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불교사>
미국역사와 함께 보는 미국불교사(10)
이 글은 1997년부터 약 20년에 걸쳐 미주현대불교에 번역 연재되었던 미국불교사에 관한 중요한 책들인‘백조가 호수에 온 이야기 How the swans came to the lake(한국어로는 이야기 미국불교사로 출판'. '미국이 만난 불교 The American Encounter with Buddhism', '미국 불교 Buddhism in America'를 토대로 하여 이 책들을 다시 인용하여 재구성하여 쓴 글이다. 전체적인 방향은 아래와 같은 관점에 방점을 두고 기술할 것이다.
글| 김형근
스즈키 다이세츠는 미국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긴 사람이기 때문에 지난 호에 이어 이번에는 20여년 전에 실린 정희수 박사의 글을 다시 소개한다.
스즈키 다이세츠(1870-1966)의 위대한 업적은 서구의 지성 사회에 대승불교의 근본 정신을 소개하고 수없이 많은 서구 지성들을 불교적인 구도의 길로 인도했다는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아가 그는 선(禪: Zen)불교의 신비하고 오묘한 구도와 삶을 체험한 산증인이었다.
19세기 말은 서양 학자들이 언어학이나 음성학적인 연구를 통하여 동양의 세계에 접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동양적인 정신에 가깝게 접하는 데는 여러 가지 장애물이 있었던 시대였다.
어쩌면 동서의 접맥이 가능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하던 단절의 세대를 살던 이들에게 다이세츠는 새로운 가능성을 향한 각성을 불러 일으켰다. 대개의 경우 다이세츠는 선불교의 전반을 서구사회에 전한 불교학자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선의 진리를 소개했다기 보다는 그것을 서구의 개념과 그들의 문화 심성속에 심도있게 이식하는 역할을 한다. 어쩌면 그는 동양사상과 서양사상의 깊은 단절과 대조의 계곡을 잇는 교량을 만들기 위해서 원(願)을 세우고 평생을 수고한 불교학의 대성이다.
서구의 지성들에 베푼 깨달음의 맛
“사람은 하나의 생각하는 갈대이지만 계산하거나 생각에 매이지 않을 때 큰일을 이룰 수 있는 법이다. 어린아이같이 천진난만함은 자아의 집착을 버리는 수행의 긴 여정에서 찾을 수 있다. 비록 그가 그 경지 도달했더라도 여전히 집착하지 않는다. 하늘로부터 내리는 비와 같이, 바다에서 일렁이는 파도처럼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같이 생각한다. 오수를 즐기는 봄바람에 피어오르는 푸른 잎새처럼 당연히 그는 비와 바다와 별들이 되며 잎새와 하나가 된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하여 무한히 많은 화두(話頭)를 쏟아 놓았다. 아무런 지침도 없이 그의 깨달음의 세계를 서구의 지성들에게 가르쳤다. 노승과 같이 달관한 고고한 인격 속에서 학문의 꽃을 피운 것이다.
크리스마스 험프리스(Christmas Humphreys)는 다이세츠와의 특별한 인연의 우정속에서 영국사회에서 불교운동을 한 분이다. 심지어는 개인의 재정을 털어가면서 다이세츠의 저작들을 속속 영문으로 출판하도록 돕기도 한다. 그는 다이세츠의 생애를 이렇게 적는다.
“불교가 오랫동안 신비가들에 의해서 예시되었던 것으로만 생각하던 우리들에게 지적인 영역을 초월한 언어와 상징의 세계에 대한 새로운 맛을 보게 한 것은 스즈키 다이세츠의 수고에 의한 것으로 이에 지극히 감사한다.”
다이세츠는 학생 시절에 자신의 인생 문제와 씨름하면서선 수행에 참여하게 된다. 선 수행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은 그는 서구 사회와 전 인류를 향하여 그가 경험한 선불교의 정신을 전해야 한다는 확신을 갖게 된다. 니시타니 게이지는 다이세츠의 열정적인 삶을 이렇게 적는다. “의심할 것 없이 그의 평범함 속에는 쉬지 않는 열정이 있었다.
