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제국, 그리고 교육
멩이
울산한살림의 강연을 부탁받고 많이 망설였다. 많은 분들이 강연을 찾아올 때 어떤 전망을 만나고 싶어하지만 사실 나는 길을 가르쳐줄 손가락과 지도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원칙에 충실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고, 문제 자체보다 맥락을 보려 노력하는 사람이며, 시비를 가리는 싸움보다 포용과 인내를 강조하는 사람이고, 부단히 자연과 삶의 입장에서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일 뿐이다.
여기서 나는 내가 요즘 하는 생각들을 중심으로 우리가 처한 내외적 상황을 먼저 고찰해 보고자 한다. 우선 내적인 문제로 언어(/생각)와 외적인 문제로 제국(/공동체)을 생각해봄으로써 우리의 주소를 확인해보고 싶다.
언어(/생각)
부처에게 영원을 묻거나 우주의 끝 따위를 묻는 제자가 있었다. 부처는 말했다.
‘독화살을 맞은 이가 있어, 신음하면서 그 독화살을 누가 쏘았고, 왜 쏘았고, 또 무슨 독이 들어 있는지 알기 전엔 수술을 받을 수 없다고 고집한다고 하자. 그러면 그의 몸에 독이 퍼져 그는 곧 죽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고르기우스의 매듭처럼 얽힌 교육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백인백색의 대안과 해결이 제시되어도, 여전히 헤어나지 못하는 교육의 수렁.
혹 우리가 시작부터 잘못된 것은 아닐까? 기본 전제가 바르지 못한 것은 아닐까? 장님이 장님을 끌고 미로를 헤맨다. 때론 정답이 없는 것도 정답이 될 수 있다.
우선 교육의 전제를 의심하자.
우리의 생각은 말로 이루어진다. 더구나 시대의 중심어들은 벼리역할을 하고, 문법구조는 사유의 구조와 범위를 한정한다. 그것을 패러다임이라고 하든 에피스테메라고 하든 신화라고 하든 세계관이라고 하든 상관없다. 교육도 예외가 아니다. 문교부-교육부-교육인적자원부-교육과학기술부로 이어지는 부서 명칭에서 우리는 국민을 대상화한 권위적 국가계몽주의를, 나아가 인간을 물리적 자원으로 바로보는 산업자본주의를, 그리고 철저히 과학기술적 시각으로 이해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를 만나기도 한다.
교육이라는 말 자체도 문제가 있다. 교육은 철저히 ‘가르침’에 치우친 말이다. 교육과 공부는 180도 다르다. 교육은 철저히 ‘누가 누구를 가르친다’는 말이다. 주어인 ‘누가’는 옳고 바른 기준이 되며, 대상인 ‘누구를’은 그르거나 미숙한 교정 대상이 된다. ‘가르친다’는 말은 일방향적이기 때문에 불안하고, 강제적이다. 그런데 심각한 것은 주어인 ‘누가’가 옳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이다. 교육이라는 권위주의적 말이 정착하고 발휘되는 것은 교육이 국가의 통치 수단으로 자리잡으면서다. 특히 현대교육은 식민시대와 개발독재시대를 거치며, 상명하복의 근대화 이데올로기를 관철시키는 직접적 도구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교육의 근본문제를 고민하는 사람들은 대상화되고 소외된 ‘가르침’ 대신,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배움’에서 길을 찾고자 한다. 교육에 의해 왜곡된 ‘공부’와 ‘학습’의 원래적 의미를 찾는 일이 그래서 중요하다. 먼저 영어 수학 따위의 지식을 쌓는 것으로 오해받고 있는 ‘학습’을 살펴보자. 공자의 <논어>는 ‘학이’편으로 시작한다. ‘學而時習之 不亦說乎(학이시습지 불역열호: 배우고 지금 열심히 익힌다면 즐겁지 않겠는가)?’ 주어는 빠져 있지만, 여기에서는 학습의 주체인 ‘나’와 대상인 ‘그것’이 있을 뿐이다. 재미난 건 ‘習(습)’이라는 말인데, 그것은 현재형이며 새의 날개짓처럼 부단한 실천 행위와 체화 과정을 나타낸다. 공부(工夫)도 기예의 부단한 연마라는 의미에서 실천과 체화의 의미가 담겨 있다. 즉 유교적 전통에서의 공부나 학습이란 철저히 내가 몸으로 하는 것이다. 지금처럼 지식을 머릿속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몸으로 익혀 살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습득해야할 ‘문화’와 미숙한 ‘나’를 가정하면서 여전히 유교적 계몽주의라는 특별성을 띈 말일 수밖에 없다.
