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불교사 >
미국역사와 함께 보는 미국불교사 (42)
이 글은 1997년부터 약 20년에 걸쳐 미주현대불교에 번역 연재되었던 미국불교사에 관한 중요한 책들인‘백조가 호수에 온 이야기 How the swans came to the lake(한국어로는 이야기 미국불교사로 출판', '미국이 만난 불교 The American Encounter with Buddhism', '미국 불교 Buddhism in America'를 토대로 하여 이 책들을 다시 인용하여 재구성하여 쓴 글이다.
전체적인 방향은 아래와 같은 관점에 방점을 두고 기술할 것이다.
미국에 도래하는 불교는 뉴잉글랜드의 초월주의자들이 동양의 대안적 영성을 찾아 나섰던 이래로 150년간 지속되었던 구도역정의 종착지였다. 유럽계 지식인 미국인들의 내밀한 관심사로부터 이른바 하나의 대중운동으로 변화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미국사회의 흐름에 대한 반발과 그 대안으로 불교가 당시의 미국사회의 젊은이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글 | 김형근
미국 불교의 역사적 배경 (1)
미국에서 발행하면서 미주한국불교의 역사를 기록하고 미국불교 현장을 직접 찿아가 보도하는 미주현대불교는 현재 미국불교가 전 세계의 불교계에 큰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에 미국불교사에 대한 소개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본지는 그 동안 2017년 2월부터 5년 여 동안 ‘미국역사와 함께 보는 미국불교사’를 연재해왔으며, 그 시작을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1893년의 시카고 종교회의가 아니라 1844년이라고 본다. 이외에도 서부에서는 중국인 이민자들에 의해 1850년대에 불교신앙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관점과 더불어 어떤 종교사이던지 그 종교사를 잘 이해하려면 그 시대적 배경을 잘 알아야 한다는 관점에서 미국불교사 장면에 상응하는 미국 역사에 관한 시대상황과 미국불교사 연표를 함께 소개해 왔다.
이 미국불교사 내용은 본지에서 번역하여 발행한 미국불교사에 관한 세 권의 책-- ‘이야기 미국불교사’, ‘미국과 불교의 만남’, ‘미국불교’를 토대로 시대순으로 소개하면서 1990년대 까지 소개하였다. 여기에 미주한국불교사도 소개했는데 1970년대와 1980년대를 본지 소장 자료를 토대로 분석하여 소개하였다. 올 12월호에는 1990년대의 미주한국불교사를 소개하려고 한다. 2021년 5월호 부터는 시대순이 아니라 주제 별로 소개한다. - 편집자 주
붓다에 의해 설파된 해탈의 길은 아시아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여러차례 변용되었으며, 오늘날 미국의 불교 공동체들에서 이것은 새롭고 토착적인 형태로 변모해가고 있다. 불교가 미국에서 중요한 종교적 존재가 된 것은 불과 수십 년 밖에 되지 않았고, 또 그렇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현재 미국에 하나의 미국 불교가 있다기보다는 여러 개의 미국 불교들이 있다고 말하는 편이 더 타당하다. 미국 불교의 역사적 배경을 초기 미국불교사, 시카고 종교회의, 이민자 단상,
