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불교사 >
미국역사와 함께 보는 미국불교사 (47)
이 글은 1997년부터 약 20년에 걸쳐 미주현대불교에 번역 연재되었던 미국불교사에 관한 중요한 책들인‘백조가 호수에 온 이야기 How the swans came to the lake(한국어로는 이야기 미국불교사로 출판', '미국이 만난 불교 The American Encounter with Buddhism', '미국 불교 Buddhism in America'를 토대로 하여 이 책들을 다시 인용하여 재구성하여 쓴 글이다.
전체적인 방향은 아래와 같은 관점에 방점을 두고 기술할 것이다.
미국에 도래하는 불교는 뉴잉글랜드의 초월주의자들이 동양의 대안적 영성을 찾아 나섰던 이래로 150년간 지속되었던 구도역정의 종착지였다. 유럽계 지식인 미국인들의 내밀한 관심사로부터 이른바 하나의 대중운동으로 변화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미국사회의 흐름에 대한 반발과 그 대안으로 불교가 당시의 미국사회의 젊은이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글 | 송광섭 (편집위원/조계종 국제포교사)
Moments in American Buddhism
미국불교의 역사적 순간들 (2)
6번지 일본 정토진종 스님 카가히 하와이 도착
1889년 3월 12일 정토진종 스님 카가히 개인자격으로 호놀룰루에 도착. 노동자 실태파악.
The first informal Buddhist missionary activities in Hawaii begin with the arrival of Jado Shinshu priest Soryu Kagahi.
하와이 일본 불교 창시자 카가히 스님
하와이에 최초로 온 일본 스님은 정토진종 본원사파 소속의 소류 카가히 스님이었다. 스님은 큐슈의 오이타현에 위치하고 있는 코토쿠-지 출신이었다. 그는 고향 출신의 하와이 이민자들로부터 편지들을 받았고, 그 편지들을 통해서 그들의 어려운 상황을 전해들었다. 그들의 상황을 몹시 걱정하여, 그는 하와이로 가서 그들을 종교적으로 도와주려고 결심하였다. 스님은 1889년 수개월 동안 하와이에 머물면서 열정적으로 불교를 일본인 농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포교하였다.
스님은 1889년 1월 3일 오이타현을 출발하여 오사카에서 4일간 머물고 종단 본부가 있는 교토로 갔다. 그는 1월 9일 교토로 가서 정토진종 본원사파 총본산 서본원사의 문주인고손 오타니 스님을 만나 하와이의 어려운 사정을 논의하였다.
아카마쓰 스님은19세기초 정토진종 서본원사파 문주인 혼뇨 오타니 스님이 “나무아미타불” 여섯자로 쓴 족자를 카가히 스님에게선물로 주었다. 카가히 스님은 그 족자를 종단의 공식적인 인증의 징표로 간주하고 하와이로 가지고 왔다.
스님은 3월 2일 호놀루루 항구에 도착하였고, 하와이 정부의 이민관인 조지 나카야마는 스님을 따뜻하게 환대하였고, 스님은 3월 3일 일본 총영사관을 방문하여 안도총영사를만났고, 본인은 정토진종 본원사파 소속의 스님이고 본 종단의 포교당을 하와이에 설립하겠다고 안도 총영사에게 본인의 포부를 설명하였다. 안도 총영사는 일본 기독교 선교사들에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였지만, 스님을 환대하지 않았다.
그는 기독교가 사실상의 국가 종교인 하와이 왕국에서카가히 스님이 불교를 포교할 수 없을 것이라고 카가히 스님에게 말했다. 그는 일본인들이, 기독교인들이 되어 하와이 지역 기독교인들과 잘 어울릴 필요가 있다고 카가히 스님에게 충고하였다.
스님은 3월 3일 저녁 코지마 호텔에서 하와이 최초의 일본불교 법회를 집전한 이후, 정토진종 본원사파하와이 포교당으로 사용할 하우스를 물색하기 위해 동분서주하였다.
