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백李時白

작성자김광우|작성시간16.05.23|조회수81 목록 댓글 0

이시백李時白

 

 

 

 

 

이시백李時白(1581~1660)은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고 연양군延陽君에 봉해졌습니다.

다음해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협수사協守使가 되어 안현鞍峴에서 정충신鄭忠信 등과 함께 반란군을 격파했습니다.

 

그 공으로 수원방어사가 되어 병마 3,000을 훈련시키고, 유사시에는 십장기十丈旗와 방포放砲를 신호로 모이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정묘호란 때 병마를 이끌고 신속히 동작나루에 도착, 인조를 강화도로 무사히 인도했습니다.

 

1633년 병조참판, 1636년 경주부윤이 되었으나, 왕이 불러들여 병조참판으로 남한산성수어사를 겸했습니다.

그해 12월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인조를 맞이했으며, 서성장西城將으로 성을 수비했고, 다음해 공조판서에 승진되어 지의금부사를 겸했습니다.

1638년 병조판서 때, 척화신斥和臣(병자호란 때 중국 청나라와의 화친을 배척하는 신하를 이르던 말)으로서 청의 강압에 못 이겨 심양瀋陽에 아들 유대신 서자를 볼모로 보냈다가 2년 뒤 탄로되어 여산礪山에 중도부처中途付處(유형流刑으로 지정장소를 떠나지 못하도록 하던 형벌)되었습니다.

 

다음해 풀려나서 총융사가 되고, 1644년 심기원沈器遠의 모반 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무고를 받았으나 왕의 신임으로 추궁을 받지 않고, 이어 한성판윤과 형조, 공조의 판서를 역임했습니다.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죽고 원손이 어려 인조와 중신들은 봉림대군鳳林大君(훗날의 효종)을 세자로 삼을 것을 희망했으나, 이경여李敬輿와 함께 원손을 그대로 세울 것을 주장했습니다.

 

16495월 효종이 즉위하자 이조판서, 좌참찬이 되고, 1650(효종 1) 우의정에 올랐습니다.

다음해 김자점金自點의 모역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우 시방이 그와 가깝다는 이유로 혐의를 받자 도성 밖으로 나가 조용히 지냈습니다.

1652년 사은사謝恩使(고마운 일에 대한 감사의 답례로 수시로 보내던 사신)로 청나라를 다녀와 언사言事(나랏일에 관한 상소上疏)로 견책을 받은 조석윤趙錫胤 등을 신구伸救(죄가 없음을 사실대로 밝히고 누명을 벗겨 남을 구원함)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벼슬에서 떠났습니다.

 

그러나 바로 좌의정에 이어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에 봉해지고, 1655년 영의정에 임명되자 다시 벼슬에 나왔습니다.

1658년 김육金堉(1580~1658)의 건의에 따라 호남에도 대동법을 실시하도록 했습니다.

다음해 효종이 죽자 윤선도尹善道 등이 수원에 능을 정하자고 건의했으나, 그가 교통이 빈번해 적합하지 못함을 들어 여주의 영릉寧陵을 택하도록 했습니다.

 

일곱 번이나 판서를 역임했고 영의정에까지 올랐으나, 청빈해 빈한한 선비집 같았다고 합니다.

 

다음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李肯翊이 찬술한 조선시대의 사서史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시백은) 기상이 씩씩하고 원대하였으며, 체격이 크고 훌륭하였고 힘이 뛰어나게 세었으나 항상 깊이 감추어 비록 남에게 곤욕을 당하여도 겨루지 않았다.

백사白沙가 일찍이 말하기를, ‘이시백은 포의로서 사귀어 노는 자는 모두 이름난 사람들이며, 그를 믿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닦아서 그렇게 되는지 모르겠다하였다.

임술년에 어머니가 별세하여 겨우 성복을 마쳤을 때,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 신공申公이 찾아와 조상하였는데 시백의 아버지 충정공忠定公이 시사時事(반정反正)를 언급하자 첫마디에 서로 뜻이 맞았다.

