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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불 교 사

1960년대의 미국불교 (4)-1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19.06.29|조회수177 목록 댓글 0


『미국이 만난 불교(The American Encounter with Buddhism』 제3장 비전秘傳 불교도, 합리적 불교도, 낭만적 불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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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의 미국불교 (4)-1

 

미국에서 활동하는 중국 스님들의 계보.

 

미국 불교는 일본 불교계 인사들이 1893년 시카고 종교회의 이후부터 꾸준하게 등장한다.

이보다 수 십년 늦게 온 중국불교계 인사들은 이제 미국불교의 중요세력이다. 미국에는 1962년 미국에 샌프란시코로 입국한 선화 선사(상인)을 비롯하여 대만불교계에서 크게 활동을 하고 있는 성운스님이 이끄는 불광사, 증엄스님이 이끄는 자제공덕회, 중대선사 지부 등 대부분 계열에서 들어와 활동하고 있다.

 

이들의 뿌리를 살펴보면 북가주 만불사 선화선사는 허운(虛雲)(쉬운)대사가 스승이다. 성운스님과 증엄스님의 뿌리는 타이쉬 태허(太虛, 1890-1947) 스님이다.

 

허운(虛雲)대사(1840~1959)는 근.현대 중국의 큰 선지식으로서 거의 쇠잔해 가던 중국의 선풍을 다시 중흥시킨 거목이다. 스님이 태어난 1840년은 아편전쟁이 발발한 해로 근대 중국이 시작된 때이다. 허운 대사는 부패가 만연했던 청나라 말엽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운동, 청일전쟁, 신해혁명과 청의 멸망, 공산당 창당과 국공합작, 항일전쟁, 사회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등 중국 근현대의 굵직한 사건들과 함께한 일생을 보냈다. 피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으로 가득 찬 삶을 산 허운 대사는 미신으로 치부되며 무너져 가던 불교 전통을 다시 확립하고 선종 5가의 법맥을 이으며, 전쟁으로 신음하던 동시대 중국인들의 아픔을 위로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불심이 돈독했던 양 무제의 후손인 허운 대사는 19세에 출가하여 56세에 깨달은 뒤 120세에 입적할 때까지 전쟁과 혁명으로 가득한 환란 속에서도 선()의 중흥과 불교 전통의 회복, 중생구제를 위해 노력하였다. 뼈를 깎는 노력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언제 어디서나 계율을 준수하기 위해 애썼으며, 경전을 손에서 놓지 않고 연구하며 대장경의 보존을 위해 팔방으로 다니며 노력하였다. 또한 혼란스러운 때일수록 불법(佛法)의 진리로 중생을 이끌기 위해 머무는 사찰마다 불교대학을 설립하여 출가와 재가를 막론하고 불교 교육에 힘썼으며, 남화사, 대각사, 진여사, 태화사, 화정사 등등 많은 사찰을 중건하였다특히 허운 대사는 중국 선종 5가 중 임제종(臨濟宗) 43, 조동종 47세 조사가 되었다. 당시 선승들은 남송대에 법맥이 끊겼던 위앙종(潙仰宗), 법안종(法眼宗), 운문종(雲門宗)의 계승자로 추대했다. 선맥이 거의 단절되다시피 한 상황에서 불교계는 허운이 선종 전체를 다시 세우길 바랐다. 또한 계율을 철저하게 지킨 율사이자 경전을 손에서 놓지 않은 강사로서 근현대 중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고승이다. 현재 중국의 선종 승려 대부분은 허운 대사의 법맥을 따르고 있다.

그의 행적중의 유명한 것 중의 하나가 삼보일배로 보타산에서 오대산까지 간 것이다. 1882년 음력 71일 시작해서 1884년 봄에 오대산 현통사에 도착했다.

한국에 소개된 허운대사 관련 서적으로는 참선요지생사의 근본에서 주인이 되라중국근현대불교의 선지식 허운등 여러 책이 있다.

 

태허(太虛)스님은 중국불교의 혁신을 이끈 스님으로 평가를 받는다. 1922년 후베이 우창에서 무창불학원을 설립했다. 이 학원은 중국 불교 최초로 교육과 연구, 도서관과 출판부등 종합적인 기능을 가진 근대적 불학원이다.

아래는 인터넷 검색에서 뽑은 글이다.

 

그러나 살아생전 태허는 욕을 참 많이 먹었던 사람이다. 비교적 객관적으로 태허에 대해 회상한 20세기 후반 수행자 남회근(南懷瑾, 1918-2012)이 출가자들을 모아 놓고 참선지도를 하면서 했던 회고의 말이 이것이다.

