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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불 교 사

[2022년 7월호] 양적으로 팽창하고, 질적으로 확장기였던 1990년대 미주한국불교계 (1) / 김형근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2.11.14|조회수154 목록 댓글 0

< 미국불교사 >

 

 


미국역사와 함께 보는 미국불교사 (50)

 


이 글은 1997년부터 약 20년에 걸쳐 미주현대불교에 번역 연재되었던 미국불교사에 관한 중요한 책들인‘백조가 호수에 온 이야기 How the swans came to the lake(한국어로는 이야기 미국불교사로 출판', '미국이 만난 불교 The American Encounter with Buddhism', '미국 불교 Buddhism in America'를 토대로 하여 이 책들을 다시 인용하여 재구성하여 쓴 글이다.
전체적인 방향은 아래와 같은 관점에 방점을 두고 기술할 것이다.
미국에 도래하는 불교는 뉴잉글랜드의 초월주의자들이 동양의 대안적 영성을 찾아 나섰던 이래로 150년간 지속되었던 구도역정의 종착지였다. 유럽계 지식인 미국인들의 내밀한 관심사로부터 이른바 하나의 대중운동으로 변화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미국사회의 흐름에 대한 반발과 그 대안으로 불교가 당시의 미국사회의 젊은이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글 | 김형근

 

 

양적으로 팽창하고, 질적으로 확장기였던
1990년대 미주한국불교계 (1)

 

 

 

이 글은 1990년대 미주한국불교계를 분석한 최초의 글이다. 이 글은 그동안 미주현대불교에 소개된 기사와 필자가 수집한 자료에 의거하여 쓴다. 아마도 여기에 빠진 것들도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빠진 부분은 계속 보강하고 있다. 

1990년대는 세계적으론 냉전이 종식되고 미국주도의 국제질서가 확립된 시기로 이 시기의 대통령은 조지 H.W. 부시(1989-1993.1)와 빌 클린턴(1993.01-2001.01)이었다. 이 시기에 미국 경제가 비교적 안정되었고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자들이 계속 들어왔으며 로스 엔젤레스와 뉴욕시 등에서 한인사회가 계속 팽창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 1992년 4월 29일에 시작되어 5월 4일까지 이어진 폭동은 로스앤젤레스(L.A.) 역사상 최대 규모의 무장 폭동이었으며 미국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왔고 한인사회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 폭동시기에 한인 타운이 많은 공격을 받았는데 로스 엔젤레스 한인타운에 있던 관음사는 폭동으로부터 관음사 건물을 지키려고 도안스님과 신도들이 밤에 보초도 서는 등 많은 노력을 하였다. 

 

도안스님



이 시기는 미주한국불교가 양적으로 팽창하고 질적으로 향상된 미주한국불교계의 전성기였다.  1980년대에 이어 계속적으로 스님들이 미국으로 입국하였다. 1980년대와 이 시기에 입국한 스님들에 의해 1990년대에는 47개의 사찰이 미주 여러 지역에 창건되면서 미주한국불교계는 급팽창하였다. 
그리고, 남북통일을 위한 단체들과 재가 신행단체들이 설립되고, 로스엔젤레스와 뉴욕에 봉사단체가 등장하였다. 또 이 시기에 로스엔젤레스를 비롯하여 뉴욕, 북가주 워싱턴CD, 시카고에 일주일에 한 시간을 혹은 두 시간 방송하는 많은 방송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였고, 로스 엔젤레스에서는 도안스님에 의해 텔레비전 방송국도 등장하였으며 이 시기부터 본지 미주현대불교가 한국에서 스님 초청행사를 시작하여 이 후에 여러 차례에 스님과 교수 초청행사를 하였다. 그리고 미주현대불교는 1999년에 UN/NGO에 가입하여 이후부터 10년간 국제불교활동가 양성을 위한 지원을 하였다. 
이 시기에  박성배 교수가 근무하는 뉴욕주립대인 스토니부룩대학교와 동국대학교가 공동으로 원효스님의 저서를 영역하는 작업, 미국종교학회 연례 모임인 한국분과에서 ‘돈.점론’ 토론 등 한국불교를 널리 알리는 세계화 작업이 시작되었으며 또 다양한 불교문화 활동이 있었다. 이 시기에 눈에 띄는 것은 본국 대행스님이 이끄는 스님이 1989년 12월 뉴욕한마음선원을 시작으로 미국과 카나다에 여러 지부를 창건하였고, 카나다에서 삼우스님이 많은 활동을 활발하게 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의  사찰건립과 스님입국, 활발한 불교교양 대학, 통일운동단체와 신행단체 설립, 한국불교의 세계화 작업, 문화예술 활동 등을 자세하게 살펴본다. 미주현대불교의 스님 초청을 통한 한국과 교류 활동 시작과 미주지역의 여러 불교방송국 설립등도 연도별로 소개하려고 한다.