이 말하기를, ‘이 일은 맏상제와 의논하지 않을 수 없는데, 마침 애통 중에 있으니 뒷날을 기다려야겠다하였더니, 충정공이 말하기를, ‘이는 대의에 관한 일이니 상주가 일에 참여하지 않는 일반적인 관례대로 논할 수 없다하고, 곧 공을 불러내어 의논하여 결정하였다.

 

병자년 수어사로 남한산성의 일을 주관하였는데,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행차하자 공(이시백)을 불러 이르기를, ‘성중에 여러 가지 미비한 것이 많은데 어찌 경이 수어사의 임명을 받은 후에도 미비한 것이 있는가하였더니, 답하여 아뢰기를, ‘신이 임명을 받았을 당초에 오늘의 환란이 있을까 염려하여 체찰부體察府에 청하기를, ‘일이 급작스러이 일어나면 먼 고을의 군사는 형편상 미처 모이지 못할 것이므로, 원컨대 가까운 고을의 군사를 나누어 배속시켜 주시오하였으나, 체찰부에서 허락하지 아니하였고, 다시 5월에 청하기를, ‘합동 훈련을 시키고 그 지역을 정하여 병기를 수선하게 하여 뜻밖의 일에 대비하자고 하였으나, 체찰부에서 또 허락하지 않았으며, 7월에 다시 합동 훈련을 시킬 것을 청하였으나 또한 허락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에 신이 부득이 어전에 직접 아뢰기를 청하여, 겨우 경기도 내에 소속된 군사를 한 번 야간 훈련을 시키고 약간의 움막을 지어 땔감을 조금 쌓아 놓고 돌아갔는데 금일에 이르러 이 모양이오니, 신 또한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하였다.

체찰부에서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다른 일로 핑계하여 공을 잡아다 특별한 곤장으로 피가 흐르도록 때리니, 해괴히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나, 공은 분하게 여기거나 한탄하는 빛이 거의 없었다.

 

(이시백)이 살던 집은 곧 충정공이 나라에서 하사받은 것으로 뜰 위에 전부터 한 그루의 유명한 꽃나무가 있었는데, 그 이름은, 금사낙양홍金絲洛陽紅이라 하였고, 세상에 전하기는 그 꽃나무가 중국으로부터 왔다 하였다.

갑자기 어느 사람이 일군을 데리고 찾아왔으므로 그 연유를 물었더니, 그는 곧 대전별감大殿別監으로 임금의 명을 받고 그 꽃나무를 캐어 가려는 것이었다.

공이 꽃나무에 가서 그 뿌리까지 뽑아 부수어뜨리고 눈물을 떨어뜨리며 말하기를, ‘나라의 형세가 아침저녁을 보장할 수 없는데 임금께서 어진 이를 구하지 않고 이 꽃을 구하시니 어찌하시려는가. 내 차마 이 꽃으로 임금에게 아첨하여서 나라가 망함을 볼 수 없다. 모름지기 이 뜻을 아뢰라하였다.

그 후 임금이 공을 대접함이 더욱 두터웠는데, 그 충성스럽게 간한 뜻을 가상히 여겼기 때문이다.

 

기축년에 임금이 어수당魚水堂에 나와서 공(이시백) 등 두어 사람을 입시하게 하였다.

술과 찬이 모두 안으로부터 나왔다.

임금이 친히 잔을 잡고 묻기를, ‘병조판서는 주량이 얼마나 되오하자, 공이 답하기를, ‘신은 본래 술을 마실 줄 모르는데다가 항상 병을 앓고 있어 더욱 마시지 못합니다하였더니,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병은 남한산성에서 너무 애써서 생겼다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경의 자손은 몇이나 되는가하여, 공이 수를 들어 대답하였더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게 많은데 과거 공부에 힘쓰지 않음은 웬 까닭인가. 만약 나라 일을 담당하고자 하려면 비록 무과武科라도 좋다. 경의 선친이 나라 일에 충성을 극진히 바쳤으므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하였다.