인도 벵갈(Bengal)에서 윌리엄 존스(William Jones)와 영국인들로 이루어진 그다지 크지 않은 그룹이 아시아학회(Asiatik Society)를 1784년에 설립했다. 이 학회의 학회지가 미국인들에게 일반적으로 아시아의 종교, 그중에서도 특별히 불교를 차례차례 소개하는 데 이바지했다. 1784년에는 또한 한나 아담스(Hannah Adams)의 그리스도교 종파와 세계종교들에 대한 평이한 개관서의 초판본이 나왔다. 이 초판본에서 아시아 종교들이 83페이지 짜리 부록에서 논의되었는데, 나중 판본들에서 이 종교의 전통은 좀더 부각되었다. 해를 거듭하며 미국의 그밖의 저자들인 조셉 프리스틀리(Joseph Priestley) 같은 종교자유주의자들과 데이빗 베네딕트(David Benedict) 같은 보수적인 신교도가 아시아 종교를 다루었다. 19세기 초 유럽인과 미국인 선교사들, 여행자, 외교관들이 보고서들을 보내왔다. 마침내 유럽의 학구적인 사람들이 아시아의 언어와 문화를 공부함으로써 더욱 충분한 이해를 향한 중요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즉 서양에서 인도학(Western Indology)과 중국학(Sinology)이 시작되었고, 이 모든 것이 결합되어 교양있는 미국인들은 아시아 종교를 더욱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1780년대와 1830년대 사이에 광범위하게 다양화되고 있던 관점을 가진 미국인들은 세계의 종교를 분류하는 방식을 놓고서는 서로 의견이 일치했다. 거의 모든 미국인 해석자들은 종교계의 지도를 다음과 같이 그렸다. 즉 그 지도에는 (1)그리스도교도, (2) 유대교도, (3)‘마호메트교도’, (4)‘이단’ 혹은 ‘이교도’가 자리잡았다. (18세기 후반 또 하나의 다른 범주로 ‘이신론자들’이 종종 추가되었다.) 이들 종교적 지도제작자들은 대개 유교, 도교, 불교, 신토(神道; Shinto: 일본 민족 사이에서 발생한 고유의 민족신앙), 힌두교 및 다른 모든 동남아시아 전통을 한 덩어리로 만들었다. 심지어 편견없는 소개에 책임을 다하겠다고 표명하였거나 진정성 있는 개인적 관심을 보였던 소수의 사람들조차도 불교 및 다른 전통들을 ‘이단’(heathenism)이나 ‘이교’ (paganism)로 간주하거나, 기껏해야 약간 더 나은 관용과 교양을 발휘하여 주류종교와는 다른 ‘동양종교’라 불리는 덩어리의 일부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종교간 구별을 해낼 수 있었던 해석자들 사이에서는 이슬람교, 유교, 힌두교가 가장 널리 알려졌다. 대부분의 미국인 저자들은 힌두교와 이슬람교에 더욱 호기심을 일으켰다. 도교와 신토는 계속해서 베일에 싸여 있었으며, 19세기 말에 가서야 단지 부분적으로만 베일이 벗겨지게 될 터였다. 19세기의 20, 30, 40년대 들어 서양인들의 불교지식은 조금 증대되었다. 하지만 힌두교와 관련짓거나 심지어 혼동하는 전통은 계속되었다. 예를들어 1845년이나 되었는데도 아시아 종교를 공부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미국인 학인들 중 한 명이었던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은 누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를 “아주 유명한 불교 서적” 이라고 잘못 취급하고 있다.
불교의 본성과 가치에 대한 미국인들의 공개적인 토론은 이보다 수십 년 전에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1844년경 시작된 대화의 맥락에서 붓다가 역사적인 인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1840년대와 1850년대에 붓다는 종교의 창시자로서 예수, 마호메트, 조로아스터, 공자와 합류했다. 동시에 그가 세운 전통이 힌두교 및 여타 ‘이단’의 구성요소들과 구별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국인 독자들의 인식이 갑작스럽게 완전히 바뀌지는 않았다. 학자들은 일반인과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어도, 저자들의 경우에는 심지어 세기가 바뀐 후에도 여전히 불교와 다른 아시아 전통들을 혼동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다. 예를 들어 1906년 불교에 상당한 관심을 기울였던 한 잡지의 편집자는 불교와 힌두교를 혼동하지 않도록 독자들에게 상기시켜주라고 재촉하는 “편지를 계속 반복적으로 받는다”고 기록했다.
