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손길 <절규>>
김광우의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 중에서
오슬로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는 <절규>는 뭉크가 1893년에 그린 것이다.
1893년이라면 반 고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3년이 지난 후이다.
폴 고갱은 파리에서의 생활이 삭막하여 타히티 섬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반 고흐가 여동생 윌에게 보낸 편지에 노이로제란 말을 사용했듯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불안이 있었다.
산업혁명 이후 도시가 발달하고 사회가 빠르게 문명화되어 가고 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뭉크가 불안을 견디다 못해 절규한 것은 어쩜 당연해 보인다.
갑자기 들이닥친 공포를 이기지 못해 뭉크는 몸을 S자 모양으로 비틀고 입을 크게 열며 눈을 크게 뜬 채 두 손을 얼굴에 대고 절규했다.
<절규>는 그의 자화상이지만 우리는 뭉크 대신 반 고흐, 혹은 고갱을 그곳에 세워놓는 상상을 할 수도 있다.
공포에 질린 모습은 당시 물질보다는 정신적인 가치를 더 고귀하게 여긴 진보주의 사상을 가진 지식인과 예술가들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문학에 관심이 많은 뭉크에게는 인간 본질에 대한 불안이 있었다.
뭉크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키에르케고르의 저서를 탐독했으며, 그가 소장한 책 중에는 니체의 전집과 14권의 키에르케고르의 전집이 있었다.
키에르케고르는 파스칼에 의해 사유된 불안이 인간을 사로잡는 까닭에 관해 『불안의 개념』(1844), 『죽음에 이르는 병』(1849) 등을 통해 깊이 분석했다.
어떤 대상에 대한 공포와는 달리 불안은 무에서 비롯되는 인간 본성을 위협하는 근원적인 의식 또는 정서이다.
따라서 불안은 파악하기 어렵고 이에 집착하면 할수록 인간은 무기력해진다.
뭉크가 키에르케고르 전집 제4권 『불안의 개념』을 여러 번 읽은 흔적이 있어, 불안이라는 인간의 근원적·감성적 잠재의식에 집착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실존적 혹은 근원적 상태로서의 불안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개념은 곧 그의 개념이기도 하다.
불안에서 절망에 이르게 되고 절망은 곧 파멸을 부른다.
불안은 <절규>외에도 <절망>, <칼 요한 거리의 봄날> 등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길을 걷는 도시인들의 얼굴을 가면처럼 상징적으로 묘사하면서 모두가 불안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절규>를 변형한 작품이 무려 50종이나 되어 이 주제에 대한 그의 애착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절규>는 그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그의 회화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게 해주는 상징적인 그림이기도 하다.
<절규>를 잘 이해하면 나머지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다.
역동적인 색의 사용, 자연의 꿈틀거리는 속성에 대한 이해,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충동과 변화에 대한 강렬한 표현이 <절규>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이 세 가지는 그의 회화를 특징짓는 요소이다.
미국 미술사학자, 뉴욕 대학 교수, 구겐하임 미술관 큐레이터를 역임한 로버트 로젠블럼(1928-)은 파리 인류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페루의 미라가 <절규>에서의 해골과 같은 머리의 모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결박당한 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미라는 분명 <절규>에서의 뭉크와 흡사하다.
배경의 줄무늬 채색은 음파를 가시화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나타난 자연의 힘과 에너지가 물성화한 하늘의 소리 없는 아우성과 동일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보다는 그의 정신을 지배하는 영역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핏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배가 물 위에 떠있어 자연의 풍경으로 보이지만 이는 실제의 풍경이 아니라 그를 괴롭히는 불안, 공포, 사랑과 증오의 이중성을 나타내기 위한 은유적인 풍경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것들을 가시화한 내면의 자연인 것이다.
그림에서 두려움에 치를 떠는 해골 같은 모습의 남자는 뭉크 자신이다.
그의 절규가 대지를 진동하고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일 정도로 절박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이해가 바람직한 이유는 그가 1891년 류머티즘에 의한 열병으로 니스에서 투병할 때 쓴 일기가 그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저녁 두 친구와 함께 걷고 있었고, 해는 막 서산에 지고 있었는데 약간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돌연히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으며 탈진된 듯 느껴져 난간에 몸을 의지했다.
검정색에 가까운 진한 파란색 협만과 도시 위에 피의 불길이 넘실거렸고, 친구들은 계속 걷고 있었지만 나는 그냥 서서 불안에 떨고 있었다.
나는 끊임없는 절규가 자연을 관통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산책을 나갈 때 뭉크는 주변 환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상념에 지나치게 몰두해 있어 다른 사람의 눈에는 몽유병자처럼 보였다.
