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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7,8월호] 미국 불교의 역사적 배경 (2) / 김형근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1.07.25|조회수94 목록 댓글 0

< 미국불교사 >

 

 


미국역사와 함께 보는 미국불교사 (43)


이 글은 1997년부터 약 20년에 걸쳐 미주현대불교에 번역 연재되었던 미국불교사에 관한 중요한 책들인‘백조가 호수에 온 이야기 How the swans came to the lake(한국어로는 이야기 미국불교사로 출판', '미국이 만난 불교 The American Encounter with Buddhism', '미국 불교 Buddhism in America'를 토대로 하여 이 책들을 다시 인용하여 재구성하여 쓴 글이다.
전체적인 방향은 아래와 같은 관점에 방점을 두고 기술할 것이다.
미국에 도래하는 불교는 뉴잉글랜드의 초월주의자들이 동양의 대안적 영성을 찾아 나섰던 이래로 150년간 지속되었던 구도역정의 종착지였다. 유럽계 지식인 미국인들의 내밀한 관심사로부터 이른바 하나의 대중운동으로 변화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미국사회의 흐름에 대한 반발과 그 대안으로 불교가 당시의 미국사회의 젊은이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글 | 김형근

 


미국 불교의 역사적 배경 (2)

 

1993년 시카고100주년기념 행사

 

미국에서 발행하면서 미주한국불교의 역사를 기록하고 미국불교 현장을 직접 찿아가 보도하는 미주현대불교는 현재 미국불교가 전 세계의 불교계에 큰 영향을 주고 있기 때문에  미국불교사에 대한 소개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다. 본지는 그 동안 2017년 2월부터 5년 여 동안 ‘미국역사와 함께 보는 미국불교사’를 연재해왔으며, 그 시작을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1893년의 시카고 종교회의가 아니라 1844년이라고 본다. 이외에도 서부에서는 중국인 이민자들에 의해 1850년대에 불교신앙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관점과 더불어 어떤 종교사이던지 그 종교사를 잘 이해하려면 그 시대적 배경을 잘 알아야 한다는 관점에서  미국불교사 장면에 상응하는 미국 역사에 관한  시대상황과 미국불교사 연표를 함께  소개해 왔다. 
이 미국불교사 내용은 본지에서 번역하여 발행한 미국불교사에 관한 세 권의 책-- ‘이야기 미국불교사’, ‘미국과 불교의 만남’, ‘미국불교’를 토대로 시대순으로 소개하면서 1990년대 까지 소개하였다. 여기에 미주한국불교사도 소개했는데 1970년대와 1980년대를 본지 소장 자료를 토대로 분석하여 소개하였다. 올 12월호에는 1990년대의 미주한국불교사를 소개하려고 한다. 2021년 5월호 부터는 시대순이 아니라 주제 별로 소개한다.       

- 편집자 주

 

1893년 시카고종교회의
컬럼비아 박람회

 

시카고 종교회의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종교의회(World’s Parliament of Religions)는 일반적으로 미국 불교의 계보에서 중요한 운동으로 간주되고 있다. 
1893년 만국 박람회 또는 세계 컬럼비아 박람회(영어: World's Columbian Exposition)는 1492년에 일어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1893년 5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이다. 
이 박람회 기간 중에 크고 작은 많은 회의들이 개최되었는데 그중에서 대 성공을 거둔 것이 세계종교회의이다. 1893년 9월 11일부터 9월 27일까지 열린 세계종교회의(Parliament of the World's Religions)는 세계 최초로 동서양의 정신적 전통을 대표하는 공식 모임이 되었다.  이 회의를 통해 불교는 전 미주에 널리 알려졌다.  그 당시 전 세계에서 열 개의 서로 다른 종교 전통을 대표하는 대표단들이 모인 역사상 가장 포괄적인 종교 간 회합이라고 일컬어진다. 여러 가지 면에서 볼 때, 시카고 종교의회는 미국 국내의 종교행사로서는 가장 중요했다. 이것은 유대교도와 가톨릭교도들이 개신교도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미국 종교의 주류로서 등장했다는 점, 그리고 미국의 종교적 페미니스트의 첫 번째 물결이 시작된 점을 특징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종교의회는 영광스럽게도 동서양 간 만남의 역사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주로 기억되는데, 이 점은 다소 아이러니하다. 왜냐하면 의회에 참석한 대다수의 유대교도와 기독교도들은 아시아 종교에 대해서 무지하였고 또 업신여기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의회는 아시아 종교들, 특히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가 미국에 정식으로 첫 선을 보인 계기가 되었다. 시카고 종교의회의 100주년을 기념하여 1993년에 복합적인 회합이 더 큰 규모로 시카고에서 열렸던 것은 충분히 큰 의미가 있었다.

