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위천 따라 정자서 고택까지 ‘역사 흔적’ 가득 |
유난히 뜨거웠던 여름은 위대하다. 여름은 사람들이 더위를 피해 곳곳의 강과 바다로 나가 더위를 식히게 했고, 과일과 곡식이 익어가도록 했다. 노란 야생화가 화단을 꾸미듯 피어 있던 봄날 농산리 석불을 찾아 한바기 둘러보고..
◇ 용암정·수승대 농산리 석불입상에서 들판 사이로 내려서면 덕유산 자락에서 흘러내린 맑은 물이 흰 거품을 일으키며 소용돌이치는 위천 너럭바위 위에 용암정이 있다. 용암정은 1801년(순조1)에 용암 임석형이 강산풍월을 읊조리며 세월을 보내던 곳이다. 1864년에 보수 공사를 하였고,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기와지붕이다. 중앙에 방 1칸을 만들어 마루 아래에서 불을 땔 수 있게 하였고 마루 둘레에 난간을 설치하였다. 계단은 통나무를 도끼로 쪼아 만들어 자연미가 그대로 살아있다. 정자 안에는 ‘용암정,반선헌 청원문 환학란’ 이라고 쓴 액자가 걸려 있다.
정자 아래를 흐르는 위천을 따라 한 모랭이를 굽이져 돌면 경사진 반석과 맞붙어 있는 용소가 있다. 이곳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용소에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옛날 용소에 두 마리의 이무기가 살고 있었는데 천년의 세월을 은둔하며 이곳에서 살다가 승천하는데 한 마리가 사람의 눈에 띄어 처절한 울음소리를 내며 용소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용암정 근처에 있는 다리를 건너 구불구불한 산과 냇물을 끼고 있는 지방도로를 따라 오리도 안되는 곳에 수승대가 있다.
수승대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영남 제일의 동천으로 쳤던 안의삼동 중 하나인 원학동 계곡 한가운데 위치하는 화강암 암반으로 깊고 긴 계곡과 주변 임야와 어우러져 탁월한 자연경관을 보여준다.
수승대는 백제의 사신들이 중대한 임무를 띠고 남의 나라로 떠날 적에는 반드시 거쳐 갔다. 본래 수심에 차서 송별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수송대였으나, 조선 중종8년(1513년) 정월 학자 퇴계 이황이 마리면 영승리에 왔다가 한양으로 가면서 시를 한 수 남겼다고 한다.
시 내용에 수송을 수승이라 바꾸어 부른 구절이 있어 그 후 수승대라고 불렀다고 한다. 수승대는 거창의 누대와 정자를 대표하기에 손색이 없는 곳이다.
요수정이라는 정자가 있고 관수루라는 누각이 있으며, 크고 잘생긴 바위가 있다. 거기다 구연서원이라는 배움터가 있으니 갖출 건 다 갖춘 셈이다. 매년 수승대 일원에서는 거창국제연극제가 열린다. 거창국제연극제는 자연, 인간, 연극이라는 주제로 수승대 일원 무대에서 주옥 같은 연극이 공연되어 밤하늘을 빛냈다. 수승대의 빼어난 절경 속에 낮에는 계곡에서 피서를 즐기고, 밤에는 하늘의 별을 보며 연극을 관람하는 일석이조의 즐거움이 있다.
◇ 황산리 신씨고가·황산마을 담장 수승대 주차장에서 길을 건너 잠시 걸으면 거창 신씨 집성촌인 황산마을이 있다. 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냇물을 따라가면 신씨 고가가 있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27년 옛 건물을 헐고 다시 지은 것으로 일명 원학고가라고도 부른다. 건물은 안채, 사랑채, 중문채, 곳간채, 솟을대문, 후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검소한 양식에 서민 전통한옥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집이다.
이 마을의 담장도 등록문화재 제259호로 지정되어 있다. 담장은 대개 토석담으로 활처럼 휜 담장길이 고가들과 어우러져 고즈넉한 풍경을 이룬다. 담장은 물 빠짐을 위해 아랫단 60~90cm 정도 자연석으로 돌만 이용하는 메쌓기 방식으로 쌓고 그 위에 황토와 작은 돌을 교대로 질서 있게 쌓아 올렸고 담장 위에는 대부분 기와를 올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