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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 역사

신라 남원경(南原京)과 고구려 유민 (펌)

작성자현덕|작성시간14.04.22|조회수743 목록 댓글 0

남원(南原)과 고구려 유민

 


< 남원의 소경(小京) 설치 >

남원 소경은 남북국시대 5소경의 하나로 신라 신문왕 5년(685년)에 설치되었다. 남원은 본래 백제의 고룡군(古龍郡)이었는데,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보덕국(報德國)을 파하고 그 유민들을 소경의 설치와 함께 이곳에 이주시켰다. 특히 남원소경에서는 고구려 유민을 통해 왕산악(王山岳)의 칠현금(七絃琴)이 신라 옥보고에게 전해졌고, 고구려 후예 중에서 불교 고승들이 많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신라의 소경 설치 목적은 수도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을 원활히 지배를 위한 것이었다. 삼국통일을 전후해서 신라는 고구려·백제 등 복속국에 대한 일종의 회유책으로, 그 지역을 직접 지배하지 않고 지배층을 원거주지에서 옮겨 본래의 지배체제를 유지하면서 신라에 반항하는 세력이 형성될 수 없도록 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소경은 특수한 단위 행정구역으로 1개 현 정도의 규모였다. 구조 역시 성곽으로 둘러싸여 도시지역과 전원지역으로 나누었다. 도시지역은 수도를 모방한 계획도시 모양으로 귀족과 같은 신분의 신라인과 새로이 신라에 통합된 국가의 왕족 및 귀족들이 거주하였다. 주변의 전원지역은 군·현과 유사한 일반 촌락으로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소경의 관직 위계는 일반 군·현보다 높은데 그 이유는 일반 군·현의 주민 대부분이 농민인데 비해 소경의 주민은 복속 지역의 귀족과 신라 귀족들로 이루어졌다는 특수성 때문이었다.『삼국사기』「직관지」외위조(外位條)에 따르면, 소경의 장관을 사신 또는 사대등이라 하였고, 그 차관급을 사대사(仕大舍) 또는 소윤(少尹)이라고 하였다. 관등은 사신이 급찬(級粥-9품)에서 파진찬(波珍粥), 사대사가 사지(舍知)에서 대나마(10품)로 되어 있다. 그 조직 역시 경주를 따라 소경마다 6부를 두어 왕이 돌아가며 체류하였다.

 

남원에 고구려 유민이 정착하게된 경위는 고구려 부흥운동 과정에서 금마의 보덕국 건설과 관련이 있다. 신라는 보덕국 해체에 반발한 고구려 잔존 유민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주변 주·군에 분산·이주시켰다가, 1년 후 남원에 소경을 설치하면서 다시 그 유민을 남원에 이주시켰다.

 


< 고구려 부흥운동과 유민의 금마 이동 >

당나라는 고구려가 멸망한 뒤 거의 10년 가까이 보장왕을 당나라 수도에 억류하였다가, 677년 그를 요동주도독(遼東州都督)으로 삼고 조선왕으로 봉하여 요동지역의 고구려 유민을 통치하게 하였다. 그러나 보장왕이 말갈족과 내통하여 고구려부흥운동을 꾀하자, 앙주로 유배시켰다. 보장왕이 유배지에서 죽고, 685년 그 손자인 보원(寶元)을 조선군왕으로 삼았다. 698년 벼슬을 높여 좌응양위대장 충성국왕(左鷹揚衛大將 忠誠國王)에 봉하여 요동지역을 다스리게 하였으나, 보원은 현지로 가지 않았다.

