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감 한 개
강 길 수(姜 吉 壽)
“잘 됐다. 웬 횡재야!”
하는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빨리 걸은 탓인지 땀이 조금 나고 목이 마르던 차다. 입맛을 다시면서 밀감 껍질을 벗기려는 찰라, 불현듯 번개같이 뇌리를 스치는 생각이 손을 멈추게 했다. ‘만일 이 밀감 속에 누가 독극물이라도 넣었다면?’ 하는 의구심이 든 것이다. 머리가 쭈뼛해진다. 밀감을 먹기 위해서는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무모한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자, 전율과 함께 온 몸의 맥이 쭉 빠진다.
앙상한 가지 끝에 애써 매달린 잎 몇 개가 소슬바람에 나비처럼 팔랑이며 벌써 새봄을 기다리는 늦가을, ‘양학동등산로’에서 생긴 일이다. 비록 나지막한 야산이만, 호기심 많은 나는 이 곳 저 곳, 이 길 저 길을 거의 다 다녀 보았다. 세 번째 쉼터가 있는 곳에 다다랐을 때, 왼쪽 아래로 이제 막 몇 사람이 미끄러지며 다니기 시작한 흔적이 처음 보였다. 그 쪽은 급경사여서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길이 없었다. ‘나 같은 사람들도 있군.’ 하고 생각하며 흥미롭게 그리로 향했다. 미끄러지기도 하면서 내려가 얼마 후엔 골짜기의 작은 도랑에 닿았다.
도랑을 막 뛰어 건너려 할 때였다. 도랑바닥 마른 잡초위에 노란 밀감 한 개가 탐스럽게 떨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바닥에 내려가 밀감을 주워 먹으려했던 것이다.
“사회에 대한 이유 없는 불만으로, 불 특정인에게 ‘묻지 마’ 무차별 위해를….”
전에 읽었던 신문기사들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떨어진 밀감하나 믿고 주워 먹을 수 없는 세상이다. 인간에 대한 실망감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스스로 말하면서도 가장 사악한 존재가 인간이란 생각에 이른다. 그러자 인간인 자신에 대한 자괴감마저 먹구름처럼 몰려온다. 세상에는 도처에서 얼마나 많은 또 다른 형태의 ‘밀감’들이 뭇 생명들의 삶을 위협하고 있을까도 생각해 본다. 망연자실한 듯 그대로 우두커니 서 있다. 한 낮인데도 갑자기 어두워지는 것만 같다. 슬프다.
"하느님을 믿으며, 사람을 사랑하고, 마음 비우며 살아내겠다는 너도, 밀감 빠뜨린 사람 하나 믿지 못하는 구나.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영악한 속물에 지나지 않는 게지!"
라고 비웃듯 되 뇌이며 서 있는 자신을 조금 뒤 알아챘다. 손바닥에 노란 밀감을 올려놓고 쳐다본다. 이런 생각들이 났다.
‘이 밀감은 아마도 저 멀리 제주에서 예까지 왔으리라. 한 해 전, 주인의 풍작 비는 마음 담아 씨눈으로 잉태되어 봄에 꽃피우고 작은 열매 맺었을 거야. 알뜰한 보살핌으로 여름의 뙤약볕에 살찌우고 폭풍우를 이기며 자랐겠지. 가을에 정성으로 수확되고 포장되어, 바다 건너 산 넘고 강을 질러 이 고장에 팔려왔을 테고. 그리고는 어떤 이의 간식거리로 등산 배낭에 넣어졌을 거야. 그가 도랑을 폴짝 뛰어넘으면서 밀감은 그만 여기 떨어졌을 테고. 그렇다면, 이 밀감은 제주에서 예까지 와서 보람도 없이 그냥 썩어 버릴 운명이 아닌가! 사람의 먹을거리가 되어 그의 몸으로 변신하여, 전혀 다른 차원의 한살이를 살도록 마련되어져 있기에 그토록 꿈에 부풀어 있었을 텐데…. 내가 만일 여기서 버린다면, 이 밀감의 이 한살이는 얼마나 쓸쓸하고, 허무하며, 슬플까?’ 하고.
‘밀감 한 개의 단순한 문제를 뭐 그리 심각하게 생각하느냐? 그깟 밀감 한 개 버리면 그만인 것을 왜 머리 아프게 사느냐? 그래가지고 이 험난한 세상을 어이 살아내려 하느냐? 주책도 팔자지.’하는 생각도 났다. 한편으로는, ‘어떤 화상이 칠칠찮게 밀감을 여기다 흘려 놓고, 남을 골탕 먹이나?’하고 괜스레 밀감 새 주인을 원망하는 마음도 들었다. 그러나 다음순간,
“인연이지. 하필 내가 가는 길 앞에 밀감이 떨어져 있다는 것이 인연인 게야. 자기 인연은 사람이라면 믿고 봐야해. 세상은 내가 생각하는 만큼 사악하지는 않아. 이 밀감은 세상에 대한 내 믿음을 시험하려고 주어진 거야!”
하는 마음의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왔다. 불안했다. 망설였다. 하지만, 그 소리는 거부 못할 어떤 힘이 되어 나를 끌어당겼다. 오기(傲氣)가 생겼다. 무작정 밀감을 먹기로 했다. 먹기 좋게 말랑한 밀감의 껍질을 벗겨내고, 탐스런 알맹이를 아주 시원하고 맛있게 먹었다. 입안에 느껴지는 새콤달콤한 맛과 상큼한 향기, 그리고 목을 시원하게 넘어가는 감촉은 여느 밀감과는 비교할 수 없이 좋기만 했다.
밀감 한 개에 목숨을 건 내 무모한 ‘모험’은 이렇게 감행되었다. 실험실에 근무한 경험을 되살려, 주위상황과 시간, 밀감의 냄새나 상태 등을 분석하고, 나름대로의 과학적인 결론에 의해 그 상황을 대처 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리 하지 않았다.
수분(數分)이 지나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과 잠간 사이에 일어난 상황이었지만, ‘밀감 한 개의 모험'은 세상에 대한 내 ‘믿음의 승리’로 끝난 것이다. 조금 전, 밀감을 손에 쥐고 일었던 의구심과 실망감의 파도가 되레 큰 믿음과 희망의 물결로 변하여 기쁨으로 밀려왔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향한 강력범죄 등, 이 시대 사회악들로 생채기난 내 마음은 새콤달콤하고 시원하게 맛좋은 밀감 한 개로 치유 받고 있다.
손에 남은 상큼한 밀감의 향이 향기롭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