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갱이 아를에 도착하다>
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화랑 부소&발라동의 회화부 책임자로서 테오의 노력 여하에 따라 수입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고갱은 테오에게 공손해야 했다.
고갱이 아를로 가서 반 고흐와 함께 지내려고 한 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테오에 대한 선심이고, 반 고흐에 대한 연민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고갱은 테오의 제안을 받아들여 아를로 가기로 결정하고 10월 8일에 슈페네커에게 적었다.
테오 반 고흐가 날 위해 도자기 몇 점을 팔았는데 300프랑이나 되네.
이달 말 아를로 가서 잠시 지내다 오려는데 돈 걱정 없이 한동안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을 것 같네.
테오가 매달 내게 돈을 주기로 했거든.
그러나 일주일 뒤 슈페네커에게 보낸 편지에는 만족해하던 감정이 일소되어 있었다.
테오가 날 무척 좋아하지만 녀석은 남쪽으로 내려가는 데 드는 비용을 지불하려고 하지 않는다네.
녀석은 차가운 데가 있는 네덜란드 놈으로 ...
고갱이 아를에 도착한 때는 나뭇잎이 붉게 물든 10월 28일이었다.
역전 카페의 주인 마리 지누는 새벽에 기차에서 내리는 고갱을 알아보았다.
몇 주 전 고갱이 반 고흐에게 보낸 자화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고갱은 반 고흐가 있는 <노란 집 The Yellow House>에 당도하여 짐을 풀면서 수도원에라도 온 느낌이며 반 고흐를 쳐다보니 파리에서 봤을 때와는 달리 초췌해진 꼴이 영락없는 수도승의 몰골이었다.
고갱은 그 집에 9주 동안 머물게 된다.
두 사람이 함께 한 9주 동안에 두 사람은 그들의 걸작 중 40편 가량을 그리게 된다.
영화 <아마데우스 Amadeus>에서 천재 모차르트를 보고 신을 원망한 음악의 재능이 뛰어난 궁정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질투하며 고뇌하듯 두 사람은 서로가 살리에르의 입장에서 서로를 질투하며 고뇌하게 된다.
노란 집에는 호두나무 침대가 하나, 백송 침대가 하나, 매트리스 두 개, 거울, 의자는 열두 개나 있었다.
반 고흐는 자신의 방을 수도원의 방처럼 꾸몄지만 고갱을 위한 방은 해바라기 작품으로 장식하고 “진정 예술성이 풍부한 여인의 방”처럼 꾸며두었다.
고갱은 반 고흐에게 자신이 있는 브르타뉴는 매우 흥미로운 곳이라면서 아를에 비해 모든 것이 낫고 훨씬 아름답다고 자랑하고 몇 주 뒤 베르나르에게는 아를의 풍경과 사람들이 매우 소규모이며 꾀죄죄하다고 적었다.
고갱은 아를을 ‘빛의 왕국’, ‘일본’, 또는 고향 네덜란드처럼 푸근하게 느낀 반 고흐와는 달리 별 볼일 없는 곳으로 여겼으므로 지역에 대한 두 사람의 인상 차이에서부터 이미 불화가 예고된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야외에 나가 이젤을 나란히 놓고 작업했지만 회화적 구성에 관해 각기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으므로 매번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두 사람이 야외에서 처음 그림을 그린 곳은 알리스 캉 공동묘지이다.
‘망자들의 섬’이란 뜻의 엘리시안 들판으로도 불리는 그곳은 아를 성벽 밖 남동쪽에 있는 고대의 공동묘지이다.
오렐리앙 가를 따라서 로마인들을 묻은 묘지로 초기 크리스천들에 의해 신성한 지역으로 여겨졌던 곳이다.
4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많은 주요 성자들의 시신이 그곳에 묻혔으며 기적이 발생하는 거룩한 곳으로 사람들에게 소문이 났다.
알리스 캉에는 두 개의 예배당이 남아 있어 19세기 말까지 크리스천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하나는 제뉠리아드 예배당으로 전설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아를의 첫 주교에게 나타나 자신의 무릎자국을 남겼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생오노라 예배당으로 1880년대까지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예배당에는 팔각형의 종탑이 있다.
길 양편에 포플러나무가 길게 늘어져 있고 나무 아래에 석관들이 띄엄띄엄 길게 줄지어 있다.
그곳에서 반 고흐는 그가 말한 ‘가을 풍경화’ 네 점을 그리고 고갱은 두 점을 그렸다.
반 고흐는 생오노라 예배당을 멀리 바라보는 위치에서 캔버스를 세로로 길게 하고 석관과 포플러나무들이 만든 통로가 중앙이 되게 그렸다.