인생의 후반기에 일반적인 말로 그는 하나의 임무를 완수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무한한 임무였다. 인생의 후반기에 그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 이런 저런 일들을 하고 싶다고 말하였다. 때로 그 일들을 끝내기 전까지는 살아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그의 태도에서 나는 무량한 원력(願力)을 안고 사는 모습을 담지했고 그의 무한한 열정은 종교적인 삶 그 자체였다.”
그는 자신이 직접 깨달은 실존적인 불교경험을 서구인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우선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불교의 가르침을 새롭게 해석하고 제고하여 하나의 체계있는 불교학을 형성한다. 그것은 가히 창조적인 작업이다. 그의 학문적 성향은 무엇보다 우선 경전에 대한 원전의 이해를 중심으로 삼고 해석학적인 평가를 더하는 데 있다.
이렇게 하여 불교의 진수를 전법(傳法)해야 한다는 그의 평범한 열정은 현대 학문적인 요청속에서 고시고하된 전통의 유산을 풀어내는 난해한 작업을 독특하게 감당했다.
미주불교사 연표 (1890년대 ~ 1930년대)
7.30일 불교청년 연합결성. 20달러로 강연장을 빌림. 이후 돈이 모이면 강연장을 빌림.‘떠다니는 선방“ 아웨노 푸테츠에게서 출가한 소케이안이 주축이 되어 ‘미국 불교도협회 (Buddhist Society of America)라는 법인체 설립. 뉴욕에서 〈한국불교도들의 기독교신앙으로 전향하는 길〉 (The Buddhist Bible) 발간. 버먼트주쎄포드에서 초판 발행. 그는 한때 중국 푸차오에 파견되었던 그리스도교 선교사였다. |
다양한 활동영역
1870년 스즈키 다이세츠는 일본 가나자와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유교 신봉자로서 의사였고, 어머니는 당시 강한 정토신앙이나 임제선 가통에는 특별히 속해있지는 않았으나 불심이 돈독했던 분이었다. 일찍 아버지가 타계한 후 어머니는 정토진종(淨土眞宗)의 신앙에 몰두했기에 다이세츠는 어린시절 가정의 아미타불단(阿彌陀佛壇)을 가까이 하면서 자라났다.
매달 그의 집에는 스님들이 와서 독경을 했고 매일 아침 어머니는 불단에 촛불을 밝혀 공양했다.
스즈키는 그런 지극한 가정적인 분위기에서 자랐다. 이사카와 제 4고등학교에서 그는 유명한 니시다 기타로 선생을 만났으며 그의 과학적인 지성의 훈력은 강한 인상으로 남게된다.
1891년 동경대학에 입학하였고 곧이어 가마쿠라에 있는 고센 이마기타의 절에서 좌선(坐禪)을 배우게 되고 그의 구도적인 여정의 새로운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다이세츠는 고센 이마기타의 강직한 훈련과 좌선의 태도에서 조화와 인간의 깊은 마음의 세계를 탐닉하게 되며 선수행의 맛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그후 고센이 타계한 후 그는 샤쿠소엔의 문화에서 산선(散禪)수행을 계속하게 된다.
이렇듯 그의 승가적인 삶의 경험은 학생시적 남다른 열정과 구도에서부터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893년 시카고에서 있었던 세계종교회의(World's Parliament of Religons)는 다이세츠의 여정에 커다란 계기가 된다. 그는 당시 회의에 초대되었던 샤쿠의 연설문을 영문으로 번역하는 일을 맡게 된다. 샤쿠 소엔의 추천으로 다이세츠는 <불타의 복음 (The Gospel of Buddha,1895)>를 썼던 풀 카루스박사를 만나게 되고 그의 책을 일본어로 번역하게 된다.
