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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일국의 국모가 처참하게 시해되는 사건이 있었다. 조선의 26대왕 이였던 고종의 비 명성황후. 한 동안 우리의 기억 저편에 있던 명성황후의 존재는 1995년 뮤지컬 명성황후, 2001년 TV사극의 열풍을 타고 이 시대에 다시 등장한다. 매체를 통해 가깝게 느끼고는 있지만 그녀의 외모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부분은 알려진 사실이 드물다. 아직까지 명성황후 사진의 진위에 대한 논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명성황후의 일생
본명 민자영. 조선 철종당시 증영의정 민치록의 외동딸로 태어나 9세 때 고아가 되어 어렵게 생활을 하다 세도정치의 기반을 없애기 위해 중전을 물색하던 대원군의 눈에 띄어 16세에 왕비로 간택되었다. 이 후 총명함으로 고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대원군의 섭정을 물리치면서 정치의 주도권을 잡게 된다.
쇄국정치를 고집하던 대원군이 물러나고 조선의 문물개방은 빠른 속도로 이루어졌다. 외국을 통해 유입이 된 새로운 사상과 문물은 조선이 새로운 시대에 눈을 뜨게 하는 반면 수구세력들의 불만은 늘어나고 일본상인들의 농간으로 백성들의 반일감정은 고조된다.
결국 별기군 특별우대에 반발하여 무위영의 군사들은 난을 일으켜 민씨척족과 황후의 처형을 요구하는 사건인 임오군란이 일어나 대원군이 다시 등장을 하게 되고 황후는 변장을 한채 피신을 해 가까스로 목숨을 구한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다시 정국의 중심에 대원군이 등장을 하고 큰 위협을 느낀 조정의 기득권층은 청나라 텐진에 주재하던 영선사 김윤식에게 통지를 하여 청국의 조정을 요청하였다.
청국은 종주국으로써 속장을 보호해야한다는 명분으로 일본에 빼앗긴 조선의 기득권을 되찾으려 군사를 이끌고 들어와 내정을 간섭하기 시작했으며 이때 대원군을 납치해 청국으로 호송을 하고 다시 황후는 궁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후 10여 년간 일본과 청나라의 각축전은 청일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나 이미 노쇄한 청나라는 일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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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항후가 시해된 장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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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후 일본은 시모노세끼 조약과 갑오경장을 요구하여 조선의 지배기반을 확고하게 구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러시아, 불란서, 독일을 회유하여 일본의 기득권 탈취를 골자로 하는"삼국간섭"을 성사 시킨 명성황후에 의해 일본은 조선을 다시 잃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결국 일본은 대세를 뒤집기 위해 "여우사냥" 이라는 작전명 아래 황후의 암살계획을 수립하고 1895년 10월8일 사무라이 다카하시 겐지의 칼에 의해 파란 많았던 일생을 마감하게 된다.
명성황후의 사진 논쟁의 시작 1990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작한 중학교 국사교과서에는 명성황후로 소개되는 사진이 등장을 한다. 하지만 1997년 개정판 교과서에는 명성황후로 소개된 사진은 삭제가 되고 왕비가 시해된 장소 옥호루의 사진만이 게재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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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에 실린 사진의 진위 논쟁이 거세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당시 교과서에 실린 사진은 당시 주한 이탈리아 영사로 재직하던 카를로 로제티가 동료 사진작가 가리아초와 함께 서울을 돌아다니며 기록한 서적 "꼬레아 꼬레아니"(1904년)에 등장하는 사진이다.
이 후 사진은 두 권의 책을 통해 알려진게 된다. 어의로써 명성황후를 보좌했던 외국인 언더우드 여사가 한국에서의 생활을 토대로 작성한 "한국에서 토미 홈킨스와 더불어 보낸 세월" (1905년 292p)이며 다른 한 권은 고종의 정치 고문이었던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 박사의 저서 "대한제국멸망사" (1906년 138p)이다.
하지만 이 두 권의 책 속 어디에도 사진 속 인물이 명성황후 라는 설명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사진 아래 [정장을 한 궁중 여인] 이라는 짧은 설명만이 나타나 있을 뿐이다. 서거 한지 몇 년이 지나지 않은 일국의 국모 사진이 진짜다 가짜다. 라는 사건에 다시 휩쓸리게 된 것이다.
