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마흐Ernst Mach(1838~1916)>
아인슈타인에게는 두 사람의 과학 영웅, 모라비아 태생의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철학자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1838~1916)와 네덜란드의 이론물리학자 헨드리크 로렌츠Hendrik Anton Lorentz(1853~1928)가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한 번도 그들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는 프라하 대학으로 가기 전에 교육부를 방문하기 위해 빈에 갔다가 교외에 살고 있던 마흐를 찾아갔다.
방에 들어온 아인슈타인에게 그는 “크게 이야기 하게. 다른 불쾌한 특징도 있지만 나는 거의 귀머거리에 가깝네”라고 소리쳤다.
아인슈타인은 마흐에게 원자의 실체에 대해서 설득하고 싶었다.
마흐는 오래 전부터 원자가 인간 정신 속에서 가상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며 반대해왔다.
아인슈타인은 “기체에서 원자의 존재를 가정함으로써 비원자론적인 이론으로는 예측할 수 없었던 관찰 가능한 성질을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선생님도 그런 가정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마흐는 마지못해서 인정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던 마흐 철학에 대해 어느 정도 거부감을 갖기 시작했으며, 그것은 그에게 중요한 전환의 시작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로렌츠를 만나기 위해 네덜란드의 라이덴을 방문했다.
마리치와 동행한 그는 자신들과 함께 지내자는 로렌츠 부부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아인슈타인은 복사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서 “선생님이 생각하시듯 저는 정통 빛-양자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을 미리 밝혀드립니다”라고 했다.
그들은 토요일 밤늦게까지 온도와 전기전도 사이의 관계와 같은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로렌츠는 광자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논문에서 사소한 수학적 오류를 찾아냈다.
그러나 그것은 아인슈타인이 지적했듯이 1/2을 빼먹었던 “일회성 오류”로 논문 뒤에는 제대로 포함되어 있었다.
환대와 “과학적 자극”이 모두 아인슈타인의 다음 편지를 절절하게 만들었다.
그는 “선생님에게서는 선함과 너그러움이 넘쳐나서 제가 선생님의 집에 머물면서 제가 엄청난 친절과 명예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생각해볼 여유도 없었습니다”라고 했다.
로렌츠는 아인슈타인의 일생에 아버지와 같은 인물이 되었다.
그는 핑계만 있으면 라이덴으로 가서 로렌츠를 방문했다.
1928년 로렌츠가 타계했을 때 아인슈타인은 추모사에서 “저는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숭고한 인물의 무덤 앞에 서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로렌츠의 탄생 100주년이었던 1953년에 아인슈타인은 그의 업적에 대한 글을 썼다.
그는 “뛰어난 정신에서 나온 것은 무엇이거나 아름다운 예술작품처럼 명쾌하고 아름다웠다. 그는 내가 평생에 만났던 어떤 사람보다도 개인적으로 내게 깊은 의미가 있었다”고 했다.
마리치는 프라하로 이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도시의 더러움과 지저분함이 기분을 억누르기 전까지는 그곳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괜찮았다.
그들은 처음으로 집에 전깃불과 함께 입주 하녀를 고용할 수 있는 공간과 수입을 갖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대학의 사무실에서 우거진 나무와 다듬어진 정원이 있는 아름다운 공원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오전에는 여자들이 가득했고, 오후에는 남자들이 가득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깊은 생각에 빠져 혼자 걷는 사람도 있고, 집단으로 모여 활발한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도 있음을 알았다.
아인슈타인은 그 공원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물어보았다.
그곳이 정신병자들의 수용소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아인슈타인에게는 두 사람의 과학 영웅, 모라비아 태생의 오스트리아 물리학자, 철학자 에른스트 마흐Ernst Mach(1838~1916)와 네덜란드의 이론물리학자 헨드리크 로렌츠Hendrik Anton Lorentz(1853~1928)가 있었다.
아인슈타인은 한 번도 그들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는 프라하 대학으로 가기 전에 교육부를 방문하기 위해 빈에 갔다가 교외에 살고 있던 마흐를 찾아갔다.
방에 들어온 아인슈타인에게 그는 “크게 이야기 하게. 다른 불쾌한 특징도 있지만 나는 거의 귀머거리에 가깝네”라고 소리쳤다.
아인슈타인은 마흐에게 원자의 실체에 대해서 설득하고 싶었다.
마흐는 오래 전부터 원자가 인간 정신 속에서 가상적으로 구성된 것이라며 반대해왔다.
아인슈타인은 “기체에서 원자의 존재를 가정함으로써 비원자론적인 이론으로는 예측할 수 없었던 관찰 가능한 성질을 예측할 수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선생님도 그런 가정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마흐는 마지못해서 인정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던 마흐 철학에 대해 어느 정도 거부감을 갖기 시작했으며, 그것은 그에게 중요한 전환의 시작이었다.
아인슈타인은 로렌츠를 만나기 위해 네덜란드의 라이덴을 방문했다.
마리치와 동행한 그는 자신들과 함께 지내자는 로렌츠 부부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아인슈타인은 복사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서 “선생님이 생각하시듯 저는 정통 빛-양자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을 미리 밝혀드립니다”라고 했다.
그들은 토요일 밤늦게까지 온도와 전기전도 사이의 관계와 같은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로렌츠는 광자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논문에서 사소한 수학적 오류를 찾아냈다.
그러나 그것은 아인슈타인이 지적했듯이 1/2을 빼먹었던 “일회성 오류”로 논문 뒤에는 제대로 포함되어 있었다.
환대와 “과학적 자극”이 모두 아인슈타인의 다음 편지를 절절하게 만들었다.
그는 “선생님에게서는 선함과 너그러움이 넘쳐나서 제가 선생님의 집에 머물면서 제가 엄청난 친절과 명예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생각해볼 여유도 없었습니다”라고 했다.
로렌츠는 아인슈타인의 일생에 아버지와 같은 인물이 되었다.
그는 핑계만 있으면 라이덴으로 가서 로렌츠를 방문했다.
1928년 로렌츠가 타계했을 때 아인슈타인은 추모사에서 “저는 이 시대의 가장 위대하고 가장 숭고한 인물의 무덤 앞에 서 있습니다”라고 했다.
그리고 로렌츠의 탄생 100주년이었던 1953년에 아인슈타인은 그의 업적에 대한 글을 썼다.
그는 “뛰어난 정신에서 나온 것은 무엇이거나 아름다운 예술작품처럼 명쾌하고 아름다웠다. 그는 내가 평생에 만났던 어떤 사람보다도 개인적으로 내게 깊은 의미가 있었다”고 했다.
마리치는 프라하로 이주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도시의 더러움과 지저분함이 기분을 억누르기 전까지는 그곳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괜찮았다.
그들은 처음으로 집에 전깃불과 함께 입주 하녀를 고용할 수 있는 공간과 수입을 갖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대학의 사무실에서 우거진 나무와 다듬어진 정원이 있는 아름다운 공원을 내려다볼 수 있었다.
오전에는 여자들이 가득했고, 오후에는 남자들이 가득 모여들었다.
그중에는 깊은 생각에 빠져 혼자 걷는 사람도 있고, 집단으로 모여 활발한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도 있음을 알았다.
아인슈타인은 그 공원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물어보았다.
그곳이 정신병자들의 수용소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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