 


 로스 엔젤레스 도안스님이 
미주한국불교계의 대표로 부상한 시기

1964년 서경보 스님 도미로 시작된 미주한국불교는 1969년 서경보 스님은 박사학위를 받은 후 귀국을 하였고, 이후 삼우스님, 고성스님, 숭산스님, 법안스님, 도안스님, 기대원 스님, 카나다에 광옥스님, 채인환스님 등이 입국하여 초기 한국불교를 이끌었다. 이 중에서 숭산스님과 삼우스님은 주로 미국인 대상으로 활동을 하였고, 뉴욕 원각사의 법안, 로스 엔젤레스 관음사 도안, 하와이 대원사의 대원 스님이 미주한국불교를 선도하였다. 그러나 법안스님은 중풍으로 인해 1988년부터는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없었고, 기대원 스님도 1996년 대원사를 떠나게 됨으로써 활동 영역이 대폭 줄어들고, 영향력이 현저하게 감소되었다. 자연스럽게 1990년대 후반부터는 도안스님이 숭산스님과 더불어 미주한국불교계를 대표하는 스님으로 부상하였다. 

도안스님은 1986년 12월에 L.A.의 옥스퍼드와 3가에 미국한국불교계에서 가장 큰 건물을 마련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1987년부터 본국에서 역량 있는 스님들을 초청하여  많은 행사를 하였는데 1990년대 부터는 불교사상 강연회, 한미불교봉사회 활동 전개, 한국에서 스님과 교수 초청강연회, 불교교양대학을 활성화,  통일운동 전개, 라디오 불교방송과 텔레비전 방송, 정기적으로 3.1절 행사와 8.15 행사, 그리고 개원기념 행사를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정기적으로 꾸준하게 하였다. 
관음사는 미주한국불교계에서 드물게 행사와 프로그램을 정기적으로 꾸준하게 하였는데 이것은 도안스님의 최대 강점이었다. 또  한인사회 모임에 불교계를 대표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라디오와 텔레비전변 방송 운영과 초청강연을 하면서 시대 상황에 맞게 관음사를 운영하였다. 다만 그 시기에 미주 주류사회에서는  티베트 불교가 대세였으며, 명상 수행이 매우 활발하였는데 이러한 흐름에는 따라가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이것은 당시 미국 사회와 미국불교계의 흐름을 도안스님을 비롯한 한국불교계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마음선원  /  삼우스님


삼우스님의 활동과 한마음선원의 진출
 
 이 시기에 삼우스님도 카나다에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많은 활동을 한 기록이 있고, 대행스님이 이끄는 한마음선원이 (1989년 12월 뉴욕 지원 개원) 뉴욕을 시작으로 알라스카, 로스 엔젤레스, 시카고, 오하이오, 토론토, 버지니아 등 미국의 동부, 서부, 중부, 그리고 카나다까지 여러 지역에 지원을 건립하고 대행스님이 자주 미국을 방문하여 대법회를 뉴욕, 로스엔젤레스, 시카고, 워싱턴 DC 지역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서 하였다. 한국에서 대규모 한마음선원 합창단이 오기도 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 법회에 몰려왔다. 

 