당시 명성황후의 면모를 알던 사람들은 왜?, 사진의 진위여부를 밝히지 못한 것일까?
명성왕후를 만난 사람들 명성황후는 어떤 외모를 지니고 있었을까?? 현재 황후에 대한 사료가 전해지지 않는 상황에서 외모에 대한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녀를 만난 사람들의 증언이 실린 글이 전부이다.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이였던 신동식 위원은 칼럼 "취재의 한께 놓쳐버린 이야기들"에서 명성황후의 외모를 짐작한 만한 잛은 글이 소개 된다.
"조선조 23대 순조의 셋째 딸 덕온공주 외증손녀 윤백영 할머니는 60년대 초 궁중관련 문화재 고증, 보전 활동에 소리 없이 공헌한 분이다. 자그마한 체구에 총기가 대단하고, 눈이 밝아 문화재관련 취재 때 여러 번 도움을 받았다. 윤씨는 덕온공주가 직접 입었던 당의를 보관해 오다가 복식학자 석주선 교수에게 기증했고, 단국대에 석주선 박물관이 개관되며 이곳에 소장케 한 분이다. 이 분이 어렸을 때 집안에서 명성황후를 뵌 어른들 말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명성황후는 얼굴이 갸름하고, 콧날이 오똑하고, 입매가 야무지고, 눈이 가늘고, 살비듬이 흰 분이었는데 단지 눈동자에 실핏줄이 서 있어 '언짢은 상'으로 어른들이 걱정했다고 한다. 제 명에 못 갈 흠이라는 말이 돌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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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과 순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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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후를 만난 또 다른 인물로는 영국 고위성직자의 딸 이였던 비숍여사가 있는데 그녀는 1893년 조선을 처음 방문한 이래 1897년 까지 4차례 조선을 답사했다.
그녀는 조선 방문기간 중 명성황후를 4차례 만났으며 그녀가 남긴"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을 통해 명성황후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다.
“왕비는 마흔 살을 넘긴 듯했고 퍽 우아한 자태의 늘씬한 여성이었다. 피부는 너무도 투명하여 꼭 진줏빛 가루를 뿌린 듯했다.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예지가 빛나는 표정이었다. 대화가 시작되면, 특히 대화의 내용에 흥미를 갖게 되면 그녀의 얼굴은 눈부신 지성미로 빛났다. 나는 왕비의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에 감명을 받았다. 나는 그녀의 기묘한 정치적 영향력, 왕뿐 아니라 그 외 많은 사람들을 수하에 넣고 지휘하는 통치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라 전한다.
비숍여사의 글에는 황후의 외모 뿐 아니라 성품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을 한다. 외모가 아닌 성품에 대해서는 황후를 만난 다른 사람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는데 먼저 영국의 "데일리 메일"지 조선특파원 맥켄지 기자는 황후를 주변사람들에게는 관대했으나 적과는 타협하지 않는 강한 여성으로 묘사를 했으며 당시 주조선 미국 서기관 이였던 윌리암 샌즈 역시 의지가 강한 시대를 앞선 한 명의 정치가로써 황후를 보았다. 또한 황후 시해사건을 지휘했던 일본인 미우라 고로 공사도 "황후는 재능이 뛰어났으며 좀처럼 빈틈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며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렇듯 간간히 남아있는 자료를 통해 황후의 모습을 추론해보면 나이에 비해 무척 젊은 피부와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정치가로서의 역량 또한 무척 뛰어난 단아한 외모와 풍부한 학식을 겸비한 여인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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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은 황후를 매우 신뢰하고 사랑했으며 국정일을 의논할 수 있는 동반자로 생각했다. 여성의 활동이 극히 제한 되었던 시절 수렴청정 -나이 어린 왕이 성인이 될 때까지 왕대비 또는 대왕대비가 국정의 일을 대리로 처리하던 것- 이 아닌 왕의 동반자로써 막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기록을 통해서도 국내외 정세를 보는 식견 과 현명함이 뛰어난 여성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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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것이 진짜인가? 