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이재인 (1~3) 한평생 문인의 길 걷다 문인인장 모아 박물관 열다
[역경의 열매] 이재인 (1) 한평생 문인의 길 걷다 문인인장 모아 박물관 열다
박윤서2026. 6. 8. 03:06
농부의 아들로 문인이 되기까지
내 의지나 재주로 된 적 없어
기도 제목 바뀔 때마다 길 열려
내 삶은 주님 손길에 항복한 여정
이재인 한국문인인장박물관장이 최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공원에서 두 손을 모으고 환하게 웃고 있다. 신석현 포토그래퍼
밭으로 치면 한 뙈기나 될까. 충남 예산 광시면에 스물한 평 남짓한 작은 박물관을 운영한지도 26년이 됐다. 한국문인인장박물관이라고 이름 붙이기에 부끄러운 크기지만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름 알찬 구석이 있다. 입장료 대신 인장(印章)을 하나씩 모아온 것이 어느새 1000점을 넘겼다. 흥선대원군 이하응부터 김소월, 김유정, 청록파 3인과 서정주 박경리까지를 말한다면 알찬 구석이 있다는 내 말에 조금은 설득됐을 것이다.
인장 하나하나에는 글 쓰는 사람 지문이 찍혀있다. 평생 글을 곁에 두고 살아온 내게 이 박물관은 단순한 수집품 창고라 하기엔 부족하다. 나와 비슷한 길을 걸어온 이들의 발자취를 담은 곳이다. 나이 여든이 됐지만 아직도 현역인 탓에 아침 9시반이면 박물관 문을 열고 오후 4시반에 닫는다. 이후에는 책상 앞에 글을 다듬다가 교회 예배당으로 향한다.
본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농사일은 내게 어색하지 않다. 농사는 틈틈이 짓는데 요새는 서리태 콩에 들깨, 감자를 심어 놨다. 가을에 거둬 들기름도 짜고 동네 집집마다 돌며 한 봉지씩 안겨주니 그 재미에 흙을 만진다. 나이가 들면 체력이 자꾸 주는데 매일 새벽 예배를 드리다 보니 절로 기력이 솟는다. 이 나이 먹고도 밭 갈고 얼마 전 새롭게 나올 책도 탈고했으니 말이다. 노인이 되면 네 가지 고통이 따라온다고들 한다. 가난 병 외로움 그리고 할 일 없는 괴로움이다. 성경에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 했으니 난 여전히 손을 놓지 않는다.
살림 밑천이나 되라며 머슴이 될 신세(?)였지만 하나님 인도하심으로 소위 돈 안 되는 문인의 길을 걷고 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경기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중·고교 국어교사와 잡지사 ‘전자과학’과 ‘월간축구’에서 기자로도 일했다. 지금의 교육부인 문교부 공보관에서 연구사로도 있었으니 이 나이 먹도록 글 쓰는 일이라면 안 해본 일이 없다. 그 길 한복판에서 1989년 발표한 소설 ‘악어새’가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르면서 비로소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충남 예산은 조선 최고의 문인이자 서예가인 추사 김정희 선생을 비롯해 예로부터 문학적 발취가 있는 전통 있는 문향(文鄕)이다. 고향인 이곳에 박물관을 세운 것도 그 까닭이다. 앞으로 풀어낼 이야기는 흙에서 시작해 글에 가닿은 한 인생의 기록이다. 그러나 그 길은 내 의지나 재주로 낸 것이 아니다.
‘애머슴 팔자를 면하게 해달라’던 우물가 기도에서 자동차 정비소를 떠나게 해달라던 천막 안의 철야기도로 기도 제목이 바뀌어 갈 때마다 길이 열렸다. 의심 많던 한 사람이 어떻게 주님의 손길에 항복해 왔는지에 대한 고백에 가깝다.
<약력>△1945년 출생 △경기대 국어국문학과 △전 경기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문인인장박물관 관장 △소설 ‘악어새’ ‘귀츨라프’ 등
정리=박윤서 기자 pyun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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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재인 (2) 열여섯 되던 해 애머슴 보내려는 아버지에 소신 발언
박윤서2026. 6. 9. 03:10
아홉 살에 입학했지만 공부 1등
연좌제 있던 시절 백부가 공산당 활동
아버지, 진학보다 애머슴 보내려 해
전도사에 배운 기도 덕에 희망 품어
이재인 한국문인인장박물관장이 1980년대 충남 예산의 고향 뒷동산에서 머슴살이를 할 뻔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지게를 지는 시늉을 하고 있다.