대다수 문화발전의 경우처럼 공공연한 불교관련 논의도 문화적·경제적·정치적·사회적 요인들이 합류되는 지점에서 형성되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어떤 요인들은 다른 요인들보다 더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는 듯하다. 특별히 미국의 논의는 앵글로-아메리칸 선교사들과 여행자 기록물들의 지속적인 영향으로 활기를 띠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진전된 두 가지 상황인, 유럽인들의 불교연구 개시와 뉴잉글랜드 초월주의(Transcendentalism) 출현으로 인해 이런 논의가 더욱 활성화되고 세련되어졌다. 서양인들은 여러 세기 동안 불교의 전통을 두고 논평을 해오고는 있었지만, 불교에 대해 감식력이 있고 언어적인 지식을 갖춘 학문은 19세기까지는 진전되지 못했다. 전문가의 한 사람인 J. W. 드종(J. W. deJong)은 체계적인 유럽의 불교연구 개시는 1826년 외제네 뷔르노프(Eugène Burnouf: 1801-52)와 크리스띠앙 라센(Christian Lassen, 1800-76)이『팔리어에 관한 에세이(Essai sur le pali)』를 출판한 날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 책은 유럽에서 출판된 최초의 팔리어 문법서였다. 10년도 더 일찍 산스크리트어와 중국어로 강의하는 최초의 유럽인 강좌의 개설이 심대한 의미를 지녔던 만큼이나, 신성한 불교언어의 하나인 팔리어의 문법서 발간 역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하지만 여러 측면에서 볼 때 유럽의 본격적인 불교연구는 서양언어로 불교를 체계적이고 학구적으로 다룬 최초의 책이 1844년에 나타났을 때 비로서 시작되었다고 할 것이다. 바로 뷔르노프의 역작『인도불교사 입문(L'Introduction a l'histoire du buddhisme indien)』은 서양인들에게 나중의 연구를 위한 견고한 기초를 제공했다.
뷔르노프의 저작으로 특징지어지는 유럽 불교학문의 영향은 에드워드 엘브리지 솔즈베리(Edward Elbridge Salisbury: 1814-1901)가 1844년 5월 28일 미국 동양학회(the American Oriental Society) 첫 연례모임에서 발표한 ‘불교역사에 관한 연구보고’(Memoir on the History of Buddhism)에 명확하게 나타나 있다. 아시아 언어와 종교를 전공하여 미국 최초로 유명한 학자가 된 독실한 조합교회 신자였던 솔즈베리는 1841년부터 1854년까지 예일대에서 아랍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가르쳤다. 그는 프랑스에서 뷔르노프와 함께 공부했었고, 자신의 논문을 통해 저 프랑스 동양주의자의 연구결과를 세상에 전했다. 뷔르노프도 초월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사실상 솔즈베리의 강연이 있기 바로 몇 달 전 엘리자베스 피바디(Elizabeth Peabody: 1804-94)는 <다이얼지(the Dial)>에 싣기 위해 뷔르노프의 저작으로부터 한 귀절을 번역했었다. 그녀는『법화경(Saddharmapundarikasutra or Lotus Sutra)』의 불어 번역본에서 그 귀절을 따왔다. 해설이 달린 피바디의 번역과 솔즈베리의 영향력 있는 강연이 비공식적이긴 했어도 미국인들의 불교논의를 촉발시켰다.
그러나 두 가지의 일반적인 발달상이 현재 불교의 풍경을 밝혀주면서, 미국적 유형의 다르마를 창안하는 데 작용하고 있는 몇몇 세력을 제시해주고 있다. 첫 번째 발전의 면모를 살펴보면 불교를 미국에 도입하는 데 필수적 역할을 했던 특정한 사람과 사건이 포함된다. 그들은 미국 불교의 몇 가지 중요한 내용이 형성되는 데 기여했을 뿐 아니라 불교로 개종한 사람들에게도 역사 및 토착적 영적 계보를 제공해주었다.
두 번째 발전의 면모인 이민은 훨씬 더 간접적인 측면에서 미국불교의 이해를 도와주며, 미국 종교사에서도 강력한 역할을 해왔다.장기간에 걸쳐서 이민은 모든 공동체와 그들의 종교 전통을 재구성 해왔고, 그 과정에서 미국의 민족적, 정치적, 영적 풍경을 변화시켜 왔다. 과거에 이민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파악하게 되면 이민 불교가 미국에 어떻게 적응해갈 것인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도 있다.
