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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시간 무렵, 라이온이 내 사무실에 들어섰다.
가슴이 철렁한다.
죄를 지은 듯하다.
라이온은 우리 회사 직원이 아니다. 인터넷 동호회에서 알게 된 젊은이다.
만년필을 좋아해서 가끔 만나면 만년필 이야기를 한다.
라이온은 나를 만나서 총무부의 미스 리를 소개를 받을 참이었다.
헌데 그 미스 리는 방금 내 자리를 떠난 다른 남자와 저녁 약속을 이미 했다.
미스 리는 우리 회사의 우리 미스였다.
예쁘고 곱고 상냥하다. 라이온과 짝을 맞춰줄 참이었다.
라이온 27, 미스 리는 23이니 좋은 나이였다.
방금 나와 이야기를 하고서 떠난 다른 남자는 누구였나. 그 또한 우리 회사 직원이 아니다.
길에서 만난 남자였다. 그런 친구가 내 소개를 받아서 미스 리와 만날 약속을 한 거다.
이는 비극적 희극이다.
떡눈이 오던 날이었다.
길바닥은 난장판이었다. 퇴근 시간에 차를 회사의 주차장에 두고 지하철을 타고서 집에 가는 중이었다.
경리부 여직원과 총무부의 미스 리는 나와 같은 방향이었다.
또래 그 아가씨들은 혼자 있으면 조용하나 함께 있으면 명랑한 대화는 듣기만 해도 좋았다.
그리고 중간에 그 둘은 내렸고 나는 종점 가까운 내 집 근처에서 내렸다. 그때 나를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남자다. 명함을 먼저 내게 건넨다. 무슨 설계사무소 소장, 그의 직책이다.
총무부의 미스 리를 보고 한 눈에 반했단다.
이런 실성한 녀석이 다 있나! 그렇다면 미스 리를 따라 가지 늙은 미스터 황을 왜 따라왔대.
자기는 독신이라며 자기와 대화를 해보고 쓸 만한 사람이나 미스 리를 소개해달란다.
이때 나는 깜박 라이온은 잊고 있었다. 워낙 설계사무 소장의 기습작전이 신속해서 나는 뭐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당황했다.
그리고 한 편 이 젊은 친구가 멋져 보였다. 19세기가 아닌 20세기말에 아직도 길에서 만난 여자를 한 눈에 반해서 소개를 해달라는 용기가 부럽고 대견했다.
내 사무실에 오라고 나도 명함을 주었다.
나는 내심 미스 리에 대해선 이 소장하고 인연이 안 될 자신이 있었다,
경리부 아가씨 말로는 미스 리는 군인 중에도 장교하고 결혼을 하겠다는 작정을 하고 있다는 거다. 선을 봐도 그런 사람들하고만 본다는 이야기다.
한 번 나를 보고 갔고 넌지시 총무부에 가서 미스 리를 한 번 보고 수작을 떨고 갔다.
이런 이야기, 주택사업부의 황부장이 어디계신가요?
나를 만나고서 여자와는 그런 헛소리를 하고 갔단다.
한 번 만나서 명함을 주었는지 뭐를 주었는지 경리부 아가씨의 정보에 의하면 이 날 그 건축 소장과 만난다는 말을 방금 들은 뒤였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라이온에게 좋은 아가씨를 소개할 테니 오라고 하는 날이 이렇게 꼬였다.
라이온은 헛물을 켰다.
차분하고 나이답지 않게 점잖은 라이온은 나를 보았으면 됐다고 한다.
라이온은 라이온의 탈을 쓴 양인 듯 내 마음에 걸린다.
회사 밖에 있는 찻집에 가서 내가 차를 산다.
나는 메모지에다 품속의 펠리칸을 꺼내서 사연이 이렇게 저렇게 됐다고 구차하게 설명을 한다.
잊으세요. 저는 일파님을 봤으니 됐어요.
나는 라이온의 시선이 내 만년필에 꽂히더니 만년필 이름이 뭐냐고 묻는다.
펠리칸 이지. 어디 한 번 써봐. 필기 맛이 죽여준다고.
과연, 잘 나가네요.
라이온은 만년필을 이리저리 만진다.
내 품에는 몽블랑 145가 또 있다.
몽블랑은 서류 결재를 할 때 쓴다.
펠리칸은 수첩에 메모를 할 때나 회의할 때 쓴다.
내 윗사람 중 아무도 몽블랑을 쓰는 사람이 없다.
동료 부장들 중 아무도 없다.
공연히 눈치가 보인다.
나는 받아든 펠리칸의 뚜껑을 닫고서 라이온에게 건넨다.
자네, 만년필이 없지. 이거 쓰라고. 내 미안한 마음이야.
준다느니 아니라느니 하나마나한 대화가 오간다.
라이온은 자신의 가방에서 팜의 파이롯드를 꺼낸다.