카가히 스님은 3월 16일과 17일 양일 저녁에도 친란을 추모하는 법회를 계속해서 거행하였다. 매우 많은 신자들이 일련의 법회에 참석하였고, 그 법회 장소가 매우 협소하였다. 그는 3월 19일 키무라의 초청으로 하와이섬의 힐로로 갔고, 힐로에 소재하고 있는 키무라의 집에 머물면서 하와이섬에서 거의 한 달 동안 머물렀다. 그는 4월 1일 쿠쿠아아우를 방문하였고 노동 계약으로 하와이에 와 있었던 조타이 코다마 스님의 집에 하룻 밤 머물렀다. 그 당시 코다마 스님의 노동 계약 기간은 만료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카가히 스님은 코다마 스님 부부에게 호놀루루로 거처를 옮겨 자신의 포교활동을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카가히 스님은 편지를 자주 써서 그가 하와이에 머문 기간 동안 성취한 포교 성과를 일본에 알렸다. 그는 그 편지들에서 2개의 포교당을 하와이에 개설하였다고 그들에게 보고하였다. 그는 10월 중 잠시 귀국하여 서본원사 본부에 그의 포교성과를 보고할 예정이었다. 카가히 스님이 호놀루루에서 일본으로 출발하기 전인 10월 1일, 같은 종단 소속의 도로 니시자와 스님과 산지 고토 스님이 다행히 호놀루루에 도착하였다. 특히 후쿠오카 출신인 니시자와 스님은 카가히 스님과 동일하게 엔게쓰 토요 스님 아래에서 불교를 배웠고, 시모노세키의 코묘-지 사원 소속이었다. 그래서,스님은 도로 니시자와 스님을 힐로 포교당의 책임자로, 그리고 코다마 스님을 호눌루루 포교당의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니시자와 스님은 1891년 3월까지 힐로 포교당의 책임자로 봉직한 이후, 운가이 가모 스님이 니시자와 스님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카가히 스님은 1889년 10월 5일 호놀루루에서 요코하마행 배에 승선하였고, 10월 19일 요코하마에 도착하였다. 그는 교토로 가서 그의 포교활동 성과를 종단 본부에 상세히보고하였고, 종단적 차원에서 종단의 포교사들을 하와이에 공식적으로 파견해줄 것을 종단에 요청하였다. 카가히 스님을 비롯하여 초기의 일본 스님들은 종단적 차원이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 일본에서 하와이로 와서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카가히 스님 보다 이전 하와이에 왔던 코다마 스님은 정토진종 본원사파의 정식적인 스님이 아니라고 추정되므로, 카가히 스님이일본불교최초의 포교사로 간주될 수 밖에 없다. 더욱 더 중요한 사실은 카가히 스님 이전에 온 코다마 스님은 카가히 스님 이전에 하와이에서 포교활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종단은 카가히 스님의 요청을 매우 긍정적으로 검토하였고, 하와이에 포교사로 가고 싶어하는 스님들이 종단에 쇄도하였다. 그렇지만, 그가 하와이에서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 한 편의 글을 한 불교 잡지에 기고하였고, 그 글은예기치 못한 심각한 문제점을 야기시켰다. 그는 서구에서 활동하고 있는 불교 포교사들은 기독교의 신 개념을 활용하여 정토진종의 아미타불을 설명할 것을 그 논문에서 촉구하였다.기독교 이외의 어느 종교도 법적으로, 그리고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하와이의 현실에서, 그의 주장은 매우 타당하였다.
