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있잖아."
??
"저기..."
어그를 끄는 게 나인 줄 알았지? ㄹ혜어로 어그를 끄는 건 바로 내가 아닌 오세훈이다. 뭐지? 옥장판이라도 사달라는 건 아닐 테고.
"넌 이상형이 뭐야?"
쟤가 나한테 이상형이 뭐냐고 물어보는 걸 보면 나쁜 상황은 아닌데...
솔직히 좀 어이가 없었다.
정확히 기억한다. 2학년 때 여자 애들끼리 서로 친해지려고 할 때, 체육시간에 이상형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분명 농구 골대 앞에 있던 오세훈은 나보고 '너는 이상형을 따지면 안 되는 기집애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언제까지 꿈만 꾸고 살 것이냐고, 제발 현실을 직시하라는 말도 덧붙였었다.
"그런 건 왜 물어봐? 전에 네가 나보고 했던 말 기억 안 나? 넌 정확히 나보고 이상형을 따지면 안 되는 사람이라고 했어."
"그래서 내가 그... 있잖아... 저기... 하고 수줍게 물어봤잖아."
와씨. 대박이다. 그건 수줍은 게 아니라 ㄹ혜어라니까?
"이상형 뭐냐고."
깨갱...
흠... 이상형? 외모 같은 거 말하는 건가?
난 원래 아청하면서도 세련된 남성스러움을 지닌,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말도 안 되는 남자를 좋아하긴 하는데... 우리 집 가풍이 잘생기면 우선 좋아하고 보는 분위기이다 보니, 요즘의 내 이상형은 당연히 내 앞에 앉아 있는 바로 그대가 맞긴 하다만...
"얼굴?"
"뭐든. 얼굴이든 성격이든..."
그건 바로 너! 라고 하고 싶은데, 아직 그렇게 들이댈 단계는 아닌 것 같고. 이걸 어떻게 말한담? 누구처럼 앙큼한 말로 오세훈 속을 뒤집어 놔서 현재의 이 아리까리한 관계를 좀 뒤집어엎어 버리고 싶지만, 아시다시피 난 연애는커녕 그나마 썸 타던 것도 오세훈 때문에 다 망했었다. 한 마디로 경력이 1도 없다. 요즘 왜 이렇게 경력 있는 신입을 찾는 시바새끼들이 많냐고 자소서를 쓰던 언니가 욕을 씨부렸는데, 그건 취업시장에서만 유행하는 분위기가 아니었구나!
전래 끼부리고 싶은데, 우리 집에 그런 유전자는 애초부터 없는 상황이고... 생각나는 건 왠지 모르게 7차 교육과정 윤리 시간에나 들었을 법한 그런 말들뿐인데.
"몸과 정신이 튼튼한 사내."
난 최대한 돌려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오우... 너 보기보다 되게 적극적이다."
저런... 역시 한국인 엄마가 키운 한남 아니랄까봐 굉장히 본인에 대해 긍정적이구나. 근데 넌 잘생겼으니까 그래도 돼! 그리고 넌 몇 번을 말했지만 정말 보기 드문 한남이란다.
"그러면 넌? ....넌 이상형이 뭔데?"
일부러 먼 곳을 보며 말을 좀 흐렸다. 별로 안 궁금한 것처럼 보였겠지? 앞에 앉은 그의 이상형이 ㄹ혜의 현남친보다 더 궁금해 죽을 것 같지만, 손톱도 보고 딴청을 좀 부렸다. 가진 것이라곤 자존심과 이 육중한 몸뿐인 나는 이런 식으로라도 센 척을 하고 싶었다.
내가 오세훈을 좋아하는 걸 인정하고 난 뒤 주위의 남자들에게 가장 많이 물어본 것이 바로 '이상형'이다.
그리고 그들은 한결같이 '예쁜 여자'라고 했다. 그와 더불어 그들은 한남 주제에 지 몸값이 똥값인 것도 모르고,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여자가 제 여자였으면 좋겠다는 말도 함께 씨부렸다.
어쨌든 비쥬얼은 다르지만 오세훈도 한남국에 속해 있는 국민이다. 도대체 '보호 본능'을 일으키는 여인이 어떤 여인인가, '보호 본능'을 일으키려면 어떤 태도를 취해야만 하는가, 궁금하여 나의 친구들에게 물었더니 그녀들은 이렇게 말했다.
"차도로 걷는 건 어때? 중앙선과 차도를 오가면서 걸으면 아슬아슬하고 더 좋을 거야!"