초기 미국 불교사
메세추세츠주의 콩코드 지역 1840년대 불교적 행위 보여
많은 개종 불교도들은 스스로를 남북전쟁(1861~65) 이전의 수십 년까지 거슬러가는 하나의 대안종교적인 혹은 영적인 전통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의 역사적 정확성은 그 주장이 개종불교도에게 일련의 전례를 만들어주고 또 자신들도 고유의 계보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에 비하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볼 때, 이러한 주장은 또한 개종 불교도들을 미국의 문화 및 역사와 연결해줌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다르마를 형성할 때 그들이 미국의 과거로부터 요소들을 선별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한다. 보다 더 엄밀한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토착 계보는 미국인들의 불교 이해방식이 낭만적이면서도 무지했던 단순함으로부터 오늘날의 공동체에서 발견되는 복합성으로 발전해가는 모습을 어렴풋이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계보의 원천은 종종 초월주의자들과 미국 초기 낭만주의자들, 이를테면 랄프 왈도 에머슨(1803~82), 월트 휘트먼(1819~92),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62)까지 거슬러간다. 유럽의 낭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아시아 종교들에 매료되었으며, 그 열성은 수십 년 동안 미국인들이 그러한 종교들을 대중적으로 수용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 사람들은 학자들이 여러 세대에 걸쳐서 번역해왔던 힌두교와 불교의 문헌들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던 제1세대의 서양인 저자들이자 지식인들이었다. 이 낭만주의자들은 불교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종종 아주 제한적이었지만, 부족한 불교지식을 열성과 창의성을 가지고 보충했다. 에머슨, 소로, 휘트먼, 그리고 그들의 동시대인들은 아시아 종교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동양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창의적 작가이자 대안적 종교사상가의 본보기였던 그들은 진정으로 이 계보의 선두에 서 있었다. 미국 불교에서 그들의 중요성은 우선적으로 그들이 한 세기 이후에 출현하게 되는 또 한 세대의 미국인 구도자들, 즉 잭 케루악, 개리 스나이더, 알렌 긴스버그, 앤 왈드맨 같은 비트 세대 시인과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사실에 있다. 비트 세대의 시인들은 미국인들이 불교에 관심을 가지도록 만들고 또 개종자 공동체 내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도록 다르마를 창의적으로 전유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초월주의자들, 비트 세대, 그리고 일련의 다른 작가들은 문학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다르마를 토착화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오늘날 불교의 이미지와 사상은 미술과 대중예술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표현되고 있으나, 불교중에서도 특히 선은 여러 세대에 걸쳐서 미국문학에, 특히 시에 많은 영향을 끼쳐왔다.
1870년대에 뉴욕 시에서 창설된 신지학회(Theosophical Society)는 이러한 미국 계보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발전상이다. 신지학회의 창설자들인, 냉담한 장로교인 헨리 스틸 올코트(Henry Steel Olcott,
1832~1907)와 러시아로부터 귀화한 이민자 헬레나 페트로브나 블라바츠키(Henena Petrovna Blavatsky, 1831~91)는 아마도 미국 최초의 개종 불교도들일 것이다. 그들은 뉴욕을 출발하여 남아시아로 간 다음, 스리랑카에 도달하여 불법승 삼보에 귀의했다. 그 이후 올코트는 스리랑카의 불교 지도자들로 하여금 기독교 선교사들에 맞서서 스스로를 지켜갈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을 계기로 유명해졌다. 유럽제국주의 시대에 불교가 기독교에 잠식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는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북아시아의 테라와다 불교와 대승불교의 지도자들을 연합하여 통일전선을 구축하고자 힘쓰기도 했다. 그 결과 올코트는 스리랑카의 민족영웅으로 간주된다. 블라바츠키와 그녀의 후계자로서 신지학회의 회장을 맡았던 애니 베산트(Annie Besant,1847~1933)는 혁신적인 영적 지도자로서, 그리고 아시아 종교 전통의 위대한 동조자로서 기억되고 있다.
