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變化)된 삶
로마서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엡 4:23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시 51:10 정결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새 영을 부어주소서!
우리는 예수를 믿은지가 오래 되었는데도 인격의 변화가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성경 지식은 많아졌는데
그만큼 인격은 바뀌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는 꼬박꼬박 나오고 봉사도 열심히 하는데도 여전히 변화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때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을 받고, 새로운 다짐을 해 보지만 인격이 그대로인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들을 거룩하게 만들어 가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간절하고 진실한 기도가 뒤따르지 않으면서 말씀만 듣고 끝나는 신앙생활은 우리에게 언제나 지적인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끝나 버린다. 어떻게 하면 나는 새롭게 변화될 수 있을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신앙의 원리를 하나, 둘 깨닫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깨달을 때의 마음의 각성을 토대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무엇을 기도해야 할지 말씀을 통해서 조명 받고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열렬히 그리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더욱더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를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어리석음과 야비함, 여전히 육체를 사랑함,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려는 불순종, 그리고 하나님의 뜻보다는 나의 뜻을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내 자신의 기분과 감정을 기준으로 삼아 하나님을 거스르는 우리의 모든 삶의 태도들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기도 속에서 끊임없이 깨닫고 깨뜨려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새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만약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배우면서도 자신이 깨뜨려지고 무너지는 것이 무엇인가를 경험하지 못했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사람에게는 문제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어떻게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느 한 성도가 깨뜨려지고 마음이 무너지는 진실한 회개의 경험이 없다고 할 것 같으면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회개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의인이든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이든지 둘 중 하나일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고 말합니다.
마음이 너무나 병들어서 진리의 칼을 대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처지에 있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몇 달 째, 몇 년째 교회의 마당만 밟으면서 오가는 사람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무엇 때문에 교회에 나오고 있습니까? 여기가 어디입니까?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살아 계신 집이 아닙니까? 누구에게 보이기 위해서 여기에 오는 것입니까? 정말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야 되겠다는 마음의 각오가 있습니까? 뜻 없이 되풀이되는 교회 출석만을 통해서 내 영혼이 어떻게 병들어가고 있는가 생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믿으려면 믿고 말려면 말고, 둘 중 하나를 명백하게 하십시오. 차든지 덥든지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계3:15). 하나님이 살아 계신 것 같으면 제대로 믿으십시오. 형식적으로 교회를 왔다 갔다 하기만 하는 이들은 믿는 사람들 속에 있을 때는 믿는 사람인 것처럼 자신을 과시하고, 믿지 않는 사람 속에 있으면 자기는 예수와 아무 상관없는 세상 편인 것처럼 흉내 냅니다. 그렇게 이중적인 신앙생활을 하느니 차라리 정직하게 회개하고 아버지께 탕자처럼 돌아오는 것이 희망적이지 않습니까? 진실해져야 합니다. 참된 신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위의 다른 사람에게서 “너는 예전에 네가 아니구나.”라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예전에 사랑하던 것을 버려야 합니다. 예전에 행하던 거짓들, 어두움을 버리고 빛 가운데 속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에 은혜를 받을 때는 새사람인 것 같다가 금방 다시 옛사람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것은 완전히 변화된 것이 아니라 변화가 되려 하다가 옛사람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아니라 교회에서, 세상에서 하던 행동을 그대로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우리를 구원해내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신자의 마음에는 내가 나인 것 때문에 죄송한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예전에 나여서 너무나 죄송합니다. 주님께서 저를 거룩한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예수님까지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구원하셨는데, 뿐만 아니라 내 안에 성령님까지 보내주셨는데 예전에 못된 기질을 그냥 가지고 살아갑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도 제가 너무 싫습니다.” 이런 고백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만하면 됐지’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변화에 대한 갈증이 있습니다.
