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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불 교 사

[2022년 8월호] 양적으로 팽창하고, 질적으로 확장기였던 1990년대 미주한국불교계 (2) / 김형근

작성자파란연꽃|작성시간22.12.27|조회수82 목록 댓글 0

 

< 미국불교사 >

 

 


미국역사와 함께 보는 미국불교사 (51)


이 글은 1997년부터 약 20년에 걸쳐 미주현대불교에 번역 연재되었던 미국불교사에 관한 중요한 책들인‘백조가 호수에 온 이야기 How the swans came to the lake(한국어로는 이야기 미국불교사로 출판', '미국이 만난 불교 The American Encounter with Buddhism', '미국 불교 Buddhism in America'를 토대로 하여 이 책들을 다시 인용하여 재구성하여 쓴 글이다.
전체적인 방향은 아래와 같은 관점에 방점을 두고 기술할 것이다.
미국에 도래하는 불교는 뉴잉글랜드의 초월주의자들이 동양의 대안적 영성을 찾아 나섰던 이래로 150년간 지속되었던 구도역정의 종착지였다. 유럽계 지식인 미국인들의 내밀한 관심사로부터 이른바 하나의 대중운동으로 변화했다. 여러 차례에 걸쳐 미국사회의 흐름에 대한 반발과 그 대안으로 불교가 당시의 미국사회의 젊은이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글 | 김형근

 


양적으로 팽창하고, 질적으로 확장기였던
1990년대 미주한국불교계 (2)

1991년 10월 LA 관음사 에서 열린 남북해외동포합동법회

 

이 글은 1990년대 한국불교를 분석한 최초의 글이다. 이 글은 그동안 미주현대불교에 소개된 기사와 필자가 수집한 자료에 의거하여 쓴다. 아마도 여기에 빠진 것들도 있으리라 생각하는데 빠진 부분은  계속 보강하고 있다. 

1990년대는 세계적으론 냉전되고 미국가 확립된 시기로 이 시기의 대통령은 조지 H.W. 부시(1989-1993.1)와 빌 클린턴(1993.01-2001.01)이었다. 이 시기에는 경제가 비교적 안정되었고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자들이 계속 들어왔으며 로스 엔젤레스와 뉴욕시 등에서 한인사회가 계속 팽창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 1992년 4월 29일에 시작되어 5월 4일까지 이어진 로스앤젤레스(L.A.) 역사상 최대 규모의 무장 폭동이었으며 미국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왔으며 한인사회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 폭동시기에 한인 타운이 많은 공격을 받았는데 로스 엔젤레스 한인타운에 있던 관음사는 폭동으로부터 관음사 건물을 지키려고 도안스님과 신도들이 밤에 보초도 서는 등 많은 노력을 하였다. 


(1)  불교계에 통일운동 부상
 
1990년대 미주한인사회는 30년이 지난 지금의 미주한인사회와는 많이 다른 사회였다. 지금 미주한인사회는 그때와 다름없이 한국과 교류가 매우 활발하지만 더 이상 많은 이민자들이 오지 않고, 유학생들도 많이 감소하고 있다. 당시에는 1970년대 초부터 시작된 미국이민 붐으로 한인들이 몰려오는 것이 계속되고 있었고, 20년 정도 흐른 시기였다. 1990 년 대 초는
인터넷도 없었고, 1990년대 말까지도 인터넷이 활성화되지 않은 시기였다. 인터넷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은 인터넷으로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필요한 일을 하려면 직접 그 장소로 가야 했다. 그러므로 한인타운에 가야 한국에 갈 수 있는 비행기표도 살 수 있고, 한인 타운에 부동산 구입에 필요한 중개인, 변호사, 은행 등이 몰려 있었다.  대형한국식품점도 대체로 한인 타운에 자리 잡고 있어서 한인 이민자들은 한인 타운에 많이 의존하였고, 미국생활에 적응을 돕는 단체들의 도움이 많이 필요한 시기였다. 이민자들이 많이 의존하는 단체의 중심에 종교단체가 있었다. 종교단체를 중심으로 봉사단체도 생기고, 사찰이나 교회에서 사교활동이 이루어졌으며, 이민 생활에 필요한 정보도 얻을 수 있고, 자녀들의 한국어 공부도 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종교단체가 중심이 되다 보니 종교계에 봉사단체도 생기고, 통일운동에 하는 목사, 신부, 스님들이 등장했다. 불교계는 개신교와 천주교에 비해 좀 늦게 1990년대에 들어서야 이런 단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통일운동에 큰 계기가 된 것은 5.18 광주민중항쟁이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혹은 광주민중항쟁은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광주시민과 전라남도민이 중심이 되어, 조속한 민주 정부 수립,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퇴진 및 계엄령 철폐 등을 요구하며 전개한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이다. 이 운동을 군사정권이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이후에 한국에서는 민주화와 남북통일운동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그리고 이 영향은 미주와 유럽 등 해외로 퍼져나갔다. 
미국에서는 한인들이 많이 사는 로스 엔젤레스, 뉴욕, 워싱턴 DC, 시카고 등 여러 지역에서 한국의 민주화와 통일운동 물결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종교계는 개신교와 천주교 인사들이 많이 했고, 불교계에서는 행동으로 나서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1986년 7월 뉴욕에서 뉴욕주립대 스토니부룩 캠퍼스의 박성배 교수가 이끄는 보현보살회 창립(9월부터 민족불교연구회로 개명)되고 이 모임에서 민중불교적인 입장에서 매월 경전공부를  하였다.  그해 말 9월 말 뉴욕 박성배교수가 이끄는 민족불교연구회 주도로 뉴욕 영사관 앞에서 '재북미 한국불교인 선언문' 발표하고 이를 지지하는 반정부 시위를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가졌는데 이는 미주한국불교인 최초의 민주화 운동이었다. 

