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 성황신과 금성산신이 무당에게 내리다>

작성자김광우|작성시간09.08.11|조회수144 목록 댓글 0

 <고려시대에 성황신과 금성산신이 무당에게 내리다>





조선의 도처에는 무격巫覡들이 모여 기도하는 성황사城隍祠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각 군에서는 별신굿別神事을 했으며, 이때 무격의 무리가 춤과 노래로 흥을 돋우는데 불러서 청하는 것이 모두 성황신城隍神이었습니다.

그 근원은 고려시대에 나온 것입니다.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에 따르면 함유일咸有一이 삭방도朔方道 감창사監倉使가 되었을 때(함유일이 삭방도 감창사가 된 것은 의종 때임) 등주登州(지금의 안변安邊) 성황신이 여러 차례 무당에게 내려와 기이하게도 나라의 화복禍福을 알아맞혔습니다.

함유일咸有一(1106-85)은 고려 중기의 관리로 가는 곳마다 미신타파에 힘쓴 것으로 유명합니다.

삭방도朔方道는 고려 제6대 성종成宗 때 제정된 10도道의 하나로 지금의 강원도 북부지방을 말합니다.

감창사監倉使는 고려시대 동서북면東西北面에 파견한 지방관입니다.

함유일은 성황사에 가서 국제國祭를 지낼 때 읍揖만 하고 절을 하지 않았으므로 담당 관청(유사有司)에서 임금의 비위를 맞추려고 탄핵하여 파직시켰습니다.

국제는 국가에서 국왕의 명의로 지내는 제사를 말합니다.


전라도 나주 금성산 일대에 있던 신당 금성산신錦城山神은 으뜸가는 음사淫祠였습니다.

음사淫祠란 올바르지 못한 신사나 제사를 말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모시는 신이 올바르지 못한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신은 정신正神이라도 모실 자격이 없는 사람이 신을 제사하는 경우입니다.

예컨대 유교의 규정에 의하면 산천은 제후諸侯 이상만이 제사할 수 있으며, 일반인이 제사하면 음사가 됩니다.

금성산신에 무녀들이 떼 지어 모여들어 굿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조선의 풍속에 산신山神에 대한 제사를 도당굿(도당제都堂祭)이라 하는데, 이 역시 무녀巫女를 써서 신을 모시는 것으로 고려시대의 금성신당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고려 충렬왕 때 중신 정가신鄭可臣(?-1298)은 나주羅州 사람입니다.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해 화려한 요직을 거쳤으며, 충렬왕忠烈王 3년(1277년) 보문각寶文閣 대제待制에 임명되었습니다.

보문각은 경연과 장서를 맡은 관청이며, 대제는 정5품 벼슬입니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나주 사람들이 말하기를 “금성산신이 무당에게 강신하여 ‘진도珍島와 탐라耽羅를 칠 때 내가 실로 힘을 썼는데, 장수들은 상을 주면서 내게는 녹祿을 주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반드시 나를 정령공定寧公에 봉하라’ 했다.


‘진도珍島와 탐라耽羅를 칠 때’란 삼별초의 난을 진압한 것을 말합니다.

고려시대에는 신에게 관작을 주는 제도가 있었으며, 이는 신을 국가에서 공인한다는 의미이므로 해당 신을 모시는 지방 세력들에게는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정가신이 나주 사람들의 말에 혹해 왕에게 넌지시 말하여 정령공에 봉했고, 또한 그 고을을 녹미祿米 5섬을 거두어 해마다 그 신당에 보내주었습니다.

충렬왕 3년 나주목사로 하여금 금성산신에게 해마다 쌀 5석을 지급하여 제사하도록 한 조치가 『고려사高麗史』에 보입니다.

충렬왕 초에 관리 沈양이 공주부사公州副使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전라남도 장성군인 장성현長城縣의 어떤 여자가 “금성대왕錦城大王이 나에게 내려 말씀하시기를 ‘네가 금성신당의 무당이 되지 않으면 반드시 네 부모를 죽이리라’고 하기에 내가 두려워 따랐다”고 말했습니다.

금성산신錦城山神을 금성대왕錦城大王이라고 불렀는데, 신神을 대왕大王이라 한 것은 한국과 중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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