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원金應元
난초만 그린 김응원金應元(1855~1921)의 출신배경이 전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가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하인이었다는 설이 전해집니다.
흥선대원군이 섭정에 오르기 전에 득의의 묵란을 즐기며 은신할 때부터 어린 종복으로 따라다닌 김응원이 그 뒤에도 계속 개인 수종으로 대원군을 모시며 석파란법石坡蘭法을 스스로 익힌 것으로 전해집니다.
석파는 대원군 이하응의 아호입니다.
섭정기의 대원군이 주위의 묵란 앙청을 모두 응할 수 없어 김응원으로 하여금 대신 그리게 했다고도 하는데, 김응원의 묵란은 석파란법을 충실히 추종한 바탕 위에 이루어졌으며 후년에는 김정희의 문인화 정신의 묵란법도 본받아 한층 자재로운 경지에서 도달했습니다.
1911년에 근대적 미술학원으로 서화미술회書畫美術會 강습소가 개설될 때에 조석진趙錫晉, 안중식安仲植과 함께 지도교사진에 들어 묵란법墨蘭法을 가르쳤습니다.
1918년 민족사회의 전통적 서화가들과 신미술 개척자들이 서화협회를 창립할 때에도 조석진·안중식 등과 함께 13인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습니다.
글씨는 행서와 예서를 잘 썼고 그림은 묵란이 전문이었습니다.
그의 묵란들은 대원군의 필법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독자적인 경지를 이루었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은 창덕궁 소장인 웅장하고 환상적인 구도의 대작 <석란石蘭> 등이 있습니다.
<석란>은 대작으로 광대한 의상意想과 묵란 기량이 한껏 발휘된 대표적인 역작입니다.
변화무쌍하게 전개되는 기암유곡奇岩幽谷의 경개에 청아한 난초들이 고결한 풍정으로 그려졌고 다른 초화는 일체 배제되었습니다.
암석의 몽상적 형상은 공간의 깊이와 유현한 분위기를 수반하며 수묵필치, 먹의 농담 변화, 태점의 표현 등이 궁중에 바쳐진 그림답게 필력과 기량을 다한 듯이 보입니다.
왼편 상단에 예서체로 적힌 글귀는 “난의 기운은 맑고 돌의 바탕은 고요하다. 맑으면 오래 가고 고요하면 수를 누린다”는 뜻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