 

조선불교도 연맹 스님들 뉴욕지역 환영회
조선불교도 연맹 스님들과 한국 월주스님, 도안스님, 법타스님, 카나다 대각사 양일스님이 함께 뉴욕 엠파이어 빌딩 관광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뉴욕에서 가장 먼저 남북한 통일운동에 관계된 단체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1990년 초에 미주현대불교 편집인인 필자, 원각사 청년회의 김연문, 필라델피아 원각사 선우스님 등이 주축이 돼 뉴욕에서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미주불교인협의회’가 결성되었다.  남북불교 교류에는  1989년 10월에 창간된 미주현대불교가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창간 된 1년 후에 필자는 당시 로스 엔젤레스에서 활동하고 있고, 1989년 평양에서 열린 청년학생축제에 참가한 적이 법타스님을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미주불교인협의회’회장으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1990년 11월 15일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미주불교인협의회’ 회장 신법타 사무국장 김형근 이름으로 '조국의 평화통일 기원 남북재미동포 불교인 합동법회 제안서를 조선불교도 연맹에  서신으로 냈다. 필자는 미주현대불교 편집인으로 소개하였다. 이런 제안서를 내기 전에 필자는 이행우 선생을 비롯한 미국의 한국인 케이커 신도들을 비롯하여 통일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 일의 성사를 위해 도와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리고 케이커 이행우 선생님으로부터 조불련에서 서신을 받기 전에 조불련에서 이 행사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미리 듣게 되었다.  미국에서 이런 북한사람들이 참석하는 행사가 성사되려면 북한 불교계 인사들의 미국입국을 위한 사전 준비를 해야 한다. 당시에는 불교계에서는 이런 일을 한 사람도 없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필자가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이런 일들을 하나 하나 해결해 나갔다. 그리고 미 국무성에서 1991년에 서신을 받았다. 또 북한의 ‘조선불교도 연맹’으로부터 제안서에 대한 회신도 필자가 받았다. 역사적인 남북불교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미주불교인협의회’에서 시작을 하였지만 그 후에 로스 엔젤레스 도안스님과 하와이 기대원 스님이 뒤늦게 이 행사를 하려고 뛰어들면서 복잡한 일들이 생기게 되었다. 필자가 조불련에서 온 답신을 팩스로 도안스님께 보내 드렸더니 도안스님이 기대원 스님이 전미주의 스님들과 연락하여  이 행사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부랴 부랴 회장:도안,부회장:법타,상임위원장: 대원스님으로 하는 '한겨례 불교교류추진 미주불교인협의회-이하 한불협'을 만들었다. 법타스님은 필자가 하던 단체의 회장이면서 스님들이 하는 이 단체의 부회장으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많은 부분을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미주불교인협의회’에서 추진시킬 수 밖에 없었다. 법타스님이 한국으로 가서 필자와 전화연락을 하면서 북측과 더불어 중요한 남측의 대표단 스님들도 확정하였다. 이렇게 일이 진행되니까 필자는 로스 엔젤레스로 가서 관음사에서 도안스님과 법타스님을 함께 만나서 교통정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필자는 도안스님께 “이 행사는 스님이 잘 아시다시피 저와 법타스님이 빨갱이 소리 들어가면서 추진을 했습니다. 스님부터 제가 이 행사에 대해 이야기를 했을 때 별 관심이 없었고,조불련에서 회신이 안 올 것으로 생각했지만 회신이 왔습니다. 그런데 원래 후원단체인 관음사와 대원사의 주지 스님께서 뒤늦게 이 행사를 주최하시고 싶다고 하니 그렇게 하는 것이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게 하십시오. 불교 행사이니까 당연히 스님들이 주역이 되어야 하니까. 만약에 이 행사에 미국에서 한 사람만이 대표로 선출되어야 한다면 도안스님께서 하시는 것에 찬성합니다. 두 사람이면 스님과 우리 단체 대표인 법타스님이 되어야 하고, 네 사람이면 한불협에서 도안스님과 대원스님, 우리단체에서는 법타스님과 제가 되어야 합니다.”라고 정리했다. 원래 이 행사는 로스 엔젤레스에서 큰 행사를 한 후에 동부에서도 할 예정이었지만 급조된 한불협이 전면에 나섰기 때문에 동부에서는 할 수가 없었고, 그저 사찰 방문하고, 필라델피아 원각사와 메릴랜드 법주사에서 초청법회 형식으로 하는데 그쳤다.