담임 선생님의 강요 섞인 권면은 믿음의 불씨를 던진 격이 됐다. 작은 불똥은 튀면서 거대한 건물을 불태우는 화염이 되기도 한다. 겨자씨만 한 믿음이 거대한 나무가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나는 아홉 살에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동기생들보다 두 살이나 늦은, 일종의 만학도였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열여섯 살이 됐다.
아버지는 열여섯의 나를 애머슴으로 보내버릴 계획을 갖고 계셨다. “중핵교를 댕겨봐야 넌 면서기도 못해. 그러닝깨 머슴살이 5년 허면 채소밭 한 뙈기허구 논 서너머지기는 장만할 수 있어. 거따가 집이나 짓구 살면 되닝깨 그리 알어라.”
아버지의 명령은 군주의 말처럼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당시 출석하던 광시침례교회의 전도사님이 내게 알려주신 대로 희망을 품고 기도를 했다. 당시 우리 집 안에서 아버지의 말씀에 무조건 복종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밥을 먹으라면 먹고, 잠을 자라면 잤다. 하지만 그날따라 나는 항변을 했다.
“전, 왜 면서기도 못한대유. 학교 공부도 1등이고, 급장이고, 한문도 ‘명심보감’을 뗐는디유?” 머리 알이 조금은 굵어졌기 때문에 항의조로 반문했다.
“안 되면 안 되지, 무슨 잔소리가 많어 이눔아. 저눔이 제 큰아버지를 닮었나.”
큰아버지는 동리에서 이른바 ‘변호사’로 불렸었다. 진짜 변호사가 아니라 변호사 사무소의 사무장 출신이셨다. 그분은 무엇보다 언변이 뛰어났다. 한문에도 능통했고 무엇보다 돈을 잘 쓰시는, 그래서 큰어머니에게 원성을 매우 자주 듣는 그런 분이셨다. 우리 집안에서는 ‘남로당’이라는 말이 금기어 중 하나였다. 큰아버지는 바로 6·25전쟁 당시 남조선로동당 계열의 공산당 핵심 간부셨다.
1950년 북한 공산군이 남침하자 남로당 핵심 간부였던 나의 백부, 그분은 그 길로 대한민국 장관의 가택을 곧바로 접수해 버렸다고 들었다. 내가 열세 살 때 할머니로부터 직접 전해 들은 이야기이니까 6·25전쟁 이후로부터 그리 오래된 이야기는 아니다. 그것이 아버지가 내게 “넌 면서기도 못 한다”고 하신 이유의 뒷사정이다. 그것은 이른바 ‘신원 특이자’였다. 큰아버지의 호적부에 붉은 글씨(朱書)로 ‘공산주의자’로 기록돼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당시에는 8촌 이내에 공산주의자로 분류된 가족이 있으면 공부를 아무리 잘하고 좋은 성적을 거둬도 공무원으로 임용될 수 없었다. 이른바 연좌제다. 그런 사정을 알고 계셨던 아버지는 내가 애초부터 미련을 갖지 않도록 나름의 배려(?)로 조치하셨다. 그래서 얼른 살림 밑천이나 장만하도록 머슴으로 보내버릴 생각이셨다.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마을에 사는 고령 신씨, 신숙주 대감의 후손인 신씨 종학(宗學)에 특별 입학했던 일이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동급생보다 나이도 많았지만 이러한 수학(修學) 덕분에 학급에서 1등, 학년에서도 1등을 쉽게 차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 전도사님께 배운 기도의 덕분으로 내 인생의 방향이 바뀌어 왔다고 나는 믿는다. “공부 열심히 하고 품행이 방정하면 언젠가 너의 앞길은 훤히 열릴 것”이라는 교회학교 선생님의 말씀을 굳게 믿고 어린아이의 순진함으로 기도했다. 그리고 어린아이를 그렇게 의식화시킨 선생님의 한마디는 실제적인 효력을 발휘했다.