동서양 간에 실제 교류가 거의 없었던 시대에 일종의 동서양 융합이었다는 점에서 신지학은 미국 불교의 계보에서 19세기와 빅토리아 시대의 발전상을 특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신지학회는 가장 중요한 접촉 지점 중 하나가 되었으며, 수십 년 동안 이러한 기능을 계속했다. 많은 신지학회 회원들은 신지학이 불교의 한 형태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신비주의, 과학사상, 기독교와 유대교의 요소, 힌두교와 불교 등에서 끌어온 현대적 혼합영성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가장 알맞다. 신지학의 많은 특징들은 오늘날 불교와 완전히 구별되는 뉴에이지 종교운동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나이든 개종 불교도 중에는 신지학 회원이었다가 나중에 더 정통적이고 아시아적인 형태의 불교를 받아들인 사람들도 있었다.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 지역 중국인들
1850년대부터 불교신앙 생활
초월주의자들이 콩코드에서 동양적인 것을 놓고 연구하며 즐기고 있을 때, 아시아인들은 콩코드로부터 3,000마일 떨어진 미국 서부에 당도하기 시작했다. 1848년, 샌프란시스코 북부에 있는 존 셔터의 제재소에서 금이 발견되었을 때만 해도 미국 땅에 중국인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불과 1년 후에는 300명의 중국인들이 캔톤 식당에서 모임을 가졌고, 최고급의 중국 비단옷과 신발을 착용한 중국의 상인들과 무역단들이 포트머스 광장에서 도시의 유지들로부터 공식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날 중국인들은 중국어로 깨끗이 인쇄된 그리스도교 선교 팸플릿을 받았는데, 중국인들은 큰 관심 없이 의례적으로만 잠시 훑어보았다. 캘리포니아 신보(California Courier)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우리는 이렇게 멋진 사람들의 모임을 이전엔 본 적이 없다. 이 사람들은 다른 외국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미국인들에게도 질서와 준법정신이 강한 침착한 사람들로서 본보기가 되는 민족임이 틀림없다”라고 보도했다.
이 상인들은 선두주자들이었다. 1852년까지 미국의 골드러쉬gold rush: 새 금광지로의 쇄도로 2만여 명의 중국인들이 미국에 도착하였다. 1860년에는 캘리포니아 주민 10명 중 1명이 중국인이었다. 19세기 말에는 무려 중국인 주민이 6만 3천 명이나 되었다. 1867년, 이 중국인 노동자들이 중부 태평양 연안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이들은 절벽에서 타고 오르내릴 수 있는 바구니를 만들어 사용하여 로키 산맥과 네바다에 다이너마이트를 설치하고 곡괭이질을 했다. 중국인 농부들은 야채를 심고 과수와 포도도 재배하였다. 중국인 어부들은 해안에서 새우나 조개류를 잡았고, 중국인 노동자들은 사크라멘토 강 삼각주의 물을 빼는 제방시설과 운하를 건설하였다. 중국인들은 요리사, 세탁사, 이발사, 점원으로도 일했다. 이러한 모든 직업에 종사하면서 중국인들은 소설가 마크 트웨인Mark Twain이 묘사하듯이 “조용하고 화평하며 술주정뱅이가 아닌 유순하고 부지런한 좋은 이웃”임을 보여 주었다.
광동지방은 언제나 중국에서 가장 개방적인 지역이었다. 또한 항상 독립적이고 국수적이기도 했다. 1850년, 다시 이 지역은 외세인 만주세력에 대항하는 반란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반란 세력 중에 거의 성공할 뻔했던 ‘태평천국의 난’을 이끈 홍수전洪秀全은 그리스도교 공부를 좀 하고 남부 침례교 목사에게서 지도를 받았다. 홍수전은 자신을 예수의 형제로 신격화하고, 이 신앙을 지방자치와 청국의 멸망을 위한 천년왕국 운동과 결합시켰다. 홍수전은 또한 불교를 철저히 배격했다. 그래서 미국 선교사들은 홍수전이 자신을 신격화한 대목으로 인해 환멸을 느끼기 전까지는 그를 대대적으로 지지했다.
광동지방의 농부와 어부 및 뱃사람들은 옛날부터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자바와 베트남으로 진출했다. 1850년대에는 내란, 반란, 횡행하는 도적의 무리, 물가 폭등, 무거운 과세, 줄어드는 농토 등의 민생고가 이 지역 주민들에게 황금산으로의 이주에 대한 꿈을 갖게 했다. 이 기간 동안 포로 신세로 페루로 끌려간 소작농들은 노예나 다름없었다. 그래도 미국으로 간 농민들은 자신의 뱃삯은 지불했거나, 나중에 이자를 합해서 미국에서 노동하여 갚겠다는 약조를 하고 대부貸付를 받아 배를 탔다.