 

이로부터 조선군왕은 고구려 왕실을 계승하되 당나라 수도에 머물면서 당나라 조정 의례에 참석하고, 또 명목상 당나라 영토 안에 있는 고구려유민을 대표한다 하여 고려조선군왕이라 칭하게 되었다. 즉 '고려조선군왕'이란 중국 당(唐)나라가 고구려 마지막 왕 보장왕의 후손에게 준 요동(遼東)지역 통치자 칭호인 것이다. 당나라와 마찬가지로 신라 역시 고구려 유민을 회유하고 문제없이 다스리기 위해서는 고구려 왕족을 왕으로 대우하여 고구려 유민을 대표하게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 부흥운동은 고구려 유민들이 당나라의 지배에 대항하여 일으킨 저항 운동이었다. 668년 평양성을 함락한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고구려 전역을 9도독부 46주 100현으로 나누어 실질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려고 하였다. 이와 동시에 고구려인의 저항을 방지하기 위하여 유력한 고구려인 2만 8000여 호를 중국의 내지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러한 당나라의 정책에 반대하여 문무왕 10년(670) 대형(大兄) 검모잠(劒牟岑)은 고구려의 유민(流民)을 규합하여 궁모성에서 대동강 남쪽으로 진출하여 당나라의 관원과 승려 법안(法安)을 죽인 뒤, 광범위한 고구려의 부흥운동을 일으켰으며, 신라와도 연합을 꾀하였다.  

 

신라와 당의 전쟁은 670년 음력 1월, 사신 김양도(金良圖)가 당의 옥중에서 죽은 직후부터 본격화되었다. 이 해 3월, 사찬(관등 제8위) 설오유가 이끄는 신라군 1만과 고연무가 거느린 고구려 부흥군 1만이 압록강 건너 지금의 만주 봉황성(鳳凰城) 지역에서 합동 작전을 전개하여 당에 붙은 말갈군을 대파했다. 이와 같은 압록강 이북의 부흥운동은 당군의 한반도 진입을 차단하고 고구려 유민들의 반당(反唐) 봉기를 촉진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었다. 이 해 6월, 고구려 고토(故土)에서 대형(大兄 : 고구려의 관등 제2위) 검모잠과 왕족 안승이 차례로 일어나 무리를 모으고 당에 반기를 들자, 문무왕은 이들을 대당 전쟁을 유리하게 전개하기 위한 우익으로 삼았다.  

 

670년 겨울 10월 문무왕은 장군 품일과 문충에게 군사를 주어 백제 고토(故土)로 진격시켰다. 백제의 잔당이 명을 거역하고 반란을 일으킬 기회만 엿보고 있다는 이유를 내걸었다. 품일·문충 부대는 단번에 63개성을 빼앗고, 여기서 살던 백제 유민들을 신라 땅에 이주시켰다. 또한 신라의 천존·죽지 부대는 7개성을, 군관·문영 부대는 12개성을 각각 빼앗아 한 달여 만에 전남·전북 일대 의 82개성을 공략하였다.

 

671년 당군이 말갈군과 연합하여 백제의 옛 땅으로 남하했다. 이에 문무왕은 의복·춘장 부대 등을 보내 당군을 격퇴하고, 죽지(竹旨) 부대를 파견하여 가림성(加林城)의 웅진도독부 병참원인 둔전(屯田)을 짓밟아 식량을 폐허화시켰다. 당군과 백제군은 연합하여 신라군을 반격했다. 드디어 부여 동쪽 석성에서 전투가 벌어져 신라의 죽지 부대가 적 지휘관 6명을 사로잡고 5천 3백 명을 전사시켰다. 신라군은 웅진성을 압박하면서 백제의 고도 사비성 일대에 소부리주(蘇夫里州)를 설치했다.

 

그러나 671년 안시성이 당군에 함락되고, 672년과 673년의 백수산(白水山) 전투와 호로하(瓠瀘河) 전투의 패배로 부흥군은 후퇴하였다. 차츰 당군에 밀려 그 유민들을 거느리고 대동강을 건너 지금 황해도 재령 지역인 한성(漢城)으로 남하했다. 그는 서해상의 사야도(史冶島)에서 안승을 맞아 왕으로 옹립하고 문무왕에게 사자를 보냈다.
『우리의 먼젓번 임금(보장왕)은 잘못이 많아서 멸망했으므로 이제 저희들은 고구려의 귀족 안승을 새 임금으로 삼았으니, 원컨대 대국 신라의 울타리가 되어 길이 충성을 다하게 해 주십시오』  안승이 신라에 원조를 청하자 신라에서도 당나라의 세력을 쫓아낼 필요가 있었으므로 이를 받아들여 부흥군 세력과 신라와의 관계가 더욱 밀착하게 되었다.

