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심재덕 (1-00) 어린 시절 힘겨웠던 삶이 지금의 나를 세운 밑바탕
간증: 1642. [역경의 열매] 심재덕 (1-00) 어린 시절 힘겨웠던 삶이 지금의 나를 세운 밑바탕 화전민이 일군 산골 마을에서 태어나 학교 다녀오려면 매일 25리 길 걸어 쇠꼴 베고 장작 지고 통나무 자르는 산골 생활은 몸을 단련하는 훈련장 심재덕 선수가 지난 11일 경남 거제 아주천에서 화이팅을 외치고 있다. 나는 충북 괴산군 연풍면 분지골에서 태어났다. 화전민이 일군 산골 마을이었다. 조령산에서 이화령 고개를 넘어 백화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어린 시절 내 놀이터였다. 버스가 다니지 않던 마을이어서 학교에 다녀오려면 매일 25리(약 9.7㎞)를 걸어야 했다. 해가 지고 진촌 마을 불빛이 사라지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공포였다. 상여와 장례 도구가 놓인 어느 집 앞을 지날 땐 창문 너머 울긋불긋한 물건들을 보며 죽음을 떠올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목에는 저수지가 있었다. 사람이 빠지는 일이 종종 있었고, 어릴 적 부풀어 오른 시신을 빼내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했다. 봄이 되면 얼음이 갈라지며 터지는 굉음이 골짜기를 울렸다. 어둠 속에서 길을 찾는 법을 배웠다. 그 길을 홀로 걸어 집에 닿던 그 경험은 지금 내가 ‘울트라 트레일 러닝(자연 속 비포장 코스를 42.195㎞ 이상 달리는 초장거리 레이스)’을 완주하는 데 큰 힘이 된다. 우리 집은 호롱불을 켜고 살았다. 먹을거리를 산과 밭에서 구했다. 봄에는 두릅과 취나물, 여름에는 텃밭 채소와 산 열매, 가을이면 밤과 도토리, 겨울에는 칡뿌리 즙이 식탁에 올랐다. 계절마다 바뀌는 산골 밥상은 단순한 끼니가 아니라 몸을 단련하는 훈련장이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 가난이야말로 내 지구력을 길러준 스승이었다. 늘 왜소했지만 산골 아이라 힘을 써야 했다. 여름이면 쇠꼴을 베어 나르고, 겨울이면 아버지, 형제들과 함께 땔감을 날랐다. 산에 올라가 톱으로 나무를 베고 통나무를 굴려 신작로까지 내려보냈다. 내 몸보다 무거운 통나무 장작을 어깨에 메고 비탈길을 내려오면 어깨와 허벅지가 불에 덴 듯 화끈거렸다. 냇가에서 쇠망치로 물고기를 잡을 때는 팔이 저릴 정도로 휘둘러야 했다. 그렇게 몸은 조금씩 단단해졌다. 울트라 트레일 러닝을 하며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발걸음이 무겁게 느껴질 때면 어린 시절 장작을 지던 내 모습이 떠오른다. 나무를 놓치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던 순간과 결승선을 향해 버티는 지금의 내가 다르지 않다. 그때의 땀과 고통이 오늘의 긴 레이스를 견디는 근육과 심장이 됐다. 지금도 종종 혼자 산길을 달린다. 어두운 밤, 작은 빛 하나에 의지해 뛰어도 두렵지 않다. 큰 대회를 앞두고 야간 산악 훈련을 하면서 멧돼지나 뱀을 만나도 주저하지 않는다. 어떤 산을 달리든 고향 산골을 달리는 듯 익숙하다. 힘들고 부족했던 시절은 인생의 걸림돌이 아니라 선물이었다. 고단한 삶의 흔적이 달리기의 밑바탕이 되어 오늘의 나를 세웠다. 예수를 믿고서야 깨달았다. 그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길이였다는 것을. <약력> △1969년 충북 괴산 출생 △1987년 대우조선(현 한화오션) 입사 △2008년 Sub-3(마라톤 풀코스 3시간 완주) 한국 최초 100회, 현재 330회 달성 △일본 노베야마 고원 울트라 마라톤(100㎞), 미국 MMT 100마일(약 160㎞) 등 다수의 국제 대회 우승 △세계 정상급 울트라 트레일 러너 △ 노스페이스 애슬리트팀 소속 △거제 염광교회 집사 * [역경의 열매] 심재덕 (1) 어린 시절 힘겨웠던 삶이 지금의 나를 세운 밑바탕 * [역경의 열매] 심재덕 (2) 늘 응원단이었던 운동회… 골리앗 무너뜨린 꼴찌의 반전 * [역경의 열매] 심재덕 (3) 입사 면접서 종교 속여 합격… 숙련된 조선소 일꾼으로 성장 정리=사진 손동준 기자 sdj@kmib.co.kr [역경의 열매] 심재덕 (2) 늘 응원단이었던 운동회… 골리앗 무너뜨린 꼴찌의 반전 어린 시절 달리기 실력은 항상 꼴찌 한 번도 순위에 들어본 적 없었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나간 씨름 대회서 가장 힘센 친구를 상대로 승리 맛봐 심재덕 선수가 19살 무렵이었던 1987년 충남 괴산 고향집에서 염소와 힘겨루기 하는 모습. 