스님이 그 글을 일본에서 발표한 이후, 종단의스님들은 하와이 일본불교 현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카가히 스님을 비판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카가히 스님의 하와이 포교를 적극 권장했던 그의 스승이자 장인인 엔게쓰 토요 스님조차 카가히 스님을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카가히 스님은 그런 격렬한 비난을 감당하지 못하고 정토진종의 승적을 스스로 포기하였다. 그는 오이타현의 가족 사원인 코토쿠-지에 13년 동안 은신하면서 외부적인 불교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가 하와이에서 일본으로 돌아가서 논문을 발표한 1889년에는 반기독교 정서가 일본 불교계에 팽배하였고, 불교 지도자들은 그런 분위기 속에서 그의 논문을 매우 감정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는 1889년 11월 말 자신이 하와이에서 겪은 경험을 생생하게 기록으로 남겼고, 1917년 1월 입적하였다. 거의 한 세기가 지난 1980년대에 비로소 세이카쿠 타케소노 스님은 카가히 스님이 쓴 그 기록물을 통해서 스님의 활동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학문적으로 재평가하였고, 카가히 스님을 하와이 일본불교 창시자로 간주하였다. 우리는 그 자료를 통해서,그리고 타케소노 스님의 연구를 통해서 하와이 일본불교도입 시기를 온전히 조명할 수 있었다. 보수적인 일본불교 지도자들의 주장과 달리, 하와이 일본불교의 토착화 과정은 기독교의 지대한 영향 속에 사실상 이루어졌다.
******이 글은 미국에서 활동했던 고 성원스님의 논문’하와이 일본불교의 토착화 과정과 당면과제’ 내용에서 발췌하였다.
7번지
1890년 미국 인구조사에 따르면 당시에 미국에 47개 사찰이 있었다. 이것은 아마도 1850년대 골드러시 시기에 켈리포니아로 온 중국인 이민자들에 의해 설립된 사찰로 추측된다.
1890년 The U.S. Census reports fortyseven established Buddhist temples in America.
8번지는 시카고 세계종교회
1893년 시카고 세계종교회의가 열린 곳이다.
시카고 박람회와 종교회의
시카고 종교회의는 미국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 회의를 통해서 불교가 미국에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습니다.
(a)시카고 박람회
1492년 콜롬부스의 미대륙 발견 4백주년 기념으로 1892년에 준비를 시작하여 이듬해 1893년 5월 1일부터 10월 30일까지 6개월간 47개국이 참가한 콜롬비아 세계박람회(Columbia Exposition)가 열렸습니다. 화이트 시티(White City)라는 이름까지 가진 방대하게 설계된 박람회 현장은 현재의 시카고 산업과학박물관에서 시작하여 그 남쪽 젝슨공원(Jackson Park) 인근 57번가와 67번가 일대였습니다. 세계 최초로 발명한 지퍼가 출품되기도 했던 이 세계적인 콜롬비아 박람회는 콜롬부스 후손을 초청한 연인원 2천7백만명이 입장했던 거대한 국제적 행사였습니다.
이 역사적인 1893년 시카고 박람회는 한민족 유사 이래 다국가들이 참가하는 국제 행사에 최초로 조선 조정의 대표단이 참가한 행사였습니다. 조선정부가 최초로 파견한 대표인 정경원(鄭敬源, 1841-1898)을 찾아온 사람들은 뜻밖에 현지 시카고에서 나타난 박용규와 서병규라는 두 명의 시카고 코리안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뚜렷한 신분과 역사적 기록을 가진 최초의 현지인 코리안 동포의 행적을 가진 해외동포역사의 효시로 평가되어 마땅합니다.
시카고 박람회 출품대원으로 파견되어온 정경원이 고종에게 올린 어전보고 서신(1893년 음력 3월 18일: 양력 5월 3일)에서 당시 시카고 박람회에서 만나 6개월간 현지 고용까지 된 이들 시카고 사람들인 박용규(朴鎔圭) 서병규(徐丙珪)에 대한 <高宗實錄>의 기록과 정경원의 후손들이 소장하고 있는 당시의 가문 기록들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당시 시카고 박람회장 개회식에 참가했던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은 특별히 한국전시관에서 연주하는 조선 악공들의 연주를 듣고 목덜미를 끌어안고 감탄하기까지 했습니다. 1893년 9월 5일 코리안 전시관이 주최하여 오후 7시 콩그레스 길과 미시간 길에 있는 오디토리움 호텔에서 1백여명이 참가하는 연회를 베풀었습니다.