 

문무왕 14년(674) 신라는 안승과 검모잠 등 그 유민을 현재 익산 지역인 금마저(金馬渚)로 집단 이주하게 한 뒤 사찬 수미산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책봉하고 보덕국(報德國)이란 국호를 내렸다. 보덕국은 백제의 고토를 차지한 웅진도독부를 견제할 목적에서 급조된 신라의 부용국이었다. 또한 신라는 문무왕의 조카딸을 안승에게 시집보내고 양미(糧米) 등을 보급하자 결국 부흥군의 잔여 세력은 신라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이때 부흥군의 내부에서는 의견의 대립으로 분열,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는 사태로 발전하였다. 이로써 고구려 부흥군의 무력활동은 끝이 나고 당나라와의 무력대결은 신라가 담당하게 되었다.

 

안승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왕의 외손이라고도 하고, 혹은 연개소문의 동생인 연정토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신라는 683년(신문왕 3) 10월에 보덕국을 폐하고 안승을 경주에 불러들여 3품관인 소판(蘇判) 벼슬을 내려 신라 귀족으로 삼았다. 또한 김씨 성을 내린 뒤 경주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좋은 집과 농토를 내렸다고 하였다.

 


< 전주의 보덕화상과 보덕국 >

익산은 전라북도 북서부에 위치하여 북으로는 금강 줄기를 사이에 두고 충청남도 부여군 및 논산군과, 남으로는 만경강을 끼고 김제군과 닿아 있다. 사방이 평야로 둘러싸여 드나들기가 편리한 까닭에 예나 지금이나 전라도로 들어서는 어귀가 된다. 수로가 편리한 만큼 신석기 시대 이래 농경문화가 번창했고, 삼한 시대로부터 정치적·문화적 중심지가 되었다. 익산 땅에서도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곳은 금마면과 왕궁면을 포괄하는 옛 금마 지역이다.

 

일찍이 삼한 시대에 기자의 41대손인 기준이 위만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통해 남으로 내려오다가 금마 땅에 이르러 마한의 왕이 되었다. 이것이 마한 54개 소국 가운데 건마국이었다. 그후 백제의 시조 온조는 마한을 병합한 후 이곳을 금마저라 불렀다. 금마저란 금마마한(金馬馬韓), 기씨마한(箕氏馬韓)에서 유래한다. 중국의 정겸은 조선 사신에게 듣고서 기준의 마한 땅을 금마라고 한다고 기록하였다. 즉 '금마 마한'에서 비롯된 것으로 기준이 살던 '금마 지역 물가'를 의미하는 셈이다. 현재 사적 92호인 익산토성을 안승이 보덕국을 세운 곳이라 하여 '보덕성'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백제문화의 전성기였던 600년 무렵, 무왕은 금마저를 도성으로 삼고 미륵사, 제석사와 같은 거대 사찰과 왕궁평성을 쌓았다. 이를 근거로 백제가 금마 지역으로 천도하려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나, 또 한편으로는 사비성, 웅진성과 함께 이곳을 별도(別都)로 경영했으리라는 주장도 있다. 김정호가 지은『대동지지(大東地志)』에 "지금의 익산에 무왕은 별도(別都)를 두었다."라는 것과 중국 육조시대의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에 보이는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지(枳慕蜜地)로 천도하여 새로이 정사를 운영하였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백제는 신라와 분쟁이 격화되자 옛 마한세력의 절대적 지지와 호남평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게 되었다. 무왕 역시 강력한 백제를 건설하려는 뜻이 있어 익산지역에 궁성을 운영하여 자신의 정치적인 세력과 더불어 군사력을 강화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금마는 대당 전쟁에 있어서 부여의 웅진도독부를 공략할 중요한 요충지역이었다. 지역세력의 지지를 발판으로 삼아 금마에 부흥군을 끌어 주둔케 하였던 것이다. 이밖에도 금마저로 고구려 유민이 집단 이주 정착하고자 한 것은 가까운 전주에 이미 보덕화상이 고구려 불교의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도 보덕국이란 국호를 받은 것과 무관하지 않다.