 20여명의 스님이 입국하였고, 여러 스님 입적과 혜민 스님 등 다수 출가자 등장  

1980년대 시기에 스님들이 매년 꾸준하게 미국에 입국하였는데 최소한 30여명 최대 40여명으로 추정된다. 1990년대는 이보다는 적다. 필자가 파악한 스님은 20명 정도 입국하였으며, 또한 로스 엔젤레스의 수도사를 건립한 한계정 스님 등 미국에서 입적한 스님들도 다수가 있다. 또 뉴욕불광선원에서 혜민스님과 버지니아 보림사에서 해인스님이 출가를 한 시기이다. 
이 시기에 입국한 도범스님, 휘광스님, 뉴욕 한마음선원 원공스님, 1989년도 유학을 목적으로 도미했지만 1993년에 필라델피아에 관음사 창건한 정수스님 등은 이제 미주한국불교계를 이끌어가는 스님이다. 입국 사유는 여러 가지인데  유학을 목적으로 온 스님도 있고, 현재 오레곤 주 포틀랜드에서 포교하는  종안스님은 스승 성도스님의 부름을 받고 왔고, 뉴욕 원공스님, 뉴져지 연경스님처럼 사찰에서 초청을 받아서 온 스님도 있다. 어떤 스님은 한의학을 공부하러 오기도 하였다. 그런데 많은 스님들이 도미 목적을 정확하게 밝히지 않기 때문에 이 부분을 파악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다. 
  미국에서 사찰을 기반으로 한국불교 초석을 놓던 한계정, 도명, 원명, 혜등, 혜관, 혜영 스님 등 여러 스님들과 미국과  인연이 깊던 서경보 스님이 1996년 일타스님이 1999년 하와이에서 입적했다.
1998년 혜민스님이 뉴욕 불광선원에서, 현 웨스트 버지니아 아랸야사 주지 해인스님이 버지니아 보림사 경암스님에게, 지금 텍사스 주 킬린에서 활동하고 있는 수화스님이 법성종으로 출가하였다. 
1999년 7월 6일 L.A. 영산법화사 염 무진행 보살이 의정부 장흥에 있는 영산법화사 본사에서 김행산스님으로 부터 삭발 출가를 하고 스님 생활을 시작하였다. 미국에서 출가한 것은 아니지만 미국에서 살던 현성스님은 1993년 시카고 불타사 주지를 역임한 현성스님이 늦깍기로 한국 화계사에서 숭산 행원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도범스님  /  정수스님
휘광스님  /  연경스님
원공스님과 신도들  /  선묵스님

 


미주에서 10년 이상 성공적으로 활동을 하다가 이 시기에 한국으로 떠난 스님들도 있다. 1978년에 시카고 불타사 주지로 왔던 홍선스님이 1990년에 중앙승가대 교수로 한국으로 갔다. 1980년대에 미국에 입국하여 필라델피아 원각사, 보스톤 범어사,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보림사에서 활동했던 선우스님은 1998년 2월에 한국으로 돌아갔다. 카나다 토론토 불광사 광옥스님은 1994년 10월부터 불광사 주지를 하면서 서울 약수사 주지로 활동 시작하였다. 

입국한 스님을 자세하게 살펴보면 뉴욕 한마음선원 원공스님, 현 포틀랜드 동암사 주지 종안스님,  보스톤 문수사 도범스님, 로스 엔젤레스 한인타운에 있었던 원명사에서 활동했던 명은스님, 시카고 불타사 주지를 역임한 화랑스님, 뉴욕 불광선원 휘광스님은 뉴욕 원각사로 왔다. 아틀란타 화덕사 주지였던 소요스님, 뉴욕 정명사를 창건한 길상스님, 필라 원각사에 있다가 마이애미 보현사를 개원한 금산사 출산의 우진스님, 삼보사를 인수하고, 미주금강선원을 창건한 청화스님, 라스베가스 운주사를 창건한 비구니 우석스님, 휴스톤 소림사 개원했던 해동스님, 일관도 인의법단 이 정희 점전사, 버지니아에 연화정사를 창건하고 대학교에서 강의를 하던 성원스님, 산호사 정원사 지연스님, 뉴져지 혜안정사를 창건한 연경스님, 뉴욕 연국사 주지 선묵스님, 불송종 메릴랜드 구곡사 무암스님.
 
이 시기에 입적한 스님을 연도별로 보면 로스 엔젤레스 1990년 11월에 한계정스님, 1995년에 뉴욕 조계사 주지 도명스님이 암으로, 1996년에 뉴욕 원각사 혜관스님, 로스 엔젤레스 원명사 창건한 원명스님이 교통사고로 입적하였다. 1997년 뉴욕 전등사 창건한 비구니 혜등스님이 충주 용화사에서, 1998년 뉴욕 연국사 주지 혜영스님.  