한창 뜨는 PDA이다. 한때 시대를 풍미하던 팜을 나는 또 다른 동호회에서 총무를 맡고 있는 다른 친구에게 얼마 뒤에 또 준다.
일파님께서 글을 쓰시면서 이 기계이야기를 하셨지요. 저는 별로 쓰는 일이 없으니 이것을 쓰세요. 그래야 제 마음이 편하지요.
라이온이 다녀가고 그 소장이 다녀간 뒤 6개월이 지났을까. 소장의 뚝심이 미스 리를 꺾었다.
총무부의 미스 리는 그 소장과 결혼을 했다.
미스 리는 라이온의 미스 리가 아니라 소장의 미스 리가 되었다.
그 뒤 10년이 지났다.
이제 마흔이 가까운 나이의 라이온과 가끔 연락이 된다.
두 해 전 우리 집에 왔을 때 윗도리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서 보여준다.
내가 그에게 주었던 펠리칸이다.
사랑을 맺을 인연이 떠난 뒤 그에게 남은 펠리칸M400이다.
펠리칸을 보면 미스 리 생각이 난다.
맺어주지 못한 인연과 더불어.
펠리칸
그 펠리칸에 대한 이야기에는 서부전선에 이상이 없다와 개선문의 작가 레마르크가 떠오른다.
1820년 독일에서 잉크 제조회사로 출발한 ‘펠리칸(pelikan)’사가, 1929년에 최초로 만든 만년필이다. 1800년대 독일에서 물감과 그와 관련된 도구들을 생산 판매해온 회사를 창립한 호너만 Carl Hornemann은 화학자고 물감 제조사이었다.
부친은 당시 독일의 귀족 계급의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공식 ‘그림 지도교사(drawing master)’ 이기도 했다. 단순히 물감과 관련 도구를 생산 판매하는 상인(商人)이 아니었다. 칼Carl은 당시에 프랑스와 영국으로부터 값비싼 물감들을 수입하여 연구 분석하여 물감의 질을 높였다. 1863년 화학자 군테 바그너 Gunther Wagner가 ‘펠리칸’ 사에 들어오고 1871년에 회사를 인수했다. 만년필 뚜껑 cap 위에 펠리칸이 새끼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로마 카톨릭적 상징인 Wagner 가문(家門)의 문장을 새기고, 이를 정식 상표로 등록하였다.
가족경영의 비즈니스를 원한 Gunther Wagner는 1881년 ‘펠리칸’의 순회영업사원으로 회사생활을 시작한 프릿츠 바인도프 Fritz Beindorff를 사위로 맞이하고 1895년 이 회사를 사위에게 넘긴다. 새로운
경영과 자본으로 ‘펠리칸’사는 점점 성장하여 생산시설과 작업라인을 확장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펠리칸’사에게도 전쟁은 큰 재앙이었다. 모든 수출통로가 막히고 사업규모도 축소되었다. 1921년 회사는 프릿츠 바이도프Fritz Beindorff와 그의 세 아들과의 동업관계로 재조직되었다. 그리고 잉크사업을 보완하기 위해서 새로운 품목으로 1925년 만년필 제작을 시작한다. 당시 잉크 저장 시스템이 안약주입기 eye dropper같은 것으로 만년필에 잉크를 넣었다. 헝가리 태생의 엔지니어인 테도 토바크스 Theodor Kovacs가 지금은 '플런저'방식으로 알려진 피스톤 식의 저장방식을 새로 개발하여, 1923년 특허를 취득하고 자체적인 회사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경영난에 이기지 못하여 1925년 펠리칸’사가 Theodor Kovac으로부터 특허권을 사들였다. 피스톤 잉크 주입방식을 완성시키기 위해 카롤라 바코 Carola Bako를 고용하여 끝내 이를 성공했다.
드디어 1929년 '펠리카'사에서 최초로 생산한 만년필이 나왔다.
이름은 '펠리칸 만년필(The Pelikan Fountain Pen)'이다. 시판 즉시 이목을 끌었다. 만년필이라면 검정색으로 알던 시절에는 대담한 색상의 만년필이었다. 최신 재질인 초록색 셀룰로이드의 몸통(배럴)에 새롭게 디자인된 현대식 캡이 돋보였다.
더구나 놀라운 잉크 주입방식인 피스톤식의 저장방식을 몸속에 지녀서다. 이 새로운 저장시스템은 디자인의 혁명이었다. 작은 몸체에 당시로서는 대단히 많은 용량의 잉크를 저장하는 실용성이 뛰어났다.
더구나 스크루 방식의 촉(nib) 교환 시스템으로 촉 부분을 돌리면 그대로 피드와 함께 빠져나오게 하여 촉 교환이 아주 손쉽다. 이 점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펠리칸의 고유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혁신적인 촉 교환 방식은 당시 펜 판매자들로 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고객들이 원하는 촉을 손쉽게 판매할 수 있게 되었고, 촉 교환이 별다른 도구나 기술 없이도 가능했기이다. 이서서 당연히 판매도 늘어났다.
