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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불 교 사

19세기 말 미국과 일본을 무대로 한 보스톤 불교인들의 활동.미국불교사 6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19.03.01|조회수207 목록 댓글 0


『미국이 만난 불교(The American Encounter with Buddhism』 제3장 비전秘傳 불교도, 합리적 불교도, 낭만적 불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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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미국과 일본을 무대로 한 보스톤 불교인들의 활동.

 

차례

1. 1880 년대와 1890년대 미국사회 풍경의 한 단면.

2. 보스톤 불교인들이 활동

()에드워드 모스 교수(Edward Morse).

()어니스트 프란시스코 페놀로사(Earnest Francisco Fenollosa)

() 윌리엄 스터지스 비글로우 Willliam Sturgis Bigelow

 

 

 

1. 1880 년대와 1890년대 미국사회 풍경의 한 단면.

 

1880년대와 1890년대는 도시의 팽창이 드라마틱하게 이루어진 시기다. 1840년 인구 25만이 넘는 도시는 1, 1860년 인구 5만이 넘는 도시는 16개에 불과했지만, 1890년엔 인구 25만이 넘는 도시가 11개에 이르고 (3개는 100만 이상) 전 인구의 1/3이 도시에 거주했다. 인구 8,000명 이상 도시는 1880년에서 1900년 사이에 2배로 증가했으며, 도시 인구는 5,000만에서 7,600, 점유비로는 전체 인구의 22.7 퍼센트에서 32.9 퍼센트로 증가했다. 역사학자 아서 M. 슐레진저(Arthur M. Schlesinger, Sr., 1888~1965)1878년부터 1898년 까지를 도시의 발흥시기로 보았다.

도시의 발흥은 대중신문의 급속한 성장을 가져왔다. 일간지의 총발행부수는 185075만부에서 1890830만부로 급증했다. -- 미국사 산책4, 강준만 저서

 

현재 미국 공장 노동자의 삶에 비해 19세기 미국 공장 노동자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임금은 유럽에 비해 2배였으나, 노동 조건은 가혹하고 여유가 없었다..[13] 1873 1893에 국내를 덮친 대불황은 임금을 낮추고, 높은 실업률과 불완전 고용률을 낳았다.

 

미국의 하와이 합병과 필리핀

 

하와이는 본래 독립국가로서 1782 카메하메하 1 이후 왕조 체계가 유지되던 독립국가(하와이 왕국)였다. 이 합병은 텍사스 합병과 거의 유사한 절차로 이루어졌다.

 

1890 미국 관세법 개정으로 제당업이 타격을 받자 하와이에 와있던 미국인들이 중심이 되어 미국과 합병운동이 일어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1891 즉위한 릴리우오칼라니 여왕이 미국 농장주들의 면세혜택을 폐지하는 헌법개정을 시도하자 1893 하와이 혁명 일어나서 1894 공화국이 되었다.

미국인을 중심으로 미국과 합병운동은 "Newlands Resolution" 하여 미국에 하와이를 합병해달라는 요청을 하였고, 결국 1897616일 매킨리 미국 대통령과 하와이 공화국 합병조약을 체결하도록 하였고 조약을 미국 의회가 189877 비준하였다. 조약이 효력을 발생한 날짜가 1900 4 30일이다. 또한 미국은 1899에 스페인으로부터 필리핀을 인수했다

 

 

2. 보스톤 불교인들이 활동

아시아 국가 중에서 일찍부터 미국과 교류가 가장 많은 나라는 중국과 일본이다. 그중에서 특히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많은 교류를 하였고 미국불교사와 문화사에 큰 역할을 하였다.

미국과 일본은 1854년 미일화친조약, 1858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일본이 개항을 해 근대화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상호 많은 사람들의 교류가 있었다.

특히 보스톤 지역 지식인들이 일본을 많이 방문하고 양국 교류에 큰 족적을 남겼다. 이들은 일본이 서양문물에 대해 최고조로 열광하던 때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살았다.

미국불교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 세기말 보스턴 불자들은 가장 흥미로운 전환기에 있었다. 이들은 도쿄 제국대학교에서 교수로 서양의 학문을 전달하였으며, 일본인들이 잘 몰랐던 일본 문화를 독창성을 알아보았다. 에드워드 모스와 어니스트 프란시스코 페놀로사는 특히 일본 문화에 많은 열정을 보였다. 일본인들을 위해 페놀로사는 현대 서양미술에 비해 일본 전통 예술의 우수성을 설명하는 강의를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들 행적에 주목되는 것이 몇 가지가 있다.