그렇게 날마다 새롭게 변화되기 위해서는, 새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받은 은혜를 간직하고 기도생활을 지속해야 됩니다. 그렇게 해야지 계속해서 부패한 성품들이 변화되고 주님의 사람으로 순결하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루 동안만 해도 얼마나 더러운 것들을 많이 봅니까. 더러운 것들을 그저 보기만 합니까. 마음속에 더러운 생각들이 얼마나 많이 스쳐지나갑니까. 눈으로, 말로, 귀로, 생각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짓습니까. 이런 것들은 계속 꽉 차있는데 그것들을 씻겨내는 눈물의 기도가 없습니다. 더러운 것을 씻어내는 성화의 기도는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것들은 계속해서 쌓여가고 하나님께서 내 속에 주신 예수의 생명은 점점 희미해져갑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 속에 있는 부패와 죄가 하나님이 주신 신령한 은혜를 이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교회는 다니지만 신자 아닌 신자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나쁜 신자가 되려고 결심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기도 속에서, 자기 깨어짐의 아픔 속에서 참회의 눈물로 죄와 더러운 것들을 뽑아버리고 주님이 심으신 은혜들은 간직하는 진실한 기도생활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타다만 나무토막처럼 불결한 신자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기도는 이렇게 우리를 변화시키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범사에 절제력이 있고 온유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 위기가 와도 쉽게 흔들리지 않고 기쁜 일이 있어도 경솔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기도의 사람들입니다.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신자다운 신자가 되어봅시다.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우리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이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그 큰 사랑을 입었는데도 이렇게 밖에 살아가지 못함에 대해 뉘우치면서 어린 아이처럼 하나님 앞에 울어봅시다. 그래서 더러운 욕심의 때, 세상 사랑의 오물, 주님을 섬긴다고 살아오면서도 마음에 묻을 수밖에 없었던 찌꺼기들을 씻어냅시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IV. 관계의 확증
마지막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는 그 자리에서 당신과 하나님 사이에 존재하는 친밀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하나님께서 인 치시는 사건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하기 싫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좋은 것을 다 하기 마련입니다. 기도가 좋으면 합니다. 바쁘다는 것은 다 핑계이고 기도하는 것이 싫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더 나아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 대한 풍부한 감동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그리스도인이 자신의 책에서 이런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데, 그분의 아들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행복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 고백하는 그 사랑을 믿을 수 있겠는가?’ 은혜 아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우리의 심금을 울렸던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마음에 평생 동안 감동이 되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것들입니다. ‘나 같이 쓸모없는 죄인을 위해서 형벌은 주님께서 받으셨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니. 하나님 나라의 훌륭한 유업들을 받게 하시다니, 그런 축복이 내게 가당하기나 한가’라고 하는 감격이 바로 관계의 감격에서 밀려오는 것입니다.
교회 출석만이 신앙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그 당연한 것을 사람들이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관계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까? “좋으신 주님, 귀하신 주님, 내 인생의 전부이신 주님, 내 삶의 이유이신 아버지, 주님만이 나의 행복이시며 내 기쁨이시며 나의 대치할 수 없는 가치이신 하나님” 이런 모든 고백들은 관계에 대한 인침이 있는 신앙생활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꼭 고아원 같습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또 안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감격이 없습니다.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야 하는 것도 모르고 자기의 근본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 가득 있습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아들 된 것, 주님의 자녀 된 것에 대한 감격이 있습니까?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감격 없이 살아가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기도생활의 부족입니다. ‘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라는 찬송 고백이 기도하지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도 “너는 내 아들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강력한 인 치심이 두 번 나타납니다. 요단강변에서와 변화산에서였습니다. 모두 기도하실 때의 일입니다. 기도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의 감격 속에서 살도록 만들어 주는 커다란 힘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어 행복하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깊은 기도 속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기도 속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만이 그 관계를 놓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이 보이십니까? 주님이 만져지십니까? 우리가 주님을 알 수 있습니까? 그런 친밀함을 경험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는 기도생활입니다. 그 속에서 주님의 근심을 보면서 회개하고, 주님의 아픔을 보면서 뉘우치고, 주님의 열망을 보면서 충성할 결심을 하게 되며, 주님의 지혜를 보면서 우리들이 지혜로워지게 됩니다. 어루만지시는 주님을 경험하면서 치료받게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어떻게 기도생활 없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V. 결론과 적용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하나님과의 만남을 위하여, 기도의 간절한 제목을 가지고 변화산을 오르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 신령한 세계를 보여주셨고 신령한 변화를 경험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간의 관계에 대한 인침을 다시 한 번 확증하셨습니다. 이 모두가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일어난 일입니다. 이렇게 기도의 진정한 힘은 그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데 있습니다. 기도 속에서 이러한 것들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했을 때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붙들면서 살아갈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렇게 예수님처럼 기도할 때 하늘의 힘을 공급받아 이 세상에 발을 딛고는 있지만 영원에 잇대어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나를 지금의 내가 아닌 나로 바꾸는 그 기도의 세계, 지금 맛보고 계십니까?