  10월 29일 L.A. 관음사에서 '조국통일 불교도 합동법회'를 한국불교종단협의회 주최로 하였다. 이 행사는 일본의 조불련이 참가하게 되어 1945년 분단 이후 남북해외동포불교인들이 처음으로 함께 만나는 아주 역사적인 행사로 되었다.  그리고 주최는 이 행사에 필요한 비용을 댈 수 있는 조계종 총무원장이 당연직 회장이 되는 종단협의회 주최로 진행되었다.종단협이 주최로 되었기 때문에 조계종은 물론이고, 태고종, 천태종, 관음종, 진각종 등 한국불교계에서 각종 종단의 총무원장들이 대거 로스 엔젤레스를 찾아왔다. 그 만큼 이 행사는 한국불교계의 큰 행사였던 것이다. 
  
이 행사가 끝난 후에 급조된 ‘한불협’은 그 행사 이후에는 아무런 활동이 없이  중단되었고 다음 해인 1992년 2월에 동부에서 만든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미주불교인협의회’을 줄인 ‘미주평불협’을 로스 엔젤레스에서 결성하였는데 이는  한국에서 법타스님이 월주스님을 회장으로 내세워 만든 ‘평불협’의 미주 지부였다. 이후 미국에서 남북불교 교류는 이 도안스님이 중심이 된 ‘미주평불협’과 필자가 발행인으로 있는 ‘미주현대불교’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미주평불협에서 한 업적으로는 1997년 12월 29일 미주평불협 지현 정사가 평양을 방문하고 황해도 사리원에 하루 6천 그릇의 국수를 생산하는 '금강국수공장' 설립하기로 조불련과 합의한 것으로 이후 이 국수공장에 밀가루를 보내는 사업은 한국불교계에서 큰 호응을 받았다.
남북은 원래 한 나라이고, 매우 가까운데 한반도에서 태평양 건너 멀리 미국에서 남북교류가 진행된 것은  남북한의 특수한 환경 때문이다. 남한의 보안법 때문에 남한에서는 북한을 방문하기가 어려웠고, 인도적 사업과 종교적 사업이 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는 남북간 직접 교류가 가능했기 때문에 남북한 불교 교류는 미국의 한국불교계 도움이 별로 필요 없이 진행되었다. 


1990년대 미주한국불교계 통일관련 연혁
 
1990년 초 뉴욕에서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미주불교인협의회 창립(미주한국불교계 첫 번째 남북통일운동단체).
1990년 
11월 15일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미주불교인협의회’ 회장 신법타 사무국장 김형근 이름으로 '조국의 평화통일 기원 남북재미동포 불교인 합동법회 제안서를 우편으로 조선불교도 연맹으로 보냄.