현재 명성황후라 주장하는 사진은 프랑스 주간지 ‘륄뤼스타라시옹’(L’ILLUSTRATION) 1895년 11월2일자 빌타르 드 라게리(Villetard de Laguerie) 기자의 기사에 실린 명성황후 삽화, 1904년 프랑스 잡지 ‘르 뚜르 듀 몽드’에 실린 ‘일본 과격분자에 의해 살해된 한국의 황후’ 사진, 초 중등 교과서에 삽화로 실려 있는 명성황후의 어진(御眞), 로제티가 촬영한 그의 한국 여행기인 ‘꼬레아 꼬레아니’(1904)에 실린 사진, 1920년 이승만의 [독립 정신]에 실린 사진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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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륄뤼스타라시옹'에 등장하는 삽화는 "한국의 비극"이란 제목과 한국의 왕비라는 설명과 고종, 대원군의 삽화와 함께 실린 점을 들어 명성황후일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사진을 게재한 빌타르 드 라게리 는 청일전쟁(1894~1895)때 종군 특파원으로 극동에 파견되었던 인물이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무렵 1895년 3월경 제물포항을 거쳐 조선으로 들어와 2년 가까이 조선에 머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체류기간동안 기자는 자신이 보고 겪은 한국의 상황을 정리해1898년 "한국, 독립이냐? 러시아, 또는 일본의 손에 넘어갈 것이냐"로 발간을 한 인물이다. 이 책의 내용 중에도 명성황후의 삽화가 등장을 한다.
이 사진이 진본임을 주장하는 김준희 (前 건국대 교수)의 글을 인용해보면 "책의 47장의 삽화 가운데 4장의 왕실사진 삽화가 포함이 되어있다. 사진에는 명성황후와 고종. 대원군.왕세자(순종)가 등장한다. 특히 왕세자의 사진은 고종을 앞에 모시고 찍은 것이고, 나머지 명성황후와 고종.대원군의 사진은 독사진들이다." 현재 국내. 외 알려진 고종, 대원군, 순종의 사진과 비교를 해 보면 "한국, 독립...."의 삽화와 동일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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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의 독립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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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프랑스 잡지 ‘르 뚜르 듀 몽드’에 실린 사진. 사진을 제공한 사람은 당시 한국을 방문했던 아장박사. 아장박사는 '한국여행'이라는 제목의 기사의 내용 중에 문제의 사진을 싣고 ‘일본 과격분자에 의해 살해된 한국의 황후’라 명시하고 있다.
아장박사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큰 관심을 가지고 현장 답사와 자료조사를 한 인물로 그의 열의를 볼 때 사진의 신빙성은 높다는 주장을 한다.
마지막으로 이승만의 [독립 정신]에 실린 사진은 진본임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부족해 진짜일 가능성이 낮다.
현재까지 알려진 명성황후 사진은 게재된 시기는 다르지만 이승만의 [독립정신]에 실린 사진을 제외하고는 모두 로제티의 "꼬레아 꼬레아니"에 실린 사진의 인물과 동일 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판단을 하고 있다. 결국 어느 것이 진짜인가를 말하기 이전에 로제티의 사진이 정말 명성황후인가 하는 문제만이 남는 것이다.
명성황후의 사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사진의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으로 한국의 중등학교 교과서에서 사라진 로제티의 명성황후의 사진은 모두 8종인 일본의 2001년 개정판 역사교과에는 여전히 등장한다.
올해 <다시 살아나는 국모, 명성황후>를 제작한 다큐코리아 제작팀은 "조선일보" 1935년 1월1일자에서 사진과 관련된 중요한 자료를 발견했다.
신문에 등장한 사진은 모두 2점으로 한 점은 논쟁이 일어난 로제티의 사진과 같으며 또 한 점은 이승만의 [독립정신]에 실린 사진과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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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는 "규중에 숨은 고흔 각씨" 라는 제목으로 두 장의 사진을 게재하고 있다. "고흔 각씨"는 황후가 아닌 궁녀를 말하고있다. 이런 내용은 당시 조선의 풍습을 일본에 소개하고 있는 "한국사진첩"(1905년) 역시 조선의 궁녀로 소개를 하고 있다. 한일합방을 기념으로 일본이 발간한 한국 병합 기념첩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사진을 다루고 있다.
