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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불 교 사

[2020년 9,10월호] 1980년대 미국불교 (3) - 미국한국불교계 풍경 (1) / 김형근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0.09.21|조회수831 목록 댓글 0


    < 미국불교사 >




    미국역사와 함께 보는 미국불교사 (36)




    이 글은 1997년부터 약 20년에 걸쳐 미주현대불교에 번역 연재되었던 미국불교사에 관한 중요한 책들인‘백조가 호수에 온 이야기 How the swans came to the lake(한국어로는 이야기 미국불교사로 출판', '미국이 만난 불교 The American Encounter with Buddhism', '미국 불교 Buddhism in America'를 토대로 하여 이 책들을 다시 인용하여 재구성하여 쓴 글이다.
    전체적인 방향은 아래와 같은 관점에 방점을 두고 기술할 것이다.
    미국에 도래하는 불교는 뉴잉글랜드의 초월주의자들이 동양의 대안적 영성을 찾아 나섰던 이래로 150년간 지속되었던 구도역정의 종착지였다. 유럽계 지식인 미국인들의 내밀한 관심사로부터 이른바 하나의 대중운동으로 변화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미국사회의 흐름에 대한 반발과 그 대안으로 불교가 당시의 미국사회의 젊은이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글 | 김형근



    1980년대 미국불교 (3)
    미주한국불교계 풍경(1)




    1982년 하와이 대원사(현 무량사) 1차 불사 준공식때 평화 탑 제막식




    미주한국불교사 중에서 중요한 성과를 냈고
    폭풍 성장한 한 시기


    미주한국불교 나아갈 방향을 모색한 시기
    -문화원 건립, 대학교 설립 추진, 언론활동이 시작된  시기


    미주한국불교계에서 활동한 스님들을 분류할 때 서경보스님을 비롯하여, 삼우스님과 고성, 숭산, 법안, 도안스님, 대원스님, 혜성스님 등 70년대에 입국한 스님들을 삼우스님은  미주한국불교의 개척자로 1기 스님들로 분류한다. 나도 이 견해에 동의한다.  이들은 당시에 사찰이 없고, 신도들이 매우 적은 여건에서 사찰을 세우고 포교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에 들어온 스님들 중 숭산스님, 법안스님, 도안스님 등은 입적을 하였고, 삼우스님, 고성스님, 대원스님, 혜성스님 등은 현재도 건재하지만, 현재 활동하는 스님은 삼우스님 뿐이다. 혜성스님은 대부분 한국 부산 금강사에 머무르고  일 년에 2-3차례 미국을 방문하고 있다. 이 스님들의  뒤를 이어 1980년대에 많은 스님들이 미국과 카나다에 입국하였고 이들이 미국의 여러 지역에 사찰을 건립하면서 미주한국불교의 거점 지역을 넓히면서 크게 성장시켰다. 그리고 이 1980년대에 한국불교의 나아갈 몇 가지 방향이 시도되었는데 시도한 스님들은 1970년대에 들어온 스님이었다. 이 스님들이 미국을 배우면서 가장 먼저 한 것이 포교당 설립이었는데 그것이 1980년대에 들어서 결실을 맺었다. 그중에서 하와이 대원사(현 무량사), 로스엔젤레스 관음사와 달마사, 뉴욕 원각사, 시카고 불타사 등은 지금도  미주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사찰이고, 발전을 견인한 사찰들이다.  1세대 스님들과 신자들 그리고 1980년대에 미국에 입국한 스님들과 신도들이 이후 미주한국불교계를 이끄는 중요한 인적자원이었다. 그래서 미주한국불교사에서 1980년대가 매우 중요한 시기였고, 이 시기의 성과가 바탕이 되어 미주한국불교계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이 80년대에 들어온 스님들 중에도 입적하거나 한국으로 돌아간 스님도 많지만 아직도 미국에서  주지로 활동하고 있는 스님들이 많다. 화공, 진월스님은 한국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 활동하고 있다.  이 시기에 스님들이 매년 꾸준하게 미국에 입국하였는데 최소한 30여명 최대 40여명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에  입국하였지만 확실한 입국 연도 기록이 없는 스님들이 많다. 예를 들어 로스 엔젤레스에 정희사를 개원했던 태고종 지산스님, 휴스톤 남선사를 설립했던 묘봉스님 등도 이 시기에 이미 활동한 기록은 있지만 입국 연도가 알려지지 않았다. 이 80년대 중에서도 1980년도에 많은 스님들이 입국하였다. 지명스님, 도철스님, 정윤스님, 현일스님, 설조스님, 명선스님(타코마 반야사 주지) 도현스님, 범주스님, 지명스님, 대정스님 등이다. (현 무량사 주지 도현스님은 1979년 11월에 입국하였다. 1980년대에 온 스님으로 보아도 된다.)