 


47개의 사찰 개원

 이 시기에  1980년대와 비슷한 47개의 사찰이 들어섰다. 이것은 1980년대 45개와 더불어 가장 많은 숫자에 해당한다. 미주현대불교가 1989년 10월에 시작하였는데 그 당시에 60개 정도가 미주에 있었다. 1989년부터 1999년까지 10년간 무려 47개가 문을 연 것이다. 1990년대에 문을 열었지만 짧게는 수 개 월 길게는 몇 년 만에 문을 닫은 사찰들도 제법 된다. 이 시기에 들어선 사찰 중에서 보스톤 문수사, 뉴욕 불광선원, 조오지아 전등사, 필라델피아 관음사 등은 2022년 현재 미주한국불교계의 중요 사찰이다. 
지금까지 존재하는 사찰은  LA 한마음선원, 진각종 LA포교원 불광심인당, 시카고 한마음선원(1991년 개원), 미네소타 삼불사, 달라스 보현사, 보스톤 문수사, LA 법화홍통원, 시카고 선련사, 아틀란타 전등사, 마이애미 죽림사(후에 보현사로 개명),  토론토 한마음선원, 필라델피아 관음사, 로스 엔젤레스 태고사, 뉴욕 정명사, 샌프란시스코 불광사(현재는 활동 중단), 버지니아 한마음선원, 뉴욕의 일관도 인의법단, 카나다 밴쿠우버 서광사, 포틀랜드 동암사, 뉴욕 불광선원, 필라델피아 화엄사, 하와이 관음사, 북가주 대승사, 미주 금강선원, 뉴욕 혜안정사(현재는 뉴져지에 있음). 켈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 법보선원 등 24개이다. 
그리고 한때 많은 활동을 하였던 샌프란시스코 보림사, 육조사, 로스 엔젤레스 대각사, 텍사스 주 킬린 영원사, 라스 베가스 운주사, 휴스톤 소림사, 하와이 정법사, 덴버 보타사 등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1993년 비구니 일아 스님에 의해 뉴져지에서 개원한 화엄사, 오하이오 한마음선원, 아틀란타 화덕사(주지 소요스님), 로스 엔젤레스 관음사 분원인 샌디에이고 관음사, 카나다 알바라토주 에드먼튼시에 건립된 오오사 등은 짧게는 수 개 월 내지  수년 만에 사라졌다.

 

L.A. 불광심인당  /  뉴욕 불광선원
L.A. 법화홍통원  /  보스톤 문수사
L.A. 금강선원  /  L.A.법보선원



1990년대  LA 관음사  간추린 연혁

1990년 3월 1일  관음사 주최로 삼일절 기념 <삼일 정신의 계승>이란 제목으로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정구복 교수, 전 충남대 김길환 교수, 원광대학교 김팔곤 교수,  L.A.충현교회 황성수 목사 초청강연회.
11월 17일 불교인 민족통일 연구소, 남가주불교청년연합회, 남가주승가회 공동주최로 '불교사상 대강연회'가 관음사에서 열림. 김도안 스님 기조연설, 법타스님, 양은식 박사 강연. <민족통일 선언문>발표 -- 미주현대불교 8호 소식
1990년 12월 2일 서울 대한불교합창단 L.A.공연이 관음사 문화원 대강당에서 열림 
1991년 3월 1일 삼일절 기념 관음사에서  L.A. 평통회장 이관옥, 이덕수, 윤상해 목사, 황영애, 민병용 한국일보 논설위원, 법타스님, 도안스님 등이 참석하여 분단극복을 위한 대 토론회 개최.
3월 '한미불교봉사회' 초대회장에 김광명장 보살 취임.--취임식행사는 6월 22일 나성 시연회관 에서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가짐.

4월1일부터 19일까지 도안스님과 법타스님이 북한불교계 시찰하고 돌아 옴.
6월 19일 <한민족불교 교류추진 미주불교협의회-한불협> 주최로 미국을 방문중이던 북한 대표단을 초청하여 L.A.관음사에서 환영간담회를 가졌다. 이날 행사에는 단장 한시해(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로철수(해외동포원호위원회 부위원장), 고기준(조선기독교 연맹 서기장), 리성봉(평양 봉수교회 담임목사),최옥희(조선기독교연맹 신학생)과 환영위원회 공동의장인 은호기, 양은식씨등과 나성 지역 스님과 불자 등 150여명이 참석하였다. -- 16호 소식 

 