 

1893년의 종교의회에서 불교는 다소 부차적인 역할에 그쳤을지라도, 미국 불교사에서 이 의회를 의미 있는 사건으로 보는 데에는 적어도 네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아시아 불교도들은 대체로 호의적이었던 청중 앞에서 테라와다, 선, 니치렌 등의 여러 불교 형태를 소개함으로써 불교가 단일한 것이 아니고 매우 다양한 복합적 전통이라는 사실이 미국인들에 의해 인식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또한 이 종교의회는 불교가 현대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되기 시작한 시점을 나타내기도 했다. 테라와다 불교도이자 올코트의 제자이기도 했던 아나가리카 다르마팔라(Anagarika Dharmapala, 1864~1933)와 임제선 승려 샤쿠 소엔(Shaku Soyen, 1860~1919)은 근대 아시아 불교의 중요한 지도자들이었다. 대다수의 서양인들 사이에서 불교가 이국적이고 고색찬연하며 불가해한 신비주의의 형태로 간주되고 있던 시대에 그들은 다르마를 완전히 현대적이고 살아있는 전통으로 제시했다. 뿐만 아니라 이 아시아의 지도자들은 불교가 무신론적이고 또 근원적으로 심리학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교야말로 과학과 종교 사이의 불일치가 심화되고 있는 현상에 기독교보다도 더 잘 대처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런 주장은 오늘날의 많은 불교도들에 의해서도 계속 강조되고 있다.
다음으로 시카고 종교의회는 근대의 종교 간 대화 운동의 시작이라고 간주되기도 한다. 세계 종교 간의 이해를 넓히는 데 전념하고 있는 다수의 단체들은 이 종교의회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대화는 20세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 까닭은 세월이 흘러갈수록 세계화와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 간의 친밀한 접촉이 증가되었기 때문이다. 개종자들과 광범위한 전통의 이민자들이 어떤 점에서 다르고 또 어떤 점에서 같은지에 대해 논의를 진행중인 현대 미국 불교의 풍경에서 대화는 필수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불교도, 기독교도, 유대교도 간의 대화는 이해력을 더 넓혀주면서 불교도들이 미국의 종교적 주류로 진입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시카고 종교의회는 불교를 미국에 최초로 포교했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이정표가 되고 있다. 이 종교의회 이후 다르마팔라는 미국 여행을 여러 차례 했으며, 그때마다 불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진지하고 지적인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비록 미국인 구도자들이 안락한 신비주의를 자기 방종적으로 탐구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가 신물을 느꼈을지라도 말이다. 샤쿠 소엔도 역시 여러 차례 미국을 방문했지만, 보다 더 중요한 점은 소케이안, 센자키 뇨겐, 스즈키 다이세츠와 같은 여러 일본인 동료와 제자들이 그의 발자취를 따랐다는 것이다. 20세기 초 수십 년에 걸쳐서 그들이 이룬 업적은 미국 선불교의 토대를 효과적으로 닦아놓았다. 소엔은 또한 일리노이의 과학적 자연주의자 폴 캐러스(Paul Carus,1852~1919)에게 미국 최초의 불교문헌 기획자이자 출판인이 되도록 고무하기도 했다.
19세기 말경에는 많아야 1~2천 명 정도의 소수 미국인들이 주로 출판물의 형태로 대화에 참가하였으며, 그 내용은 미국적 환경에서 요구되는 일, 그리고 그 안에서 불교의 생존가능성에 대한 것들이었다. 그들은 다르마를 미국인의 관용어로 옮기는 의도적 과정이 실제로 시작되기 전에 반드시 제기되어야만 했던 근원적인 문제들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무아라는 붓다의 가르침은 미국의 개인주의와 조화될 수 있을까? 명상을 강조하는 불교전통이 외향성과 실천주의로 잘 알려진 문화 속에서 번성할 수 있을까? 미국인들이 무신론 전통을 받아들일까? 삶이고통이라고 전제하고 있는 불교가 낙천적 태도로 잘 알려진 미국인들을 매료하기에는 지나치게 부정적이고 속세를 벗어난 것이 아닐까? 80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미국인 개종불교도들 사이에서, 그리고 이민자 불교 공동체 내에서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광범위한 답변들이 나오고 있다.