이 일본에 거주하면서 미국과 일본의 교류에 앞장선 초기 미국인들 중 불교와 관련깊은 사람들이 보스톤 박물관과 많은 관계가 있다. 이들이 수집한 유물은 보스톤 박물관으로 갔다. 보스톤 박물관은 이 들의 유물 덕분에 동아시아의 귀중한 유물을 많이 확보할 수 있었다.

이들은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서양 학문을 소개하였고, 불교 수행을 하고 불교인이 되었다. 이들은 일본문화에 매료되었으며 중국과 일본의 많은 유물을 수집하여 이 유물들이 보스톤 박물관 설립네 큰 기여를 하였다.

1885921일 페놀로사와 비글로우는 천태불교의 계를 받았다. 이들보다 앞서 1880신지학회 헨리 올콧과 블라바츠키 부인이 스리랑카로 가서 오계(五戒)를 받았다. 이들의 공통점은 다같이 미국 밖에서 오계를 받은 것이다. 다른 점은 신지학회 사람들과 달리 페놀로사와 비글로우는 현지 일본에서 장기 체류하며 필경 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자격이 있는 스승에게 대승불교를 배우고 수행한 사람들이었다. 페놀로사는 불교가 자신만을 구하려는 이기적인 종교라는 선입견을 바로 잡으려는데 최대한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미국불교사 연표가 들어가야 함.

 

이 시기에 활동하였던 사람들을 소개한다.

 

()에드워드 모스 교수(Edward Morse).

 

1877316, 하버드 대학교의 동물학 교수 에드워드 모스Edward Morse는 미국 대륙횡단 기차를 탄 후, 요코하마행 증기선 토키요 시티(City of Tokio)호에 승선했다. 모스는 다윈의 학설을 공부하기 위해 완족류脘足類; 꽈리조개 따위를 찾고 있었다. 그는 일본에 머무른 지 며칠 만에 기차를 타고 가다가 차창을 통해 신석기시대의 오모리 조개무덤을 발견했다. 이것은 일본 고고학의 시작을 알리는 일대 사건이었다. 도쿄 제국대학교의 관리들은 매우 감명을 받아, 모스에게 동물학과와 자연사 박물관을 조직해 주도록 요청했다. 그해 여름, 모스가 완족류를 찾았을 때 그는 일본에 매료된 많은 보스턴 사람 중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그는 보스톤 지역의 지식인 여러 사람들을 일본으로 데려가 미국과 일본의 교류에 큰 공헌을 하였다. 모스는 마침내 일본 도자기의 열렬한 전문수집가가 되었다. 그는 다도를 공부한 최초의 서양인이기도 했고, 일본 전통뮤지컬 를 노래하는 법을 배웠다.

 

()어니스트 프란시스코 페놀로사(Earnest Francisco Fenollosa)

 

18784월이 되자 모스는 그의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갔고, 곧 그가 도쿄 제국대학교를 위해 선발한 두 명의 미국인 교수도 그를 뒤따랐다. 물리학자 T. W. 멘덴홀Mendenhall과 정치경제학과 철학을 가르칠 어니스트 프란시스코 페놀로사Ernest Francisco Fenollosa 두 사람이었다.