    이 80년대에 입국한 스님들 중에 현재도  미국에서 활동하는 스님은 로스 엔젤레스 현일스님(법왕사), 현철스님(반야사), 도현스님(하와이 무량사), 명선스님(타코마 반야사), 일면스님(타코마 서미사), 인권스님(LA 보문사), 정업스님(시애틀 정각사), 법장스님(필라델피아 화엄사), 양일스님(카나다 대각사),지광스님(뉴욕 원각사), 화공스님(포틀랜드 보광사) 등이다.
    이 시기에 미국에서 출가한 스님은 도암스님(숭산스님이 은사, 현 뉴욕 조계사 주지)과 삼보사 창건주 이 한상 거사의 부인 상품화 보살은 출가하여 ‘흥림’이란 법명을 받고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들어와 활동하였지만 입적한 스님은 영주스님(시카고 봉불사), 제원스님(메릴렌드 법주사), 경암스님(버지니아 보림사), 도명스님( 뉴욕 조계사 주지 역임) 범주스님(달마사 주지 역임) 등이다. 이 시기에 왔다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간 스님은 지명스님, 도철스님, 설조스님, 법타스님, 묘봉스님, 정현스님, 삼묵스님, 선우스님 등 많다.


    로스 엔젤레스 현일, 현철스님 (왼쪽부터)


    서미사 주지 일면스님


    도현스님-하와이 무량사 주지


    지광스님-뉴욕 원각사 주지



    학교에 다닌 스님들. 지명스님, 화공스님, 진월스님, 도현스님, 삼묵스님, 지광스님 


    80년대에는 입국한 스님들은 다양한 경력과 재능을 가진 스님들이 있었다. 이들 중 일부는 미국의 대학교에 입학하였는데 지명스님, 화공스님(현 포틀래드 보광사 주지), 진월스님(샌프란시스코 고성선원 주지), 도현스님(하와이 무량사 주지), 삼묵스님, 지광스님(뉴욕 원각사 주지) 등이다. 이 스님들 중 지명스님은 필라델피아 탬플대학교, 화공스님은 위스콘스주립대학교, 진월스님은 버클리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삼묵스님은  박사학위 과정을 마쳤다.  지광스님은 메사츠세츠 주립대학교에서 서양철학을 전공했고, 도현스님은 버클리대학교 학부를 마쳤다.
    범주스님과 정현스님은 문화활동을 한 스님이다. 범주스님은 로스 엔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 그리고 뉴욕에서 많은 전시회를 가졌다. 정현스님은 1984년 LA올릭픽에 맞추어 LA한국문화원에서 도안스님이 이끄는 서부승가회 주최로 탁본 전시회를 하였다. 또 이 해에 하와이 연방청사 건물에서 하와이대학교 동서문화교류센터 주최로 탁본 전시회를 가지기도 하였다. 정현스님은 1982년 미국에 입국하여, 정혜사 주지를 잠깐한 후에 샌프란시스코 여래사, 타코마 서미사에서 장기간 객승으로 있다가, 서미사 일면스님의 소개로 포틀랜드 보광사 주지를 역임하고, 콜로라도 덴버에서는 용화사를 설립하여 포교활동을 하였다. 이 곳 저 곳 만행을 하며 장기간  몇 개월씩 객승으로  살았다. 지금은 찾아보기 어려운 낭만의 시절이었다. 1979년 하와이로 입국하고 하와이에 불은사를 창건한 자은스님은 춤을 추는 무용가였다. 