<알리스 캉 Les Alyscamps>에서 그는 석관과 포플러나무에 밝은 색을 칠하면서 가장자리를 선으로 명료하게 했다.
가장자리를 선으로 틀이 되게 하는 방법을 그는 이후에도 계속 사용했다.
고갱도 동일한 제목으로 그리면서 캔버스를 세로로 사용했는데, 사이즈가 반 고흐의 것과 비슷하지만 구성과 내용은 사뭇 다르다.
고갱은 반 고흐와는 달리 양편으로 늘어진 포플러나무들 사이에서 그리지 않고 옆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리면서 복도처럼 나타나는 구성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위로 솟은 나무를 굽이치고 위로 편향되게 묘사하면서 팔각형의 생오노라 예배당 타워가 좀 더 가까이 보이도록 했다.
약간 경사진 길 중앙에 세 여인이 보이는데, 생기가 없어 보이며 잠시 걷기를 중단하고 화가와 관람자를 향해 똑바로 바라보는 모습이다.
검정색 외투, 보닛, 흰색 칼라로 봐서 한눈에 아를 여인들임을 알 수 있다.
반 고흐의 한 쌍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고갱도 세 여인의 외곽을 선으로 분명하게 하지 않고 얼굴과 손을 점처럼 한 번의 살색 붓질로 생략하며 다리는 가려져 드러나지 않게 했다.
고갱은 반 고흐와 달리 색을 가는 선처럼 작고 세로로 칠했는데 세잔의 영향이다.
고갱은 색을 알뜰하고 간결하게 그리고 줄무늬처럼 사용했다.
반 고흐도 세잔의 회화방법을 좋아했지만 고갱과 동일한 제목으로 그린 그림에서는 응용방법이 상이하게 나타난 것은 특기할 만하다.
고갱은 오른쪽 가장자리에 나무의 줄기를 그려 넣어 옆으로 난 가지와 잎이 세 여인의 머리 위에 아치 모양의 덮개가 나타나도록 구성했는데, 이 또한 세잔의 영향으로 그가 반 고흐보다 세잔의 영향을 더 많이 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세잔은 풍경화에서 곧잘 나무의 무성한 잎이 아치 모양을 이루어 평편한 구성에 대립시켰다.
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화랑 부소&발라동의 회화부 책임자로서 테오의 노력 여하에 따라 수입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고갱은 테오에게 공손해야 했다.
고갱이 아를로 가서 반 고흐와 함께 지내려고 한 건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테오에 대한 선심이고, 반 고흐에 대한 연민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고갱은 테오의 제안을 받아들여 아를로 가기로 결정하고 10월 8일에 슈페네커에게 적었다.
테오 반 고흐가 날 위해 도자기 몇 점을 팔았는데 300프랑이나 되네.
이달 말 아를로 가서 잠시 지내다 오려는데 돈 걱정 없이 한동안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을 것 같네.
테오가 매달 내게 돈을 주기로 했거든.
그러나 일주일 뒤 슈페네커에게 보낸 편지에는 만족해하던 감정이 일소되어 있었다.
테오가 날 무척 좋아하지만 녀석은 남쪽으로 내려가는 데 드는 비용을 지불하려고 하지 않는다네.
녀석은 차가운 데가 있는 네덜란드 놈으로 ...
고갱이 아를에 도착한 때는 나뭇잎이 붉게 물든 10월 28일이었다.
역전 카페의 주인 마리 지누는 새벽에 기차에서 내리는 고갱을 알아보았다.
몇 주 전 고갱이 반 고흐에게 보낸 자화상을 보았기 때문이다.
고갱은 반 고흐가 있는 <노란 집 The Yellow House>에 당도하여 짐을 풀면서 수도원에라도 온 느낌이며 반 고흐를 쳐다보니 파리에서 봤을 때와는 달리 초췌해진 꼴이 영락없는 수도승의 몰골이었다.
고갱은 그 집에 9주 동안 머물게 된다.
두 사람이 함께 한 9주 동안에 두 사람은 그들의 걸작 중 40편 가량을 그리게 된다.
영화 <아마데우스 Amadeus>에서 천재 모차르트를 보고 신을 원망한 음악의 재능이 뛰어난 궁정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질투하며 고뇌하듯 두 사람은 서로가 살리에르의 입장에서 서로를 질투하며 고뇌하게 된다.
노란 집에는 호두나무 침대가 하나, 백송 침대가 하나, 매트리스 두 개, 거울, 의자는 열두 개나 있었다.