당시 25살이었던 어니스트 프란시스코 페놀로사는 미국 페리호가 일본의 300년간의 쇄국정책을 무너뜨리고 강제로 일본을 개국시키기 1년 전인 1853년 살렘에서 태어났다. 하버드에서 그는 아주 뛰어났다. 철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헤겔을 읽고 허버트 스펜서 클럽을 만들기도 했다. 2년간을 대학원 장학생으로 공부하고 신학교에 잠시 머물렀다. 그리고 보스턴 미술박물관에서 그림공부를 했으며, 찰스 엘리어트 노톤이 하는 예술사의 새로운 분야 강의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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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와서 모스와 페놀로사는 일본문화에 열정을 보였다. 모스는 일본 도자기의 열렬한 전문 수집가가 되었고 페놀로사는 미술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당시에 일본은 세슈와 같은 거장이 만든 전통화나 조각 등은 대체로 봉건시대의 유물이라 생각하여 빨리 잊고 싶어하는 듯 했다. 그러나 페놀로사는 바로 이 전통예술을 동경의 골동품상에서 발견하곤 깊은 감동을 받았다. 작품을 전에 접한 적이 있는 여타의 서양인들과 달리, 그는 작품에 드러나는 사실주의의 부족함이나 겉으로 보이는 왜곡 따위에 개의치 않았다. 헤겔파 미학자로서 그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똑같이 그려내는 손재주보다는 그림에 표현된 사상이 중요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는 중국과 일본의 화가들이 공간과 선의 대가라는 사실도 알아챘다. 즉 페놀로사는 여백이 비록 더 중요하지는 않더라도 그려진 그림 부분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점을 이해했다.

페놀로사의 진짜 공부는 막 하버드 대학교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한 일본 학생이 그에게 쿠로다 후작과 그의 작품모음을 소개한 때부터 시작되었다. 후작은 미국인은 이 작품을 판단할 수 없다. 이 예술은 그들의 이해 범위를 넘어선다라고 하면서도 세슈나 모토노부의 작품을 페놀로사가 몇 시간 동안이나 감상하도록 허락했다. 그는 토쿠가와 쇼군을 위한 궁정화가들이었던 카노와 토사 집안 사람들을 만나서 이들의 작품과 전통을 연구했다. 나중에 󰡔이야기󰡕를 쓴 카쿠조 오카쿠라 두 사람의 도움이 컸다. 곧 그는 동양예술이 서양예술과 마찬가지로 위대한 전통임을 깨닫게 되었고, 중국이 수백 년간 죽음과 같은 상태에 있어 왔다고 너무나 당연한 듯이 경시하는 사람들의 계속되는 이야기는 모두 거짓임을 알게 되었다.

1882, 페놀로사는 류츠카이 클럽의 귀족들을 위해 값싼 현대 서양예술에 비해 일본 전통예술의 우월성을 강의하게 될 만큼 많은 공부를 했다.

이러한 우수성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고전미술을 경시하고, 서양문명에 대한 동경으로 인위적이고 가치도 없는 현대미술에 감탄하면서, 쓸데없이 이를 모방하고 있다. 이 얼마나 슬픈 일인가? 일본인들은 자기 본래의 훌륭한 전통으로 되돌아가서, 서양미술 가운데서 그나마 있으면 좋은 점만 취해야 한다고 페놀로사는 말했다. 이 강의는 큰 효과가 있었다. 페놀로사는 마침내 오카쿠라와 함께 제국의 미술담당관으로 임명되었다.

 

페놀로사는 활동적이고 정력적인 사람이었으며 태어나서 진리를 위한 고된 투쟁을 하겠다는 맹세를 하고, 자비의 봉사를 하기 위해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 자신의 소명에 신성하게 헌신하는보살의 이미지에 대단히 큰 감명을 받았다.

 

페놀로사는 당과 송대의 불교문화를 꽃피운 중국문화 중 최고의 정수를 이어받은 나라가 일본이라 생각했다. 그는 미래에 있을 동양과 서양의 결합을 예언했다. “다음 세기에는 과학적 분석력과 영적인 지혜가 심미적 통합과 영적인 사랑을 위하여 결합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호류지(法隆寺) 백제관음상과 페놀로사

 

페놀로사와 오카쿠라가 호류지 사찰의 일본 스님들에게 유메도노 별관의 문을 열도록 설득했을 때, 그에게 최고의 순간이 닥쳐왔다. 200년간 아무도 이곳의 내부를 본 사람은 없었다. 1868년에는 반불교의 기운을 타고 몇몇 신토[神道] 승려들이 강제로 들어가려다가 벼락이 치는 바람에 놀라서 도망친 적이 있었다. 스님들은 유메도노 사원의 문을 열겠다는 결정을 듣자, 이제 최소한 지진이라도 발생하리라 예상하고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러나 페놀로사가 정부의 편지와 명령서를 들고서 막무가내로 들어가겠다고 고집하자, 스님들은 마지못해 항복했다. 페놀로사는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았던 길다란 열쇠가 먼지로 덮인 자물쇠 속에서 찰칵거리는 소리를 낼 때의 느낌을 결코 잊을 수 없으리라. 성전 내부에는 커다란 덩어리가 겹겹으로 된 헝겊에 덮여 있었고, 그 위에는 오랜 세월 쌓인 먼지가 수북하였다.…… 우리의 눈과 코는 이 매운 먼지 때문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마지막 겹의 면헝겊이 벗겨졌을 때 세상에 더 없이 독특하고 웅장한 불상이 수 세기만에 처음으로 인간의 눈앞에 다가왔다.…… 우리는 이 뛰어난 걸작이 한국인이 제작한 불상임을 즉시 알 수 있었다. 이 불상이 백제 관음상이다.