폴카루스는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번역(1898)할 계획을 세우고 그 일을 위해 다이세츠를 초청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그의 미국에서의 활동의 시작이다. 그는 자신의 고독한 이국의 삶을 감내하며 전초적인 삶의 모험을 감행했던 것이다. 시카고 종교회의는 새로운 지성적인 충격을 던져준 세계적인 사건이었다. 이때에 인도에서 온 힌두교를 대표한 비베카난다(Vivekananda)의 신선한 메시지는 서구사회에 충격이었다. 이와 함께 동양의 영성적인 세계가 서구의 지적인 갈증을 채워주는 새로운 자료로 소개되기 시작했는데 그중의 하나가 불교이다.
이런 동서 교섭의 태동은 다이세츠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의 불교의 가르침과 삶의 철학을 외국의 청중들에게 전할 수 있는 자료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마침 카루소의 출판사에서 편집을 도우면서 불교학 저술의 기회를 갖게 된다. 이때부터 禪에 대한 기본적인 글들을 쓰기 시작한다.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영국의 <팔리경전회(Pail TextSociety)>의 잡지에 선보인 선불교에 대한 글이다.
곧이어 카루스 박사와 함께 <대승기신론>을 번역 출판하게 된 것은 인상적이다. 몇 해 후에 그는 다시 일본에 귀국하고 가구슈인대학과 동경 대학에서 영어교수로 활동을 하게 된다. 교수생활 이외의 여가시간에는 거의 가마쿠라에 가서 산선(散禪)수행을 하였다.
1919년 존경하던 소엔 선생이 열반하고 가구슈인 대학에도 군인 출신이 총장으로 오면서 그곳에 머무르는 것이 크게 의미가 없게 되자 사직하고 오타니 대학에서 교수생활을 지속하게 된다. 오타니 대학은 정토진종 계통의 학교이고 교토학파의 터가 된다. 그는 <이스턴 부디스트(The Eastern Buddhist)>를 중심으로 선불교와 불교의 전영역에 대한 저작을 지속하게 되고 1921년부터 1939년까지 대승불교의 사상에 대한 많은 영문 논고들을 발표하게 된다.
이때에 세계적인 이목을 끌게 되는 <능가경연구(Studied in the Lankavatara Sutra, 1930)>와 <선불교(Essays in Zen Buddhism, 1933)>등을 연속 출판하였으며 세계적인 학문적 명성을 얻게 된다. 이미 그의 책을 통하여 서구 사회에서는 수많은 선 수행자들이 생기고 여러 곳에서는 그를 초청하여 직접 그의 삶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갈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된다.
1936년 7월 영국에서 세계 신앙인 회의(World Congress of Faiths)가 열렸다. 그는 거기에 초청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수많은 세계 종교 지도자들과 만나 학문적 삶이 성숙되기에 이른다. 이때 그가 강연했던 것을 모아서 <선과 일본문화(Zen and Japanese Culture)>라는 문헌을 간행되게 된다.
인류 공유의 원형은 “지혜”
전쟁과 함께 세계의 난류와 갈등을 거치면서 다이세츠는 자신의 내적인 평화와 깊은 갈등을 느낀 것으로 회고한다. 전쟁 기간 동안 그는 일본에 머물면서 보다 내면적인 선적인 삶을 수행하게 되고 이는 후에 활발한 저작에 기반을 이루게 된다.
한편 파괴적인 전쟁의 폐허를 경험하면서 일본의 제국주의적인 군사 정책에 회의를 던졌던 철학자 다나베 하지메가 전후에 일본의 참회를 촉구하면서 <참회의 철학>을 쓴 것에 비한다면, 다이세츠는 <불교의 근본: 무심의 교리>라는 저술을 통하여 당시의 모순된 정황을 선적인 체험을 통하여 역사 반성의 기회로 삼기도 한다. 이는 공(空)과 자기 비움의 철저한 경험을 역사화 하려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1945년 이후 다이세츠는 미국과 유럽을 여러 차례 오랫동안 머물게 되며 본격적으로 서구 지성과의 만남에 헌신하게 된다. 이때부터 미호코 오가무라의 애정 어린 반려와 동반은 외국에서의 삶을 가능하게 한 열매였다고 할 수 있다.