     1984년 로스 엔젤레스 올림픽 선수촌 방문한 LA 관음사 도안스님, 키큰농구 박찬숙 선수



     이 시기에 들어온 스님들 중에는 사찰을 개원한 스님들이 많다


    설조스님이 샌프란시스코 여래사, 도철스님은 뉴져지 성불사, 텍사스 킬린에 성불사, 타코마에 성불사를 개원하였다. 타코마 성불사는 현재 서미사로 개명되었다.  비구니  명선스님이 타코마에 반야사, 지명스님이 LA에 반야사. 현일스님이 LA에 법왕사, 정윤스님이 산호세에 대승사, 재원스님이 메릴랜드에 법주사, 경암스님이 버지니아에 보림사. 윤성해 스님이 뉴욕에 불국사,  인권스님이 LA에 보문사, 정업스님이 시애틀에 정각사, 정현스님이 덴버에 용화사, 영주스님이 시카고에 봉불사, 화공스님이 보스톤에 범어사, 선우스님이 샌프란시스코에 보림사, 도만스님이 디트로이트에 무문사, 홍선스님이 산호세에 정원사, 선진스님이 샌디에이고에 불광사  등 많은 스님들이 사찰을 개원하였는데 그 시기는 1980년대도 있고, 1990년대 등 시기는 많이 다르다. 이 사찰들 중 뉴져지 성불사, 샌프란시시코 보림사, 뉴져지 불국사, 덴버 원효사와 용화사, 버지니아 보림사,  샌디에이고 불광사 등 지금은 없어진 사찰도 많다.

                                                                                                       


     휴스톤 남선사


                                         
    1980년대에 건립된 사찰들이 많다


    로스 엔젤레스 고려사, 정희사, 정혜사, 뉴욕 백림사와 전등사. 조오지아 아틀란다에 보광사, 성불사(시애틀), 불은사(하와이), 휴스톤 남선사, 달라스 여래사, 샌프란시스코 여래사, 필라델피아 원각사, 보스톤 범어사, 덴버의 원효사와 용화사 등 45개 이상의 사찰이 건립되었는데 미주한국불교 역사에서 가장 많이 사찰이 건립된 시기이다. 미시간 주 앤에버 선련사, 보스톤 켐브리지 선원, 시애틀 돈오선원 등은 미국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하였지만  대부분 사찰은 한국인 대상이었다. 이 1980년대에 메릴랜드 성불사, 휴스톤 현법사, 템파의 보현사. 등 폐쇄하는 사찰도 나타난다.


    이 시기에 건립된 사찰의 지역을 살펴보면 로스 엔젤레스와 샌디에이고 등 남가주 지역이 많고, 뉴욕은 상대적으로 적다. 또한 북가주 지역에도 여래사를 비롯하여 보림사(Seaside), 정원사 여러 사찰이 들어섰다. 또 라스베가스, 피닉스, 콜로라도 덴버, 텍사스 주 달라스와 휴스톤  그리고 킬린. 시애틀 등 미주 많은 지역으로 확장된다.
     이 시기에 사찰이 많이 건립된 이유는 1970년대부터 시작된 이민 열풍으로 미국에 온 한인들이 아직 현지에 적응하지 못한 상태에서 종교 단체를 중심으로 사교와 미국사회 정보교환이 이루어졌고, 그리고 마음의 안정을 얻었기 때문이다. 또 종교단체를 통한 영주권 취득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미주에 한국불교 포교가 시작된 시기에 조계종을 비롯한 한국불교계는 해외포교에 대한 경험이 별로 없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미지에서 벗어난 이후로부터 대략 30여년이 지난 시기이고, 또 그 30여년도 비구 대처 간 싸움으로 세월을 보낸 시기이기 때문에 그런 경험을 할 기회가 없었다. 또한 당시에 한국불교계는 미국에 대해 아는 사람도 미국 유학을 마치고 간 서경보 스님 외에는 거의 없었다. 이러한 사정은 아시아 전통불교국가에서는 일본 외에는 대부분 비슷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미국에서 포교에 대해서는 누구에게 상담할 사람도 없었고, 경험이 없었던 것이다. 미국에 친지 초청이나 여행으로 온 스님들이 많았기 때문에  조계종단 등은 누가 미국에 가는지 파악도 못한 상태였다. 어쨌든 종단 차원에서 포교에 대한 사전 교육은 없었기 때문에 모든 스님들은 미국 포교에 대해서는 각자 알아서 해야 했다.