 

당시 나는 태허 대사를 좀 삐딱하게 보고 있었는데, 나중에는 존경하게 되었다. 오늘날 중국 불교에서 승려들이 바뀐 것은 모두 그 사람 덕분이다. 원래 다들 태허를 보고 정치 승려라고 욕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는 참 대단한 사람이다. 그는 신문기사를 썼고 혁명가들을 따라다녔다. 그래서 다들 그를 정치 승려라고 욕했던 것이다. 해만 뜨면 하루 종일 정치가들과 왕래하니, 당시 우리는 그를 경멸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를 싫어했고 불도佛道를 제대로 닦지 않는 자라고 여겼다. 그러나 나중에 나는 그가 선정禪定의 힘을 갖춘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한번은 그가 남경에 온 적이 있었다. 당시 중앙정부에서 그를 찾았기 때문이다. 마침 남경에 그의 제자와 친구가 많이 있어서 그가 남경에 도착하자 고위인사들과 관료들이 그를 맞이하러 마중 왔다. 그가 기차에서 내렸는데 소변이 마려웠던 모양이다. 그는 곧바로 바지를 내리고 사람들이 보는 데에서 오줌을 갈기는 것이 아닌가! 앞에 대기하는 사람들을 의식조차 하지 않았다. 이런 것들을 개의치 않는 경지, 그는 미친 사람도 아닌데 바로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갈긴 것이다. 그를 맞이하러 나온 나리님들이 바로 그를 부축했다. 스승님, 제발 이쪽으로 와서 오줌을 누시라고. 그런데 그는 상관하지 않았다. 마중 나온 사람 중에는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었는데 다들 주요 인사들이었다. 당시 나는 그가 안경을 쓴 것을 보았다. ‘, 이 화상은 하루 종일 선정에 있구나. 대단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는 제자들도 많았는데, 당시 사람들은 제자로 귀의하면서 모두 스승에게 돈을 바쳤다. 그런데 그는 끝까지 한 푼의 돈조차 쳐다보지 않았다. 즉 단 한 푼도 그의 손을 거쳐 간 적이 없었던 거다. 돈이 산처럼 쌓여도 돈을 만지지 않는 것, 이것이 출가자가 지켜야 할 계율이니까. 태허는 얼마가 들어오고 어떻게 쓰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일생을 이렇게 살았다. 말이야 쉽지만 행하기는 쉬운 일이 아닌데 그는 그것이 매우 자연스러웠다.”

 

191262세의 기선(징안) 화상은 사찰재산 보호를 위해 중앙정부와 교섭하러 북경으로 갔으나, 내무부 직원과 담판을 하던 중 직원으로부터 조롱과 멸시를 받았고, 따귀까지 맞았다. 그는 분노를 삭이지 못해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이런 지경을 당해서야 불교계는 비로소 한목소리를 내며 정부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대총통 원세개(1859-1916)는 사태를 무마하기 위해 불교재산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태허는 불교 내부적으로 혁명을 주창하고 나선 것이다. 1913년 스승 기선 화상 추도회에서 태허는 불교 혁명’, 즉 불교교리, 불교제도, 불교재산의 혁명을 외쳤다.

교리혁명의 골자는 혹세무민의 미신불교를 혁파하고 대승불교의 자리이타 정신으로 돌아가 국가와 사회에 기여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중생들이 사는 사회에서 불교가 분명한 의미를 갖기를 바랐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후에 인생불교人生佛敎이론으로 발전하였고, 그의 제자들에 의해 대만 불교의 핵심 사상인 인간불교人間佛敎사상으로 발전되었던 것이다. ‘제도혁명의 골자는 승려의 생활과 승려조직을 개혁하여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승단을 꾸리자는 것이었다.

인간불교를 주창하고 가는 곳마다 불교교육기관을 만들었다. 태허가 만든 교육기관은 그 수가 매우 많다. 그가 관여한 불교교육기관을 살펴보면 복건성 하문의 민남불학원閩南佛學院, 호북성 무한武漢의 무창불학원武昌佛學院, 중경重慶의 세계불학원 한장교리원世界佛學苑 漢藏敎理院, 섬서성 서안西安의 팔리(巴利)삼장원三藏院, 북경의 불교연구원 등이 있다. 이것들은 모두 출가자를 위한 전문 교육기관으로 신식 교육체제를 따랐다.

태허의 사상과 활동의 영향은 제자인 인순(1906~2005) 법사로 이어받았고, 다시 대만 자제공덕회 설립자인 증엄스님에게 전해졌다. 불광산사의 성운스님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중국불교협회장은 태허스님과 함께 불교운동을 벌인 조박초 거사는 중국불교협회 회장을 지내며 문화혁명 당시 불교와 불교문화유적을 지켜냈다. 태허는 격동기 중국의 불교를 이끌며 불교를 부흥시키고, 외세의 침탈로 중국을 지켜내는데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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