"아니야. 불에 뛰어 드는 게 더 보호본능이 강하게 들을 것 같은데?"
"아니야. 차라리 벽에 이마를 존나 찧어 봐."
제 정신이 아닌 년들. 그런 건 사랑이 아니라 보험사기극이란다, 애들아.
이러니 내가 초딩이 판치는 지식인에 매달리지 개 같은 내 인생. 인복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을까.
"한결같이 예쁜 여자."
씨발 난 존나 아니잖아....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나는 내 주제를 안다. 나는 다른 의미로 한결같을 수는 있어도, 한결같이 예뻤던 적이 없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가 내 인생 최고의 리즈 시절이었지...
이 몸은 이렇게나 절망의 밑바닥을 기고 있는데, 앞에 있는 오세훈은 한결같이 예쁜 여자가 그리도 좋은지 얼굴이 방싯방싯했다. 황당하다. 그냥 예쁜 것도 아니고, 너는 여자가 한결같이 예뻐야 한다고 말했니? 내 팔자야. 난 그냥 문재인 찍으려고 태어났나봐. 투표나 존나 열심히 해야지.
[지이잉-지이잉-]
"세훈아 너 전화 와."
"스팸이야."
"이름 뜨는뎅..."
"스.팸.이.라.고"
분명 14황수정이라고 뜨는데...?
____
오세훈을 좋아하게 되면서 신경 쓰게 되는 것들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오세훈의 주위를 둘러 싼 '여자'다.
고등학교 때만 해도 그는 여자들에게 엄청 인기 있는 남자는 아니었다.
물론 1학년 때는 나 같은 잔챙이들도 오세훈을 동경하다시피 내심 마음이 있었지만, 2학년 때부터는 돈 많은 엄석대처럼 반 전체를 휘어잡는 그의 진짜 성격 때문에 그 인기는 거의 멸종 상태가 되었다. 뭐, 어땠는지는 잘 아실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오세훈네 과에는 오세훈이 그 더러운 성격을 드러낼 만큼 걔를 짜증나게 하는 사람도 없고, 급식이가 입는 교복이 아닌 그 핫바디를 적절하게 노출해주는 비싼 명품 옷이 그를 휘감고 있다. 심지어 그는 화려한 외제차까지 있는 사람이다. 학벌도 완벽하고 그의 미래가 그 과에서 가장 창창할 것이라는 건 샤대학 비둘기 친구들과 청설모 친구들도 다 알고 있다.
또한 이런 외적인 것이 아니어도 오세훈은 기본적으로 다 갖추고 태어난 '강한' 남자다. 그 여왕벌보다 더 여왕벌 같은 성격을 모른다고 하시진 않겠지. 확실히 입 닥치고 세상만사에 무심한듯하게 구는 그의 겉모습만 봤을 때는 애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아주 매력적으로 보인다.
굳이 주먹을 쓰지 않아도 제일 센 사람. 이런 남자를 '별로'라고 생각할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될까?
그리고 현재 문과인 학생이 갈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센 과를, 과연 학문만 열심히 연구하기 위해 입학한 학생이 몇 명이나 될까?
결국 오세훈에게 끌리는 건 불가항력, 뭐 이런 것이다. 그러니 걔가 딱히 노력하지 않아도 언제나 주위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한 것이고.
에휴. 새삼 내가 얼마나 후달리는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네. 어쩌다 쟤를 좋아하게 됐을까. 열 번 찧어 안 넘어 간다는 나무 없다는 속담이 있지만, 난 나무 앞에서 얼쩡거릴 나무꾼의 자격도 안 되는 것 같기만 하다. 다들 도끼로 후려치는데, 나 혼자만 맨 손으로 후려치는 느낌... 흑흑
황수정이 오늘 한 번만 전화 온 것은 아니었다. 어쩜 그 과에는 여자도 그렇게 많은 건지.
지연이, 정아, 은주, 소연이 등등. 뭐 가끔은 과대 형도 있긴 했지만, 함께 있을 때 오세훈네 과 여자들에게 연락이 오는 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도 그 중에서 가장 끈기있는 여성은 바로! 황! 수! 정!
한 번은 하도 전화가 오기에 너무 신경 쓰여서 전화 좀 받으라고 한 적이 있다. 됐다고 하는 그였지만, 무음으로 돌려도 계속해서 번쩍거리는 휴대폰은 나까지도 정신 사납게 만들었지 뭔가.
결국 오세훈은 전화를 받고... 튀어나온 그녀의 음성을 듣고 난 정말 까무라치는 줄 알았다.
