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술降神術>
강신술降神術을 심령술心靈術, 교령술交靈術이라고도 합니다.
사자死者의 혼령魂靈이나 먼 곳에 있는 사람의 생령生靈을 데려오는 일입니다.
이와 같은 술법術法을 하는 사람을 영매靈媒라 합니다.
『천예록天倪錄』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천예록天倪錄』은 인물의 전기를 중심으로 한 한문설화집이며, 제목 ‘천예天倪’는 『장자莊子』 「제물편齊物篇」에 나오는 말로 ‘시비나 대립, 차별을 초월한 경지’를 뜻합니다.
송상인宋象仁 공公은 매우 강직하고 정직했으며, 평생 무당巫堂들을 미워했다.
그래서 무당들이 귀신鬼神을 핑계로 백성들을 속이고 있으며, 빌거나 축원한다고 하여 오랫동안 음사淫祠를 행하면서 사람들의 재물을 허비한 것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으니, 실로 모두가 허망虛妄한 것이라 했다.
항상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이 무리들을 모두 없애 세상에 다시는 무당이 없도록 할 수 있을까’라 했다.
남원부사南原府使가 되자 명령하기를 ‘만약 우리 고을에 무당이라 칭하는 자가 발각되면 하나도 남김없이 매를 쳐서 죽일 것이니, 경내에 두루 명하여 모두 다 듣고 알게 하라’고 했다.
무당들이 이 명령을 듣고 두려워하여 일시에 달아나 모두 다른 읍으로 옮겨갔다.
송宋 공公은 우리 고을에는 한 명의 무당도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루는 광한루廣寒樓에 올라가 바라보니 한 미인美人이 말을 타고 흙으로 빚은 장구를 메고 가고 있었는데, 무녀巫女 행색行色이 분명했다.
바로 사령을 보내 붙잡아서 관아의 뜰로 끌고 오게 하여 묻기를 ‘네가 무당이냐?’ 하니 ‘그렇습니다’라고 했다.
또 묻기를 ‘너는 관가에서 내린 명령을 듣지 못하였느냐?’ 하니 ‘들었사옵니다’라고 했다.
그래서 말하기를 ‘너는 죽음이 두렵지 않느냐. 어찌하여 우리 고을 안에 남아 있느냐?’ 하니, 무당이 절을 하고 아뢰었다.
“소인이 드릴 말씀이 있사오니, 원컨대 굽어 살펴주십시오. 무당에도 진짜와 가짜가 있사옵니다. 가짜 무당이야 죽일 수도 있습니다만, 진짜 무당이야 어찌 죽일 수 있겠습니까? 관가에서 영을 내려 엄금하는 것은 가짜 무당을 얘기하는 것이지, 진짜 무당은 아닐 것이옵니다. 소인은 진짜 무당이옵니다. 관가에서 저를 죽이지 않을 것임을 알고 편안히 있으면서 옮겨 가지 않았사옵니다.”
공公이 묻기를 ‘어찌하여 네가 진짜 무당이라고 하느냐’고 하니, 무당이 ‘원컨대 시험해보십시오. 영험靈驗이 없으면 죽음을 청하겠습니다’라고 했다.
공公은 다시 ‘네가 귀신을 부를 줄 아느냐’고 물으니, 무당은 ‘부를 수 있습니다’라 했다.
그 당시 공公에게는 죽은 지 얼마 안 된 평생의 친구가 있었다.
공公은 ‘내게 죽은 친구가 있는데, 서울에서 아무 벼슬을 하던 아무개이다. 네가 그의 혼령魂靈을 부를 수 있겠냐’고 물었다.
무당이 대답하기를 ‘어렵지 않사옵니다. 당연히 나리를 부를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하오나 음식 몇 그릇과 술 한 잔은 꼭 있어야 부를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공公은 사람 죽이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 생각하여, 그의 말을 따라 진위眞僞를 실험하고 나서 처리하기로 하고, 곧 명을 내려 음식과 술을 차려주도록 했다.