 

샤큐 소엔                                        폴 카루스                                       THE buddhist society


샤쿠 소엔의 임제선 동료들과 제자들이 일본에서 미국으로 들어왔던 20세기 초 수십 년 동안 미국 불교계보의 성격과 미국인들이 불교를 접할 기회는 크게 변했다. 소케이안은 소엔의 법형제로서 두 사람은 같은 스승 아래서 배웠다. 소케이안은 1906년 미국에 도착하여 마침내 뉴욕 시에 거처를 정했지만,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서 얼마 동안 수행에 참여하고 끝마친 다음, 1929년이 되어 비로소 제자들을 배출할 수 있는 권한을 인가받았다. 그 후 그는 선승의 계를 받았다. 그 이후 뉴욕에 돌아온 그는 1931년에 미국불교협회(Buddhist Society of America)를 창설했다. 나중에 제일선원 First Zen Institute로 그 명칭을 바꾼 이 단체는 미국인에게 선을 가르치기 위해 세워진 최초의 불교기관 중 하나였다. 루스 풀러(Ruth Fuller, 1892~1967)는 이 불교협회의 주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녀는 나중에 소케이안과 결혼했고 마침내 일본의 한 사원에서 선을 공부하기도 했으며, 이제는 미국의 선구적 여성 불교도 중 한 명으로 칭송받고 있다.
 이즈음 소엔의 제자 센자키 뇨겐(千崎如幻, 1876~1958)이 미국 서부해안에 도착했다. 소엔의 지시에 따라서 그는 17년 동안 미국에서 불교를 가르치지 않고 미국의 규범과 관습을 익히면서 보냈다. 그는 얼마 동안 남의 집 하인 생활을 하기도 했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농장과 호텔사업에 손을 대기도 했다. 스승과 서약한 17년이 되던 해인 1922년에 비로소 그는 불교 공부와 수행을 위한 비공식적 모임을 열고, “떠다니는 선방(the floating zendo)”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모임의 정해진 본부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소케이안과 센자키 뇨겐에 의해 조직된 초기 선 단체들은 20세기 초기에 다르마에 관심을 보였던 소수의 미국인들을 위한 개척적인 전초기지가 되었다. 그들이 공유했던 불교의 접근법은 훗날 개종 불교도 공동체 안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하나의 패턴을 예고 하기도 했다. 즉 소케이안과 센자키는 둘 다 선 승가단체의 엄격한 체제 안에서 훈련을 받았지만, 그들은 단체의 제도적인 형식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태도를 공유하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또한 선의 전통과 그것의 오랜 제도의 역사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던 미국인 재가 수행자에게 다르마와 다르마의 수행을 가르치는 모험에 마음이 끌렸다. 승가교육을 받은 일본의 선생들과 재가자의 신분과 생활방식을 가진 미국 학생들의 이와 같은 결합은 미국의 개종불교에서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미국인들이 일본의 역사와 전통을 훨씬 더 정교하게 이해하게 되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대다수의 미국인 개종 불교도들은 이 ‘개종자’라는 용어가 지니고 있는 어떤 형식적이고 전통적인 의미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불교 승려가 되지 않았다. 대체로 그들은 아시아의 사원에서 발견되는 그 어떤 식의 제도적인 엄격함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다. 대다수는 독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자신들의 수행과 핵가족의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맞출 필요가 있다. 대다수는 또한 아시아의 재가 불교도가 행하는 ‘승가 공양’이라는 종교활동의 형식을 수용하지 않았다. 그 결과, 대다수의 개종 불교도들은 승려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형적인 재가 불교도도 아니게 되었고, 개종자 불교에는 아직 강력하고 전통적인 승가 공동체가 발전되지 않은 상태다. 오늘날 많은 개종 불교도들은 미국에 불교승가 전통이 없다는 사실을 환영하고 있으며, 불교수행을 재가자들의 필요에 맞게 변경하는 것을 대체로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렇지만 또 다른 사람들은 장기적으로 볼 때 미국에 강력한 승가 전통이 없게 된다면 다르마의 발전에 해가 되고, 또 붓다의 가르침의 완전함도 저해될 것이라는 우려를 표현하기도 한다.

