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고갱 씨>
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고갱의 작품에서 브르통 사람들의 모습이 점차 사라집니다.
1889년에 그린 <안녕하세요, 고갱 씨 Bonjour Monsieur Gauguin>는 쿠르베의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 Bonjour Monsieur Courbet>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그린 것이다.
그는 아를에서 반 고흐와 함께 지낼 때 파브르 미술관에 가서 쿠르베의 작품을 보았다.
쿠르베는 사소하거나 일화적인 것에 장엄함을 부여하고, 색조를 부드럽게 하거나 이상화시키지 않으며, 추하거나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위엄을 불어넣는 재능을 지녔다.
교회의 그림에 천사를 그려 넣으라는 요청을 받자 쿠르베는 “나는 결코 천사를 본 적이 없다. 내게 천사를 보여다오. 그러면 천사를 그리겠다”고 했다.
고갱은 이따금 파리를 방문했지만 예술의 수도는 그에게 감동을 주지 못했다.
상징주의 작가들이 자신들의 그룹에 가세하라고 권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그는 말라르메, 베를렌, 미르보, 장 모레아스, 오리에, 모리스 등과 우정을 나눴지만 그들의 그룹에 전적으로 동조하지는 않았다.
장 모레아스Jean Moréas(1856~1910)가 1886년 9월 18일에 『르 피가로』지에 ‘상징주의 선언문’을 발표한 후 평론가들은 그들을 상징주의자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모레아스는 예술의 본질은 “사상에 감각적 형태를 씌우는 것”이라고 했다.
상징주의 작가들이 상상에 의존해 비실제 세계를 창조한 데 반해 고갱은 실제 세계를 예술적으로 환상의 세계인 것처럼 묘사했다.
기독교를 회화에 끌어들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는데 기독교를 종교적인 이유로 좋아한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면에서 받아들일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리스도의 메시아 역할을 좋아한 이유는 예술가들에게도 그런 역할이 부여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갱은 1889년 가을 캄보디아 미술에 매료되어 캄보디아식 도자기를 제작했으며 여우가 있는 나무조각상 <욕망 Lust>을 제작했다.
<욕망>을 제작한 후 1890~91년 겨울에는 음탕함을 상징하는 여우처럼 생긴 동물의 앞다리를 르 풀뒤 바닷가를 배경으로 길게 누운 여인의 젖가슴 위에 올려놓은 그림을 <순결의 상실(봄의 각성)>이란 제목으로 그렸다.
여우는 중세 동물 우화집과 교회 장식에서 사악함과 더불어 음탕함을 상징하는 동물로 사용되었다.
고갱이 1889년 브르통에서 사용한 스케치북에는 여우 혹은 개처럼 생긴 동물에 대한 묘사가 많이 그려져 있다.
<사랑하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에도 이런 동물이 삽입되었다.
<니르바나, 메이어 드 한의 초상>에서 드 한의 얼굴을 여우처럼 그린 것도 이런 동물에 대한 상징성과 관련이 있다.
고갱은 베르나르로부터 반 고흐의 사망소식을 전해 듣고 르 풀뒤에서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베르나르,
빈센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네. 자네가 장례식에 참석했다니 다행이네.
정말 슬픈 일이야.
하지만 난 그렇게 슬프지 않아.
난 이미 그의 죽음을 예견했고 그 가엾은 친구가 자신의 광기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기 때문이지.
한순간 죽음의 고통을 겪는 것이 도리어 그에게는 큰 행복이었을 거라고 생각되네.
그로 인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 환생하여 이승에서 한 훌륭한 일로 보답 받을 수 있을 테니까(부처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나마 동생에게 버림받지 않았고 화가 몇 사람이 그의 작품을 이해했다는 것으로 위안을 받을 수 있겠지.
1890. 8
김광우의 <성난 고갱과 슬픈 고흐>(미술문화) 중에서
고갱의 작품에서 브르통 사람들의 모습이 점차 사라집니다.
