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주님을 좇아서

누가복음 10장 29-37절. 한 사마리아 사람

작성자이남수|작성시간12.12.31|조회수645 목록 댓글 0

어떤 율법사가 ‘자신의 이웃’에 대해서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대답을 하셨는데,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첫째는 ‘네 이웃’에 대한 개념이고, 둘째는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개념이고, 셋째는 사랑의 개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서 이런 개념을 생각해볼 수가 있습니다.

 

율법사의 질문

 

예수님과 대화를 통해서 율법의 참된 정신을 답한 율법사는 예수님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29절)라고 질문을 합니다. 율법사가 이런 질문을 한 것은 “자기를 옳게 보이기 위해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군가에 대해서 이미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생각을 정당화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28절에 “네 대답이 옳도다.”고 하니까 예수님을 시험한 것에 대해서 ‘잘못했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자신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자신은 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법을 정당하게 지키고 있음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웃이 누군가 말씀하시면 자신은 그런 이웃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 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이 말씀을 지키지 못할 사람으로 스스로를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은 율법을 준수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보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생각하는 이웃에 대한 것(자신들의 전통에 따름)과 맞지 않으면 주님을 향하여 반박할 수 있는 재료도 얻게 됩니다.

 

보통 “이웃” 그러면 거리 개념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신의 집에서 가까이 살고 있는 사람이 이웃이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보통 이렇게 많이 생각을 합니다. 멀리 있는 사촌보다 가까이 있는 이웃이 낫다는 것은 이런 거리 개념의 이웃이 적용됩니다. 국어사전에도 보면 서로 접하여 사는 집을 이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는 자신이 ‘이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선택한 소수의 사람들을 그렇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이야 말로 참다운 이웃이다, 이렇게 말할 때는 단순히 거리 개념이 적용되는 이웃이 아니라 ‘참다운 이웃’이라는 선택된 사람들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율법사에게는 ‘사마리아 사람’은 이웃이 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사마리아인이 아무리 가까이 살아도 이웃이 될 수 없습니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서로 좋지 않은 깊은 갈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 9절에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했다고 하지요. 서로 그런 관계였기 때문에 이 율법사에게 사마리아인은 이웃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지만, 주님께서는 ‘네 이웃’이라는 개념부터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고 제대로 얘기할 수 있는가? 어떻게 자신을 옳게 보일 수(29절)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자신의 생각대로, 때로는 그릇된 교회 전통에 따라서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하신 참된 뜻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개념이 먼저 바르게 서 있어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외적으로 보이는 말씀을 따른다고 하면서 자기방식으로 해석해서 한다면 하나님과 관계없는 행동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이 많습니다. ‘일천 번제’를 드린다는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그 의미를 바르게 생각하지 않으니까 오늘날도 이것을 행한다고 하면서 스스로의 신앙에 대해서 공적을 주장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을 얼마 정해서 매일 드리는 것이 번제의 개념인지 물어야 합니다.

 

이웃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

 

예수님께서는 어떤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서 참된 이웃의 개념을 생각하도록 하십니다.

이 비유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강도 만난 유대인입니다. 30절에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다고 하지요. 예루살렘은 해발 769m의 고지대입니다. 여리고는 당시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던 지역이었습니다. 이 여리고는 해발 250m 밖에 안 되는 낮은 지대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까지는 약 36km 정도 되는데 길이 가파른 곳도 있고, 암석들도 많아 강도들이 자주 나타났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강도는 만나기 싫은 사람입니다. 강도들은 이 사람의 옷을 벗기고 때려서 거반 죽게 되자 버리고 갔습니다. 생존에 큰 위협을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도움이 정말 필요한 사람입니다.

 

두 번째 사람은 한 제사장과 한 레위 사람입니다(31-32절). 이들은 율법사가 전통적으로 ‘이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의 행동은 피하여 그냥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이 강도를 만난 유대인의 현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쪽으로 돌아서 갔습니다. 자신들도 강도를 만날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고, 이 사람이 거의 죽었다고 판단하고 시체로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레위기 21장 1-3절)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생사여부를 바르게 확인했어야 했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어떤 사마리아인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이 천시하고 상종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을 이 강도 만난 유대인의 참다운 이웃으로 등장시키고 계십니다.