서울대 씩이나 다닌다는 사람이 애샠키 흉내를 내며 끔찍한 애기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가는데, 왜 오세훈이 전화를 피하는지 통탄스러울 정도로 공감했었다. 아니, 내가 저 스펙이면 진짜 존나 멋있는 여자로 살 텐데 왜 저러고 살지? 흉자 롤롤이 샤대학에 있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요.
그는 시종일관 서울대 애기동자에게 '어', '아니'로 대답을 일관하다, 급기야 급똥이 왔다는 대답으로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나는 괜히 쓸데없는 짓이 하고 싶어 졌다. 바로 그 혹시나 하는 상황 때문에.
너무 걱정이었다. 연애고자인 나도 우리가 그냥 단순히 놀려고 만나는 게 아닌 건 아는데, 조급한 마음과 함께 동반되는 이기적이고 못난 마음이 얼굴 한 번도 보지 못한 황수정을 미워하게 만들었다. 아무 사이도 아닌데 누굴 미워하는 나도 싫지만, 불안하고 남자 따위에 욕심이나 부리는 나는 괜히 심술 나서 오세훈을 떠봤다.
"혹시 썸녀야?"
여주야 제발 좀... 제발 그 입 좀 닥쳐라. 이런 급 낮은 조급한 행동이야 말로 을이 되겠다고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왜 너는 항상 사고를 치고 수습을 하려고 하는 거니!
"그게 뭔데?"
그걸 왜 모르지? 아흔 먹은 우리 할머니도 일곱 살 연하인 최씨 할배랑 썸 탄다고 나에게 말했었는데?
"너 썸 탄다는 말 들어본 적 없어?"
"알아."
"근데 썸녀를 몰라?"
"너 돌았냐?"
"....네?"
"내가 얘랑 썸 탄다고? 너 일부러 그래?"
"아니... 나는..."
"나 진짜 요즘 착하게 살라고 하는데 왜 자꾸 내 속을 뒤집는 거지?"
"아니... 전화두 너무 자주 오구... 애교도 부리구... 내가 들으려고 들은 건 아닌데, 사실 그렇긴 하잖아."
아우씨. 쟤는 왜 저렇게 화를 내고 그래? 내 속도 모르고 엉엉...
"제 멋대로 전화하는데 뭐 어쩌라고."
"남자들은 꼭 여자 혼자 그러는 것처럼 말하더라? 다 아는 척 보듬어 주고 꼭 결정적일 때 내빼더라. 너도 뭔가 틈을 준 거 아냐?"
"뒤지고 싶나봐. 요즘 내가 널 너무 많이 봐 줬지?"
"죄송합니다...ㅎ 그냥 농이야 농~ 아휴~ 이 케이크 참 달고 맛있다~"
살벌한 얼굴로 살인예고를 날리는 오세훈이 무서워 짜지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어디서 기담 엄마귀신이 내는 것과 같은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희희"
내 앞에 앉아서 그러지 말아주라. 난 당신이 웃으면 더 무서운 사람이에요. 한참을 귀신처럼 히죽이던 그는 나에게 결정적 한 타를 날리는 한 마디를 날렸다.
"너 질투하지."
다 들킨 것 같은 알량한 마음.
등신 쪼다인 나는 시뻘건 얼굴로 송강호급 메소드 연기를 하려 했지만, 오세훈은 이미 내 마음을 다 아는 것 같기만 하다. 웃는 그의 얼굴이 나를 놀리는 것 같아 무슨 말이라도 하려고 했지만, 사실인 걸 어떡해. 자식 같아서 그랬다고는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런 거 아니야. 난 다른 여자는 관심 없어."
"어머. 세훈아. 질투라니! 무슨 그런 말을 하고 그러니."
"귀신을 속여라. 너 요즘 진짜 귀여운 거 알지? 괜찮아, 괜찮아. 그런 질투는 계속 해도 돼. 나 속박 당하는 거 즐겨."
시발... 해치고 싶다 진짜... 누구를?
입방정이나 떠는 김칫국으로 절여진 나를!
"너 뭐 가지고 싶은 거 없냐? 존나 말만 해. 내가 다 사줄게."
내가 가지고 싶은 건 네 마음이야. 얼마나 좋을까.
마음을 숨기려 나는 일부러 퉁퉁댔다.
"뚱딴지같은 소리야. 몰라 진짜."
"너는 맨날 모른다고 하더라."
질투? 참나...
그래! 질투 맞아!