배움이란 이토록 인위적인 것인가? 하지만 내 입장은 자연의 모든 존재가 살아감 자체의 과정 속에 배우고 있다는 것이다. 공자가 학습의 인위적 노력을 강조했지만, 실은 학습 자체가 이미 자연적 과정이다. 살아가기 위해 우리는 적응하며 변화하기 때문이다. 학습은 살아가기 위해 삶을 통해 습득하는 모든 활동을 의미한다. 좀더 나아가면, 삶이 모든 것이다.
노자는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 했고, 수운은 ‘하늘은 불택선악(不擇善惡)’이라 했다. 이 말은 우리에게 문화적 선악의 가치판단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옹졸한 인간중심주의인가를 알려준다. 이는 교육을 바라볼 때도 중요한 시각을 제공한다. 우리는 전제를 의심함으로써, 이 시대와 자신을 상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의 그 많은 상수과 변수를 다 따지며 완성할 교육의 목표란 과연 뭘까? 우리를 어떤 사이보그로 만들잔 말인가?
편견 투성이인 ‘교육’에 집착하는 한 우리는 교육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자연은 ‘반드시’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생각에 갇혀 있는 언어적 세계관을 어느 정도 극복할 필요가 있다. 가슴의 직관으로 인식하는 세계도 있고, 몸과 감각으로 인식하는 세계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지나치게 대뇌중심의 세계에 매몰된 나머지 생각의 폐쇄회로에 갇혀 있다. 차라리 난 교육을 말하는 대신 ‘기쁘게 살라’고 말하고 싶다.
제국(/공동체)
교육문제를 학교에서만 풀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학교 자체가 가정과 지역의 공동체를 파괴하고 점령하는 제국적 도구로 기능하기도 했거니와, 이미 사회 전체가 학교화되어 정보화시대 평생교육의 시대가 도래했기 때문이다. 우린 아침부터 저녁까지 영화, 텔레비전, 신문, 컴퓨터 등의 매체 환경에 접속되어 쉼없이 정보를 받으면서 살고 있다. 이미 가상의 정보매트릭스 안에 태어나 자라고 사유하며 판단을 내린다. 우리의 의식과 삶이 이미 기계와 시스템에 접속된 상태로 존재하며 우리는 더 이상 자연인이 아닌 사이보그적 삶을 살고 있다. 더불어 개인을 보호했던 전통적 껍질인 가정과 마을 공동체는 물론 지역적 토착성도 사라졌다. 우리는 이미 소외된 개인인 자본주의적 생산-소비자로 태어난다. 그러니 하나의 시스템의 일부에 불과한 학교에 너무 많은 것들을 기대하지 말자. 절망하자는 말도 아니다. 냉철하게 문제를 살피고 가능한 것을 하자는 것이다.
좀더 단순화시키자. 문제가 없었던 시대도 없다. 모든 시대가 문제를 안고 있었고 인간은 그것을 해결하려고 투쟁해왔다. 그것을 나는 도구와 시스템의 비중이 점차 커지면서 벌어지는 비인간화 과정과 그에 맞서 개인의 자유와 자립을 옹호하는 인간화의 노력으로 이해한다. 둘의 대립이 인류사에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시점이 있다. 야스퍼스가 말한 인류의 4대 성인들이 나타났던 차축시대가 그렇다.
인간적 도구의 발명과 사용, 그리고 그것에 기반한 안정적 자급자족이 확보된 신석기문명은 이후 부족전쟁을 거쳐 제국을 발생시킨다. 신석기문명의 어느 단계에 도달하자 도처에서 제국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제국은 이질적인 것을 통합하고 아우른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의 성격을 규정짓는 것은 물리적 군사력만이 아니라, 가치를 통일하고 축적을 가능케 한 돈이다. 제국의 문명이란 그 돈으로 필요한 것들의 사용을 충당할 수 있는 도시문화의 풍요와 편리를 아편처럼 제공함으로써 유지된다. 제국의 성공과 성격은 돈과 닮았다. 추상화된 단순성, 표준화가 그것이다. 돈은 제국의 혈관을 도는 피다. 언어와 도량형의 통일 및 도로의 발달은 돈과 같이 제국의 혈관이며 피톨이다. 그런데 문제는 제국이 인간을 기능화하고 통제하는 권력(억압)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숫자로 표현되는 수리적 사고는 돈과 결합하여 세계를 완전히 포섭할 수 있는 언어로서 완벽하게 기능하고 있다.