1991년 
1월 22일: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불교인협의회(회장: 법타스님, 사무국장 김형근)는 조선불교도 연맹으로부터 전보를 받았다. (조선불교도 연맹으로부터 받은 최초의 공식 문서)
1월 28일,로스 엔젤레스에서 '한겨례 불교교류추진 미주불교인협의회' 발족을 위한 모임
발기인 법안, 도안, 대원, 법타, 성도, 경암, 홍선, 양일, 진월, 준비실무 :하와이 대원사에 머물던 현응스님(전 조계종 교육원장 역임, 현재 조계종 해인사 주지) 
1월 29일 창립 회장 도안, 부회장: 오홍선, 대원, 양일, 법타, 경암 상임위원장: 대원,  부위원장 법타 
2월 15일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미주불교인협의회' 김형근 사무국장은 조불련으로부터 1991년 1월 10일자로 된 답신을 받았다.
2월 24일 <북한의 절과 불교: 법타스님, 정태혁교수 공저> 출판기념회를 L.A.관음사에서 가짐.
3월 1일 삼일절 기념 관음사에서  L.A. 평통회장 이관옥, 이덕수, 윤상해 목사, 황영애, 민병용 한국일보 논설위원, 법타스님, 도안스님 등이 참석하여 분단극복을 위한 대 토론회 개최.
4월1일부터 19일까지 도안스님과 법타스님이 북한불교계 시찰하고 돌아 옴.
6월 19일 <한민족불교 교류추진 미주불교협의회-한불협> 주최로 미국을 방문중이던 북한 대표단을 초청하여 L.A.관음사에서 환영간담회를 가졌다. 이날 행사에는 단장 한시해(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로철수(해외동포원호위원회 부위원장), 고기준(조선기독교 연맹 서기장), 리성봉(평양 봉수교회 담임목사),최옥희(조선기독교연맹 신학생)과 환영위원회 공동의장인 은호기, 양은식씨등과 나성 지역 스님과 불자 등 150여명이 참석하였다. 
9월 16일 유엔 총회 개막일에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미주불교인 협의회' 동부지구 회원들은 뉴욕지역의 재미 한청련, 한겨레운동 미주연합, 뉴욕목요기도회와 함께 '평화협정 체결 촉구와 자주적 평화통일 촉진을 위한 범동포시위'에 참가 
10월 29일 L.A. 관음사에서 '조국통일 불교도 합동법회'이 행사에는 남북한과 재일동포 불교계 인사, 미국불교계 인사들이 참석한 최초의 역사적인 행사.  주최: 종단협의회

1992년 2월 미주평불협 창립. 회장에 용운스님. 
1993년 3월 18일 평불협 미주본부 주최 북한유적 사찰 사진전 코리아타운프라자 마켓시장에서 개최.
1995년4월 8일 평불협 2대 임원 선출, 회장에 김도안스님, 상임고문 이정산 스님, 상임부회장 지현정사, 사무국장 신동수 
1995년 4월 25일부터 5월 2일까지 미주현대불교 김형근 편집인, 하와이 대원사 대원스님, L.A,수도사 정산스님, 진각종 장지현 정사는 모두 다 조선불교도연맹 초청을 받고, 평양축전에 참석하는 형식으로 북한을 방문함. 

1995년 8월 15일 북한 조불련 초청으로 8.15 통일대축전 행사에 평불협 도안스님과 신동수 사무국장이 참석하고 돌아옴 
1995년 9월 16일 미주평불협 주최로 관음사에서 '조국통일 기여를 위한 종교학자 대토론회' 진월스님, 심재룡교수, 정병조교수, 길희성교수, 박성배 교수 등 참석.

 

황해도 금강국수 공장을 방문한 도안스님


1997년 12월 29일 미주평불협 지현 정사가 평양을 방문하고 황해도 사리원에 하루 6천 그릇의 국수를 생산하는 '금강국수공장' 설립하기로 조불련과 합의.
1998년 1월 9일 미주평불협 주최로 L.A.관음사에서 3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98년 신년 간담회'를 개최. 이날 행사에서 법타스님, 김영철 목사, 김세을 목사, 김도안스님과 한원구, 은호기, 이성렬, 배연원씨등이 토론 참가자로 토론을 벌임.
2월 15일 시카고 하정. 평화통일 기원법회가 반도회관에서 정묘스님 초청강사로 시카고 불교실업전문인협회(회장: 임대지) 주최로 시카고 한인단체장과 불교인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
4월 미주평불협과 서울 평불협에서 추진한 황해도 사리원 금강국수공장 가동시작. 4월1일부터 19일까지 도안스님과 법타스님이 북한불교계 시찰하고 돌아 옴.


