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를 생산하는 뉴욕으로
김광우의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숨비소리) 중에서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대중문화 생산 체계에서 뉴요커들이 가진 헤게모니는 텔레비전 초창기에 더욱 강화되었다.
맹렬한 속도로 발전한 텔레비전은 NBC, CBS, ABC 채널들과 함께 단연 뉴욕의 사업이었다.
1940년대 말엽과 1950년대 초기에 그 방송사들의 프로그램들은 뉴욕 대도시 지역에 폭넓게 집중된 시청자들을 노렸다.
그 프로그램들은 미국 최초의 텔레비전 스타인 ‘미스터 텔레비전’ 밀턴 벌의 이미지로 대변되는 뉴욕적인 양식을 고수했다.
밀턴 벌은 에드 설리번의 <토스트 오브 더 타운 Toast of the Town>이나 오락 프로그램들처럼 상당히 뉴욕적인 오락 방송의 스타였다.
생방송으로 중계된 텔레비전 시리즈물들은 브로드웨이의 자원을 활용했고, 대개 뉴욕을 배경으로 삼았다.
루시 볼의 인기드라마 <아이 러브 루시 I Love Lucy>는 <신혼부부들 The Honeymooners>(1954-61)과 마찬가지로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전개되었다.
뉴욕은 텔레비전 정보의 수도였다. <언론과의 만남 Meet the Press> 방송은 1947년에 그 대장정을 시작했으며, CBS는 매카시즘에 용감하게 맞서는 에드워드 머로의 <시 잇 나우 See It Now>과 같은 최초의 다큐멘터리를 발전시켰고, ABC는 1954년에 미군 변호사들과 매카시가 벌이는 토론을 생중계로 방송했다.
1962년에 뉴스 진행자가 된 월터 크론카이트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1950년대 중반에 들어서 텔레비전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방송사들은 제작과 프로 편성을 목적으로 하는 거대한 영화제작 스튜디오와 비슷해졌다.
당대의 특징인 <아이 러브 루시>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촬영되었고, ABC 방송사는 디즈니 사와 이어서 워너 사와 동업자 관계를 맺었다.
1945-55년에 텔레비전의 가장 뉴욕적인 양상들이 빠르게 사라졌다.
1962년에 <투니이트 쇼 Tonight Show>를 맡은 조니 카슨은 10년 뒤에 뉴욕을 떠나 버뱅크 스튜디오로 옮기고, 워싱턴에서는 텔레비전 정치 저널리즘의 위력이 상승하여 텔레비전 정보 제작과 배급의 중심으로서 뉴욕과 맹렬한 경쟁을 벌였다.
지역 라디오 방송국의 증가는 음악 장르의 다양화와 뉴욕 밖에서 진행된 음반 산업의 발전을 도왔다.
1950년대부터 일종의 반항의 화신이었던 로큰롤은 멤피스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뉴욕은 어쩔 수 없이 상황에 적응해 텔레비전과의 경쟁으로 심하게 타격을 받은 전쟁 전의 영화 궁전들을 콘서트 홀로 바꿀 뿐이었다.
브루클린의 패러마운트는 1950년대 말에 플래터스Platters와 커미츠Comets 같은 성공한 록 그룹들을 맞아들였다.
그러나 뉴욕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새로운 음악 형태의 중심에 다시 놓였다.
밥 딜런과 반체제 저항 시대의 포크 음악 이후로 디스코가 나이트클럽들을 침략하고 유명한 스튜디오 54는 그 명소가 되었다.
1970년대 말 뉴욕에는 약 300개의 디스코테크가 생겨나 1977년에 존 트라볼타라는 스타를 탄생시킨 존 배덤의 영화에서 묘사된 <토요일 밤의 열기>에 빠진 20만 명의 젊은이들이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뉴욕은 무수한 홀과 클럽들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로 이어지는 유행 음악들을 즐겼다.
1950년대에 예술가들은 텔레비전을 현대 가정의 필수적인 가구로 보았다.