급속하게 변화하는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은 환경에 지배 당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스스로의 변혁입니다. 급변하는 환경에 맞춰 최소치를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변화가 필수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익숙한 틀과 사고체계에서 벗어나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창조적 메커니즘으로, 새로운 블루오션의 세계를 개척해야 합니다.
빌 게이츠는 다가올 10년의 변화는 지난 50년의 변화속도를 압도할 것이라 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새로 생성된 정보량은 지난 5000년 동안 인류가 접했던 지식의 양보다도 많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와 세상, 이분법적인 사고체계로 교회의 본질을 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는 잃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세상 속에 존재합니다. 진리를 사수하고 진리를 선포하는 공동체이기에, 세상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극도로 경계하고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만 고립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새로워져야 한다.
급속하게 변화하는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은 환경에 지배 당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스스로의 변혁입니다. 급변하는 환경에 맞춰 최소치를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변화가 필수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익숙한 틀과 사고체계에서 벗어나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창조적 메커니즘으로, 새로운 블루오션의 세계를 개척해야 합니다.
빌 게이츠는 다가올 10년의 변화는 지난 50년의 변화속도를 압도할 것이라 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새로 생성된 정보량은 지난 5000년 동안 인류가 접했던 지식의 양보다도 많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와 세상, 이분법적인 사고체계로 교회의 본질을 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는 잃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세상 속에 존재합니다. 진리를 사수하고 진리를 선포하는 공동체이기에, 세상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극도로 경계하고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만 고립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변화의 기적
급속하게 변화하는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조건은 환경에 지배 당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정복하고 다스릴 수 있는 스스로의 변혁입니다. 급변하는 환경에 맞춰 최소치를 최대치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변화가 필수적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익숙한 틀과 사고체계에서 벗어나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새로운 창조적 메커니즘으로, 새로운 블루오션의 세계를 개척해야 합니다.
빌 게이츠는 다가올 10년의 변화는 지난 50년의 변화속도를 압도할 것이라 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새로 생성된 정보량은 지난 5000년 동안 인류가 접했던 지식의 양보다도 많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와 세상, 이분법적인 사고체계로 교회의 본질을 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는 잃은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세상 속에 존재합니다. 진리를 사수하고 진리를 선포하는 공동체이기에, 세상의 조류에 휩쓸리지 않도록 극도로 경계하고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만 고립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이렇게 변화시키십니까?
1. 변화시켜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본문 3절을 보니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그랬습니다. 오늘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복을 주시기를 원한다는 말입니다.
2.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용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본문 4절에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그랬습니다. 여러분, 버드나무라 하는 것은 시냇가에 무성하게 뿌리를 내리고 자라게 되는데 버드나무를 웬만한 습기만 있으면 그곳에 뿌리를 내리고 빨리 잎을 맺고 열매를 맺고 자라는 나무로 유명합니다. 버드나무는 유용하게 사용이 되는데 그 가지가 연하고 부드럽습니다. 그러나 단단합니다. 그래서 바구니를 만드는데 많이 사용합니다. 또 군인들이 쓰던 방패며 또 화약을 만드는 재료로도 사용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버드나무는 많은 용도로 사용을 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무슨 말씀인가 하면 오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손들에게 이와 같이 야곱이 이스라엘로 이스라엘이 더 높은 차원, 여수룬으로 높이 되는 것처럼 변화시켜서 여러분을 변화시킨 후에 은혜와 성령을 충만히 주실 뿐 아니라 오늘의 교회와 사회 각 분야에 걸쳐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큰 기둥으로 사용해주신다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변화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새로워지기를 원합니다. 우리 모두 내가 지금 처해있는 현주소가 무엇인지 내가 야곱에 자리에 있으면 야곱의 자리에서 이스라엘의 자리로, 이스라엘의 자리에서 있으면 그곳에서 바로 여수룬의 자리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한 단계 한 단계 우리 신앙의 차원을 높여서 이제부터 여러분과 여러분의 후손들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약속하신 은혜와 성령이 충만한 놀라운 복, 또한 버드나무가지처럼 하나님을 위해서, 이 민족을 위해서 크게 쓰여지는 각 분야에서 걸출한 기둥들이 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