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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불 교 사

[2017년 9월호] 보스톤 박물관- 미국불교사(7) /김형근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17.09.13|조회수204 목록 댓글 0


    미국역사와 함께 보는 미국불교사(7)


    글| 김형근


     


    차 례

    1. 보스턴 박물관과 인연깊은 세 사람
    2. 보스턴 박물관 소개
    3. 보스턴 박물관 소장 고려시대 라마탑형 사리구와 사리 반환 소식



    1. 보스턴 박물관과 인연깊은 세 사람
    미국불교사는 단순히 미국에서의 불교의 발자취만이 아니다. 미국의 문화사이고, 종교사이며 아시아 이민사이다. 이번 장에서는  19세기에서 20세기로의 세기의 전환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거주하면서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일본 문화를 배우고 익히며 수집한 수 만점의 일본 문화재를 보스톤 박물관에 전해진 이야기를 설명하고자 한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앞장에 소개된 3 사람이다. 에드워드 모스 교수, 어니스트 프란시스코 페놀로사, 월리엄 스터지스 비글로우이다.
    가장 먼저 미국에 온 사람은 하바드대학교 동물학 교수였던 에드워드 모스로 1877년이었다. 어니스트 프란시스코 페놀로사는 1978년는 부인 리지 밀렛과 함께 모스 교수를 따라 일본으로 갔다. 윌리엄 스터지스 비글로우는 하버드 의대 교수였으나 보스턴에서 의사직을 수행하는 대신 모스와 함께 일본에 왔다.
    모스는 일본 도자기의 열렬한 전문수집가가 되었고 또한 다도를 공부한 최초의 서양인이었다. 페놀로사는 하바드에서 철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보스톤 미술박물관에서 미술공부를 하기도 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미술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페놀라사는 동양화가들이 공간과 선의 대가라는 것도 알아챘으며, 그림에서 여백의 중요성도 이해했다. 페놀로사는 일본에서 일본 작품을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공부했다. 그의‘동경미술학교’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주제로 강연을 하였는데 이 강연들은 일본 미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882년 페놀로사는 류츠카이 클럽의 귀족들을 위해 값싼 현대 서양예술에 비해 일본 전통예술의 우월성을 강의하게 될 만큼 많은 공부를 했다.
    그는 일찍부터‘차 이야기 The Book of Tea'를 쓴 카쿠조 오카쿠라와 인연을 맺었다. 페놀로사는 오카쿠라와 함께 일본의 미술담당관으로 임명되었다.

    페놀로사가 모스에게 썼듯이, “세계의 고고학자들이 그리스와 터키에서 벌이고 있는 발굴작업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을 자신이 하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한 세기를 앞선 윌리엄 존스 경의 표현과 비슷한 말로써 다음과 같이 인정했다.

    사람들은 인류를 위한 동양문화의 실질적 중요성을 그리스 문화의 경우처럼 생생하게 인식하지는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전체 인류 역사의 측면에서 볼 때, 동양문화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지금 그리스와 라틴의 역사와 그 예술의 맛을 알아야 지성인이라 자처할 수 있듯이, 동양문화에 등장하는 중요한 사람들의 이름이나 업적 및 그들 문화의 진보단계를 알아야만 제대로 된 인문적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간주될 때가 곧 오리라는 생각이 든다.