리처드 해밀턴은 1956년에 콜라주 작품 <도대체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그토록 다르고 두드러지게 하는가?>에서 거실을 묘사하면서 카세트플레이어와 청소기와 같은 기술적 산물들과 함께 텔레비전을 등장시켰다.
그 밖의 팝아티스트들도 텔레비전을 소도구로 사용했는데, 예를 들면 톰 웨설먼은 텔레비전을 조립물의 대상으로 삽입했다.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누드 여인이라는 고전적 모티프에 현대의 상징물인 코카콜라와 텔레비전이 삽입된 것이다.
프랑스 조각가 세자르는 1962년에 작동 중인 텔레비전 한 대를 전시하면서 원래의 케이스를 투명한 것으로 대체했다.
그는 받침대 위에 이것을 올려놓음으로써 조각으로 전시하고, 자신이 권총으로 텔레비전의 화면을 위협함으로써 매체 비판적인 의도를 두드러지게 드러냈다.
백남준이 뉴욕에 도착한 것은 1964년 초였다.
플럭서스의 멤버 딕 히긴스는 백남준을 퀸스 대학의 영문학 교수이며 소설가인 윌리엄 윌슨에게 소개한 뒤 백남준으로 하여금 첼시에 있는 그의 타운하우스 꼭대기에 세 들어 살 수 있게 주선했다.
1962년 독일로 가서 마키우나스가 주도하는 비스바덴 플럭서스 페스티발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플럭서스 창립멤버가 된 히긴스는 유럽 각지를 순회하며 해프닝에 전념하면서 동시에 집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백남준은 나중에 소호의 모서 스트리트에 자리 잡으면서 마키우나스의 이웃이 되고 샤롯 무어맨을 만나게 되었다.
무어맨은 당시 요코 오노와 같은 방을 쓰면서 전위예술에 경도되었다.
뉴욕의 줄리어드 음악학교 출신의 첼리스트 샤롯 무어맨Charlotte Moorman(1933-91)은 1963년에 케이지, 얼 브라운과 더불어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을 조직하고 1982년까지 열다섯 차례에 걸쳐 페스티벌을 이끌었다.
뉴욕 시장 에드워드 카치는 1980년에 이 페스티벌이 전위문화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 공헌했음을 치하하여 그해 6월 20일을 공식적으로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의 날’로 제정했다.
1963년 저드슨 홀에서 열린 제1회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은 전위음악 페스티벌이었지만 1964년 제2회부터는 백남준 공연의 파트너로 활동하면서 그 성격이 전환되어 플럭서스에 동화되었다.
저드슨 홀에서 슈톡하우젠의 <오리지날>이 공연되는 동안 극장 밖에서는 마키우나스를 비롯한 몇몇 명의 플럭서스 멤버들이 “인종을 박멸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면서 유럽 문명의 허구를 비난하고, 슈톡하우젠의 작품이야말로 문화제국주의의 산물이라고 고발했다.
이는 플럭서스 내부의 갈등이 표면화된 것이기도 했다.
다양한 배경과 독창적인 예술가들의 모임이었던 까닭에 당시 마키우나스의 통솔력은 먹히지 않았다.
그러자 마키우나스는 플럭서스 멤버들을 놓고 도표를 만들면서 ‘진정한 플럭서스’ ‘어쩌다 플럭서스’, ‘플록서스가 더 이상 아닌’, 그리고 ‘플럭서스가 전혀 아닌’ 멤버들로 분류했으며, 그 밖에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거기에 속하는 알 핸슨과 무어맨을 파문하기도 했다.
포스텔의 데콜라주, 벤 보티에의 토탈아트, 히긴스가 운영하는 출판사 섬싱엘스 프레스,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는 플럭서스를 하나로 뭉치게 하기보다는 갈라놓게 했다.
게다가 삶과 죽음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상징적으로 표출하는 극도의 개인주의와 표현주의를 표방한 보이스는 마키우나스에 의해 ‘플럭서스가 전혀 아닌’ 멤버로 분류되었다.