심 선수 제공 학창시절 수상자로 내 이름이 교정에 울려 퍼진 건 중학교 2학년 때, 단 한 번뿐이었다. 그때 받은 상은 반공학생상이었다. 북한에서 날아온 ‘삐라’(전단)을 가장 많이 주워 제출한 학생에게 주는 상이었다. 산에 다니다 전단을 발견하면 나는 부지런히 모아 지서에 가져다 줬다. 그 덕분이었다. 운동장 조회 시간, 교장 선생님의 말씀까지 끝나자 작은 운동장이 술렁였다. 울려 퍼진 내 이름에 어린 동생들이 함께 축하해 주었다. 나는 그때 마음속으로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받은 상장이 손에 들려 있었고 눈에는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그 얇은 종이 한 장이 아이였던 내게 처음으로 주어진 인정이었다. 지금은 달리기가 나의 정체성이 됐지만 어린 시절 나는 달리기와 인연이 없었다. 산골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읍내 아이들보다 잘 뛸 법도 했는데 전력으로 달려도 꼴찌는 늘 내 몫이었다. 초등학생 시절 가을 운동회는 학생들만의 행사가 아닌 마을 전체의 축제였다. 장날에 맞춰 열리던 운동회날 가을걷이를 끝낸 어른들이 모두 학교 운동장으로 모여들었다. 학생들의 부모는 물론 이웃과 친척까지 자리를 잡고 아이들의 달리기를 응원했다. 운동회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100m 달리기였다. 여섯 명이 출전해 1·2·3등만 상을 받았다. 상은 연필 한 자루 공책 한 권의 소박한 것이었지만 어린 마음에는 그보다 더 값진 게 없었다. 그러나 나는 단 한 번도 순위 안에 들어본 적이 없었다. 결승선에 다다를 즈음이면 이미 시상대에 오를 아이들은 정해져 있었다. 키가 작고 순발력도 부족했던 나는 언제나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뒤를 달려야 했다. 운동회의 마지막 종목은 각 마을 대표가 뛰는 오래달리기였다. 우리 동네 대표는 언제나 친구 병재였다. 키도 크고 잘 달려 당연한 선택처럼 보였다. 속으로 한 번쯤 내 이름이 불리기를 바랐지만, 현실은 늘 응원단이었다. 나는 목이 쉬도록 노래를 부르고 북을 치며 친구들을 격려하는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뜻밖의 반전은 씨름판에서 찾아왔다. 4학년 때 학년별 씨름 대회에 준비도 없이 나섰는데 상대는 힘이 세기로 이름난 영복이었다. “개미허리에 살이 붙었네.” 구경꾼들이 수군거렸다. 시작하자마자 끌려가다 지겠구나 싶던 순간, 영복의 중심이 흔들렸다. 발바닥에 모래가 꾹 눌리는 감각과 함께 본능적으로 다리를 걸었다. 거구의 몸이 뒤로 벌렁 넘어졌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와’ 하는 함성이 터졌다. 손에 잡히던 상대의 땀내와 모래 냄새, 삽시간에 뒤집히던 거구의 무게감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고놈 참 대단하다!” 여기저기서 어른들의 칭찬이 이어졌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승리가 내게 처음으로 진짜 자신감을 안겨 주었다. 작고 보잘것없는 내가 골리앗 같은 영복을 이겼다는 확신이었다. 아버지도 흐뭇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셨다. 그 한판으로 나는 동네 어른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처음으로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렸다. 하지만 그런 기회를 드릴 날은 불행히도 많지 않았다. [역경의 열매] 심재덕 (3) 입사 면접서 종교 속여 합격… 숙련된 조선소 일꾼으로 성장 월급 많이 준단 말에 대우조선 면접 “자네 종교는 뭔가” 면접관 질문에 기독교라 거짓 대답, 늘 죄책감 들어 1995년 경남 거제 한 바닷가 마을에서. 