 

BUDDHIST bible


이러한 문제는 미국 토박이였던 드와이트 고다드(Dwight Goddard, 1861~1939)라는 제3의 인물에 의해 초창기에 예견되었다. 그는 1920년대에 다르마에 처음으로 마음이 이끌렸던 개신교 선교사였으며, 그 당시 교토의 한 사원에서 한동안 거주하면서 수행하기도 했다. 고다드는 재가자 방식의 불교가 미국 다르마를 형성하는 데 부적합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이 방법은 일주일에 딱 두세 시간 정도만 불교의 영향을 받고, 그런 다음에는 세상살이의 근심과 산만함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그들(재가자들)이 세속의 삶으로 다시 떨어진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2 고다드는 이 점을 개선하고자 1934년에 붓다를 따르는 사람들(Followers of Buddha)이란 단체를 설립하였고, 이 조직을 미국승가운동으로 만들고자 했다. 버몬트와 캘리포니아에 각각 하나씩 두 곳의 사원을 구상한 그는 그 사원들을 미국 재가 불교도들의 공양을 받으면서 다르마에 평생을 바치게 될 독신 출가자들의 처소로 만들 생각이었다. 고다드의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지만,1932년 그는 테라와다와 대승불교의 자료집인 『불교성전』(The Buddhist Bible)을 발간했는데, 그로부터 수십 년 후 비트 세대인 잭 케루악 등은 이 서적을 중요한 불교경전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1950년대의 “선의 대유행(Zen Boom)”은 이 미국 불교의 역사와 계보에서 주요한 분수령으로 간주된다. 두 사람, 즉 샤쿠 소엔의 재가제자였던 스즈키 다이세츠(D. T. Suzuki)와 영국 성공회 사제이자 동양종교의 전파자였던 앨런 와츠Alan Watts는 불교, 특히 선 전통을 미국에 도입하는 데 기여했다. 비트 세대의 작가들과 더불어 그들은 불교를 미국의 주류사회에 진입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50년대 이전과 그 기간 내내 다르마는 자유분방한 예술가나 방랑자들인 보헤미안 진영에 다소간 국한되어 있었으며, 극소수의 영적 구도자들만이 심취해 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10년 동안 불교는 대중적 종교운동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스즈키는 젊은 시절이었던 1897년에 미국에 첫발을 내디딘 후 11년 동안 폴 캐러스가 운영하고 있던 오픈코트 출판사(Open Court Publishing)에서 불교문헌 번역가로 일했다. 20세기 초에 스즈키는 일본과 뉴욕의 소케이안 단체를 오가며 지냈다. 그러다가 1950년대에 그는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6년간 불교를 가르쳤으며, 거기서 그의 강의는 많은 문학인과 학자, 그리고 비트 운동의 핵심에 있던 뉴욕의 젊은 시인들과 보헤미안들의 관심을 끌었다. 스즈키의 콜롬비아 대학 강의는 또한 『보그』(Vogue)와 『타임』 같은 정기간행물의 주목을 받기도 했는데, 이것은 선이 주류사회로 진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54년 『타임』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스즈키의 콜롬비아대학 강의에 “전후戰後의 매우 다양하고 많은 학생들의 관심이 끌리고 있다. 그 중 화가들과 정신과 의사들이 특히 선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고 스즈키는 말한다. 스즈키 박사는 말하기를, 정신분석학자들이 선에서 배울게 많다는 것이다.”