1889년에 그린 <안녕하세요, 고갱 씨 Bonjour Monsieur Gauguin>는 쿠르베의 <안녕하세요, 쿠르베 씨 Bonjour Monsieur Courbet>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그린 것이다.
그는 아를에서 반 고흐와 함께 지낼 때 파브르 미술관에 가서 쿠르베의 작품을 보았다.
쿠르베는 사소하거나 일화적인 것에 장엄함을 부여하고, 색조를 부드럽게 하거나 이상화시키지 않으며, 추하거나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에 위엄을 불어넣는 재능을 지녔다.
교회의 그림에 천사를 그려 넣으라는 요청을 받자 쿠르베는 “나는 결코 천사를 본 적이 없다. 내게 천사를 보여다오. 그러면 천사를 그리겠다”고 했다.
고갱은 이따금 파리를 방문했지만 예술의 수도는 그에게 감동을 주지 못했다.
상징주의 작가들이 자신들의 그룹에 가세하라고 권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그는 말라르메, 베를렌, 미르보, 장 모레아스, 오리에, 모리스 등과 우정을 나눴지만 그들의 그룹에 전적으로 동조하지는 않았다.
장 모레아스Jean Moréas(1856~1910)가 1886년 9월 18일에 『르 피가로』지에 ‘상징주의 선언문’을 발표한 후 평론가들은 그들을 상징주의자들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모레아스는 예술의 본질은 “사상에 감각적 형태를 씌우는 것”이라고 했다.
상징주의 작가들이 상상에 의존해 비실제 세계를 창조한 데 반해 고갱은 실제 세계를 예술적으로 환상의 세계인 것처럼 묘사했다.
기독교를 회화에 끌어들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는데 기독교를 종교적인 이유로 좋아한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면에서 받아들일 만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리스도의 메시아 역할을 좋아한 이유는 예술가들에게도 그런 역할이 부여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고갱은 1889년 가을 캄보디아 미술에 매료되어 캄보디아식 도자기를 제작했으며 여우가 있는 나무조각상 <욕망 Lust>을 제작했다.
<욕망>을 제작한 후 1890~91년 겨울에는 음탕함을 상징하는 여우처럼 생긴 동물의 앞다리를 르 풀뒤 바닷가를 배경으로 길게 누운 여인의 젖가슴 위에 올려놓은 그림을 <순결의 상실(봄의 각성)>이란 제목으로 그렸다.
여우는 중세 동물 우화집과 교회 장식에서 사악함과 더불어 음탕함을 상징하는 동물로 사용되었다.
고갱이 1889년 브르통에서 사용한 스케치북에는 여우 혹은 개처럼 생긴 동물에 대한 묘사가 많이 그려져 있다.
<사랑하라, 그러면 행복해질 것이다>에도 이런 동물이 삽입되었다.
<니르바나, 메이어 드 한의 초상>에서 드 한의 얼굴을 여우처럼 그린 것도 이런 동물에 대한 상징성과 관련이 있다.
고갱은 베르나르로부터 반 고흐의 사망소식을 전해 듣고 르 풀뒤에서 편지를 썼다.
친애하는 베르나르,
빈센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네. 자네가 장례식에 참석했다니 다행이네.
정말 슬픈 일이야.
하지만 난 그렇게 슬프지 않아.
난 이미 그의 죽음을 예견했고 그 가엾은 친구가 자신의 광기 때문에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알기 때문이지.
한순간 죽음의 고통을 겪는 것이 도리어 그에게는 큰 행복이었을 거라고 생각되네.
그로 인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고, 환생하여 이승에서 한 훌륭한 일로 보답 받을 수 있을 테니까(부처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나마 동생에게 버림받지 않았고 화가 몇 사람이 그의 작품을 이해했다는 것으로 위안을 받을 수 있겠지.
1890. 8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