 

고구려 본기에 의하면 고구려 말에 오두미교(五斗米敎)가 성행하자 당고조는 영류왕 7년(624) 도사(道士)를 시켜 천존상(天尊像)을 보내 도덕경을 강연하게 하는 등 당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고구려 보장왕은 2년 연개소문의 주청으로 당에 사절을 보내어 도교를 받아들여 숭상하였다. 보덕화상이 이를 극구 반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지금의 전주인 완산주 고대산(高大山) 경복사(景福寺)로 비래방장으로 옮겼던 것이다.『신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비래방장은 보덕대사(普德大師)가 고구려 반룡산(盤龍山) 연복사에서 고달산 중턱에 옮겨놓은 집이라 하였다. 보덕은 일찍이 고구려 반룡산 연복사(延福寺)에 주석하면서 고구려가 도교(道敎) 숭상하고, 불교를 업신여겨 오래지 않아 망할 것을 걱정하며 안전한 거쳐를 찾던 중 제자 명덕(明德)의 의견에 따라, 667년(고구려 보장왕 26년) 3월 3일에 전주 고덕산에 옮겨졌다. 현재 비래암 유지에는 암자로 섰던 고가(古家) 한 채가 남아 있어 비래방장의 옛터였음을 추정케 한다. 옛날 번성했던 시절을 연상케 하는 정교한 석성과 수문이 남아 있으며, 절터로 추정되는 밭에서는 기와와 고려자기 등 파편이 출토되고 있다.  
『완주군지』에 의하면 고덕산에 있는 경복사는 고구려 보덕화상이 백제 말에 열반종의 근본도량으로서 절 안의 비래방장(飛來方丈)에 보덕화상의 화상(畵像)이 봉안되어 있다고 하였다. 현재 구이면 평촌리에 그 유지가 남아 있다.
                        

< 대문(大文)의 반란 >

남원 지역에 고구려 유민의 정착의 직접적인 원인은 고구려 유민을 회유 지배하기 위해 이 지역에 소경을 설치한 것이겠지만 그 과정에 금마 지역에서 일어난 고구려 유민의 반란을 들 수 있다.  신라가 신문왕 3년(683)에 안승을 경주에 불러들여 벼슬과 토지를 주고 신라의 귀족으로 삼으면서 보덕국을 폐하자 고구려 유민의 반발을 샀다. 급기야 신문왕 4년(684) 11월 안승의 족자(族子) 장군 대문(大文)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처형을 당하자 고구려 유민들은 신라의 관리(官吏)를 살해하고 금마저를 차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고구려 유민의 반란군은 그 기세가 대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군의 진압 과정에서 귀당제감(貴幢弟監) 핍실과 황금서당보기감(黃衿誓幢步騎監) 김영윤이 전사하는 등 신라의 전력에 많은 손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핍실의 전사는 지금의 거창군으로 추정되는 가잠성 남쪽 7리(里) 되는 곳이다. 여러 장수들이 때를 기다리자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격을 서두르다가 전사한 것이다. 이것으로 보아 반란군은 신라군을 맞아 싸우기 위해서 경상남도 거창까지 진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군은 결국 보덕성을 함락하고 그 곳을 금마군이라 하였다. 고구려 유민은 반란을 계기로 해체되어 인근 남쪽 군·현으로 분사 거주하게 하였다.  신문왕 5년(685) 3월에는 남원에 소경이 설치되자 여러 주·군의 민호(民戶)를 다시 옮겨 이곳에 나누어 살도록 하였는데, 옮겨온 민호는 대다수 고구려 유민이 포함 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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