최초 문제가 되었던 로제티의 <꼬레아 꼬레아니>와 언더우드 여사의 수기에도 역시 "정장을 한 궁중여인"이라는 설명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부분을 해석하는 학자들은 "황후를 모독하기 위해 궁녀의 사진을 사용했다"는 음모론, 항일운동을 약화시키기 위해 일본이 황후 사진을 궁녀사진으로 조작했다"는 역음모론을 주장하며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역사학자 문일평이 쓴 호암전집을 보면 "명성황후의 사진을 찾기 위해 당시까지 살아있던 황후의 상궁들을 찾아가 사진의 진위 여부를 확인한 결과 한결같이 부인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라는 내용이 실려있다. 또한 명성황후시해사건 후 고종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명성황후와 관련된 자료를 애타게 찾았다. 하지만 결국 변변한 초상화 한장 찾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면 왜? 고종. 대원군. 왕세자의 사진은 존재를 하는데 유독 황후의 사진만이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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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먼저 제기되는 의견은 당시 서양문물에 익숙하지 않던 상황에서 사진을 찍는 다는 것을 혼이 빠져나가는 행위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당시의 자료를 살펴보면 일반인들에게 스스럼없이 촬영이 이루워진 것은 1900년경 부터이다. 하지만 서양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궁내에 외국인을 두어 정보를 수집할 정도의 황후였다면 이 것은 정당성을 주장하기는 부족하다.
다음은 황후의 노출기피증 때문이라는 의견이다. 대원군과의 목숨을 건 정치적 투쟁 속에서 친족들이 암살당하는 사건들이 일어나면서 황후의 대인기피증 과 노출기피증은 심해져 일체의 초상화 및 사진을 찍지 못하게 했다는 것 이다.
하지만 이 역시 황후를 가깝게 모신 언더우드 여사가 그녀를 묘사한 괘활하고 소박한 모습으로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는 내용을 보면 그 역시 정답은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재까지 의견 중 가장 타당성이 있는 일본인의 명성황후 관련 자료를 모두 불태웠다는 주장이다. 시해사건 직후 일본정부는 자국의 개입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황후와 관련된 내용을 발설하는 자를 시국사범으로 체포해 처형했다.
이 과정에서 황후와 관련이 있는 자료들이 함께 소각이 되면서 현재 명성황후의 사진 한장, 정확한 사료조차 존재 하지 않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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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장을 한 흥선대원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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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것이 명성황후의 사진 1895년 10월 일본의 낭인 손에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시신조차 불태워져 버린 명성황후.
죽음 이후 아직까지 사진의 진위여부에 대한 공방은 끊이지 않고 있지만 황후의 사진 한 장은 당시를 살아가던 사람들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큰 의미로 부여하지 못한다.
"이 사진이 명성황후의 사진입니다."라는 발표 보다는 명성황후의 삶, 업적, 그리고 안타까운 죽음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어차피 사진이라는 것이 이미지를 담고 만드는 것이라 생각 할 때 존재의 유무조차 파악 되지 않은 사진의 진위논쟁 보다 명성황후의 이미지를 바르게 정립시키는 것이 우선이다.
흔히 "민비" 라 격하되고 비하되는 호칭, 권력에 집착한 여인, 민씨 세도정치의 주범, 투기와 질투가 심했던 여인 등 과 같은 부정적인 인식은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및 조선 침략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한 식민사관에서 발생한 것이다.
민족사관에 기초해 우리역사를 바로보고 민족의 자긍심을 회복하는 것. 그렇게 바로잡고 정립된 이미지 그 자체가 눈에 보이는 사진 이상의 사진으로써 가치일 것이다.
▶명성황후 숭모회에서 공식적으로 사용하며, 여주에 있는 명성황후 기념관에 걸려 있는 명성황후 영정이다.
자료 협조/ 국립문화재 연구소 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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