미국에 와서 그들은 익숙한 방식으로 삶을 영위했다. 광동지방의 가장 중요한 사회적 단위는 가족이었고, 마을 전체가 거슬러 올라가면 한 조상으로 연결되는 씨족사회였다. 황금산에서 중국인들은 그들의 출신지에 기초한 조직을 만들었다. 서로 다른 지방의 사투리들은 같은 중국어라도 소통이 불가능한 경우도 간혹 있었다. 이 다섯(훗날 여섯) 개의 지방 조합 조직이 중국인 이민사회의 기틀이 되었다. 이들은 현지 지점 역할을 했으니, 새로 온 이민자들에게 먹을 것과 잠잘 곳을 제공하고 각 가정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했다. 이 조합들을 통하여 중국인들은 자기 고향에 돈을 보냈으며, 결혼을 하거나 자손을 낳기 위하여 귀향하기도 했다. 이 결속은 죽은 후에도 계속되었다. 미국에서 사망한 중국인들은 이 여섯 개의 조합을 통해 매장될 수 있도록 중국땅으로 후송되었다.
이 여섯 개의 조합은 축제와 종교생활의 중심이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에 있는 미국 최초의 중국 사찰은 1853년 여름 체얍조합(Sze Yap Company)에 의해 세워졌다. 이어서 그 이듬해에는 닝영조합(Ning Yeong Company)이 내부 가구와 장식에만 1만 6천 불을 투자하여 두 번째의 중국 절을 세웠다. 이들 조합이 세운 절들은 건물 가장 위층에 자리했고, 그 절들에서는 어느 누구도 안치되어 있는 신위神位보다 더 높을 수는 없었다.
1875년 말, 차이나타운에 여덟 개의 절이 세워졌다. 19세기 말까지는 미국 서부 해안의 위로는 밴쿠버에서 아래로는 샌디에이고까지, 그리고 내륙지방에서는 시에라네바다 산맥에 이르기까지 중국인이 정착하여 일하는 곳마다 절이 세워져서 그 수가 400개 이상에 달하였다. 이들 중에는 여섯 개의 조합 최상층에 있는 절들처럼 중국으로부터 많은 돈을 들여와 장엄하게 지은 것도 있었으나, 하나의 신만을 모시는 작은 절들도 있었다. 해신海神을 모시는 어부들의 사당은 초라한 오두막으로, 겨우 한 사람이 들어가 무릎을 꿇을 수 있을 정도에 불과했다. 어떤 절은 평범한 목조건물 안에 위치했고, 또한 이민자들 자신이 직접 위로 치솟은 중국식 처마를 만들고 탑의 끄트머리에 화려한 단청색을 입혀 외부를 단장한 절들도 있었다. 이 건물들 거의 대부분은 나무로 지어졌으므로, 캘리포니아의 햇볕에 말려 만든 진흙 벽돌로 지은 스페인 가톨릭의 선교 건물들과는 달리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이 절들은 중국 이민자들의 생활에 중심적이고 필수적인 역할을 했다. 외부인들은 중국인들의 신상神像 앞에 항상 음식 공양물이 올려져 있는 모습을 보았고, 주역周易에서 사용하는 산통처럼 대나무로 된 막대기로 길흉을 점치는 광경을 목도했다. 최근에 중국계 미국인을 연구하는 역사학자들은 이외에도 추가된 사찰의 기능을 제시하고 있다.
사찰은 중국인 노동자들이 사람대접을 받는 상징적인 장소였다. 이곳은 그들의 존재에 일체감과 의미를 부여하는 곳이었다. 사찰은 이들에게 조화와 균형, 그리고 정의를 의미했다. 또한, 그 사찰에서 모시는 신들은 그 신앙에 관심을 갖거나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에게 조화롭지 못한 바깥세상으로 다시 나가서 인내하며 일하고 도(道; Tao)를 따르며 살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긍정적인 힘의 원천이었다. 사나움의 상징으로 전쟁과 부의 신神인 관우상關羽像조차도 중국인들에게는 도를 따르는 이들에게 자행되는 압박의 종결과 질서회복, 그리고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비열한 힘을 사용하지 않는 이들에게 언젠가는 행복과 행운이 따르리라는 우주적 상징이었다.