쟤네는 너랑 같은 학교에서 같은 수업도 받고, 엠티까지 가서 술 게임이든 뭐든 별 지랄 육갑을 다 떨 텐데, 난 그렇지가 못 하잖아! 심지어 너는 4년 동안이나 그 학교를 다녀야 하고... 난 왜 그렇게 공부를 안 해서 망상대를 간 거야.
그렇지만 아무 사이도 아니고 누구처럼 고백할 용기도 없으면서 말도 안 되는 독점욕이나 질투 같은 마음을 품는 것도 비참했다. 이래도 저래도 마음 품는 것조차 힘든 상대니, 매일같이 법의 레이더망에 걸리는 국민 비호감 으뜸이를 품는 덕후가 된 것 같기도 하고...
이리 됐든, 저리 됐든, 나만 설레고 나만 잠 못자...
"자꾸 귀염떤다."
웃는 얼굴이 이렇게나 귀여웠었나. 이제는 잘생기고 섹시하고 귀엽고... 너 혼자 다 해라 내 마음 다 뺏어간 나쁜놈아.
"뭐! 뭐!"
"너 얼굴 엄청 빨개."
"히트텍 입어서 그래."
"당황하는 거 봐라."
"아, 진짜 왜 그래!"
하지 마라면 좀 하지 마라!!! 팍씨!!!!!!!
내 의사표현을 해야겠다는 의지를 품고 놈을 노려보다가 나는 또 다시 심장이 철렁하는 경험을 했다.
반쯤 접힌 놈의 눈과 마주쳤는데...
가슴에 묘한 파문이 찌르르 번져서 나는 내가 놈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절실히 깨달은 것이다.
어떡하냐고 진짜...
____
본디 자신의 마음을 본 사람이 가장 궁금해 하는 것은... 바로 상대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알 것 같은 걸로는 내 만족감을 채울 수 없다. 보다 선명하고 정확하게, 아무리 분명해도 부족한 법이다.
오세훈을 떠보고 싶기도 하고, 그냥 콱 미친 척하고 앵기고 싶긴 한데, 고등학교 때 멋모르고 앵기다 나가떨어진 동창들을 생각하면 그런 것은 좋지 않은 방법이었다.
불안한 마음에 모 여초카페에 오세훈이 나에게 했던 말들과 우리가 겪었던 상황에 약간 더 살을 더해서 올렸더니 백퍼 관심이 있으니 예쁜 척하며 고백 받을 준비나 하라는 리플이 잔뜩 달렸다.
하지만 그는 과거에 내게 '줘도 안 가진다.'는 말을 했던 빌어먹을 경험이 있는 남자다. 하도 의심스러워서 한 20번쯤을 올렸더니, 나는 관종 논라너가 되어 강퇴가 될 뻔 했다.
"오! 여주 힘 좀 줬네? 오늘 그 친구 만나니?"
"오늘 발표 있어서요."
재수없는 상철 선배... 상철 선배는 우리 과에서 제일 입이 싸고 남의 시선을 병적으로 신경 써서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이다.
오늘은 기말을 대신하는 중요한 발표가 있다. 1학년이긴 하지만 과잠에 추리닝 차림으로 발표하는 태도를 아주 싫어하는 교수님이 전공 교수여서 나는 오늘 신입생 때 사고 잘 안 신었던 구두에 배가 쪼여서 잘 입지 않는 원피스까지 입었다.
강의실에 들어가니 동기들이 깔끔한 복장을 한 채로 발표 대사를 외우고 있었다. 교수님이 여간 깐깐하게 아니어서 과잠을 호크룩스처럼 여기는 몇몇 동기들도 졸업사진이라도 찍는 것처럼 복장을 갖추고 있었다.
"아 씨발...늦는 줄 알았네. 헥헥...."
지각할 뻔한 혜진이가 케니지 돋는 머리를 하나로 묶으며 앞에 앉았다. 사실 저 내연녀 같은 머리는... 치인트 홍설을 따라한 머리로 단지 주인이 혜진이어서 케니지가 연상되는 것뿐이다. 미용사 선생은 끝까지 말렸다. 결정은 내 친구가 했지.
곧 발표가 시작 되는데...
[지이잉-]
얼른 끝마무리를 지으려고 하는데...
"거기... 그... 김여주 학생?"
"눼?"
"그... 뭐냐... 내가 몇 번이나... 대포폰... 아니... 휴대전화 사용을 조심하라고 했는데... 지금... 봤어요... 가지고 나오길..."
"교수님. 한 번만 봐주세요. 엄마께 연락을 너무 안 했더니 제가 사망한 줄 알았대요... 한 번만요. 네?"