    페놀로사는 자신의 소장품들을 보스턴 미술박물관에 영원히 안전하게 보관하고 싶어 했으나, 이러한 그의 희망은 그를 윤리적인 곤경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모스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여기 사람들은 진작부터 제 수집품이 일본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많은 훌륭한 보물들을 비밀리에 사들였습니다.…… 그러나 만일 황제나 교육부가 제 수집품을 사고자 한다면,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그들에게 넘기는 것이 저의 인류에 대한 의무가 아니겠습니까? 선생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상 모스는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이미 피력한 바 있었다. 어느 날 저녁, 모스와 페놀로사와 윌리엄 스터지스 비글로우(William Sturgis Bigelow)는 작은 시골 여관에서 만나 그날 모은 서로의 수집품을 보여 주고 있었다. 그는 최종적으로 “우리가 사들인 이와 같은 훌륭한 일본 예술품 중 많은 수가 시장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숨겨진 상처로부터 흐르는 피를 빨아먹는 격입니다. 일본인들은 자기네 아름다운 보배가 외국으로 떠나버리는 일이 얼마나 큰 슬픔인지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1884년 일본에서 국보보호법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페놀로사의 수집품이 C. G. 웰드 박사에게 팔려 웰드-페놀로사관館이라는 이름으로 보스턴 박물관의 관할 하에 들어간 뒤였다. 일본 교육부나 황제도 이 작품들을 사들이겠다고 재빨리 나서지는 않은 듯했다. 그리고 모든 시대의 모든 양식에 걸친 4만여 점이 넘는 모스의 도자기 수집품들과 비글로우의 칼집과 칠기漆器도 같은 식으로 몇 년 후 보스턴 박물관으로 넘어왔다. 이 세 사람은 10년도 채 안 되는 동안에 보스턴에다 세계 최고의 극동 아시아 예술품 전시관을 만들어 준 셈이었다.

    1890년 페놀로사가 자신이 웰드 박사에게 판 소장품의 관리자(큐레이터)가 되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갈 때, 메이지 황제는 그에게‘성스러운 거울의 훈장(the Order of Sacred Mirror; 瑞宝章)’을 하사했다. 메이지 황제는 “당신은 우리 백성에게 우리나라 예술의 소중함을 가르쳐 주었소이다. 이제 당신의 나라에 돌아가서도 당신네 동포에게 이를 가르쳐 주시오”라고 당부했다.
    이 일은 페놀로사가 이미 마음먹은 바였고, 그는 이 일 말고도 더 많은 계획을 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장대한 비전을 '동과 서(East and West)'라는 교향시로 표현하여 1892년 6월 하버드 대학교의‘파이 베타 카파 학회(Phi Beta Kappa Society)’에서 읽었으며, 1893년 페놀로사가 미술 심사위원으로 참석한 컬럼비아 박람회에 때맞춰 서둘러 출판하였다.
    그는 시의 결론에서 “미래에 있을 동양과 서양의 결합”을 예언했다. “다음 세기에는 과학적 분석력과 영적인 지혜가 심미적 통합과 영적인 사랑을 위하여 결합해야만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방대한 양립하는 주제는 모든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이라고 페놀로사는 결론지었다.
    페놀로사는 이 위대한 계획의 실행에서 자신의 역할을 대단히 크게 여기고 있었다. 1891년에 그는 일기에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미국에서 내 위치를 ‘넓게’ 보아야 한다. 나는 동양의 과거 문명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있지만, 현재로선 서양사람의 몸을 받아 환생했으니 서양문명을 발전시켜야 하는 의무를 다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그는 예술, 좀더 정확하게는 예술교육을 통해 자신의 소명을 다할 생각이었다. 예술교육이란 당시 미국 교육계에서는 새로운 개념이었다. 보스턴 박물관의 극동지역 큐레이터로서 페놀로사는 몇 차례의 전시회를 열었는데, 진열 작품에는 호쿠사이의 판화, 오래된 금빛 바탕의 16세기 병풍, 사무엘 빙의 프랑스 파리 수집품과 교토에 있는 선종 사찰인 다이토쿠지에서 대여해 준 11~12세기의 수많은 중국 불화 등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세련된 보스턴 박물관 후원자들을 감동시키는 일만으로 만족할 순 없었다. 그는 세상의 경제적 문제, 고통, 죄악, 질병 등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경고했다. 모스와 마찬가지로 그는 최상의 미적인 취향을 일본에서는 가장 가난한 소작농조차 지니고 살고 있다는 데 감명 받았으므로, 미국의 대중에게도 이렇게 미적인 데 민감해지도록 가르치고 싶었다. 그는 공예가 가미된 일반적 예술교육에서 그 해결책을 찾으려고 했다. 그는“예술은 많은 궁핍한 사람들을 밝고 기쁘게 해 주고, 일본 소작농들과 같은 심미안을 키울 수 있는 여가를 주도록 사회적 재조정 작업을 벌이는 기능을 담당해야 한다”고 썼다. 페놀로사는 이러한 작업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이 마침내 자기네들이 사는 고장을 변형시키게 되리라고 믿었다.