    이 시기에 주목되는 세 분의 스님이 있다.  1970년대 초반에 미국에 입국한 법안스님, 도안스님, 대원스님으로 이 스님들은 미국에 어느 정도 적응하면서 사찰의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면서 구체적으로 시도한 시기이기도 하다. 1970년대에 미국에 입국한 스님들 중에서도 이 세 스님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전화통화도 자주 하면서 지냈다. 이 세 스님의 시도는 한국불교계에서 매우 의미가 크다고 생각한다. 이 스님들의 행보를 구체적으로 보면 LA에서 활동한 도안스님은 한국문화 소개와 봉사단체 운영 그리고 국제연대활동의 추진, 언론의 시도 등 가장 다양하게 시도하였다. 하와이에서 활동한 대원스님은 문화원 건립과 ‘불교와 평화’ 국제 학술세미나, 그리고 뉴욕에서 법안스님은 대학교 건립을 추진하였다.



    LA-관음사 문화원 개원식



    도안스님; 불교문화원 건립, 한미불교봉사회 설립, 불교교양대학 시작, 국제불교연대활동 시작


    조금 더 소개하면 도안스님은 불교문화원 건립을 위해  1981년에 로스 엔젤레스와 한국에서 각각 추진위원회를 조직하고, 이어 1982년부터 로스 엔젤레스와 한국에서 모금 전시회,  불교문화원 홍보를 위한 대규모 공연행사를 서울 세종문화회관과 부산 시민회관 대강에서 하여 큰 성황을 이루었다. 도안스님은 이렇게 로스 엔젤레스에서 사람들을 모으고, 한국을 자주 방문하면서 발품을 많이 팔면서 모금 전시회 등 많은 노력을 한 끝에 45,000 스퀘어 피트인 현 LA 관음사 큰 건물을 구입하고 ‘한국불교문화원’이라는 간판을 달았다. 이 건물은 당시까지 미주한국불교계로서는 가장 큰 건물이었다. 지금도 한국불교계는 뉴욕, LA, 시카고 등 대도시에 이처럼 큰 건물은 없다.  뿐만 아니라 스님은 1984년  한미불교봉사회 설립하여 복지사업을 시도하였는데 불교계로서는 가장 앞선 시도였다.  1986년부터 강사 채인환 스님, 이영무 박사, 김구산, 신묘봉스님 등을 강사로 하여 불교교양대학 강의를 2개월간 하였고, 이 후 꾸준하게 불교교양대학을 운영하였다. 법회 운영도 예불과 설법으로 분리하여 법당에서는 기도와 축원, 천수경 독경 등 예불을 하였다. 설법은 설법전에서 하였는데 반야심경 독경과 찬불가, 관세음보살 정근을 하면서 헌화와 헌금을 하고 난 후 설법을 하였다. 기도.예불과 설법을 분리한 법회를 함으로써 사찰에 첫발을 디딘 사람들에게 주보에 관음사 법회 참가자 수, 헌금 액수 등을 상세하게 공개하였다. 또 도안스님 활동 중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부분은 국제연대활동이었다. 비록 영어를 하지는 못했지만 스님은 국제연대활동에 적극적이었고, 1990년대에는 한인 사회에서는 개신교, 원불교 등과 함께 종교간의 대화를 하면서 함께 협력하여 사회참여 활동을 하였다. 스님은 스리랑카, 중국, 일본, 태국 등 타민족 불교국가들이 함께 연대하는 ‘전미주불교협의회 America Buddhist Congress' 창립총회를 관음사에서 개최하고 공동의장에 선출되었다. 이 행사에 당시 스리랑카의 라타나사냐 스님, 북가주 만불사 중국인 선화 선사 등 국제적으로 명망있는 스님들이 참석하였고, 한국불교계에서도 하와이 대원사에 있던 진월스님들도 참가하였다. 이러한 활동의 연장으로 1989년 7월에 L.A. 관음사에서 남가주승가회 주최로 달라이라마를 비롯한 5대 종교지도자 간담회를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최하였다. 달라이 라마가 한국 사찰을 방문한 유일한 행사였다. 스님은 또 언론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라디오 방송, 불교신문 등을 운영하였다. 불교언론을 도안스님이 시도한 이 이러한 활동은  지금까지 미국에서 활동한 스님 중 가장 돋보이는 활동이었다.