(b) 시카고 종교회의
박람회가 물질문명을 정리하는 전시회였다면 종교회의는 그와 더불어 영적이고 정신적인 표현의 회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회의에 참가했던 대표들과 청중들은 대부분 크리스천들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 종파들이 참석했습니다. 그리고 아시아에서 인도(힌두교, 조로아스터교, 시크교, 자이나교),중국, 일본(임제종, 정토진종, 니치렌 종, 천태종), 태국, 스리랑카 등이 참가했습니다.
주요 참석자들: 대회의 의장은 존 헨리 베로우스 (John Henny Barrows)목사, 인도 라마 크리슈나의 제자인 스와미 비베카난다(Swami Vivekananda), 스리랑카 아나가리카 달마팔라, 일본의 소엔사쿠(임제종), 소엔사쿠의 글은 D.T. 스즈키가 영어로 번역하였습니다.
이 회의와 미국불교를 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미국에 불교를 대중적으로 소개하고 포교하였다.
이 회의를 통해 불교가 전 미국에 소개되었다. 그리고 이후에 스리랑카 다르마파마와 사쿠 소엔은 미국을 여러차례 방문하면서 미국에 불교 포교에 큰 공헌을 했습니다.
9월 26일 시카고 신지학회 후원으로 문예 박물관(Athenaeum Museum)에서 다르마팔라는 불교와 신지학에 관한 강연을 하였다. 강연 끝난 후 미국땅에서 불교에 귀의하는 사람이 등장했습니다.
이 회의에 참가한 일본 사큐소엔과 인연깊은 소케이안, 센자키 노겐, D.T 스즈키 등이 미국에 와서 불교포교와 일본을 알리는 큰 역할을 하였다. 사큐소엔은 이 행사 참가하면서 알게된 오픈 코트 출판사 편집자인 폴 카루스를 만났다. 그와 친교가 인연이 되어 스즈키가 미국에 오게 되어 오픈 코트 출판사에서 도덕경 번역을 비롯하여 많은 번역 일을 하게 되었다. 사큐소엔의 뒤를 이어 그와 제자나 문도들인 센자키 노겐, 소케이안, D.T.스즈키 등은 회의 직후부터 수 십년을 미국에서 포교활동을 하였습니다. 이들의 노력으로 일본불교는 미국에서 가장 먼저 알려졌고 이후 일본불교계가 미국에 진출하는 토대를 만들게 되었습니다. 또 스리랑카 다르마팔라도 이 회의에서 만나 폴 칼루스의 초청으로 미국에 또 오게 되고 미국에 불교를 널리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2. 이 회의에서 테라와다, 선, 니치렌 등 여러 종파가 소개되어 불교가 다양하고 복합적 전통이라는 것을 알렸습니다.
3. 불교가 현대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대다수 서양인들 사이에서 불교가 이국적이고 고색찬연하며 불가해한 신비주의의 형태고 간주되고 있던 시대에 다르마 팔라, 사쿠소엔, 킨자이 히라이 등은 다르마를 완전히 현대적이고 살아있는 전통으로 제시했습니다. 또한 아시아의 지도자들은 불교가 무신론적이고 또 근원적으로 심리학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불교야 말로 과학과 종교 사이의 불일치가 심화되고 있는 현상에 기독교보다 더 잘 대처할 수 있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4. 이 회의는 종교간의 대화의 시작이라고 간주됩니다.
9번지
1894년 폴 카루스가 붓다의 복음서(the Gospel of Buddha)를 발행하였다.
10번지 1897년 5월 샌프란시스코 웨삭행사
The first Wesak celebration in America is held in San Francisco.
달르마팔마 주관으로 미국에서 처음으로 웨삭행사가 열렸다. 불상 앞에서 37개의 지혜의 법을 상징하는 37개의 촛불이 타오르는 동안, 400명의 인파가 달마팔마가 종려나무 잎에 적힌 <망갈라경:Mangala Sutta;吉祥經>을 독송하는 소리를 경청했다. 이후 약 100년 후인 2000년 5월에 스리랑카 정부와 미국 스리랑카 불교계 주도로 유엔에서 웨삭 법회 기념행사를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