이 중국계의 절들은 중국인들의 대중적인 신앙을 반영하여 도교, 유교, 불교가 혼재되어 있었다. 대체로 중국인들은 철학과 종교에서 놀라울 정도로 포용적이었다. 이들은 (개신교가 그랬듯이) 다른 신은 젖혀두고 꼭 하나의 신만을 숭배해야 한다는 논리를 이해하지 못했다. 중국인들은 유교의 이성주의자일 수도 있었다. 공자는 신과 귀신들을 존경하되, 거리를 두고 멀리서 존경하라고 가르쳤다. 이들은 한 지방이나 집안의 조상신을 신봉하기도 했다. 그리고 선(Zen)불교도는 절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하여 정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중국인들은 자신의 믿음이 무엇이든 간에 옛 속담이 주는 교훈을 따랐다. 즉 “누구라도 자신이 신앙하지 않는다 해서 타종교의 신을 불경스럽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이다.
중국 사원에서는 대개 도교의 신들과 불교의 신들이 함께 발견되지만, 불교의 신들만 모신 곳도 많이 있다. 중국인들은 석가모니불(Shakyamuni), 아미타불(Amitabha), 약사여래불(Bhaishajyaguru), 비로자나불(Vairocana), 문수사리보살(Manjusri), 미륵불(Maitreya) 등의 불상을 처음으로 미국에 들여왔다. 중국인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불교의 신은 관음보살(the bodhisattva of compassion)이었다. 이 보살은 자비의 화신인데 일본, 한국, 티베트, 몽고에서도 다양한 이름으로 널리 숭앙되는 신이다. 1892년, 브루클린 거리의 사원에 있는 관음보살상을 보고 어떤 작가는 “한 손에 불경을 들고, 무릎 위에 앉힌 어린아이에게 가르침을 주는 모습”이라고 묘사하였다.
관음보살 외에 중국 본토와 미국 내의 중국인들에게 중요한 신은 서방정토의 부처인 아미타불이었다. 아미타불은 누구든지 믿음을 가지고 자신의 이름을 염송하기만 하면 법을 수행하여 깨달음을 얻기에 가장 완벽한 조건을 갖춘 불국토인 서방정토에 왕생하게 하리라는 서원을 세웠던 부처였다. 대부분의 일반 중국인 신도들은 아미타불을 신앙하였고, 그래서 정토종淨土宗에 소속되어 있었다. 가장 높은 수준의 정토종 스승들은 서방정토는 이 세상에서 자신의 마음속에 건립建立된다고 가르쳤다. 이런 해석으로 많은 중국 사원에서 선 수행과 아미타불 염송을 병행하는 수행법이 채택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노동자인 황금산의 중국인 불교도들은 “나무아미타불”을 때때로 염송함으로써 훗날 서방정토에 왕생하리라고 믿는 것만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중국 불교 승려들이 있었음은 차이나타운 축제나 결혼 등의 몇몇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러나 황금산에 승려가 있었다 해도, 절을 관리하고 의식을 거행하는 일이 그 주요한 임무였다. 선종의 선사들은 은둔하여 수행하던 산에서 내려와 미국까지 오지는 않았던 듯하다. 적어도 이 당시에 중국 선사들에 관한 기록은 전혀 없었다.