반 고흐는 자신의 방을 수도원의 방처럼 꾸몄지만 고갱을 위한 방은 해바라기 작품으로 장식하고 “진정 예술성이 풍부한 여인의 방”처럼 꾸며두었다.
고갱은 반 고흐에게 자신이 있는 브르타뉴는 매우 흥미로운 곳이라면서 아를에 비해 모든 것이 낫고 훨씬 아름답다고 자랑하고 몇 주 뒤 베르나르에게는 아를의 풍경과 사람들이 매우 소규모이며 꾀죄죄하다고 적었다.
고갱은 아를을 ‘빛의 왕국’, ‘일본’, 또는 고향 네덜란드처럼 푸근하게 느낀 반 고흐와는 달리 별 볼일 없는 곳으로 여겼으므로 지역에 대한 두 사람의 인상 차이에서부터 이미 불화가 예고된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은 야외에 나가 이젤을 나란히 놓고 작업했지만 회화적 구성에 관해 각기 다른 견해를 갖고 있었으므로 매번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두 사람이 야외에서 처음 그림을 그린 곳은 알리스 캉 공동묘지이다.
‘망자들의 섬’이란 뜻의 엘리시안 들판으로도 불리는 그곳은 아를 성벽 밖 남동쪽에 있는 고대의 공동묘지이다.
오렐리앙 가를 따라서 로마인들을 묻은 묘지로 초기 크리스천들에 의해 신성한 지역으로 여겨졌던 곳이다.
4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많은 주요 성자들의 시신이 그곳에 묻혔으며 기적이 발생하는 거룩한 곳으로 사람들에게 소문이 났다.
알리스 캉에는 두 개의 예배당이 남아 있어 19세기 말까지 크리스천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하나는 제뉠리아드 예배당으로 전설에 의하면 그리스도가 아를의 첫 주교에게 나타나 자신의 무릎자국을 남겼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생오노라 예배당으로 1880년대까지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예배당에는 팔각형의 종탑이 있다.
길 양편에 포플러나무가 길게 늘어져 있고 나무 아래에 석관들이 띄엄띄엄 길게 줄지어 있다.
그곳에서 반 고흐는 그가 말한 ‘가을 풍경화’ 네 점을 그리고 고갱은 두 점을 그렸다.
반 고흐는 생오노라 예배당을 멀리 바라보는 위치에서 캔버스를 세로로 길게 하고 석관과 포플러나무들이 만든 통로가 중앙이 되게 그렸다.
<알리스 캉 Les Alyscamps>에서 그는 석관과 포플러나무에 밝은 색을 칠하면서 가장자리를 선으로 명료하게 했다.
가장자리를 선으로 틀이 되게 하는 방법을 그는 이후에도 계속 사용했다.
고갱도 동일한 제목으로 그리면서 캔버스를 세로로 사용했는데, 사이즈가 반 고흐의 것과 비슷하지만 구성과 내용은 사뭇 다르다.
고갱은 반 고흐와는 달리 양편으로 늘어진 포플러나무들 사이에서 그리지 않고 옆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리면서 복도처럼 나타나는 구성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위로 솟은 나무를 굽이치고 위로 편향되게 묘사하면서 팔각형의 생오노라 예배당 타워가 좀 더 가까이 보이도록 했다.
약간 경사진 길 중앙에 세 여인이 보이는데, 생기가 없어 보이며 잠시 걷기를 중단하고 화가와 관람자를 향해 똑바로 바라보는 모습이다.
검정색 외투, 보닛, 흰색 칼라로 봐서 한눈에 아를 여인들임을 알 수 있다.
반 고흐의 한 쌍의 모습과 마찬가지로 고갱도 세 여인의 외곽을 선으로 분명하게 하지 않고 얼굴과 손을 점처럼 한 번의 살색 붓질로 생략하며 다리는 가려져 드러나지 않게 했다.
고갱은 반 고흐와 달리 색을 가는 선처럼 작고 세로로 칠했는데 세잔의 영향이다.
고갱은 색을 알뜰하고 간결하게 그리고 줄무늬처럼 사용했다.
반 고흐도 세잔의 회화방법을 좋아했지만 고갱과 동일한 제목으로 그린 그림에서는 응용방법이 상이하게 나타난 것은 특기할 만하다.
고갱은 오른쪽 가장자리에 나무의 줄기를 그려 넣어 옆으로 난 가지와 잎이 세 여인의 머리 위에 아치 모양의 덮개가 나타나도록 구성했는데, 이 또한 세잔의 영향으로 그가 반 고흐보다 세잔의 영향을 더 많이 받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세잔은 풍경화에서 곧잘 나무의 무성한 잎이 아치 모양을 이루어 평편한 구성에 대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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