무당이 말하기를 ‘나리의 옷을 한 벌을 주시면 그것으로 신령神靈을 청하겠습니다. 옷이 없으면 신이 내리지 않습니다’라고 하니, 공公은 전에 입던 옷 한 벌을 주라고 명했다.
무당은 뜰 가운데 한자리를 마련하고 술과 안주를 진설한 다음, 몸에는 준 옷을 걸치고 허공을 향해 방울을 흔들면서 괴상한 말을 늘어놓으며, 신神이 내리기를 청했다.
잠시 뒤에 무당이 ‘내가 왔네’라 하고는 공중을 향해 먼저 유명을 달리하며 결별할 때의 슬픔을 말하였다.
그런 뒤 평생 동안 서로 즐거움을 나누며 사귄 정을 이야기하였다.
대나무로 만든 말을 타고 놀던 일부터 책상을 맞대고 공부하던 일, 과거보러 가던 일, 조정에 나아가 벼슬살이를 하던 일, 모든 행동을 함께 하고 벼슬하고 물러남도 같이하며, 속마음을 터놓고 사귀며 아교와 옻처럼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로 지낸 사정에 이르기까지 또렷이 말했다.
이는 모두 사실로 털끝만큼의 차이도 없이 맞추었다.
또한 공公과 이 친구만이 알 뿐 남들은 알지 못하는 일도 털어놓았다.
공公은 이를 듣고 자신도 모른 사이에 눈물을 흘렸으며,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말했다.
‘내 친구의 혼령이 과연 왔구나, 의심할 바가 없다.’
공公은 곧 좋은 술과 안주를 차리도록 하여 친구에게 대접하였다.
한참 있다가 인사를 하고 서로 헤어져 갔다.
공公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는 늘 무당들이란 모두 간사하고 거짓된 것으로 간주했는데, 이제 비로소 무당 중에도 진짜가 있음을 알았도다’ 하고, 무당에게 후한 상을 주고 무당을 금하는 영을 거두어들였다. 이로부터 다시는 무당을 몹시 배척하는 말이나 의견을 내지 않았다.”
송상인宋象仁(1569-1631)은 문신으로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을 사수하다 순사한 송상현의 아우입니다.
그가 남원부사로 재직한 것은 1629년경(인조 7년)입니다.
재임기간 중 살인계殺人契 조직자 10여 명을 처형했고, 이에 앙심을 품은 살인계 잔당들이 그의 조상 묘를 파헤치자 남원부사직을 사임했습니다.
광한루廣寒樓는 전북 남원시에 있는 누정으로 조선 초 황희가 세워 광통루라 했으나, 세종世宗 때 중건重建하면서 정인지가 광한루로 바꾸었습니다.
원래 건물은 임진왜란 때 불탔고, 현재 건물은 1635년(인조 13년)에 다시 지은 것입니다.
『천예록天倪錄』에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이 설화는 「용산강신사감자龍山江神祀感子」입니다.
옛날에 이름난 재상宰相이 승지承旨로 있을 때 새벽에 장차 입궐하려고 의관을 갖추고 나가려다가 너무 일러서 돌아와, 베개에 기대어 설핏 잠이 들어 꿈을 꾸었다.
말을 타고 대궐을 향해 가다가 파자교把子橋 앞에 이르러 어머니가 혼자서 걸어가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재상은 깜짝 놀라 즉시 말에서 내려와 반기면서 절을 하고, ‘어머니께서는 어찌 가마도 타지 않고 혼자 걸어오십니까?’고 물으니, 어머니가 ‘나는 세상을 떠난 사람이다. 살아있을 때와 다르니 걸어서 가는 것이다’ 했다.
재상이 ‘지금 어디로 가시기에 여기를 지나십니까”’ 하니, 어머니는 ‘용산강龍山江 옆에 사는 우리 집 종 아무개 집에서 지금 굿을 차린다기에 음식을 먹으러 가는 길이다’라고 했다.
