시의 가문 기록들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당시 시카고 박람회장 개회식에 참가했던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은 특별히 한국전시관에서 연주하는 조선 악공들의 연주를 듣고 목덜미를 끌어안고 감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189395일 코리안 전시관이 주최하여 오후 7시 콩그레스 길과 미시간 길에 있는 오디토리움 호텔에서 1백여명이 참가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시카고 종교회의

 

 

만국박람회가 물질문명을 정리하는 전시회였다면 종교회의는 그와 더불어 영적이고 정신적인 표현의 회의라고 볼 수 있다. 이 회의에 참가했던 대표들과 청중들은 대부분 크리스천들이었다. 기독교의 대부분 종파들이 참석했다. 그리고 아시아에서 인도(힌두교, 조로아스터교, 시크교, 자이나교),중국, 일본(임제종, 정토진종, 니치렌 종, 천태종), 태국, 스리랑카 등이 참가를 했다.

주요 참석자들: 대회의 의장은 존 헨리 베로우스 (John Henny Barrows)목사, 인도 라마 크리슈나의 제자인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 스리랑카 아나가리카 달마팔라, 일본의 소엔사쿠(임제종)이다, 소엔사쿠의 글은 D.T. 스즈키가 영어로 번역하였다.

 

불교적 관점에서 본 시카고 종교회의 의의

1.미국에 불교를 대중적으로 소개하고 포교에 큰 역할을 함.

 

이 회의를 통해 불교가 전 미국에 소개되었다. 그리고 달마파마와 사쿠 소엔은 미국을 여러차례 방문하면서 미국에 불교 포교에 큰 공헌을 하였다.

종교회의를 마치고 926일 시카고 신지학회 후원으로 문예박물관(Athenaeum Museum)에서 달마팔라는 불교와 신지학에 관한 강연을 하였다. 강연 끝난 후 미국에서 최초로 백인 불교인이 계를 받고 정식으로 불교인이 되었다. 이 보다 앞서 1880년 스리랑카에서 오계(五戒)를 받은 신지학회 헨리 올콧과 블라바츠키 부인이 받았다.

찰스 슈트라우스(Charles Strass)1893년 종교회의가 끝나고 나서 불교에 귀의했다. 달마팔마가 산스크리트어로 불경을 암송했고 슈트라우스씨가 이를 따라 했다. 미국 땅에서 최초의 공식적으로 백인불교신자가 된 것이다. 그는 뉴욕시 브로드웨이에서 사는 사업가로 부모가 유태인이었고 당신 30세 미만이었다.

 

사큐소엔과 인연깊은 소케이안, 센자키 노겐, D.T 스즈키 등이 미국에 와서 불교포교와 일본을 알리는 큰 역할을 하였다. 사큐소엔은 이 행사 참가하면서 알게된 오픈 코트 츌판사 편집자인 폴 카루스를 만났다. 그와 친교가 인연이 되어 스즈키가 미국에 오게 되어 오픈 코트 출판사에서 도덕경 번역을 비롯하여 많은 번역 일을 하게 되었다. 이후 스즈키는 엘렌 와츠, 쵸감 트룽파 린포체, 틱냑한 스님등과 더불어 20세기에 서양에서 영어로 가장 영향력 있는 불교책을 저술한 사람이 되었다. 사큐소엔의 뒤를 이어 그와 제자, 문도들인 센자키 노겐, 소케이안, D.T.스즈키등은 종교회의 직후부터 지금까지 대를 이어 미국에서 포교활동을 하고 있다. 이들의 노력으로 일본불교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알려졌고 이후 일본불교계가 미국에 진출하는 토대를 만들게 되었다. 또 스리랑카 다르마팔라도 이 회의에서 만나 폴 칼루스의 초청으로 미국에 또 오게 되고 미국에 불교를 널리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2. 이 회의에서 테라와다, , 니치렌 등 여러 종파가 소개되어 불교가 다양하고 복합적 전통이라는 것을 알려졌다.

3. 불교가 현대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되기 시작했다.

대다수 서양인들 사이에서 불교가 이국적이고 고색찬연하며 불가해한 신비주의의 형태로 간주되고 있던 시대에 다르마 팔라, 사쿠소엔, 킨자이 히라이 등은 다르마를 완전히 현대적이고 살아있는 전통으로 제시했다. 또한 아시아의 지도자들은 불교가 무신론적이고 또 근원적으로 심리학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교야 말로 과학과 종교 사이의 불일치가 심화되고 있는 현상에 기독교보다 더 잘 대처할 수 있다는 주장을 했다.

4. 이 회의는 불교, 기독교, 힌두교 등 종교간의 대화의 시작이라고 간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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