 

엘렌와츠                                                                               잭 케루악       
게리스나이더 엘레 긴스버그


4년 후인 1958년, 『타임』은 앨런 와츠에 대한 기사를 내면서 선의 대유행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데, 거기서는 “선불교가 시시각각 세련되어가고 있다”고 쓰고 있다.4 영국인이었던 와츠는 처음에 영국에서, 그 다음에는 뉴욕에서, 그리고 그 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오랜 세월 불교를 연구해왔었다. 1950년대와 60년대 초 그는 불교, 기독교 신비주의, 정신치료, 영성에 관한 저서를 내놓으면서 많은 독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1959년에 출간된 『비트 선, 스퀘어 선, 선』(Beat Zen, Square Zen, and Zen)은 1960년대 개시 이전의 미국 불교를 일견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다. 와츠는 잭 케루악 같은 비트 세대의 불교도들을 방종한 불교애호가들이라고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일본 이민자들과 일본의 승가 공동체들,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소수의 미국인 추종자들이 신봉하던 불교를 의미하는 스퀘어 선에 대해서만 비판적 태도를 조금 자제했을 뿐이다. 그러나 와츠는 이른바 자신이 선의 진정한 정신이라고 간주했던 것에 대해서는 찬양하고 있는데, 그것은 창의적 잠재성이 고취된 자유로운 형식의 인간주의적 영성 같은 것이라고 그는 제시했다. 다르마를 대중화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개인주의적이고, 낙관적이고, 인간주의적인 특징을 지닌 그의 방식의 불교, 그리고 창의적인 자기표현을 강조했던 그의 불교관이 1960년대 초의 포괄적 이상주의와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비트 운동은 불교의 대중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이러한 역할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매우 많기도 하다. 케루악, 긴스버그Ginsberg, 개리 스나이더Gary Snyder와 같은 초창기 비트 문학가들은 시뿐 아니라 다른 문학에 불교를 창의적으로 활용함으로써 다르마의 미국화에 도움을 주었다. 케루악은 전형적인 영적 반항아가 되었고, 긴스버그는 황홀경에 빠진 아이러닉한 성자가 되었으며, 개리스나이더는 케루악의 영향력 있는 소설 『다르마 행려』에 나오는 중심인물인 재피 라이더Japhy Ryder의 실제 모델이었으며, 이제 비트 세대에서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비트 세대의 여타 인물들과 다르게 스나이더는 선을 일관성 있게 수행하고자 일찍부터 작정했고, 그렇기 때문에 일본의 한 사찰에서 수행하면서 1960년대의 많은 시절을 보냈다. 일본에 체류하고 있는 동안 그는 결혼하고 가족을 부양하면서 자신의 첫 시집 두 권을 출간하기도 했다. 나중에 출간한 시와 에세이에서 스나이더는 불교와 미국의 신화, 자연,생태 같은 광범위한 미국적 주제를 연계시킨 선구자가 되었다.
비트 세대는 스스로를 초절주의자 세대와 선별적으로 동일시하면서, 그들의 역할모델인 초절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들이 썼던 많은 글도 정치적 색채를 띠면서 영적 저항을 표출했다. 이러한 저항을 불교용어로 표현했을 정도로, 그들은 다르마와 사회정치적 비판을 동일시하기 위한 길을 닦았는데, 이러한 추세는 그 이후 수 십년에 걸쳐서 몇몇 진영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예를 들어 케루악은 대체로 정치 사상가는 아니었지만, 불교를 순응에 저항하는 도구로 여기고 있었다.