(2) 봉사단체의 등장

미주한국불교계에 한인 이민자들을 돕기 위한 봉사단체가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1983년이다.  도안스님, 최동수, 임종하씨 등이 이사로 하여 ‘한미불교봉사회’란 이름으로 켈리포니아 주정부로 부터 허가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사무실은 관음사에 두었다. 이런 봉사활동을 제대로 하려면 미국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소셜워커가  있어야 한다. 아니면 영어에 문제가 없는 사람으로 미국의 복지제대를 잘 아는 사람이 있었야 한다. 그러나 ‘한미불교봉사회’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신도들이 가지고 오는 영어 문서를 해석해 주는 정도의 일을 하였다. 그러게 상근자가 없이 관음사에서 간헐적으로 돕는 일을 하다가 1991년 3월에 의사 아들을 둔 김광명장 보살이 초대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첫 사업으로 의료봉사 사업을 하였는데 로스 엔젤레스의 한인들이 운영하는. 유명 병원 전문의를 통하여 검진과 무료로 진료 실시하였다. 김 광명장 회장 취임식 행사는 6월 22일 시연회관에서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그리고 이 보다 한참 후에 미주현대불교 후원자들이 주축이 되어 1999년 6월에 정명사에서 출범을 하고 미주현대불교 사무실 지하실에서 업무를 개시하고 이곳에서 2년간 활동하였다. 초대 원장에는 김오연 보살님이 취임하였다. 김오연 원장은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분으로 미국 복지업무 서류를 할 실력과 경험이 있었다. 
 

 

LA관음사 본 건물에 있던 간판
자비원 근무 장면. 김오연 원장
1999년 6월 21일 자비원 개원식. 뉴욕시 플러싱 정명사에서, 서있는 사람. 정해민 KCS 이사장. 휘광,서천,묘지스님


1991년 3월 로스 엔젤레스 관음사 부설 한미불교봉사회' 초대회장에 김광명장 보살 취임.-취임식행사는 6월 22일 나성 시연회관 에서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가짐.
3월 한미불교봉사회 첫 사업으로 의료봉사 사업을 L.A. 유명 병원 전문의를 통하여 검진과 무료진료 실시 

1992년 1월 29일 김광명장 보살이 한미불교봉사회를 통해 많은 봉사활동을 한 공적을 인정받아 L.A.총영사관에서 외무부장관 표창장 수상.
1994년 7월 31일 한미불교봉사회 창립 10주년 행사.신임회장에 이영환 거사
1999년 6월 21일 미주현대불교 후원자들이 주축으로 수년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뉴욕불교사암연합회 산하로. 정명사에서 자비원 출범. 원장에 김오연. 사무실은 31-16 Union St. Flushing, NY에 둠 

 

 


1990년대 미국사회


세계적으론 냉전이 종식되고 미국 주도의 국제 질서가 확립된 시기로 이 시기의 대통령은 조지 H.W. 부시(1989-1993.1)와 빌 클린턴(1993.01-2001.01)이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선 1980년대 후반부터 이어지고 있던 경제 호황이 정점을 찍었던 황금기이자, 동시에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한 최악의 경제적 시련기이기도 했다.

1990년, 동서독 통일과 이듬해인 1991년 12월 발생한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 사건 등, 체제 경쟁에서 공산주의 진영이 축소되고, 자본주의 세계가 승리하면서 세계 질서는 미국 주도로 재편되었다고 평가를 받는 시기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 50여 년간 지속되어 온 냉전 체제가 종식되고 드디어 인류에게 평화의 시대가 찾아 오는가 했지만, 냉전 시절 잠자고 있던 극단적-폐쇄적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려 콩고 전쟁·걸프 전쟁·유고슬라비아 내전·체첸 사태·보스니아 내전·코소보 전쟁 등이 세계 각지에서 터졌다.[2]