재상이 말하기를 ‘저희 집에서 기일忌日날 제사, 계절季節마다 제사와 명절이나 초하루, 보름의 차례茶禮를 다 지내는데, 어머니께서는 어찌하여 노비집의 굿에 음식을 드시러 가는 지경이 되셨습니까?’ 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제사가 있더라도 신도神道에서는 중히 여기지 않고, 오로지 무당의 굿만을 중하게 여길 뿐이다. 굿이 아니면 혼령魂靈들이 어찌 한번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겠느냐?’고 했다.
그리고 말하기를 ‘갈 길이 바빠 오래 머물 수 없다’면서 이별을 고하고 훌쩍 떠났는데,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재상宰相이 바로 꿈에서 깨어났는데, 꿈속의 일이 황홀하면서도 너무나 생생했다.
이에 종 한 사람을 불러 명하기를 ‘너는 용산강에 사는 종 아무개 집에 가서 오늘 저녁에 나를 보러 오라고 해라. 그리고 너는 내가 입궐入闕하기 전에 서둘러 돌아오도록 하라’고 했다.
그러고는 앉아 기다렸다.
잠깐 만에 종이 과연 급히 돌아왔는데, 아직 날이 채 밝기 전이었다.
때가 몹시 추워서 종은 먼저 부엌으로 들어가 숨을 헐떡거리고 떨면서 불을 쬐니, 동료 종이 부엌에 있다가 술이나 한잔 얻어먹고 왔느냐고 물었다.
종이 말하기를 ‘그 집에서 마침 큰 굿을 벌이고 있었는데, 무녀巫女가 하는 말이 우리 집 상전上典 대부인大夫人의 신神이 자기 몸에 내렸다고 하더군. 내가 왔다는 말을 듣고는 바로 우리 집에서 심부름 온 종이로구나 하며 앞으로 불러서 큰 잔에 술을 따라주고 음식도 한 그릇 주면서 오는 길에 파자교 앞길에서 우리 아들을 만났다고 하더라’고 했다.
재상宰相은 방에 있다가 종들이 하는 말을 듣고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목을 놓아 통곡하고, 종을 불러 상세히 물었다.
그러고는 마음속으로 어머님이 굿에 가서 흠향歆饗한 것을 의심할 바 없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이에 무녀를 불러 성대하게 굿을 벌려서 어머니가 잡수시도록 했으며, 이어서 계절마다 꼬박꼬박 굿을 했다고 한다.
이상은 최유원崔有源 공公의 일로 알려졌는데, 최崔 공公은 효성孝誠으로 세상에 알려진 사람입니다.
파자교把子橋는 좌포청左捕廳이 있던 정선방貞善坊. 현재 종로구 종로3가 단성사 자리입니다.
용산강龍山江은 서울의 용산과 노량진 사이를 흐르는 한강의 일부분입니다.
최유원崔有源(1561-1614)은 대사성大司成, 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했고, 효행孝行으로 이름이 높아 사후死後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습니다.
정문旌門이란 충신忠臣이나 효자孝子, 열녀烈女 등을 표창表彰하기 위해 그 집 앞이나 마을 앞에 세우던 붉은 문으로 작설綽楔, 홍문紅門, 생정문生旌門이라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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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매공 작성시간 09.09.18 무식하게 묻습니다. 그러면 유교에서 지내는 기일 등 제사보다 굿을 하는 것이 바른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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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광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9.09.20 여기에 연재하는 글은 조선시대의 민속신앙을 전하는 것입니다. 단군, 즉 무당이 나라를 개국한 이래 민속신앙이 어떻게 존속되어왔는지를 말하는 것 뿐입니다. 오늘날 굿은 미신이지요. 그것으로 제사를 대신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다만 우리 조상들이 굿에 큰 의미를 부여했던 역사적 사실을 아는 것이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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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매공 작성시간 09.09.21 예 그러하군요 가르침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