    하와이 무량사 문화원 건물 


    대원스님의 문화원 건립과 ‘불교와 평화’ 7차례 국제학술 행사


    1975년에   하와이에 도착한 스님은 1982년 시멘트로
    전통사찰 건립, 문화원 공사, 교양대학 운동,  ‘불교와 평화’ 국제 학술행사  7차례 주최


    하와이에서는 대원스님이 한국불교 스님으로서는 드물게 큰 행보를 하였다.1975년 6월 한국에서 페이지 교수와 인연으로 하와이에 도착한 스님은 약 한 달 후인 7월 20일 오전 11시  9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하와이 총영사관 건물에서 첫 법회를 하였다. 그 후 하와이에 거주하던 불교인들을 조직하여 큰 호응을 받으면서 하와이 대원사(현 무량사)라는 한국불교의 가장 큰 규모의 불사를 한 스님이다.
    1979년 현재의 무량사 부지를 $315,000에 구입하고  전통사찰 대웅전을 1982년 10월에 낙성식을 가졌는데 이것은 본토 달마사보다도 5년 정도 빠르다. 이런 연유로 대원사는 한때 한국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미주의 한국사찰이었고 한국의 스님들이 가장 많이 방문한 사찰이었다. 대원스님이 미국에 사찰을 건립한 다른 스님과 다른 점은 대원사 불사를 하면서 한국 재벌 기업인들의 협력을 얻었고 한국사회의 주요 인사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하와이가 한국과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또 당시 한국에 미국 강렬한 붐 속에서 미국에 한국사찰을 세우고, 불교문화원을 세운다는 명분에 많은 사람들이 협력한 것이다.  대작불사를 하였고, 많은 신도들, 또 하와이대학교에 유학 온 여러 사람들이 대원사와 인연을 맺고 있어서 대원사는 하와이 한인사회에 크게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이는 L.A., 뉴욕, 시카고 등 미주한인사회 어느 사찰에서도 가져본 적이 없는 힘이었다.



    한참 전성기 시절의 하와이 대원사 부처님 오신날 연등 모습



    대원사 불사는 우선 하와이 신도들의 피나는 노력과 모금이 필요하였지만 하와이의 불자들의 재정적인 힘만으로는 쉽지가 않기 때문에 뜻있는 한국의 불자님들의 도움을 청하기 위하여 1977년 대원스님을 단장,  영화배우 출신인 조미령 신도회장이 부단장으로 신도 17명으로 모국방문단을 조직, 한국방문을 하게 된다. 당시 조계종 전국신도회 회장이었던 이후락거사의 열성적이고 따뜻한 환영, 종정스님, 정일권 국회의장, 정각회 회장 등의 호의를 가지고 이 법당건립을 위해서 적극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였으며 특히 전국신도회가 주관한 조계사 환영법회도 있었다. 이렇게 대원스님은 수 차례 한국을 다니면서 모금활동을 실시하였다. 롯데호텔에서 여러 차례 불자 연예인의 도움을 받아 모금파티를 거행하였고  하와이에서도 불자연예인 초대 모금 디너 파티를 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에서 큰 도움을 받고  하와이 불자들의 끊임없는 헌신적인 보시정신이 일치가 되어 1980년에 시작하여 1982년 10월 24일 한국식으로 이루어진 대망의 대웅전, 선원, 종각 및 세계평화 기원 불사리탑이 착공되었다. 당일 행사에는 한국에서 노구를 불구하고 참석하신 여러 스님과, 국회의원과 불자님들이 다수 참석하였고 현지에서는 당시 아리요시 주지사를 비롯해서 마스나가 연방 상원의원 및 교민 단체장들이 참여하여 앞으로의 대원사의 발전을 축하해 주었다.