정리=박윤서 기자 pyun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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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이재인 (3) 담임 선생님 권유로 간 교회, 거기서 믿음의 씨앗 싹터
박윤서2026. 6. 10. 03:06
사범학교 갓 졸업하고 부임한 선생님
“주일날 11시에 예배당 나와라” 당부
산길 걷고 공동묘지 지나야 있는 교회
나온 사람은 급장인 나와 여학생 1명
이재인 한국문인인장박물관장이 다녔던 충남 예산 웅산초등학교 전경. 그는 교회로 자신을 이끌었던 ‘라이타 돌’ 선생님을 이곳에서 만났다.
내가 주님을 영접한 시기는 초등학교 4학년 때이다. 담임 선생님이 새로 오셨다. 막 사범학교를 마치고 곧바로 교사로 부임한 선생님은 아직 앳된 얼굴에 키가 지게막대기처럼 1m 50㎝가 되지 않을 것 같던 분이셨다. 우리는 그분의 별명을 ‘라이타 돌’이라고 불렀다. 그분은 작은 체구였지만 오히려 오달진 데가 있는 선생님이셨다. 가끔 선생님은 학생들 앞에서 대놓고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침을 튀기며 강조하시곤 했다. 지금이라면 분명 항의 민원이나 신앙 강요죄에 해당될 죄목의 전도(?)였다.
당시에는 6·25전쟁을 막 치른 후라서 대부분 집에서 먹을 것이 부족했다. 청년들은 거의 징집당했고 살아서 집으로 돌아온 청년들은 많지 않았다. 돌아온 청년들은 대부분 상이군인이 돼 귀향한 처지였다. 그러니 농촌에서 일손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형편 속에서 담임으로 부임하신 선생님께서는 “너희들, 주일날 11시에 예배당에 나오라”고 하셨고 나는 약간의 외압에 부담을 느끼며 예배당에 처음으로 발을 디밀었다.
그런데 웬걸, 교회에 나가보니 학급원 59명 중에 교회에 나온 사람은 급장이었던 나와 어머니가 집사님이었던 여학생뿐이었다. 그러니까 대략 96%가 불출석이었다. 물론 당시 아이들은 일요일에도 집안 심부름을 하거나 산에 나가서 나뭇잎을 긁어 오는 노동(당시 표현으로 낭구 구하는 일)을 해야만 하던 시절이기는 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겨자씨만 한 믿음이 있다면 산을 옮길 것이고, 뽕나무가 바다에 심기울 것이며, 새들이 깃들일 만한 큰 나무가 될 것이라고.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주마간산 격으로 교회에 출석했지만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그때 간간이 주워들은 말씀과 성경 속 이야기는 훗날 내가 예수를 믿고 믿음을 갖는 데 적지만 아주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젠 그 나무가 고목(枯木)이 돼 버린 셈이다.
내가 태어나서 눈을 뜬 공간은 충남 예산군 광시면 운산리 357번지였다. 뫼 산(山)자가 두 번씩이나 연이어 들어간 곳이니 과히 외진 곳이 틀림없다. 지금도 우리 마을은 시내버스나 마을버스가 다니지 않는 농산촌이다. 당시 이 마을에도 예수를 믿는 한 가정이 살고 있었다. 그분은 어디에서 어떻게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내가 볼 때는 굳센 믿음을 지닌 분들이었다. 일찍부터 선교사님들의 전도를 받아들였던 것 같다.
이 댁에는 선교사님이 왕래하셨는지, 율무를 밭에 파종하곤 했다. 어린 내게 그것은 매우 신기해 보였다. 그분들 밭에는 당시로써는 드물던 빠알간 토마토도 주렁주렁 열리곤 했다. 나와 친구들은 그분들의 밭에서 처음 보는 신기한 것들을 구경하느라 가끔씩 걸음을 멈추곤 했다. 게다가 그 집에는 하얀 저고리에 검은색의 치렁치렁한 치마를 입고 머리를 길게 딴 누나의 모습이 있어 더욱 신기했다. 손에는 피가 묻은 것처럼 빨간 물감을 들인 가죽 표지의 성경책도 들려 있었다.
당시 시골 촌구석에서 그 누나의 모습은 적어도 내게는 선녀처럼 보였다.
그 누나가 다니는 곳이 우리 마을 광시침례교회였다는 걸 알게 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 교회에 가려면 산길을 걸어 공동묘지 길을 지나야만 됐다. 15리(약 6㎞)쯤 되는 거리였다. 어린 내가 그 교회에 다니게 됐던 것은 바로 담임 선생님이셨던 ‘라이타 돌’ 그분 덕분이었다.
정리=박윤서 기자 pyun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