차축시대인 BC 500년 ~ BC 0년 사이는 제국의 도시에서 인간의 타락을 경고하고 각성을 촉구하던 성인들의 활동이 두드려졌던 시기이다. 소위 4대성인과 종교들이 발생한 시대적 배경엔 상업의 발달과 제국의 탄생이라는 공통점이 존재하고, 그것 때문에 자연과의 균형이 깨어지고, 자급자족에서 나오는 자기신뢰와 고귀한 성품 상실이 뒤따랐다. 그들은 자연과 자급자족으로부터 멀어진 도시와 제국의 문명 타락을 경고하러 나타난 예언자들이기도 했다.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나 페르시아의 짜라투스트라, 인도의 자이나, 붓다, 중국의 노자, 공자 등이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는 거칠지만 BC500년을 기준으로 제국 이전의 역사와 제국 이후의 역사로 나눌 수 있지 않겠는가? 이는 구비전승의 선사와 제국 이후의 역사 시대로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 인도, 중국 등 거대 제국들은 각각 문명권을 형성하며 상호영향을 주고 발전해왔다. 하지만 15,6세기 유럽의 지리적 발견으로 기독교적 상업자본주의가 전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식민주의로 발전하고, 이어 19세기 과학의 발달과 산업혁명으로 상업자본주의는 산업자본주의로의 이행을 낳게 된다. 그리고 20세기말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IT산업의 발달로 전자자본주의가 가능해지고 전세계가 동시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것이 제국이 변태하고 업그레이드해온 방식이다. 지금이야말로 제국은 국가적 울타리를 벗어나 하나의 자율적 세계시스템으로 통합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전자네트워크로 지구를 학교화하여 개미의 페르몬 교환처럼 정보를 소통시켜 인간의 자율적 종속을 마련하여 스스로의 영속성을 확보한다.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이성의 기획으로 대별되는 근대기획 이후의 사회로, 탈근대(포스트모더니즘)사회라고 부를 수 있고, 탈근대사회의 사회적 담론을 형성했던 이들은 포스트모더니스트라고 불리우며 현재 들뢰즈와 가타리의 자장 안에서 머무는 듯하다. 한국사회의 대학가와 소장학자들 사이에 지배적 담론에 등장하는 다중, 다중지성, 우정은 이런 토양에서 비롯된다.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인 서울의 경우 구체적으로는 ‘수유+너머’의 고미숙과 ‘다중지성의 정원’의 조정환, 그리고 ‘하자센터’를 이끌었던 조한혜정, 그리고 친구론을 말하는 김영민 등이 보인다. 이들은 자본과 정보의 세계화한 전자제국시대에 네트워크의 자발적 다중지성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의 리좀(균사체)이 지구를 들어 올릴 아르키메데스의 점이 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자율지성의 다양한 네트워크와 동맹이 제국의 녹이 되어 제국을 변질시키고 싶어 하지만, 존재와 의식의 배반은 지속되고 제국의 속도는 늘 우리를 압도할 것이다. 이즈음에서 문득 ‘모든 희망을 버리라’는 지옥의 문에 새겨진 말이 생각나기도 한다.
하지만 자연과 자립과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인간화의 노력과 저항 또한 계속 지속될 수밖에 없다.
교육
그렇다면, 내외로 우리가 믿을 것은 무엇일까? 없다. 과연 없다.
대신 모든 희망을 버린 채, 아이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믿을 필요가 있다. 교육은 일종의 종교다. 잘못된 교육이 인간을 억압하는 타락의 종교라면, 타락의 종교가 되어버린 교육을 되엎기 위해 이제 종교적 자기극복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 교육의 방향전환-‘밖에서 안으로’가 아닌 ‘안에서 밖으로’-은 불가능하다. 천주교에서는 회심이라는 말을 쓰고, 동학에서는 다시개벽이라는 말을 쓴다. 낡은 술을 버리고 새 술을 붇는 일이다. 세계관의 변혁을 의미하기도 하겠지만 나는 보다 근원적인 통찰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회심(다시개벽)이라는 말을 쓰겠다.