 

 

페놀로싸는 한 세기를 앞선 윌리엄 존슨 경의 표현과 비슷한 말로써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사람들은 인류를 위한 동양문화의 실질적 중요성을 그리스 문화의 경우처럼 생생하게 인식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 인류 역사의 측면에서 볼 때, 동양문화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지금 그리스와 라틴의 역사와 그 예술의 맛을 알아야 지성인이라 자처할 수 있듯이, 동양문화에 등장하는 중요한 사람들의 이름이나 업적 및 그들 문화의 진보단계를 알아야만 제대로 된 인문적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간주될 때가 곧 오리라는 생각이 든다.

 

1906년 페놀노사는 뉴욕시 23번가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3개월 간의 작업 끝에 자신의 역작인 <중국과 일본 예술의 시대(Epochs of Chinese and Japanese)의 연필 초고를 탈고하였다. 그리고 최종판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1908년 심장마비롤 사망하였다.

페놀로사는 불교를 동양문명의 참 진수였다고 규명하고, 자신의 저서 <중국과 일본 예술의 시대>에서 중국 역사를 유교학자들과 새 예술과 새 삶에 대한 희망과 기쁨을 주기 시작한 불교도 및 도교도 간의 점증하는 모순관계로 보았다.

 

 

 

페놀로싸의 일본의 동경미술학과

 