    2. 보스턴 박물관 소개
    보스턴 미술관은 미국에서 가장 큰 박물관 중에 하나로 450,000 개 이상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시카고의 시카고 미술관, 워싱턴의 스미소니언 박물관과 함께 미국에서 가장 포괄적인 작품을 소장한 박물관 중에 하나이다. 보스턴 미술관에는 년간 약 백만명 이상이 관람을 하며 이는 (2013년 현재) 세계에서 62번째로 많은 관람객이 찾는 박물관이 된다.
    미술관은 1870에 설립되었으며 1876년에 오픈하였다. 처음 있었던 코플러 스퀘어에서 현재의 위치 (465 Huntington Ave)로 1909년에 옮겼다. 보스턴의 미술학교 (School of the Museum of Fine Arts)와 제휴하고 있으며 일본 나고야의 나고야/보스턴 미술관과 자매 결연을 맺고 있다.
    1870년에 지방 유지에 의하여 설립되어, 미국 독립 100주년이 되는 1876년에 개관했다. 왕실이나 대부호의 수집품으로 구성된 미술관과는 달리,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민간 조직으로 설립·운영되어 왔다는 점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유사하다. 소장품은 50여만 점으로, ‘고대’, ‘유럽’, ‘아시아,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미국’, ‘현대’, ‘판화, 소묘, 사진’, ‘염직, 의상’, ‘악기’의 8부문으로 갈라진다. 이집트 미술품이나 프랑스 인상주의 작품이 특히 충실하다.


    보스턴미술관은 현재 유화, 판화, 종이작품 등 170여 점의 포괄적인 밀레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밀레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 미술관 중 하나가 되었다. 밀레와 보스턴미술관과의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는 계기는 1850년, 바르비종에 거주하던 보스턴 출신의 작가 윌리엄 모리스 헌트(William Morris Hunt)를 통해 밀레의 작품들이 보스턴으로 전해지면서 형성된 이후, 1906년에 자선가 마틴 브림머(Martin Brimmer)를 통해 보스턴미술관에 밀레의 작품들이 기증되고, 그 작품들을 토대로 보스턴미술관의 주요 작품들이 구성되기 시작하였다.


    한국 국보급 매병 등 한국 유물·미술품 1천여점 소장

     매사추세츠주 보스턴 시내의 '보스턴 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 179호실.
    30여평(112㎡) 남짓한 이곳 '한국실'에 청동기 시대의 돌칼부터 고려청자, 조선백자, 불화, 그리고 최근 잘 나가는 이수경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200여점의 한국 유물과 미술품이 질서 정연하게 전시돼 있다.
    한·미 수교 100주년 기념으로 1982년 처음 설치된 한국실이 30년 만에 새로 단장해 지난 16일(현지시간) 재개관했다.
    국제교류재단(KF·이사장 김우상)이 70만달러(7억7천여만원)를 지원해 두터운 나무 진열장 탓에 어둡고 우중충하던 전시실을 조명을 더 밝게 하고 진열대도 전부 유리로 바꿨다.
    재개관 행사에는 말콤 로저스 미술관장과 제인 포털 아시아 담당 큐레이터, 김 이사장, 박강호 주 보스턴 한국 총영사 등이 참석했다.
    프랑스 파리 루브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더불어 세계 4대 미술관으로 꼽히는 보스턴 미술관이 소장한 한국 유물과 작품은 약 1천여점이다.

    청동기 시대 매장 유물을 포함해 고려시대 최전성기와 조선시대의 수준 높은 도자기, 칠기, 금속, 나전, 불화, 불상 등을 망라하고 있다.
    1876년 문을 연 이 미술관이 1892년 에드워드 모스의 수집품인 '안평감사환영도'와 장승, 자개 불경합, 경기 분원리 백자 등을 사들이면서 한국 미술품을 소장하기 시작했고 1911년 윌리엄 비글로, 1950년 찰스 호이트라는 애호가가 불화, 도자기 등을 대규모로 기증하면서 '한국산(産)'이 늘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비슷한 시기에 지어졌지만 아시아 지역으로부터의 수집물은 양적으로도 최대이고 질적으로 최고로 평가되며 한국 미술품의 소장 규모도 두배라고 한다.
    상감 청자 기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청자죽조문상감매병이나 불경을 보관하는 자개 경전합, 백자 달항아리, 고려 시대 금속 공예품인 은제 주전자와 받침 등은 국보급이다.
    한국실을 담당하는 큐레이터인 제인 포털은 "한국 소장품은 대영 박물관보다 오히려 낫다고 본다"며 "고려청자나 나전칠기 등은 수준이 매우 높고 보전 상태도 최상급"이라고 말했다.
    아시아 유물과 작품이 10만여점에 달하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의 작품은 턱없이 부족한 편이다. 일본은 판화와 불상 등이 다른 방에 전시돼 있고 중국도 석조물과 도자기만 전시한 공간이 따로 있다.
    (연합뉴스) 강의영 특파원  2012년 11월 18일 기사에서 발췌