우리에겐 참회가 필요하고 버림이 필요하며, 맡김이 필요하고 사랑이 필요하다. 교육의 방향전환은 기존 교육에서 실질적 힘을 행사해온 교사와 부모의 참회와 버림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어제의 나를 버리는 자기부인이 필요하다. 말과 제국 속에 너무나 확고해진 자신의 정체성 자체가 흔들려야 한다. 자신의 사유를 버리고 존재 그 자체에 직면할 수 있어야 한다. 직면하고 행복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유가 아닌 존재로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강요 없이 아이들을 품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자신의 무기력-아무것도 할 수 없음-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법도 알아야 한다. 이 황홀한 무력은 입적하신 법정스님이 말씀하신 버림으로써 모든 것일 수 있는 무소유의 마음과도 같다. 샘에 물이 차오르듯 거기서 맑은 사랑이 나온다. 사랑은 결과와 두려움을 모른다.
나는 90년대 암으로 사망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희생>이라는 영화를 잊지 못한다. <희생>은 시적 영상 속에 3차 대전이라는 인류의 재앙을 막기 위한 인간의 실존적 고뇌와 신화적 고투를 담은 영화다. 영화의 처음 장면엔 주인공 알렉산더가 실어증에 걸린 아들 고센과 말라죽은 나무를 심으며 아들에게 정성스럽게 물을 주면 꽃을 피울 수 있다고 알려주는 모습이 나온다. 마지막 장면은 고센이 물을 주고 나무 아래 누워 하늘을 올려보며 끝난다. 이는 실제 난장이 요한교부로 불린 사막교부의 일화로, 스승의 명령에 순종해 죽은 나무를 땅에 심고 멀리 있는 샘물을 긷기 위해 저녁에 떠나 새벽에 돌아와 물을 주어 결국 3년 뒤 싹이 돋고 열매를 거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에피소드다. 타르코프스키의 희망은 어른들의 참회와 희생 뒤, 실어증-실어증은 다독의 시대에 의미심장하게 들린다-에 걸린 아이가 과학적 예측과 전혀 상관없이 행하는 순수한 사랑의 행동에 있는 듯하다. 고승의 지팡이에서 싹이 나듯, 죽은 나무를 살려낼 믿음과 사랑이 필요하다.
알묘조장(揠苗助長)의 교육도 문제지만 줄탁동시(啐啄同時)의 교육도 문제다. 암탉의 단 한 차례 ‘쪼임(啄)’은 오직 안의 ‘쪼임(啐)’에 따른 행위이지만, 중요한 것은 길고 긴 시간의 품음이며 기다림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안팎의 쪼임에 눈이 멀어 더 본질적인 기다림과 사랑의 행위를 잊곤 한다. 믿음은 억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너무나 확실해 의심할 수 없기 때문에 믿는 것이다. 당신은 아이의 행복과 미래에 대해 근원적으로 믿고 있는가? 닭은 알을 품는다. 그냥! 존재 그 자체에 대해, 자연과 생명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알묘조장도 아닌 제품생산의 교육에 혈안이 되어 있지 않은가?
참회하고, 절하자. 지식과 시험과 학력 등과 같이 아이들의 생명과 신비에 가하는 일상의 폭력들을 거두고, 아이들을 걱정하기보다 우선 우리 자신을 세우고 걱정하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 하였다.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결과는 하늘에 맡기라는 뜻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순천명진인사(順天命盡人事)라 말하고 싶다. 먼저 모든 것을 하늘(자연)에 맡기고 그에 따라 옳은 일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겠는가? 한 하늘을 가슴에 품은 자가 곧 하늘을 본 사람이다. 꼬마야말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칠 수 있고, 다윗이야말로 골리앗을 돌팔매로 쓰러뜨린다. 낡은 말과 제국은 그렇게 쓰러진다.
미래에 대한 근심과 두려움을 버리고, 아이의 삶과 자유를 100% 긍정하기 위해서라도, 제국의 노예가 아니라 당신은 우선 당신 자신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