LA 관음사


1992년 3월 8일 나성 관음사 개원 18주년 기념행사.
1992년 10월 18일 L.A. 관음사에서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고은시인을 초청하여 미주불교인 예술인협회 창립총회 및 고은선생 초청강연회 

1994년 1월 18일부터 2월 19일까지 U.C.샌디에이고 주최, L.A. 관음사 후원으로 크로스몬트 칼리지에서 고려 팔만대장경 화엄경, 변상도 판화전시회.
1994년 3월 13일 개원 관음사 20주년 기념 11시 기념 법요식
오후 3시 보살계 수계 대법회: 전계 대화상 석주 대종사, 갈마 아사리, 라타나사라 승정, 교수 아사리 무진장 종사, 유나 도안스님. 오후 7시 경축 음악회 및 20주년 총 연감 출판기념회 

1995년 2월 5일 로스 엔젤레스 관음사 분원 샌디에이고 관음사 개원.
1996년 1월 28일 LA 관음사 문화원에서 관음사 주관으로 대한불교소년소녀합창단 공연. 이 합창단은 단장에 황학현, 지휘자 민선휘, 반주자 장혜영과 단원 59명.
1996년
8월 15일 L.A.관음사 통일기원 8.15 기념 행사 
11월 3일 L.A.관음사에서 고 윤이상선생 1주기 추도법회가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축원 정산스님, 기도 도안스님, 예술계 대표 윤진록 회장, 학계 최진환 박사, 음악계 최수흥 음악인의 추도사가 있었다.

1997년 1월 26일 L.A. 관음사 매주 일요일 30분씩 케이블 38을 이용하여 '한미불교방송' 시작.
1998년
3월 8일 L.A.관음사 법당에서 조계종 포교원장 성타스님 초청하여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원 24주년 기념행사.
1999년 
1월 29일 L.A. 관음사 연꽃갤러리 개원식 기념 중진작가 25인전.
3월 14일 L.A.관음사 법흥 스님, 조계종 포교원 현진 스님 등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원 25주년 기념 행사.


1990년대 한마음선원  간추린 연혁

1989년 12월 뉴욕한마음선원 플러싱에서 개원.
1990년 2월 뉴욕 한마음선원 원공스님 도미.
4월 7,8일 뉴욕한마음선원 법당에서 대행스님 초청법회 개최 
1990년 6월 뉴욕한마음선원 청년회 창립.
6월 21일 알라스카 한마음선원 알라스카 대학 예술회관에서 100여명 참석한 가운데 대행스님 참석 하지 특별법회--
12월 2일 L.A. 한마음선원 세리토스 신도집에서 개원. 총무에 보원스님.
12월 8, 9일 뉴욕한마음선원 대행스님 법회.
15, 16일 오하이오 주립대에서 대행스님 불교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법.

1991년 
3월 16일 뉴욕 한마음선원 대행스님 초청법회 
3월 31일 시카고 한마음 선원 개원 및 <대행스님 청법 추진회(대표:임백풍)>에 의해 '대행스님 초청법회'를 가 반도회관에서 열림. 300여명 참석 
10월 12일 오하이오 한마음선원 개원 

1993년 2월 7일 토론토 한마음선원 개원식

1995년 5월 버지니아 한마음선원 개원
1995년 뉴욕 한마음선원 합창단 창립.
1996년 
6월 22일 대행스님 '뉴욕초청법회와 불교음악회'가 퀸즈칼리지 콘서틀 홀에서 열림. 600여명이 
참석.
1997년
6월 13일 L.A.이벨극장에서 한마음선원 L.A.지원 주최로 '참 나를 찾아서'란 주제로 '대행스님 큰법회& 불교음악회'가 1,200명, 
6월 21일에는 시카고 North Shore Center에서 9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라는 '삶은 고가 아니다'라는 주제로 각각 열렸다. 이 행사에는 서울에서 온 한마음 선원 합창단 40명이 출연하였다.
1998년 
6월7일 버지니아 한마음선원주최로 대행스님 초청하여 Nothern Virginia Community College에서 7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법회를 가졌다.
6월 14일 뉴욕 한마음선원에서는 대행스님을 초청하여 라과디아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법회를 가졌다.
1999년 뉴욕 한마음선원 어머니 합창단 삼마디 합창단으로 재출발. 