    3. 보스턴 박물관 소장 고려시대 라마탑형 사리구와 사리 반환 소식
    문화재제자리찾기(공동의장 철안·김원웅)와 조계종 중앙신도회(회장 김의정)가 ‘보스턴 미술과 소장 사리구 및 부처님 사리 반환’과 관련 현실론을 주장했다. 두 단체는 “문화재청이 ‘이상론’을 앞세워 부처님 사리조차 반환받지 않으려 한다”며 “사리만이라도 서둘러 반환해 봉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화재제자리찾기 측은 “지난 2009년 1월 정병국 당시 한나라당 의원 등과 보스턴 미술관을 방문해, 사리구와 사리반환 문제의 협상을 시작했고, 그 결과 보스턴 미술관은 ‘사리구 반환은 불가하고 사리의 반환은 가능하다’는 입장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문화재제자리찾기 측은 “문화재청을 비롯한 정부 당국이 ‘사리구를 포함한 완전한 반환’이 아니면 받지 않겠다고 해 보스턴 미술관의 ‘사리반환 제의’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고 안타까워했다. 




     

     


    문화재제자리찾기(공동의장 철안·김원웅)와 조계종 중앙신도회(회장 김의정)는 지난해부터 사리반환 운동을 펼쳐왔다. 북한의 조선불교도연맹의 권한 위임을 받는 등 남북 공동으로 해외 반출 문화재의 반환운동을 펼쳐 높은 관심을 받았다. 문화재제자리찾기 등이 반환운동을 펼쳐온 성보는 미국 보스턴 미술관 소장의 라마탑형 사리구 일괄. 13세기 고려시대 양주 회암사 또는 개성 화장사가 원 소유지로 추정되는 성보로 사리구 내부에 안치된 소형 사리탑에 석가모니 부처님과 나옹·지공 스님의 사리가 봉안돼 있다. 사리구는 일본인 고물상이 도굴, 1939년 보스턴 미술관이 구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재제자리찾기 등은 사리구 일관 반환 입장의 재고를 요청, 지난 2009년 10월 28일 고궁박물관에서 제인포탈 보스턴 미술관 동양미술부장과 문화재청장 혜문 스님 등이 한자리에 모여 재논의 했지만, 문화재청장이 한국 정부는 ‘사리만의 반환에는 동의할 수 없다. 완전한 반환이 아니면 받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사실상 ‘사리반환제의’를 완전히 거절했다. 더욱이 보스턴 미술관은 “한국정부가 사리반환에 동의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워 사리 반환을 보류했다. 
     혜문 스님은 “1987년 오사카 시립미술관으로부터 기증받은 봉인사 사리탑의 경우 사리장업구와 사리를 분리해 원사찰인 봉인사에 돌려줬고, 데라우치 문고의 일부 반환 등의 예가 있어 사리와 사리구 분리할 수 없다는 입장과 일괄반환 주장은 무리가 있다”고 설명했다. 허흥식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사리용기를 포함한 제자리 찾기가 바람이지만 사리만의 보존도 급한 현실이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이상론만 내세우기도 어렵고, 이상론의 주장이 용기를 포함한 일체의 환수를 앞당긴다는 보장도 없다.”면서 “훼손된 용기를 새로이 조성할 필요성도 있으므로 사리만의 찾기가 용기의 환수를 지연시킨다는 주장도 있기 어렵기 때문에 사리를 서둘러 가져오고 봉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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