1954년 그리고 1958년 연이은 유럽 방문과 긴 여정 가운데 칼 융(Carl Jung)과의 만남은 중요한 것이었다. 이 만남은 후에 <선불교와 정신 분석학(Zen Buddhism and Psychoanalysis, 1960)>으로 출판되기에 이른다. 동시에 철학자 마틴 하이데거와 칼 야스퍼스와도 교제하게 된다. 이런 타 학문과의 종합적인 만남은 다이세츠의 학문의 폭을 말하여 주는 것이며 불교가 다양한 학문과의 교섭을
통하여 인류의 문화 전반에 끼칠 수 있는 지평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이세츠의 불교학 정신을 교차문학적인 개방성에 기반을 두고 심층으로부터 인류가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근원적인 원형을 불교적인 지혜에서 찾고자 한 것이다.
콜롬비아 대학의 그는 1951년에 객원교수로서 여러 분야를 강의하게 되는데 그때는 이미 팔순이 넘은 노장이었다. 이때 다이세츠로부터 사사받고 그 후에 계속 교제를 나누었던 정신 분석학자 에릭 프롬(Erich Fromm)은 수차례 함께 정신분석학 세미나에서 만나고 대화했던 경험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1957년 콜롬비아 대학에서 은퇴한 후에 멕시코에서 에릭 프롬과 한 동안 지내게 된다.
“선불교와 정신분석에 대한 주제로 멕시코 정신분석학회가 쿠에나바차에서 주최한 강연회에서는 오십여 명의 학자들이 함께 모였다. 나에게 있어 이것은 서너 차례에 걸쳐 다이세츠 선생으로부터 직접 강연을 듣는 특별한 기회가 되었다.
토론에 대한 그의 입장을 듣는 것보다도 그와 함께 한 주간 지낸다고 하는 것이 중요했다. 모임이 거의 끝날 무렵에는 참여한 대다수에게 독특한 경험이 일어나곤 했다. 그들의 생에서 아주 중요한 내면적 만남을 체험했다. 나는 가끔 지금도 그에 대한 다른 인상이 떠오른다. 그 안에 있는 천진한 동심, 사는 과정에서 대개의 사람들은 가슴이 딱딱해지지만 어린아이 같이 될 때 우리는 여전히 유연하고 열린 가슴을 갖게 된다. 이때 우리는 여전히 어머니 미소의 순수함에 믿을 갖게 되며 약속에 기대게 되고 날 때부터 갖던 무조건적인 사랑에 의지하게 된다. 바로 이러한 인격이 다이세츠 박사의 성품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인격과 성품은 세계의 정신분석학회의 회원들에게 선불교의 살아있는 인상으로 와 닿았으며, 불교의 철학적인 가르침인 공(空)의 겸허하고 구체적인 체험이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동서양의 사상가들과의 만남을 위한 열정적인 행보는 수많은 저작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그를 정삼위(正三位)로 품위하고 하와이 대학에서는 명예학위를 봉정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정토신앙과 관계된 신란(薪鸞)의 <교교신소(敎行信証)>를 영역하고 그 분야의 글들을 정리하게 되는데 이는 자신의 삶을 아미타불의 원력에 깊이 내맡기는 신심(信心)의 아름다운 고백이라고 보여진다. 아미타불의 타력적인 원력은 어린시절부터 어머니의 신앙이었으며 평생을 열정껏 달려온 노장에게 새로운 자기초월을 경험할 수 있는 의지처였으리라.
90여 권의 일본어 저술과 30여 권이 넘는 영어 저술은 노장의 방대한 연구 행적을 잘 말해주고 이것은 불가사의한 불심에 의지하고 창조적인 삶을 살아온 증거가 아닌가 생각한다.
**** 정희수 목사님의 이 글에는 스즈끼가 마치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원하는 사람으로 기술되어 있으나 이 글이 발표된 이후에 스즈키 다이세츠 일본에서의 스즈키 행동은 침략적 제국주의 전쟁에 찬동하고 많은 협조를 한 사실이 밝혀졌다.
1996년 10월 -7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