또한, 1990년대는 정보 혁명[3]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로 평가받는다. 대중들에게 정보통신(IT) 기술이 본격적으로 전파된 것이 이 시대로, 휴대전화, 무선호출기, 고성능 컴퓨터 등의 통신 기기들이 많이 등장하였다. 특히 월드 와이드 웹의 등장은 세계인들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국경 없는 세계'를 만들어냈으나, 그 이면엔 불법사이트 범람, 미디어파일 저작권 문제, 짧은 디지털자료 수명 등 새로운 문제가 산재했다. 1990년대가 20년 넘은 과거가 된 2010년대 이후, 90년대를 뭉뚱그려 '아날로그'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늘었지만, 따지고 보면 1990년대가 우리가 흔히 보는 '멀티미디어'와 '디지털'이 시작된 시기인 셈이다.[4] 인터넷을 필두로 한 정보 혁명은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거치며 격변을 가져왔고 결국 2010년대에 스마트폰 등 '스마트'가 붙은 IT기기들이 일상생활 속 남아있는 아날로그 기기들까지 대체하면서 완전히 정착되었으며, 전자 및 IT업계도 1990년대 중반까진 '멀티미디어'를 슬로건에 강조시켰고,[5] 1996년을 기점으로 제품명이나 슬로건 등지에 '사이버'나 '디지털'을 갖다붙였다.[6]

 


1993년 북미자유무역협정 출범과 우루과이 라운드 타결, 1995년 세계무역기구 출범으로 금융과 경제 영역에서의 세계화와 신자유주의화가 아주 활발히 진행되어 경제 장벽을 무너뜨려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경제 정글'을 만들어냈는데, 미국은 이런 환경에서 아주 극적인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는데 물론 중남미 지역은 그런거 없었다. 게다가 구미권은 이에 그치지 않고 전세계 경제체제를 미국/유럽식 경제체제로 포맷시키도록 만드는 데 앞장섰고, 이에 따라 '아시아의 네 마리 용'처럼 현지 특화 자본주의나 독자적 경제체제는 통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 연유로 1997년 동남아 경제위기 및 한국 외환위기가 터졌고, 무한경쟁에 따라 빈부격차도 점점 커져 2000년대 들어 20:80 사회로 고정되는 데 기여했다. 또 새천년을 앞두고 세계 도처에서 '반세계화 시위'도 터졌다. 신자유주의가 무르익다 보니 세계 사람들은 자본주의가 유일한 승자처럼 인식돼왔고, 미국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도 저서 <역사의 종말>에서 인류의 역사는 자본주의에서 끝난다고 전망했다.

신자유주의를 앞세운 보수주의가 정국을 주도했던 1980년대와 달리 전세계적으로 ‘신진보주의(신자유주의를 가미한 진보)’의 시대였다. 빌 클린턴과 토니 블레어가 대표적으로, 1990년대 말 유럽은 대부분 제3의 길 성향의 사민주의 정권이 집권했다. 이른바 ‘장밋빛 유럽’. 다른 한편으로 서구권 등 선진국에서 젊은 층을 중심으로 '정치적 올바름(PC)' 운동이 처음으로 정치권의 주류에 진입해, 일본 자민당, 이탈리아 줄리아노 아마토 내각 등 부패정권을 투표로서 몰아냈고, 미국에선 빌 클린턴 정부의 주도로 '흑인(Black)'을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 American)'으로 바꾸기도 했다.

 


그러나 유럽 경제는 점차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북유럽 국가들 중 냉전의 수혜자였던 핀란드가 소련 붕괴로 경제불황을 겪었고, 스웨덴도 마찬가지로 어려움을 겪었다. 서유럽 선진국조차도 과도한 복지비용, 강성 노조, 실업률 증가, 공장 해외이전 등 문제점이 폭로되며 개혁의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한국뿐만이 아니라 태국을 시작으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 등을 습격한 아시아 금융위기로 인도네시아에서는 30년간 집권한 수하르토 정권이 퇴진하였고, 1999년에 동티모르가 국민 투표로서 독립을 선언하는 단초를 마련했다. 말레이시아는 외환위기를 헤지펀드 등 해외 금융업계의 농간이라 보고 해외 금융자본을 철저히 봉쇄했다.

동남아에선 미얀마나 라오스 등 몇몇 국가들을 빼고 '민주화와 평화' 진전의 시대가 도래했는데, 필리핀은 1992년 피델 V. 라모스 전 국방장관이 첫 자유선거로 대통령에 취임해 공산당을 합법화시켜 내전 종식의 기반을 마련했고, 1980년대 이래 무너진 경제 재건에 주력했다. 태국 국민들은 1992년 5월에 목숨까지 걸고 수친다 내각을 퇴진시켜 군부정권을 60년 만에 종식시켰고, 캄보디아는 1993년 UN 감독 하에 독립 이래 최초로 자유선거를 치러서 입헌군주국으로 회귀 후 50여 년에 걸친 내전을 종식시켜 '킬링필드' 이미지를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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