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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역사

개혁자 존 칼빈(1) - 칼빈의 출생과 죽음

작성자이남수|작성시간11.08.16|조회수828 목록 댓글 0

개혁자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생애

 

 장 카디어(Jean Cadier)는 칼빈에 대해서 평하기를 “하나님께 정복당한 사람”(a man God mastered)이라 하였습니다. 파브르(Jelle Faber) 교수는 칼빈은 “성신의 신학자”라고 얘기하였습니다. 그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으로서 종교 개혁을 이끈 기념비적인 사람입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칼빈에 대해서 얘기는 많이 하지만 그 실상을 보면 칼빈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이번 기회에는 이 칼빈의 생애에 대해서만 살펴보려고 합니다.

 

칼빈의 출생과 죽음

 

스위스 제네바의 개혁자인 칼빈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북동쪽으로 70마일 가량(약 100km) 떨어진 피카르디(Picardy) 지역의 노용(Noyon)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에게는 4명의 형제와 2명의 누이가 있었는데, 그는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칼빈은 라틴 식 이름이고 프랑스어 이름은 쟝 코뱅(Jean Chauvin)입니다.

 

      출생 비교

1. 루터(Martin Luther) :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아이슬레벤에서 태어남. 1517년 10월 31일 정오경에 95개조 항의문을 비텐베르크 교회당 문에 게시함으로 개혁이 시작됨

2. 쯔빙글리(Ulich Zwingli) : 1484년 1월 1일 스위스 토겐부르크 지방의 빌트하우스(Wldhaus)에 있는 한 초라한 양치기의 움막에서 태어남

3. 필립 멜랑히톤(Philip Melanchthon) : 1497년 2월 16일 독일의 브레덴(Bretten)에서 태어남. 루터의 개혁에도 참여했던 그는 칼빈과 평생 친구가 됨. 그는 “성경이야말로 모든 기독교회의 회의와 교부들의 주장을 판단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이며 법칙”이라고 말함.

 

“노용”이라는 곳은 오랜 교회적 전통을 가진 도시입니다. 6세기에 성 메나르두스(St. Menardus)가 이미 주교좌를 설치하였고, 그 이후 북 프랑스 교회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이 도시의 성당에서 768년에 카알 대제가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역사가 있습니다. 주교들은 이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세속 권세를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칼빈의 아버지 제랄드 코뱅(Gerhard Cauvin)의 조상은 노용에서 멀지 않은 몽뜨에비끄라는 곳에서 어부 생활을 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본래 노동자였지만 1481년에 노용으로 옮겨왔습니다. 그는 부지런했고,예리한 생각과 조직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점을 인정 받아 주교를 위한 재정 고문, 교회의 공적인 법무관, 주교 관할 구역의 세무 징수관, 교회 재판국의 서기관 및 주교의 비서, 시참의회의 법률 고문 등으로 일했습니다.

 

 칼빈의 어머니는 잔느 르 프랑(Jeanne Le Franc)입니다. 그녀는 캄브레이(Cambrai) 출신으로 노용에서 개업한 부유한 여관 주인의 딸로 미모와 신앙이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칼빈이 어렸을 때 죽습니다(칼빈이 5살 때 쯤 죽은 것 같음. 3살 때 죽었다고 하는 분도 있음).

 

 칼빈은 쌩뜨 고드베르뜨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는데 베자에 의하면 그의 세례 의식을 집례한 사람은 노용 성당 참사였던 쟝 드 바땅스(Jean des Vatines)였다고 합니다. 칼빈은 그의 말년에 사람이 만든 전통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제정하신 거룩한 규례의 차이점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는 성유(사람의 기름 붓는데 사용되는 거룩한 기름)를 거절하지만 내가 받은 세례는 인정한다.”고 말하곤 했다고 합니다. 칼빈은 “거대한 성당의 그늘 아래에서 자라난” 사람이었습니다(빌헬름 노이저).

 

 칼빈의 이 세상을 떠난 것은 1564년 5월 27일 오후 8시경입니다. 그의 나이 54세 4개월이었습니다. “걸어 다니는 종합 병원”이라고 할 정도로 평소 병약했던 그는 1558년부터 더욱 좋지 않은 건강 때문에 고통을 겪다가 이때 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제네바 시의회록 1564년 5월 27일자에 “오늘 저녁 8시경에 존 칼빈이 하나님께로 갔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한 때는 설교하기 위해서 교회당으로 실려 가기도 했었다고 합니다. 1564년 2월 6일 설교 중에 피를 토하면서 최후의 설교를 하였습니다. 1564년 2월 28일에 칼빈은 제네바와 인근 목사들을 자신의 방에 모으고 자신이 죽은 후에도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낙심하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사방에서 위협을 당해도 하나님께서 그 고장과 교리를 지켜 주시므로 그들 사이에 다툼이 없이 형제와 같은 사랑과 굳건한 단결심이 넘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5월 28일 임종 다음 날 오후 2시에 제네바시의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는데, 유언에 따라서 이 공동묘지가 선택이 된 것이고, 그의 유언에 따라서 묘비도 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석 없는 무덤에 묻힌 것입니다.

 

칼빈의 상징, 좌우명(Motto)은 하나님께 바쳐진 불타는 심장을 가지고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오 주여! 내가 신속하고도 신실하게 나의 마음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립니다!”는 의미입니다. 1540년 10월 24일 파렐에게 쓴 편지에 “만일 이 일에 관해 내게 선택권이 있다면, 나는 당신에게 굴복하는 것 말고는 무엇이든지 다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내게 속한 것이 아니라(자기 부정)는 걸 떠올렸기 때문에, 나는 자의 심장을 주님께 기꺼이 바치겠습니다.”고 했는데 이것이 그의 중심 생각이었습니다. 그의 코트의 소매에 이 “불타는 가슴을 손으로 들어 바치는 그림”과 “두 생각 없이 솔직하게”(Prompte et sincere. 신속하고도 신실하게)라는 라틴어 경구를 새겨서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B. K. 카이퍼는 그림의 문구에 대해서 이렇게 해석합니다.

 

“나의 마음을 당신의 주의(主義)를 위하여 즐거이 신실하게 주님께 드리나이다.”(p.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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