공이 아뢰기를, ‘신이 수원水原을 맡았을 때, 집에 돌아와 선신先臣을 뵈었더니, 선신이 신에게, ‘어떻게 다스리려느냐고 묻기에, 답하기를, ‘요즘 듣건대 누가 아버지에게 수원에서 밤낮으로 군사를 준비하는데 그 마음을 추측할 수 없다 하였다니, 인심이 이 지경이니 비록 나라 일에 정성을 다하고자 하여도 그 사세가 또한 어렵습니다하였더니, 선신이 그 말을 듣고 일어나서 신을 뜰아래에 잡아 놓고 말하기를, ‘임금께서 너의 무능함을 살피지 않고 너에게 중대한 임무를 맡겼으니, 네 분수에 맞게 오직 성의를 다할 뿐이지 너의 몸을 어찌 돌아보며 남의 말을 어찌 염려할 것이냐. 남의 허망한 말을 듣고 장차 네 직책을 폐하려 하느냐하고, 노함이 심하여 매를 때리려 하다가 친척들의 만류로 그만두었습니다. 선신이 죽기 전에는 오직 나라가 있음을 알 뿐이었습니다. 이제 전하의 말씀을 받사오니 감격의 눈물을 금할 수 없습니다하였다.

임금이 한참 동안 탄식하다가 세자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이들을 보기를 팔다리股肱처럼 하니, 너도 뒷날 대접하기를 나와 같이 하라하였다.

 

(이시백)이 연경燕京에 갈 때 평양에 이르렀더니, 대동문 밖에 기생이 한 떼를 이루었는데, 화려한 복색과 단장이 빛났다.

공이 말하기를, ‘병자년 난리 이후에 서도가 탕진되어 남은 것이 없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 이를 보니 크게 이상한 일이구나하니, 평양서윤平壤庶尹이 대답하기를, ‘난리 후에 기생이라곤 오직 늙고 병든 자만 남아 있어 사신의 행차에 항상 체통을 이루지 못하므로, 이에 각 고을의 관비官婢 가운데 자태와 재주가 있는 자를 선발하여 본부에 옮기고, 또 그 친족들로 하여금 그 의복의 비용을 맡게 하였습니다하였다.

공이 노하여 말하기를, ‘나라에서 서윤을 설치한 것은 백성을 사랑하기 위함인가, 사신에게 아첨하여 기쁘게 하기 위함인가. 이러한 시절을 당하여 이러한 일을 하니 매우 놀랄 만한 일이구나하고는, 곧 뿌리쳐 물러보내고, 감사를 불러 책하기를, ‘지금 어찌 기생의 놀이를 베풀 때인가. 아뢰어서 치죄하고 싶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이번만은 그냥 둘 터이니 모름지기 재촉하여 금일 내에 돌려보내되, 혹시라도 지체하여 어김이 없도록 하시오하였다.

 

(이시백)의 집이 대대로 청렴, 검소함을 지켜왔는데, 어느 날 자기 부인이 비단실로 가장자리를 두른 방석을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라, 뜰아래 부들자리를 깔게 하고 부인을 청하여 함께 앉아 말하기를, 이것이 우리가 옛날부터 깔던 것이오. 내가 어지러운 때를 만나 외람되이 공경公卿에 올랐으니, 조심스럽고 위태롭게 여기며 실패할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어찌 사치로써 망하기를 재촉한단 말이오. 부들자리도 오히려 불안한데, 하물며 비단방석이겠소하고 한탄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부인이 부끄러워 사과하고 곧 뜯어버렸다.

 

(이시백)이 수원 부사로 있을 때, 수천 명의 군사와 말이 각 마을에 흩어져 있으므로 만약 위급한 일이 생겨도 쉽사리 모을 수 없다 하여, 열 길 되는 깃대를 높은 언덕 곳곳에 세워 놓고 모든 군사들에게 약속하기를, ‘위급하면 내가 꼭 깃대에 방색기方色旗를 달고 자호포子號砲(신호탄)를 세 번 쏠 터이니, 깃발을 보거나 포성을 듣거든 서로 알려서 어떤 사람도 시간을 넘기지 말도록 하라하였다.

정묘호란의 보고가 오자, 공은 즉시 갑옷을 입고 정문에 앉아서 깃발을 달고 포를 쏘았다. 날이 겨우 오시 경에 모든 군사가 모두 기약대로 모였으므로, 공이 즉시 거느리고 동작銅雀 나루에 도착하였을 때는 아직 날이 밝지 않았다.

임금이 불러 보고 이르기를, ‘어찌 귀신처럼 빠르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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