    대웅전 불사를 마치고 다음에는 문화원 불사를 하였다. 대원스님은  미국에서 한국불교가 한국문화를 소개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대규모의 문화원 건립을 추진하였다. 이것은 L.A.관음사 도안스님과도 같다.
    하와이에서 문화원 건립추진 위원회를 설립하였고 아울러 한국에서도 대원사불교문화원 건립추진위원회를 설립하고 위원장에는 윤길중 국회의원, 부위원장에는 당시 교통부장관이었던 차규헌씨, 간사장에는 국무총리 비서실장인 윤석순씨 그리고 위원에는 하와이 불교문화원을 건립하는데 적극관심이 많고 도움을 아끼지 않겠다고 원을 세웠던 한국 불교계의 많은 사람들을 참여시켰다. 하와이 문화원은 매우 큰 규모인데 1986년 9월에 문화원 공사 시작했다.

    불교문화원의 설립취지를 보면:
    1. 한국불교 및 불교문화를 동서문화의 접점인 미국 하와이를 통해 국제적으로 소개함으로서 그 가치와 정신을 세계적으로 인식시키고 불교의 근본정신인 자비사상을 바탕으로 한 자유와 평화의 사상을 전파함.
    2. 한국민족의 문화와 정신을 소개, 교육, 전승케하여 민족정신을 고양하고 한민족으로서의 긍지를 제고시킴.
    3. 현지의 한국 및 한국불교 연구를 활성화시키고자 하는데 있음.
    이와 같은 취지를 구현하기 위해 문화원내에 세계종교 문제 연구소, 평화문제 연구소를 설치하고 한국불교 및 불교문화를 소개하기 위해서 박물관, 도서관 및 전시관을 설치하고 이미 설립되어 있는 한글학교를 더욱 보완 확장하여 한글교육의 체계화는 물론 한국 민속, 서예, 도예, 다도 등을 보급한다. 



    1985년 2차 불교와 평화 학술회의, 대원스님,박성배 이영자


    1993년 대원사 주최 6차 불교와 평화 행사



     대원 스님은 한국스님으로서는 유일하게 큰 규모의 ‘불교와 평화’라는 주제로 국제학술대행사를 7 차례에 걸쳐 하와이, 일본, 몽고, 한국 등 여러 나라를 순회하면서 주최하였다. 이 행사에는 국제적으로 비중있는 학자와 관료, 전문가들이 참석하였다.
     "세계 평화를 위한 불교의 지도적 역할"이란 주제로 1983년부터 격년으로 1995년까지 일곱 차례의 개최된 이 학술회의는 대원스님의 기획에 의해 시작되고 운영되어 왔다. 이 세미나의 주된 관심사인 평화는 세계 각국의 불교 사상가, 평화지도자 및 평화 학자들이 함께 호소해 온 '평화로운 세계 건설'에 대한 공동 관심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비록 불교도가 이 회합의 계기를 마련하였지만 이 회의 참가자를 불교도로만 제한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그간의 학술회의 참가자는 기도교인은 물론 간디주의자, 힌두교도, 자이나교도, 이슬람교도, 맑시즘, 비종교적 휴머니스트 등 세계 모든 지역의 학자들도 망라되어 있다. 이러한 대규모 국제학술행사는 당시 미주한국불교계의 인적자원과 재정상황을 고려하면 매우 이례적인 행사였다.  대원스님은 이 대회가 지속되지 못해 너무 아쉽다고 한다. "회가 지날수록 명망있는 학자들이 참석하고 싶어 했습니다. 자기 초청해 달라고 많은 사람들이 연락이 왔습니다. 저는 지식인 중심으로 학자, 불교평화를 위해 활동하는 사람, 덕망있는 학자, 스님들 엘리트 불교인들을 중심으로 국제불교평화조직을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행사를 한번 하는데 평균 6만 달러 마지막 대회 때는 10만달러가 들어갔습니다 ."라고 이 대회가 중단된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이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의 논문은 그 후 성원스님이 설립한 ‘Pine Tree'를 통해 7권 모두 출판되어 미국에서 평화학을 강의하는 많은 대학에서 교과서로 채택하고 있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이 대회를 통해 한국 불교의 국제화 그리고 이를 위한 한국 불교 내적 토대 견실화의 필요성과 그 가능성을 보여 준 학회로 평가되었다.

