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우리의 근세사....특히나 1883년 제물포 개항 이후의 급변하는 역사의 중심에 서 있던 분들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역사학도가 아닌 내가 역사의 인물을 언급할 때.... 당연히 경박한 안목의 한계를 드러내게 되므로 나는 이 블로그의 폴더에 "어거지" 라던가 "멋대로" "엉터리" 라는 방어기제를 설치하고...나의 부족한 지식을 상상력으로 때우고 있다고 강변하는 것입니다......
그건 그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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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탕(吾禮堂)의 생애
우리탕은 조선정부가 개항된 항구에서 조세를 거둬들이는 해관(海館)을 설치하기위하여 독일인 뮐렌도르프(목인덕)를 초빙했을 때 뮐렌도르프가 상해에서 데리고 온 사람입니다.
1880년대가 되자 조선과 일본의 교역량이 증가하는데 관세를 징수할 해관(海館)이 설치되지않아 많은 손해를 보고있었으므로 이에 조선정부는 중국의 실력자 이홍장에게 해관업무에 밝은 사람을 천거해달라고 부탁하였고...이홍장은 청국해관에 근무하였고 천진영사도 역임한 독일인 "뮐렌도르프(목인덕)"를 추천합니다.
그리하여 1882년 12월 4일에 목인덕과 그의 일행이 한양에 도착하였고 이듬해인 1883년 4월에 목인덕은 상해로 가서 이홍장이 추천한 유학생 및 미국,영국, 프랑스,일본및 러시아인으로 구성된 해관요원들을 데리고 오는데 여기에 "우리탕"이 포함되어 조선의 땅을 밟게되는 것입니다.
우리탕은 1843년생으로 이 땅에 당도했을 때 40세 였습니다.
그가 조선에 오기 전에 스페인 주재 청국 공사관에서 서기관으로 근무할 당시 스페인 여성"에밀리아'와 결혼했으므로 그녀와 함께 입국하였죠. 우리탕은 한국에 도착하자 인천해관에 발령되어 근무를 시작하게 됩니다.
그런데 당시 조선정부에서는 국교를 맺은 미국에 민영익을 대표로 하는 견미 사절단(보빙사)를 보내기로하고 통역을 수행할 사람으로 인천해관에 갓 부임한 우리탕을 선정합니다.
이리하여 우리탕은 인천해관에 근무한지 한달도 못되어 보빙사의 일행으로 미국을 방문하게 됩니다.
1883년 보빙사 일행...아랫줄 맨 오른쪽이 우리탕
우리탕은 보빙사로서의 여행을 마치고 인천해관으로 돌아와 정식으로 근무에 임하게 되는데 2년뒤에는 자신을 추천한 "뮐렌드르프"가 이홍장의 미움을 사서 소환되어 한국을 떠나게 됩니다.
"뮐렌도르프"가 자신의 의도와는 달리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노력한 때문이지요. 뮐렌도르프가 떠난 후에도 우리탕은 인천해관에서 오랜동안을 근무하다가 후에는 용산과 원산의 상무위원을 역임하였고 1890년에 은퇴하였습니다.
이재에 밝은 그는 은퇴한 후에도 제물포에 머물면서 부동산업과 고리대금 등으로 큰 돈을 모아 인천 제일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부인 "에밀리아"의 소원을 따라 연건평 400평의 당시로서는 최고로 호화로운 저택을 짓고 인천에 주재하는 외교관과 외국인 사업가들을 초청하여 파티를 벌이곤 하였는데.. 여흥이 시작되면 "에밀리아"가 멋진 스페인 춤으로 분위기를 올렸다고 전해지죠.
오례당(吾禮堂)-1968년도에 소실되었다.
인천의 시만들은 이 집을 오례당 집이라 불렀는데 이는 우리탕의 한자음이며 이름 자체에 집을 의미하는 당(堂)자가 들어있어 당호로서는 안성맞춤이었던 것입니다.
이 집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돔이 있는 집이며 규모와 아름다움이 대단하기로 죤스턴이 지은 별장(인천각-지금의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탑 자리임)과 세창양행의 사원숙소(맥아더 동상 자리)와 더불어 제물포의 아름다움을 높여 주었습니다.
1901년 6월에 만국공원의 아랫쪽에 제물포에 거주하는 외교관과 사업가들 30여명이 친목을 위하여 제물포 구락부 (Chemulpo Club) 를 설립하였는데 우리탕은 여기에 유력한 회원이었습니다.
아하....제물포구락부....이 건물이 건재하여 감사합니다.
6.25 전쟁 당시에 북괴군은 인천각에 본부를 차리고 만국공원에 4개소의 방공포대를 설치하였습니다.
상륙 당일 미 해군 함재기들은 만국공원 일대를 집중적으로 폭격하였는데....이 건물이 온전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습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견뎌온 제물포 구락부
우리탕의 집은 이 구락부보다 약간 아랫쪽에 있었으므로 우리탕은 언덕길을 올라 이 구락부를 오가며 만년을 소일했습니다.
우리탕이 거닐었을 만국공원으로 오르는 계단
1883년 이 땅을 찾아와 격동의 조선 근세사에 휩쓸렸던 우리탕은 1912년 향년 69세로 삶을 마치고 지금은 청학동 산아래 마련된 외국인 묘지에 부인 "에밀리아" 와 함께 잠들어 있습니다.
우리탕의 묘
에밀리아의 묘
처음의 사진에서 보빙사로서 열린세상을 바라보고 개화의 필요를 절절하게 깨우쳤던 민영익과 홍영식은 이듬해 갑신정변에서 극명하게 갈라져 민영익은 개화당의 자객에게 치명상을 입고, 개화당인 홍영식은 외국으로 도망가기를 포기하고 청나라 군대의 손에 죽습니다.
이 나라 격변기의 모습을 지켜보던 이방인 우리탕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그는 이 땅이 겪는 시련과 위험에도 떠나지 않았고 또 이 땅에 묻혔습니다. 나는 그것을 이 땅에 대한 그의 애정으로 바라봅니다.
답동성당
답동성당에는 우리탕 부부가 봉헌한 종이 매달려 있지요.
이 종이 울릴 때 마다 격동기의 조선땅을 살다간 이방인의 영혼은 제물포 하늘위에 퍼져나갈 것입니다.
부족한 글을 마칩니다.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