그러다 그가 눈을 크게 뜨기라도 하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숭고하고 강렬한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갑자기 명확하게 사물을 보게 되는 것과 같았다.
그가 기억을 더듬어서 그림을 그리게 되는 습관에 빠진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순간적인 환영이란 수확을 거둬들이기 위해서 말이다.
그는 “난 내가 보고 있는 것을 그리지 않고 이미 본 것을 그린다네”라고 종종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그는 풍경을 사실적으로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작품에서 선과 색채는 갑작스레 떠오르는 생각들에 의해서 달라진다.
그는 나무를 이리저리 옮기고 색채와 형태를 바꿔 자신만의 상상에 적당하게 구성한다.
회화를 위해서라면 사실을 왜곡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따라서 그가 그린 것과 똑같은 나무, 말, 장소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다.
다만 오스고르더스트란드에서 그린 그림들만 예외적으로 장소에 의해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작품으로 이는 오스고르더스트란드가 그에게 정신의 보금자리였음을 말해준다.
그가 마침내 오스고르더스트란드를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는 같은 장소에서 오래 작업하는 것이 회화의 신선미를 상실하게 할 것을 두려워해서였다.
그는 늘 새로운 감동을 원했다.
뭉크는 판화가로도 유명하다.
유화로 그린 것을 석판화와 목판화로 제작하면서 각 판화의 기법의 특징을 살려 변형시켰으며 제목을 바꾸기도 했다.
판화에 대한 기술은 1895-97년 파리에 체류할 때 연마했고 선을 사용하여 강렬한 힘을 작품에 부여했다.
뭉크는 1895년에 제작한 컬러석판화에 “나는 끊임없는 절규가 자연을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라고 적었는데, 니스에서 투병할 때의 체험이 생생했기 때문이다.
핏빛으로 넘실대는 황혼의 하늘과 진동하는 대지의 거친 호흡을 매우 표현적으로 묘사하면서 ‘표현’ 자체가 회화라는 것을 시위하려고 한 듯 보인다.
김광우의 <뭉크, 쉴레, 클림트의 표현주의>(미술문화) 중에서
오슬로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는 <절규>는 뭉크가 1893년에 그린 것이다.
1893년이라면 반 고흐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지 3년이 지난 후이다.
폴 고갱은 파리에서의 생활이 삭막하여 타히티 섬으로 떠나기로 결심했다.
반 고흐가 여동생 윌에게 보낸 편지에 노이로제란 말을 사용했듯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불안이 있었다.
산업혁명 이후 도시가 발달하고 사회가 빠르게 문명화되어 가고 있었지만 정신적으로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뭉크가 불안을 견디다 못해 절규한 것은 어쩜 당연해 보인다.
갑자기 들이닥친 공포를 이기지 못해 뭉크는 몸을 S자 모양으로 비틀고 입을 크게 열며 눈을 크게 뜬 채 두 손을 얼굴에 대고 절규했다.
<절규>는 그의 자화상이지만 우리는 뭉크 대신 반 고흐, 혹은 고갱을 그곳에 세워놓는 상상을 할 수도 있다.
공포에 질린 모습은 당시 물질보다는 정신적인 가치를 더 고귀하게 여긴 진보주의 사상을 가진 지식인과 예술가들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다.
문학에 관심이 많은 뭉크에게는 인간 본질에 대한 불안이 있었다.
뭉크는 도스토예프스키와 키에르케고르의 저서를 탐독했으며, 그가 소장한 책 중에는 니체의 전집과 14권의 키에르케고르의 전집이 있었다.
키에르케고르는 파스칼에 의해 사유된 불안이 인간을 사로잡는 까닭에 관해 『불안의 개념』(1844), 『죽음에 이르는 병』(1849) 등을 통해 깊이 분석했다.
어떤 대상에 대한 공포와는 달리 불안은 무에서 비롯되는 인간 본성을 위협하는 근원적인 의식 또는 정서이다.
따라서 불안은 파악하기 어렵고 이에 집착하면 할수록 인간은 무기력해진다.
뭉크가 키에르케고르 전집 제4권 『불안의 개념』을 여러 번 읽은 흔적이 있어, 불안이라는 인간의 근원적·감성적 잠재의식에 집착했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실존적 혹은 근원적 상태로서의 불안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개념은 곧 그의 개념이기도 하다.
불안에서 절망에 이르게 되고 절망은 곧 파멸을 부른다.
불안은 <절규>외에도 <절망>, <칼 요한 거리의 봄날> 등에서도 나타난다.