스나이더는 서양으로 전승되는 다르마의 사회적 의미에 대해 쓴 몇 편의 글에서 더욱 직설적이고, 자유주의적이고, 몽상적인 태도를 보였다. 1961년 스나이더는 이런 글을 썼다. “서양의 자비는 사회혁명이었고, 동양의 자비는 근본자아/공에 대한 개인적 통찰이었다. 우리에게는 둘 다 필요하다.” 스나이더에게 불교의 도덕성이란 이런 것을 의미했다.

(불교의 도덕성이란) 자유롭고, 국제적이고, 계급 없는 세상을 분명히 지향해가는 모든 문화•경제적 혁명을 지지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어떤 충동적인 정치꾼을 제지할 때 시민 불복종,직설적인 비판, 저항, 평화주의, 자발적 빈곤, 심지어 유순한 폭력 같은 방편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남에게 해가 되지 않는 개인행동을, 말하자면 대마초를 피우거나, 페요테 마약을 하거나, 일부다처, 일처다부 또는 동성애를 할 개인의 권리를 가능한 한 광범위하게 긍정해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권리는 유대교-자본주의-기독교-마르크시즘의 서양사회에서 오랫동안 금지되었던 행동과 관습의 세계들이다.6
스나이더의 말에서 제시된 것처럼, 비트 세대는 깨달음의 추구와 마약 사용을 연계시키기도 했다. 아시아에서 그 전례가 전혀 없지도 않았던 이러한 연계는 1960년대의 반문화 속에 확산되었다. 이제는 개종 불교도 공동체에서 구세대에 속한 사람들에게, 물론 전부는 아니고 많은 사람들에게 지울 수 없는 자국을 남겼다. 
스즈키, 와츠, 비트 세대는 독특한 미국식 불교를 만드는 데 도움을 주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이런 식의 접근법이 매우 창의적인 동시에 깊은 문제도 지니고 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불교는 베이비붐 세대의 많은 개종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말하자면 그들은 주로 책을 통해서 다르마를 접하였고, 또한 그들은 깨달음의 추구가 매우 개인화 및 개별화될 수 있고, 인본심리학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도 있고, 마음을 변화시키는 물질을 사용함으로써 보강될 수도 있고, 지속적인 단련 없이 추구될 수도 있고, 수행기관들과 별개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결론을 책으로부터 이끌어냈다.
1960년대에 불교를 받아들인 많은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몰두하고 있는 불교에 대해서 거의 모르고 있었다. 불교수행을 지속적으로 심도 있게 해왔던 대다수의 사람들은 마침내 1950년대에 촉진되었던 자유로운 정신을 더욱 더 극단적으로 표출하는 태도와는 거리를 두게 되었다.
대략 1963년부터 70년대 중엽까지의 기간을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용어인 ‘60년대’라는 말은 당분간 미국 불교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으로 간주될 것 같다. 대략 그 무렵에 미국의 개종불교는 주로 선에 몰두해 있던 소수의 구도자 공동체로부터 훨씬 대규모로 더 많이 분화된 공동체로 성장했다. 급증하는 반문화 속에서 사람들은 영적인 대안을 찾아 나섰다가 선, 니치렌, 티베트, 테라와다 등의 불교 형태에서 그것을 발견하게 된 것도 그 즈음이었다. 그들은 미국에 정착한 이민자 가운데서, 그리고 해외에서 스승을 찾아냈다. 남북전쟁 이전부터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희박하게 이어져오던 역사적 선례들이 이 기간 동안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소위 오늘날미국 개종자 불교의 활기찬 복합성의 토대를 만들었다.

 

세계종교회의 이규태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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