김광우의 <비디오아트의 마에스트로 백남준 vs 팝아트의 마이더스 앤디 워홀>(숨비소리) 중에서
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대중문화 생산 체계에서 뉴요커들이 가진 헤게모니는 텔레비전 초창기에 더욱 강화되었다.
맹렬한 속도로 발전한 텔레비전은 NBC, CBS, ABC 채널들과 함께 단연 뉴욕의 사업이었다.
1940년대 말엽과 1950년대 초기에 그 방송사들의 프로그램들은 뉴욕 대도시 지역에 폭넓게 집중된 시청자들을 노렸다.
그 프로그램들은 미국 최초의 텔레비전 스타인 ‘미스터 텔레비전’ 밀턴 벌의 이미지로 대변되는 뉴욕적인 양식을 고수했다.
밀턴 벌은 에드 설리번의 <토스트 오브 더 타운 Toast of the Town>이나 오락 프로그램들처럼 상당히 뉴욕적인 오락 방송의 스타였다.
생방송으로 중계된 텔레비전 시리즈물들은 브로드웨이의 자원을 활용했고, 대개 뉴욕을 배경으로 삼았다.
루시 볼의 인기드라마 <아이 러브 루시 I Love Lucy>는 <신혼부부들 The Honeymooners>(1954-61)과 마찬가지로 뉴욕의 한 아파트에서 전개되었다.
뉴욕은 텔레비전 정보의 수도였다. <언론과의 만남 Meet the Press> 방송은 1947년에 그 대장정을 시작했으며, CBS는 매카시즘에 용감하게 맞서는 에드워드 머로의 <시 잇 나우 See It Now>과 같은 최초의 다큐멘터리를 발전시켰고, ABC는 1954년에 미군 변호사들과 매카시가 벌이는 토론을 생중계로 방송했다.
1962년에 뉴스 진행자가 된 월터 크론카이트는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1950년대 중반에 들어서 텔레비전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방송사들은 제작과 프로 편성을 목적으로 하는 거대한 영화제작 스튜디오와 비슷해졌다.
당대의 특징인 <아이 러브 루시>는 캘리포니아 주에서 촬영되었고, ABC 방송사는 디즈니 사와 이어서 워너 사와 동업자 관계를 맺었다.
1945-55년에 텔레비전의 가장 뉴욕적인 양상들이 빠르게 사라졌다.
1962년에 <투니이트 쇼 Tonight Show>를 맡은 조니 카슨은 10년 뒤에 뉴욕을 떠나 버뱅크 스튜디오로 옮기고, 워싱턴에서는 텔레비전 정치 저널리즘의 위력이 상승하여 텔레비전 정보 제작과 배급의 중심으로서 뉴욕과 맹렬한 경쟁을 벌였다.
지역 라디오 방송국의 증가는 음악 장르의 다양화와 뉴욕 밖에서 진행된 음반 산업의 발전을 도왔다.
1950년대부터 일종의 반항의 화신이었던 로큰롤은 멤피스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뉴욕은 어쩔 수 없이 상황에 적응해 텔레비전과의 경쟁으로 심하게 타격을 받은 전쟁 전의 영화 궁전들을 콘서트 홀로 바꿀 뿐이었다.
브루클린의 패러마운트는 1950년대 말에 플래터스Platters와 커미츠Comets 같은 성공한 록 그룹들을 맞아들였다.
그러나 뉴욕은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새로운 음악 형태의 중심에 다시 놓였다.
밥 딜런과 반체제 저항 시대의 포크 음악 이후로 디스코가 나이트클럽들을 침략하고 유명한 스튜디오 54는 그 명소가 되었다.
1970년대 말 뉴욕에는 약 300개의 디스코테크가 생겨나 1977년에 존 트라볼타라는 스타를 탄생시킨 존 배덤의 영화에서 묘사된 <토요일 밤의 열기>에 빠진 20만 명의 젊은이들이 그곳으로 몰려들었다.
뉴욕은 무수한 홀과 클럽들에서 1980년대와 1990년대로 이어지는 유행 음악들을 즐겼다.
1950년대에 예술가들은 텔레비전을 현대 가정의 필수적인 가구로 보았다.
