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미있고 풍부한 영화다.
그 끓어 넘쳤던 68,69년 미군기지가 있는 작은 도시의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벌어진 발랄한 고삐리들의 이야기.
무라카미 류의 <69>라는 소설이 원작이라고 한다. 90년대 대학 다닐 때 읽은 무라카미 류의 등단작인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의 인상은 내게 깊은 충격을 안겨 주었다. 마약과 섹스의 몽환적 감성이 얼마나 짙고 강렬했으며 또 새로웠는지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보다 20-30년 경제적으로 앞섰다는 것이 문화에는 어떻게 나타나는지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젊은이들은 무라카리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 열광했고 그 소설을 통해 포스트모던 시대의 감성을 이해했다. 그리고 나중에 하루키의 소설에 대한 표절시비에 휘말렸던 박일문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성공을 거두던 때였다. 아무튼 내게 하루키는 심드렁했지만 류는 충격적이었고 포스트모던의 감성과 정신을 느끼게 해준 장본인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것이 포스트모던이었지만 일본에서는 이미 20년 지난 유행이었으니.
더구나 역사적으로 그렇게 민감했던 시기에 역사에게 엿을 먹이고, 자신의 자유와 쾌락에 맘컷 탐닉하는 대범한 배짱을 보였으니. 역사라는 꼰대의 당위와 금기에 기죽지 않고 저 하고 싶은 짓과 말을 맘껏 하는 일본의 이 소설가가 나는 참으로 부러웠다.
만약 당신이 영화를 본다면 당신은 무라카미 류의 분신인 주인공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속 시간인 69년을 포함해 68,69년은 가장 처절하고 생기 넘쳤던 역사적인 시간이었다. 그야말로 1세계인 유럽, 미국, 일본에서 그것은 혁명의 해였다. 젊은 히피들이 록음악을 들으며 반전, 평화, 사랑을 맘껏 외쳤고, 기성의 허위와 권위를 타파하고자 했다. 당시 성공처럼 보였던 모택동의 문화혁명은 가장 믿음직한 교본이 되었고, 게바라의 총은 현실의 길을 보여줬다. 68년 프랑스를 비롯하여 유럽의 대학가엔 모택동과 게바라의 공산혁명을 주창하는 젊은이들로 넘쳤고, 미국에서는 루터 킹목사가 행진했고, 히피들이 넘쳤다. 69년 미국에서는 음악사에 영원히 남을 ‘우드스톡 페스티벌’이 열려 성과 마약, 그리고 음악과 평화, 사랑이 3일 동안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베트남전 반대를 부르짖던 전쟁을 체험하지 않은 세대의 혁명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냉혹한 현실의 벽은 젊은이의 낭만과 여정으로 부수기엔 지나치게 견고하고 높았던 것이다. 권력은 곧 단단하게 죄어왔다. 일본에서는 그게 극심했다. 공안 경찰이 학생운동을 하던 전공투-우리식으로 말하면 전대협과 한총련-에 가담했던 학생들을 내내 감시했고, 극우정권과 자본가들은 그들에게 취직도 못하게 불이익을 줘 사회적으로 매장을 시키려 했다. 이것이 당시 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자영업이나 당시 별 볼일 없던 만화업에 뛰어들게 된 배경이 되었다. 이는 영화를 보면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불꽃처럼 폭발하고 사그라진 역사적 배경의 무거움과 달리, 영화는 매우 재미있고 웃기다.
특히 이 영화의 중심 사건, 고삐리들이 한밤중에 학교에 잠입해 바리케이트를 치고 페인트로 학교에 온통 낙서를 하고 전공투의 투쟁을 흉내낸 것은 통쾌하기 이를 데 없다. 교장실의 책상 위에 설사똥을 안기는 장면은 얼마나 건강하고 유쾌한 반란인가? 감옥과 같은 학교를 맘껏 조롱하였던 것이다. 더불어 영화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장면, 같은 해 미국에서 벌어졌던 우드스톡을 모방하여 벌인 페스티벌도 생명력 넘치는 것이었다.
살인적인 군사문화, 경쟁을 부추기는 권위적 학교문화, 억압적 성문화는 실제로 당시의 주된 투쟁 대상이기도 했다.
영화를 보며 나는 내게 학교에 대한 해체란 실로 얼마나 큰 꿈인가 새삼 실감했다. 학교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는 것이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양심적 병역거부처럼 사이코의 발상으로 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자유란 무엇인가? 해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억압의 형식을 거부하는 몸부림으로 숨쉬기 시작하여, 매순간 삶의 기쁨으로 충만하고 사랑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행복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영화를 보며 나는 혁명적 학생운동기의 자유에 대한 열망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것이 ‘68정신’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당시의 치열한 역사의식의 무게보다, 인간의 가장 단순하고 원초적인 동기인 재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시대를 겪었던 모든 이의 무의식을 짓누르는 상처를 덜 건드리고 그 시대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아무튼 집단의 패배와 개인화는 이후 젊은이들이 걸었던 세계적 추세가 되었다. 그럼에도 개인의 재미는 이 영화의 미덕이다. 극우의 억압적 사회 구조와 그것에 맞선 극좌의 또한 억압적 행태 사이를 통렬하게 질주해 버리기 때문이다.
자유와 해방이라는 숙제는 여전히 미해결상태로 남겨진다. 진정한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는 역시 단순한 개인화로 그칠 수 없다는 한계 때문이다. 설사 그 개인들이 음악, 미술, 영화, 만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풍부한 문화를 개척했더라도, 천황제를 중심으로 한 극우세력과 살인적 군대 운용, 인간성을 오히려 말살하고 경쟁을 부추기는 학교 제도는 여전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타협의 한계다. 어떤 종류의 타협이건 타협이 일어나는 순간 그는 체제에 포섭된다. 자유란 그래서 힘든 것이기도 하다. 모든 억압을 거부하고 인간의 존엄과 사랑을 실현하려 노력하기 때문에.
이것이 영화의 결말이 명멸하는 불꽃놀이처럼 느껴졌던 이유이다. 우리의 고삐리들은 학교를 박차고 나와야 했다. 의식 있는 부모와 교사들까지 학교를 박차고 나와야 했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공부하고 서로 격려하며 같이 일어서야 했다. 하지만 그러한 비타협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극히 드물었고, 곧 왕따 당했던 것이 역사의 전례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퀘이커나 재침례 등의 평화주의자의 사회가 건설되고 이어져온 것도 사실이다.
감독이 재일교포인 이상일씨다. 유미리씨나 최양일씨도 그렇지만 일본에서 자기 이름 내놓고 활동하는 이들을 보면 일본에서 살아가는 제일교포는 유태인과 같은 미묘한 자의식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그런 걸 읽기는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