 

한마음선원-L.A  /  대행스님 행사
선련사주최행사
선련사주최행사



삼우스님의 활동도 왕성했던 시기 

1990년 7월 8일 토론토 선련사 국제운동본부 주최로 카나다불교대회 개최--캐나다 역사상 처음으로 갖는 전국 규모의 불교대회라고 주장 -- 6호 소식란  
1993년 7월 4일 카나다 토론토 선련사에서 인환스님 계사로 서양인 80여명 수계.
1993년 7월 4일 토론도 선련사 삼우스님 북미포교 85주년 기념행사 
1995년 6월 27일부터 7월 4일까지 토론토에서 북미국제불교운동본부 주최로 200여명의 미국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보살계수계식, 용맹정진 등 여러 가지 행사를 하였다.
7월 4일 토론토 선련사에서 북미주불자교수연합회 창립법회
1997년 7월 2일 '삼우스님 미주불교포교 30주년 사은의 밤' 행사를 시카고 선련사에서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자혜불교회' 주최로 개최하였다.
7월 3일 '자혜불교회 북미 선련사 국제불교운동'이 격년제로 주최하는 '제12회 국제보살계 수계식'
1999년 7월 3일, 자혜불교회 선련사 주최 격년제로 하는 제13회 국제 보살계 수계식. 미국 카나다 멕시코에서 온 115명이 수계를 받음. 85명은 처음, 30명은 재수계자. 
---111호

 

 

 

 

1990년대 미국사회


1992년 L.A. 폭동

1991년 3월 3일 로스앤젤레스에서 몇 명의 백인 교통경찰관이 과속으로 질주하는 흑인 운전자 로드니 킹(Rodney King)을 집단 구타하여 흑인 사회는 흥분하였다. 당시 로드니 킹은 백인 교통경찰관들을 용서하였으나 청각장애인이 되었다.
같은 해 3월 16일에는 한국계 미국인 두순자가 자신이 운영하는 상점에서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가 오렌지 주스를 절취했다 오인해, 충동사살하여 흑인 사회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이듬해인 1992년 4월 29일에 시작되어 5월 4일까지 이어진 로스앤젤레스(L.A.) 역사상 최대 규모의 무장 폭동이었으며 미국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왔다.

 

 


로드니 킹 사건 

1991년 3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에서 몇 명의 백인 교통 경찰관이 과속으로 질주하는 흑인 운전수 로드니 킹(Rodney King)을 체포하는 과정에서 폭행으로 보이는 무차별 구타가 있었다. 이 경찰관 폭행 사건은 피해자인 로드니 킹이 백인 교통경찰관들의 집단구타로 평생 청각장애인이 될만큼 심각한 사건이었는데도 법정에서 배심원들에 의해 가볍게 처리되었다.
4명의 로스앤젤레스 경찰관이 로드니 킹을 집단 폭행하는 모습이 TV로 공개되면서 WASP(백인, 앵글로 색슨, 개신교)로 설명될만큼 미국 사회의 특권계층인 백인에 비해 상대적 빈곤과 박탈감[2]에 젖어 잠재적 폭발 요인을 안고 있던 빈민층의 흑인 사회(라틴계 청년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가 폭발, 시위가 번졌고 급기야는 6일간의 폭동으로 비화되었다. 특히 이들은 며칠 뒤인 3월 16일 흑인 빈민 소녀가 한국인 출신 이주민이 운영하는 상점에서 사살당하자, 흑인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코리아타운을 주로 약탈 타깃으로 삼아 방화를 하는 등 치안부재의 무법천지를 만들었다. 이때의 약탈·방화로 LA 한인 사회는 정신적·경제적으로 엄청난 손실을 입었다.
50~60명이 사건 중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며 백여 명 이상의 부상자가 발생했고, 로스앤젤레스 코리아타운의 90%가 파괴되었다.