리처드 해밀턴은 1956년에 콜라주 작품 <도대체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그토록 다르고 두드러지게 하는가?>에서 거실을 묘사하면서 카세트플레이어와 청소기와 같은 기술적 산물들과 함께 텔레비전을 등장시켰다.
그 밖의 팝아티스트들도 텔레비전을 소도구로 사용했는데, 예를 들면 톰 웨설먼은 텔레비전을 조립물의 대상으로 삽입했다.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누드 여인이라는 고전적 모티프에 현대의 상징물인 코카콜라와 텔레비전이 삽입된 것이다.
프랑스 조각가 세자르는 1962년에 작동 중인 텔레비전 한 대를 전시하면서 원래의 케이스를 투명한 것으로 대체했다.
그는 받침대 위에 이것을 올려놓음으로써 조각으로 전시하고, 자신이 권총으로 텔레비전의 화면을 위협함으로써 매체 비판적인 의도를 두드러지게 드러냈다.
백남준이 뉴욕에 도착한 것은 1964년 초였다.
플럭서스의 멤버 딕 히긴스는 백남준을 퀸스 대학의 영문학 교수이며 소설가인 윌리엄 윌슨에게 소개한 뒤 백남준으로 하여금 첼시에 있는 그의 타운하우스 꼭대기에 세 들어 살 수 있게 주선했다.
1962년 독일로 가서 마키우나스가 주도하는 비스바덴 플럭서스 페스티발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플럭서스 창립멤버가 된 히긴스는 유럽 각지를 순회하며 해프닝에 전념하면서 동시에 집필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백남준은 나중에 소호의 모서 스트리트에 자리 잡으면서 마키우나스의 이웃이 되고 샤롯 무어맨을 만나게 되었다.
무어맨은 당시 요코 오노와 같은 방을 쓰면서 전위예술에 경도되었다.
뉴욕의 줄리어드 음악학교 출신의 첼리스트 샤롯 무어맨Charlotte Moorman(1933-91)은 1963년에 케이지, 얼 브라운과 더불어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을 조직하고 1982년까지 열다섯 차례에 걸쳐 페스티벌을 이끌었다.
뉴욕 시장 에드워드 카치는 1980년에 이 페스티벌이 전위문화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 공헌했음을 치하하여 그해 6월 20일을 공식적으로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의 날’로 제정했다.
1963년 저드슨 홀에서 열린 제1회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은 전위음악 페스티벌이었지만 1964년 제2회부터는 백남준 공연의 파트너로 활동하면서 그 성격이 전환되어 플럭서스에 동화되었다.
저드슨 홀에서 슈톡하우젠의 <오리지날>이 공연되는 동안 극장 밖에서는 마키우나스를 비롯한 몇몇 명의 플럭서스 멤버들이 “인종을 박멸하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면서 유럽 문명의 허구를 비난하고, 슈톡하우젠의 작품이야말로 문화제국주의의 산물이라고 고발했다.
이는 플럭서스 내부의 갈등이 표면화된 것이기도 했다.
다양한 배경과 독창적인 예술가들의 모임이었던 까닭에 당시 마키우나스의 통솔력은 먹히지 않았다.
그러자 마키우나스는 플럭서스 멤버들을 놓고 도표를 만들면서 ‘진정한 플럭서스’ ‘어쩌다 플럭서스’, ‘플록서스가 더 이상 아닌’, 그리고 ‘플럭서스가 전혀 아닌’ 멤버들로 분류했으며, 그 밖에도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거기에 속하는 알 핸슨과 무어맨을 파문하기도 했다.
포스텔의 데콜라주, 벤 보티에의 토탈아트, 히긴스가 운영하는 출판사 섬싱엘스 프레스, 백남준의 비디오아트는 플럭서스를 하나로 뭉치게 하기보다는 갈라놓게 했다.
게다가 삶과 죽음에 대한 개인적인 경험을 상징적으로 표출하는 극도의 개인주의와 표현주의를 표방한 보이스는 마키우나스에 의해 ‘플럭서스가 전혀 아닌’ 멤버로 분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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