그는 길을 걷는 도시인들의 얼굴을 가면처럼 상징적으로 묘사하면서 모두가 불안해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절규>를 변형한 작품이 무려 50종이나 되어 이 주제에 대한 그의 애착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절규>는 그의 대표작일 뿐 아니라 그의 회화를 전반적으로 이해하게 해주는 상징적인 그림이기도 하다.
<절규>를 잘 이해하면 나머지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다.
역동적인 색의 사용, 자연의 꿈틀거리는 속성에 대한 이해, 자신의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충동과 변화에 대한 강렬한 표현이 <절규>에 여실히 드러나 있다.
이 세 가지는 그의 회화를 특징짓는 요소이다.
미국 미술사학자, 뉴욕 대학 교수, 구겐하임 미술관 큐레이터를 역임한 로버트 로젠블럼(1928-)은 파리 인류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페루의 미라가 <절규>에서의 해골과 같은 머리의 모델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결박당한 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미라는 분명 <절규>에서의 뭉크와 흡사하다.
배경의 줄무늬 채색은 음파를 가시화한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 나타난 자연의 힘과 에너지가 물성화한 하늘의 소리 없는 아우성과 동일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해석보다는 그의 정신을 지배하는 영역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핏빛으로 물든 하늘 아래 배가 물 위에 떠있어 자연의 풍경으로 보이지만 이는 실제의 풍경이 아니라 그를 괴롭히는 불안, 공포, 사랑과 증오의 이중성을 나타내기 위한 은유적인 풍경이다.
자신을 괴롭히는 것들을 가시화한 내면의 자연인 것이다.
그림에서 두려움에 치를 떠는 해골 같은 모습의 남자는 뭉크 자신이다.
그의 절규가 대지를 진동하고 하늘을 핏빛으로 물들일 정도로 절박했다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이해가 바람직한 이유는 그가 1891년 류머티즘에 의한 열병으로 니스에서 투병할 때 쓴 일기가 그것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어느 날 저녁 두 친구와 함께 걷고 있었고, 해는 막 서산에 지고 있었는데 약간 우울한 기분이 들었다.
돌연히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으며 탈진된 듯 느껴져 난간에 몸을 의지했다.
검정색에 가까운 진한 파란색 협만과 도시 위에 피의 불길이 넘실거렸고, 친구들은 계속 걷고 있었지만 나는 그냥 서서 불안에 떨고 있었다.
나는 끊임없는 절규가 자연을 관통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산책을 나갈 때 뭉크는 주변 환경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의 상념에 지나치게 몰두해 있어 다른 사람의 눈에는 몽유병자처럼 보였다.
그러다 그가 눈을 크게 뜨기라도 하면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숭고하고 강렬한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갑자기 명확하게 사물을 보게 되는 것과 같았다.
그가 기억을 더듬어서 그림을 그리게 되는 습관에 빠진 것은 이런 이유에서였다.
순간적인 환영이란 수확을 거둬들이기 위해서 말이다.
그는 “난 내가 보고 있는 것을 그리지 않고 이미 본 것을 그린다네”라고 종종 친구에게 털어놓았다.
그는 풍경을 사실적으로 정확하게 묘사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의 작품에서 선과 색채는 갑작스레 떠오르는 생각들에 의해서 달라진다.
그는 나무를 이리저리 옮기고 색채와 형태를 바꿔 자신만의 상상에 적당하게 구성한다.
회화를 위해서라면 사실을 왜곡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따라서 그가 그린 것과 똑같은 나무, 말, 장소를 찾는 건 어려운 일이다.
다만 오스고르더스트란드에서 그린 그림들만 예외적으로 장소에 의해 정체를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작품으로 이는 오스고르더스트란드가 그에게 정신의 보금자리였음을 말해준다.
그가 마침내 오스고르더스트란드를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는 같은 장소에서 오래 작업하는 것이 회화의 신선미를 상실하게 할 것을 두려워해서였다.
그는 늘 새로운 감동을 원했다.
뭉크는 판화가로도 유명하다.
유화로 그린 것을 석판화와 목판화로 제작하면서 각 판화의 기법의 특징을 살려 변형시켰으며 제목을 바꾸기도 했다.
판화에 대한 기술은 1895-97년 파리에 체류할 때 연마했고 선을 사용하여 강렬한 힘을 작품에 부여했다.
뭉크는 1895년에 제작한 컬러석판화에 “나는 끊임없는 절규가 자연을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라고 적었는데, 니스에서 투병할 때의 체험이 생생했기 때문이다.
핏빛으로 넘실대는 황혼의 하늘과 진동하는 대지의 거친 호흡을 매우 표현적으로 묘사하면서 ‘표현’ 자체가 회화라는 것을 시위하려고 한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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