"...엄마?(동공지진)"
"네... 한 번만요..."
"그... 김여주 학생. 내가... 저번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일부러... 그 뭐냐. 그러니까 너희 어머니를 욕하는 건 아닌데 아휴...
그러니까... 내가 너희 어머니와는 다시는 통화하고 싶지 않다고 했는데... 이번 한 번만 봐주는... 아량을..."
아휴 다행이다.
"교수님!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저희 집에는 전화하셨잖아요!"
상철이 저 띱때끼가!
"...수업을... 진행합니다.(외면)"
우리 엄마 되게 좋은 사람인데, 박교수가 엄마를 좀 무서워하는 것 같단 말이지. 어쨌든 기말 대체인 피티는 전날 열심히 연습한 덕분에 잘 끝낼 수 있었다. 교수의 마지막 말로 수업이 마무리 되려고 하는데, 또 지잉-하고 카톡이 왔다.
[추우니까 어디 들어가 있어.]
새끼. 걱정은~ㅎ
"어련히 내가 알아서 하지이잉~"
"미친아 너 뭐 하냐; 허공에다 교태질하냐? 너 지금 코에서 음표 나오고 있어."
뒤에 있던 혜진이가 소름이 끼쳤는지 무안하리만큼 정색을 했다.
"오늘도 오경영 만나러 가냐?"
"어 ㅎㅎ"
"배알도 없는 년... 좋냐?"
"ㅎㅎ...."
얼마 전 소영이와 혜진이에게 오세훈을 좋아한다는 것을 난 아웃팅 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에게는 아직 말 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좀 힘들었다. 혜진이와 소영인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고등학교 친구들은 나보다 더 당했음 더 당했지, 과거의 레지나 세훈에게 당한 게 많아서 아직도 한을 품은 애들이 많았다.
특히 고3 시절 인혜는 에픽하이로 경력을 쌓고 뜬금없게도 무한도전 rps에 푹 빠져서 정형돈 총수로 이상한 글을 썼는데, 하필 그 공책을 오세훈이 읽고... 아휴... 더럽게 복잡한 일이 있는데다, 유진이는 오세훈이라면 자다가도 씨발거리는 애다보니...
만약 이 사실을 내 친구들이 알게 된다면... 느낌이 딱 그건데. 절교각?
수업이 끝마치자마자 지하철을 타고 오세훈이 쓰는 걸물 앞으로 가려다 급 소심해졌다. 여자친구도 아니면서 오버하는 것 같고, 누군가 나에게 누구냐고 물었을 때 대답할 명목이 '친구'라는 것은 너무나도 내가 오세훈에게 들이대는 것 같았다.
괜히 그랬다. 마음을 알지 못하니 왠지 걔는 나에게 '관심'정도인 것 같은데, 나 혼자 망붕이 된 것 같은 불안함...
그리하여 학교 주변의 어느 카페를 들어가서 기다리기로 난 결심했다. 카톡으로 오세훈에게 카페명을 보낸 뒤, 습관처럼 카페모카를 시키고 화장실을 가려는데 아놔 팍씨...
화장실이 옆 건물에 있는데다 열쇠로 열고 들어가야 한다고 했다. 보통 이런 경우 화장실이 겁나 춥고 후진데다 궁댕이가 엄청 시렵던데 팍씨팍씨팍씨!
하는 수 없이 열쇠를 받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 폰을 들어 확인해보니 끝난다는 시간이 다 돼서 잠깐 서서 오세훈에게 전화를 거는데...
어....? 오세훈이다!
손을 번쩍 들어 인사를 하려다 난 그만 손을 떨구고 말았다.
차에서 내린 오세훈이 코트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더니
휴대폰 액정을 확인하고 방긋 웃고는
액정에 입을 맞췄다. 난 이걸 뭘로 봐야 할까.
"....여보세요?"
[나 다 왔어. 조금만 기다려. 근데 어디라고?]
생텍쥐베리의 '어린왕자'의 한 구절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뭔지 아니?
흠...글쎄요. 돈 버는 일? 밥 먹는 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각각의 얼굴만큼 다양한 각양각색의 마음을 순간에도 수만 가지의 생각이 떠오르는데 그 바람 같은 마음을 잡는다는 건 정말 어려운 거란다.
정말 그런 것 같아.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만큼 힘든 일이 없을거야.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 주는 건 기적이란다.
오세훈이 나를 찾아왔던 날.
괴상하게도 재수가 좋았던 날.
로또가 당첨되는 기적은 찾아오지 않았지만, 적어도 생텍쥐베리의 기적은 찾아온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