한국계 이민자와 흑인 사이의 갈등

많은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한국계 미국인들은 이날을 사이구라고 부른다.  이 숫자는 한국어로 “사-이-구”라는 뜻으로 4월 29일, 1992년 로스앤젤레스 폭동이 시작한 날을 일컫는 말이다. 이 폭동은 미국에 거주하는 한인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이 사태로 인하여Association of Korean-American Victims 같은 많은 활동가 단체들이 구성되었고 다른 인종 집단과의 협력 관계 구축이 증가했다.
폭동이 일어나는 사이에, 많은 한인들이 한국어 라디오를 통해서 폭도들로부터 한인들을 보호 할 자원 봉사자들을 모집하여 한인타운으로 달려갔다. 대부분 즉석에서 만든 무기, 엽총, 그리고 반자동 소총으로 무장하였다.
폭동이 시작되자마자 미국 언론 ABC 방송과 LA지국인 KABC TV에서는 1991년 3월 16일에 흑인 빈민 지역인 남부 로스앤젤레스에서 발생한 이른바 '두순자사건'을 집중 보도함으로써, 한국인과 흑인 사이의 인종 갈등을 야기하여 폭동을 악화시켰다. 언론공세로써 흑인들의 백인들에 대한 분노를 한국인에게 돌아가도록 한 것이다. 또 로드니 킹 사건과 두순자사건 때, 미국 언론사들은 증거 자료로 제출된 비디오에서 로드니 킹이 출동한 경찰관들 몇 명을 밀치고 구타한 장면과, 라타샤 할린스가 두순자의 안면을 여러 차례 구타한 장면이 삭제된, 편집된 비디오를 방송에 내보내어 흑인들로 하여금 한국인과 백인 경찰들이 흑인을 차별한다고 생각하게 했다.
두순자 사건이란, 상점을 운영하던 49세의 한국 출신 이민자 두순자가 15세 흑인 소녀 라타샤 할린스가 오렌지 주스를 훔쳐가는것으로 오인해 말다툼과 몸싸움 끝을 한 끝에 결국 두순자가 권총을 꺼내 라타샤 할린스를 총격해 라타샤 할린스를 사망하게 만든 사건이다. 이 사건에 대해 배심원은 유죄 평결을 내렸고 검사는 흑인 사회의 반발을 고려해 무기징역을 구형했으나, 판사는 두순자가 재범의 가능성이 적다는 이유로 400시간의 사회 봉사명령과 함께 집행유예 판결을 내렸다.
결국 이 판결로 인해 흑인들의 사법 시스템 및 한인들에 대한 반감이 확산되었고, 결국 로스앤젤레스의 흑인 지역에서 장사하던 한국인이 흑인들의 주요 폭행 대상이 된 단초를 제공했다. 이후 폭동은 주로 흑인들이 한국인과 기타 아시아인을 향해 진행되었다. 흑인들은 한국인으로 보이는 동양인들에게 무차별 구타와 집단 난타, 투석, 총격을 가했고 이에 피해가 막심한 한국인들 또한 재산보호를 위해서 여러수단으로 방어를 하기 시작했다. 한흑 갈등으로 인한 로스앤젤레스시 전체의 피해액은 7억 1천만 달러 선으로 집계되었으며, 이중 한국인 피해액은 3억 5천만 달러로 절반에 달한다.
Loyola Marymount 대학에서 아시아 태평양 계 미국인 연구 프로그램을 책임지고 있는 에드워드 박 교수는, 이 1992 폭력사태가 한인들을 자극하여 새로운 물결의 정치 운동을 시작함과 동시에 한인들을 두쪽으로 갈라놓았다. 자유 주의자는 로스엔젤로스에 사는다른 소수민족들과 손을 맞잡고 인종적 억압과 희생양화에 싸우자는 의견이였고 보수파는법과 질서를 강조하고 공화당의 경제적, 사회적 정책을지지했다. 보수 주의자들은 한국인과 다른 소수 민족, 특히 아프리카 계 미국인의 정치적 차이점을 강조하였다.


한국계 이민자의 대응

사건 당시 미국 경찰은 베벌리 힐스와 할리우드등 부촌과 백인들이 사는 지역들만 지켰다. 그리고 폭행 살인등의 심각한 상태였던 한인 상점이 몰려 있는 지역은 방관했다. 때문에 한국계 이민자들은 상점을 지키기 위해서 진지를 구축하고 흑인들의 폭력에 대응했다. 이는 미국 현지 방송을 통해 보도되었다. 

결과
1992년 5월 1일 캘리포니아 주방위군이 출동한 것을 계기로 4.29 사태는 서서히 진압되었다. 그 뒤 한인 교민 사회와 흑인 사회에서 발생한 각종 재난에 서로 도와줌으로서 관계는 서서히 개선되어갔다. 한흑 갈등의 와중에서도 한국인 출신 입양아들을 보호한 한 흑인 남성의 기사가 언론으로 보도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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