돈을 벌기 위해 찾아온 거제는 내 인생과 달리기의 요람이 됐다. 심 선수 제공 고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큰형이 농사로 어머니를 도왔지만 자녀들 뒷바라지는 온전히 어머니 몫이었다. 대학은 언감생심이었고 동생들도 상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준비해야 했다. 증평공고 3학년 2학기, 담임 선생님이 말했다. “거제도 대우조선에서 사람을 뽑는다. 면접 보러 갈 학생 있니.” 교실은 조용했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월급이 많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결국 다음 날 면접을 보러 갔다. 인사부장은 질문을 던졌다. “자네 종교는 뭔가.” 교회에 나간 적은 거의 없었지만 얼떨결에 “기독교입니다”라고 했다. “교회는 몇 년 다녔나.”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합쳐서 6년입니다.” 열 명이 지원해 일곱 명이 붙었고 그 안에 내가 있었다. 부모님의 신앙을 내 것처럼 속여 합격을 얻어낸 셈이었다. 합격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교회 종소리만 들리면 가슴이 철렁했다. 거짓으로 얻은 기회라는 죄책감이 따라다녔다. 옷가지와 편지지를 넣은 종이 가방을 들고 고향을 떠났다. 버스는 대구 마산 통영을 거쳐 남쪽 끝을 향해 달렸다. 산이 바다로 꺼져 내리고 짠내가 바람을 타고 스며들었다. 거제 고현에 닿아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아주동 남문 앞에 섰을 때 바다 위로 거대한 골리앗 같은 크레인이 솟아 있었다. 1986년 10월 31일, 시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마침 라디오에서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흘러나왔다. 열여덟의 나는 그렇게 거제도에서의 청춘을 시작했다. 조선소는 거칠었다. 용접 불꽃이 사방에서 튀었고 쇳내와 먼지가 코를 찔렀다. 귀를 먹먹하게 하는 소음에 질려 떠나는 이들도 있었다. 산업재해로 목숨을 잃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불황이 닥치자 함께 내려온 친구 다섯은 차례로 거제를 떠났다. 곁에 남은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공장 기숙사 방은 점점 비어 갔고 작업장에서도 익숙한 얼굴이 사라졌다. 나도 갈등했지만, 조선소에서 버티지 못한다면 세상의 어떤 일도 감당하지 못하리라 여겼다. 한겨울 옥포만의 바람은 거칠었지만 분지골에서의 유년 시절을 떠올리면 견딜 만했다. 월급을 받으면 내가 쓸 것만 빼고 10만원씩 고향으로 보냈다. 집안 형편에 보탬이 된다는 사실이 뿌듯했다. 2년 반 뒤 군대에 다녀와 다시 현장에 복귀했다. 선원들이 생활하는 거주구를 만드는 목의과로 발령받아 칸막이와 가구를 설치하는 일을 맡았다. 무거운 자재를 옮기고 유리 섬유 패널을 자르면 사방으로 가루가 날렸다. 하루 열 시간 가까이 마스크를 쓴 채 중노동을 버텼다. 폐는 점점 약해지고 호흡은 힘들어졌다.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을 때마다 간신히 숨을 들이켜며 하루하루를 넘겼다. 몸은 지쳐 갔지만 꾀부리지 않았다. 군함과 잠수함 건조를 시작하며 보온 작업을 맡았다. 나는 조선소에서 숙련된 일꾼으로 자라갔다. 매년 시월의 마지막 날이면 처음 거제도에 발을 디딘 순간을 떠올리며 ‘잊혀진 계절’을 불렀다. 하지만 흥얼거림이 더해질수록 내 몸은 무너지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잔해가 내 달리기의 요람이 될 줄은. https://cafe.daum.net/ssj0643/dREi/2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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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