 

이 사마리아인이 어떤 행동을 했는가? 봅시다.

 

① 33절에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겼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생존의 위협에 처한 사람에 대해서 가지는 마음입니다. 한 인간이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는 인간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당연한 마음입니다. 자비심이 이 사람을 움직였습니다. 상대방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냐가 아니라 상대방이 어떤 어려운 처지에 있느냐가 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② 34절에 상처를 치료해주는 일을 합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가지고 그 사람을 치료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비상 응급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자비심만 가진 것이 아니고 실제로 치료하는 일까지 하지요. 기름은 상처의 통증을 완화시켜주고 포도주는 살균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③ 34절에 주막(숙박소)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아주 따뜻한 행동입니다.

④ 35절에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더 돌보아 주라고 합니다. 부비가 더 들면 자신이 돌아올 때에 갚겠다고 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예레미야스는 그 당시 숙박비는 1/12데나리온이었다고 하는데, 이렇게 계산하면 보름 정도 거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 주막에 오고 가면서 한번씩 들린 사람일 것입니다. 자신이 돌아올 때에 부비가 들면 갚겠다고 한 것은 이것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마리아인의 마음과 행동을 통해서 강도 만난 유대인의 참다운 이웃이 누구인가를 생각하도록 하십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이웃 사랑은 다른 사람을 열심히 도와주는 것이다, 이렇게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박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것을 위해서만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을 도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그것을 인정해주십니다. 구약을 보면 이 세상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신명기 15장 11절에 땅에서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들이 존재한다고 하시지요. 이것은 이 땅의 현실에 대한 진리입니다. 역사 속에서 가난한 사람이 끊어질 때가 없었습니다. 이 현실을 완전히 해결하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을 이 땅에 보내시고 감당해야 할 책임을 주셨는데, 그 일을 해나가야지 이웃을 사랑한다는 핑계로 이런 일을 외면한다는 것은 잘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의미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 강도 만난 유대인은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자비를 실천해야 할 제사장마저 외면하고 지나갔습니다. 버려진 사람, 생존 자체가 위협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데, 그 누구도 도와주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이 사마리아 사람이 찾아간 것이 아니고 자신이 갈 길을 가다보니까 만나게 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인생을 내신 그 뜻대로 우리가 살아야 하는데, 그런 길을 갈 때 이런 사람을 만났다면, 이때 자신이 이런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정당한 삶을 살 때까지 도움을 줄 때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땅에서 길을 갈 때 이런 사람을 만나게도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할 상황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진정한 이웃이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보면 이웃을 사랑하되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자신보다 더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몸을 생각하듯이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사랑함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서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 사랑할 때 내 인생을 전체 거기에 걸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도 하나님 나라의 원수인 사람을 무조건 사랑하라는 얘기를 하시지 않고 로마서 12장 20절을 보면 “주리거든, 목마르거든” 즉 인간이 생존하는데 커다란 어려움이 있으면 그냥 지나치지 말고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라, 힘이 되는 대로 도와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걸어갈 때 이처럼 누군가가 돕지 않으면 안 되는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생각하고 자비를 베풀 때 진정한 이웃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자비는 단순히 불쌍히 여기는 마음만 갖는 것이 아니고 실천적으로 그 사람의 고통을 돌보는 것까지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하십니다. 즉 누가 내 이웃인가를 생각하려고 하지 말고 내가 이웃이 되어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는 이런 자비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자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교회는 그 자비의 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자비의 직분이 바로 집사 직분이 아닙니까? 교회는 집사 직분이 많을수록 더욱 자비가 풍성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자비가 곳곳에서 실천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를 보면 집사 직분은 넘치는데 자비는 고갈되고 있는 듯한 느낌입니다. 교회는 참다운 자비가 무엇인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바르게 깨닫고 그 자비를 드러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이 자비는 하나님 나라의 맛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