중국인들은 대체로 남들을 개종시키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리고 미국에 온 중국인 불교도도 같은 성향을 띠었다. 그러나 신앙의 자유가 위협받게 되었을 때, 이들은 이 문제를 법원에 상정했다. ‘원한의 저항(Bitter Strength)’이라는 저서에서 구엔더 바르트Guenther Barth는 이 당시의 법정투쟁을 기록하고 있다. 이 사건은 1859년 봄에 존 엘드리지 대對 시옙 조합 간의 법정 충돌이었는데, “캘리포니아 대법원은 공식적으로 불교의식을 행할 권리를 지켜주기로 했다.…… 법정은 법이 금지한 행위가 동반되지 않는 한, 어떤 종교나 미신적인 숭배의식이 공공질서나 사회규범에 어긋난다고 규정지을 권리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중국 사원에 적대감을 가진 이웃들은 절을 ‘자스의 집’(joss house: 자스는 포르투갈어로 ‘신’이라는 단어의 혼합된 파격영어[pidgin]식 발음이다)이라고 불렀다. 백인들은 이 자스의 집인 절에 가는 일은 없었지만, 차이나타운에 있는 큰 규모의 사찰에는 가끔 관광하러 들러보는 일은 있었다. ‘바르샤바 커머셜 가제트Warsaw Commercial Gazette’라고 불리는 잡지 1878년 1월호에 실린 기사에서 폴란드계 언론인 (훗날 유명한 「쿼바디스Quo Vadis」의 작가인) 헨리크 셍키에비치Henryk Sienkowicz는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타운에 사는 모든 중국인들은 불교의 원리에 따라 생활한다”고 썼다. 그는 독자들을 위해 차이나타운 내의 사원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 그러나 우리는 아직 종이로 만든 여러 빛깔의 등불이 내걸려져 있는 가장 흥미로운 장소에 들어가 본 적이 없다. 방금 말한 장소는 바로 불교사원들이다.…… 그러면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누구든지 이 안에 들어오는 것이 허용된다. 자, 이제 우리는 정말 중국에 온 것이다. 큰 방 하나가 개조되어 절로 쓰이고 있는데, 울긋불긋한 등불과 여러 가지 색의 창유리 장식으로 이 방안은 밝게 빛난다. 구석에는 긴 손잡이 위로 비단 우산이 세워져 있고, 해와 달과 용 등이 그려진 깃발이나 잘 알 수 없는 청동 문장紋章이 그 위에 새겨져 있는 긴 장대가 놓여 있기도 하다.…… 중앙에는 약 60센티미터 높이의 은으로 된 한 쌍의 용 형상이 올려져 있는, 나지막하고 넓은 탁자 모양의 첫 번째 제단이 꾸며져 있다.…… 중심 제단은 절의 가장 안쪽 중앙에 자리 잡고 있다. 신비로운 황혼 빛 속에 비단 휘장 뒤로 앉아 있는 붓다의 상이 어렴풋이 보인다.…… 금빛 청동으로 칠해진 붓다의 얼굴은 지루함과 어리석음이 섞인 표정이다.
마지막 줄의 경멸적인 표현에서 당시 사람들이 막연히 품고 있던 중국 혐오와 공포증이 드러난다. 대부분의 백인들에게 절은 신상 앞에 피우는 길쭉한 향의 두꺼운 연기에 싸인 신비하고 어두운 성역을 떠올리게 했고, 이교도의 미신과 말로 다할 수 없는 종교의식들이 잔뜩 행해져 공기를 흐리게 하는 곳으로 여겨졌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사찰들이 항상 그러한 피해를 당해 왔듯이, 좀더 야만적인 외부인들에게 중국 절 ‘자스의 집’은 테러 행위의 손쉬운 표적이었다. 그리고 ‘백인 기사단(the Order of Caucasians)’과 같은 많은 반反중국인 폭력단체인 자경단원自警團員들은 지방의 중국 절들을 불살라버리는 것쯤은 대수롭지 않는 듯이 생각했다.
미국인들이 중국인 이웃의 종교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는 복원된 ‘네바다 시 중국 절’의 관음상 앞에 지금도 서 있는 두 개의 큰 물병 모양을 한 백랍白鑞 향로가 잘 대변해 준다. 이 향로는 당시 근방의 시에라네바다 산맥 기슭에서 일했던 중국인 광부들이 많은 비용을 치르고 중국 본토에서 들여온 것인데, 몇 개의 총탄 구멍을 제외하고는 꽤 잘 보존되어 있는 편이다. 부드러운 금속을 뚫어버린 이 총탄 구멍들은 100여 년 전 어느 토요일, 술집에서 나온 카우보이가 이 지방 ‘자스의 집’을 향해 쏜 산탄 몇 발의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