    대원 스님은 또 1980년 대원사 장학회를 설립 1980년 하여 하와이 박사과정에 있거나 버클리대학교에서 불교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재정후원 하였다. 이들은 현재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김욱중, 남성일 서강대교수, 조성택 고려대교수 조은수 미시간주립대교수 등이 이들이다.


    1980년 10월 24일 대원사 대웅전 기공식
    1982년 10월 24일 하와이 대원사 전통사찰 낙성식
    1986년 9월 24일: 하와이 대원사 문화원 공사 시작



    뉴욕대학교에서 공부하고, 대학교 설립을 추진한 법안 스님


    1973년 미국에 입국한 법안스님은 뉴욕 원각사 창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하바드대학교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영어공부를 주로 하다가 1976년 8월부터  뉴욕원각사 주지로 활동하였다. 주지로 있으면서 주로 뉴욕대학교에서 공부를 하였고 절 일은 사제로 1979년 입국한 혜관스님이 맡아서 했다. 서예가이기도 했던 법안스님은 원각사에서 한국인과 미국인 등을 대상으로 서예지도를 하면서 한국과 미국에서 서예 전시회를 하면서 모금을 하여  사찰 건립에 사용했다. 도안스님이나 대원 스님과 달리 뉴욕대학교에서 공부를 하였기 때문에 사찰 건물 마련하는 일 외에는 문화원 건립 등 다른 일은 하지 않았다.  대신 대학 설립을 구상하고 추진했다. 스님은  원효 연구로 결국 박사 학위를 받았다. 맨하탄 원각사가 신도들의 주차 문제로 문제가 있기도 하고, 또  대학설립을 추진하기 위해 법안스님은 맨하탄에선 업스테이트 뉴욕 현 원각사로 사찰을 이전하였다. 하려고 한 대학은 불교대학과 한의학대학이었다. 이 일은 많은 재원이 필요하므로 아버지가 일본 황족이고 어머니가 김일엽 스님인 김태신 화가와 함께 손잡고 추진했다. 김태신 화가는 원각사에서 관응스님에게 출가한 후에 일당이란 법명을 받았다.  일본의 총리 출신을 비롯한 정계에 많은 인맥이 있는 일당스님과  함께 추진하던 중에 그만 법안스님은 1988년 3월 고혈압으로 쓰러져 추진 직전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일당스님은 일본 정치인들의 협조를 받으면서 미국에 진출해 있는 일본의 대기업을 통해 모금을 막 시작하려던 상태였다. 


    세 스님은 모두 1970대 초에 미국에 입국하여 한인들이 많았던 로스 엔젤레스, 뉴욕, 하와이에서 활동의 터전인 법당을 마련하는 일을 하면서 같은 프로젝트를 추진하기도 하고 또 서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모두 한국에서 재정적인 도움을 받았는데 대원스님이 한국을 가장 많이 방문하면서 많은 후원을 받았고, 도안스님도 자주 방문하였지만 법안스님은 한국을 방문하지 않았고, 법안스님이 불참한 가운데 딱 한번 모금 서예 전시회를 하였다. 법안스님은 1981년부터 뉴욕시의  뉴스클 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하였다.


    드론으로 촬영한 현재 뉴욕 원각사 전경.
    법안스님이 이 곳에 대학교를 건립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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