현재 동경 예술대학의 전신인 동경미술학교 교수 미국인 어네스트 페놀로사(1853~1908)1882년에 미술진설美術眞說이란 주제로 강연했는데 일본 미술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전통적인 일본 미술의 우위를 이론적으로 해석한 서양인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고심원高古深遠의 미술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버리고 분별없이 외국의 풍조를 모방하는 건 스스로를 위태롭게 만든다한 나라의 문화는 과거의 역사를 기틀로 해서 건설되어야만 한다." 그의 미술진실은 통속적 관념론에 지나지 않았지만 일본 화가들의 정신과 실천에 큰 영향을 미쳤고전통 일본화와 사실주의 서양화와 비교하여 일본화 혹은 동양화의 우월을 주장한 것은 당시 일본인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가 되었다.  페놀로사는 1881년부터 심미학을 강의했는데 일본에서 최초로 미학을 강의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2년 후 中江兆民野村泰亨이 프랑스의 우제뉴 베론의 저서를 번역하여 유씨미학維氏美學으로 출판하면서 미학이란 말이 처음 사용되었다페놀로사는 미술사는 강의하지 않았다페놀로사는 일본 미술에 관심을 갖고 수집과 연구에 주력했는데 고화비고古畵備考가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그는 '미술진설강연에서 일본화에 비해 유화는 사진처럼 실물을 묘사한다면서 이는 자연 실물에 대한 모사가 미술의 근본을 이룬다는 인식은  진정한 미술로부터의 퇴보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그는 일본화는 묘상妙想idea’을 잘 담아내고 있음에 비해 유화는 거의 대부분 이 묘상을 결여한다고 했다그의 강연은 열세에 몰려 있던 일본 전통 화가들에게 소생할 절호의 기회를 마련해주었고서양화가들에게는 자신들의 작업이 역사에 뿌리를 내린 미술과 동일선상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과제가 안겨졌다이 무렵 서양미술사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서양화가들이 자신들의 존립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18804월과 8월 사이에 간행된 와유석진臥游席珍은 다카하시 유이치가 아들 다카하시 겐키치를 편집주간으로 하여 출간한 월간 미술잡지였으며  이 잡지를 통해 처음으로 화화和畵(일본 그림), 한화漢畵와 함께 서양화의 기원, 역사, 기법, 화가의 일대기 등이 소개되었다매우 간단한 서술이기는 했지만 통사로서 이집트, 앗시리아, 그리스, 로마 미술을 다뤘으며중세를 문화적 암흑시대로 보아 13세기의 이탈리아 화가 치마부에Cimabue(1240?~1302)를 언급한 후 다시금 그리스가 주목받게 되는 르네상스가 시작되었음을 언급했다와유석진3서양화 부문의 연혁 서술 부분에서는 미술을 육성하고 보호하며 존중하는 것은 문명이 도래한 개화 시기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품위 있고 또한 정신적 쾌감을 가져다주는 것으로서 , 미술이 사회상의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라고 기술되어 있다이런 논설은 2년 전에 출간된 니시 아마네의 미묘학설에 나타난 견해와 거의 일치한다와유석진에 실린 서양미술에 관한 내용은 서양화가 단순히 기술에 의한 것이 아니라 보다 수준 높은 미술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한 의도로 씌여진 것이다서양 미술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었지만 일본 전통회화를 고수하려는 대세에 의해 부진한 상태였다1889년 공부 미술 학교에서 수학한 몇 사람을 중심으로 명치 미술회라는 단체가 결성되면서부터 서양 미술사에 대한 연구가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그러나 서양 미술은 여전히 이단아 취급을 받고 있었다. ,같은 해에 관립인 동경 미술 학교(오늘 날 동경 예술 대학 미술학부)가 설립되었지만 서양화를 가르치지 않았다그러나 서양 미술사 과목이 개설되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개교한 해인 1889911일부터 이듬해 710일까지 미학과 미술사과목을 어네스트 페놀로사가 담당했으며 그의 강의를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1862~1913)이 통역했다페놀로사는 일본에서 최초로 동경 대학에서 미학을 강의하고 동경 미술학교에서 미술사를 강의한 인물이 되었다그는 그리스와 로마 미술,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코로, 밀레, 휘슬러, 인상주의 등에 관해 강의했지만 전반적인 내용은 미학이었고,  ‘미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명제 하에 테인Hippolyte Taine, 러스킨John Ruskin 등의 이론을 자신의 비평을 첨가해서 가르쳤으므로 역사적 관점과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전개시켰다그의 의도는 일본 미술을 활성화시키는 것으로 품위 있는 일본 미술이 서양에 적잖은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 윌리엄 스터지스 비글로우 Willliam Sturgis Bigelow

 

하바드대학교에서 불교 교수로 활동하면서 불교대변인 노릇을 하다.

 

하바드 의대 의사였으나 비글로우는 의사직 대신 1882년 모스와 함께 일본에 왔다.

그는 7년간 일본에 머므르다가 아자리가 세상을 뜨자 1890년 페놀로사와 함께 보스톤으로 돌아왔다. 그는 신비적 진언종 밀교 수행자로서 자기 신앙생활에 대해 과묵했다. 1908년 비글로우는 하버드에서 불교강사로 발령을 받았다. 보스톤 지역을 중심으로 불교 대변인으로 그의 경력이 시작되었다.

 

페놀로사와 비글로우는 불교에 관한 글을 쓰고 강연을 했지만 이 두 사람중 누구도 기초수행 이상을 지도할 실력도 의사도 없었다. 이들은 또한 어떤 조직을 형성하거나 제자를 양성하지 못했다.

비글로우가 후원하던 시어도어 루즈벨트가 대통령이 되었고, 비글로우는 그 영향력을 이용해 미국과 일본과의 이해증진을 도모하였다. 그는 반()일본인 법안에 항의했으며, 루즈벨트에게 무사도에 대한 글을 읽고 유도를 배우도록 권유하였다. 비글로우의 이러한 노력은 실제로 효력을 발휘해서, 1905년 루즈벨트는 비글로우의 권유를 받고 많은 반일본인 법안을 철회하였다.

 

월리엄 스터지스 비글로우는 1926105일에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트리니티 교회에서 성공회식으로 진행되었고 그의 유해에서 나온 재의 반은 공동묘지에, 반은 일본 호미요인 사찰에 보내져 불교식 장례로 엄수되었다.

 

2017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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