’펠리칸‘ 사는 만년필이 생산된 1929년을 기념하여 작품과 언론기사 중에서 대표적 작가와 기자에게 기증하는 판매 전략을 썼다. 그 대상이 그해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가 ’토마스 만(Thomas Mann 대표작 ‘마의 산’)‘과 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Im Westen nichts Neues)’를 쓴 ‘레마르크(Erich Maria
Remarque)’ 에게 기증됐다.
‘펠리칸’은 세계대전의 경제 공황기에도 만년필제조를 계속하였다.
‘펠리칸’은 ‘100’보다 상위 급 모델과 경제적 펜인 ‘Rappen’을 생산하였다. 거의 같은 때에
‘India’잉크를 사용하는 그라포스 ‘Graphos 펜’을 생산하였다.
1934년에는 ‘펠리칸’은 크고 고품질의 샤프펜슬을 선보였으며, 자체적으로 닙과 펜의 부품들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같은 해 ‘펠리칸’은 가장 유명한 모델인 ‘111T’를 선보인다.
톨레도‘Toledo’ 는 스페인 풍 스타일의 배럴(sleeve)에 ‘펠리칸’을 새기고, 클립에도 특별한 문양을 새겼다.
군테 바그너Gunther Wagner가 회사를 인수 후 100주년째인 1938년 ‘펠리칸’은 모델 ‘100N’과 같은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 수 있는 체제로 갖췄다. 회사의 로고를 ‘네 마리의 새끼’에서 ‘두 마리의 새끼’로 바꿨다. 그리고 경제적인 펜인 ‘Rappen’은 ‘Ibis’라고 불리는 다른 경제적인 모델로 대체하였다.
펠리칸은 제2차 세계대전 후 1944년에서 1946년 동안 회사의 생산설비에 큰 타격을 입지 않았으나 펜은 생산하지 못했다. 1947년에야 다시 펜 생산에 들어갔다. 1951년 ‘펠리칸’은 디자인과 함께 펠리칸 부리와 비슷한 모양으로 클립을 변화시켰다.
이 때, ‘400’을 포함한 새로운 모델들이 출시되는데, ‘400’은 블랙 캡에 블랙 / 그린 스트라이프 배럴 또는 브라운 캡에 거북 등껍질(tortoiseshell)의 스트라이프 배럴이다. 이어서 전체 나 부분적으로 금속으로 덧입혀진 ‘550’, ‘600’ 그리고 ‘700’(14K gold로 덧입혀진 캡과 배럴)도 함께 출시되었다. 1953년에는 다소간 짧은 배럴에 이전보다 놉knob부분이 두드러진 ‘NN’모델이 등장한다.
1959년에는 어느 정도 미국풍(Parker 51)의 닙에 덮개가 덮인 ‘P1’ 모델을 선보인다. 열처리가 된 피드와 잉크창이 보이게 처리된 이 펜은 ‘400’보다 고가로서 볼펜과의 치열한 경쟁으로 고통을 받는다. 이윽고 ‘펠리칸’은 펠리카노‘Pelikano’로 후퇴하게 되며, 1965년에는 이들 새로운 모델들을 재편하고 생산량을 조금씩 증가시켰다. 그러나 매출 감소로 1978년에 회사는 심각한 경제난으로 조직을 재구성한다.
1982년은 ‘펠리칸’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해였다. ‘펠리칸’은 ‘건식 복사’의 카본 페이퍼 carbon paper의 매출이 추락하고는 빚더미에 올라선다. 마침내 1983년에는 스위스의 콘도파트 AG‘Condorpart AG’가 회사를 인수한다. 그리고서 새로운 자본의 투자와 함께 업종은 잉크와 필기도구의 생산 체제를 바꾼다. 이제야 겨우 펠리칸은 회복한다.
1980년 후반에 펠리칸은 일련의 모델과 더불어 한정판들을 내놓았다. 특히 1993년의 블르오션‘Blue Ocean’ 모델은 대성공이었다. 이로서 한정판에 대한 판매 확신을 얻었다. 이후, 헌팅‘Hunting’, 월스트리트‘Wallstreet’, 콘서트‘Concerto’, 골프‘Golf’, 오스트리안의 천년‘1000 years of Austria’, 황금연대 ‘Golden dynasty’, 불사조‘Phonix’와 같은 펜들을 선보였다. 이들은 ‘800’과 ‘Toledo’를 기본모델로 한 것이다. 이후그들 시대의 원조 ‘Originals of their time’라는 새로운 개념의 펜을 내놓는다. 이는 1931년에 출시된 펠리칸 모델 ‘100’을 재생(revival)시킨 첫 번째 펜이다.
‘펠리칸’의 펜들은 우수한 품질이다. 그러나 현재의 낮은 판매량에 비하여 모델수가 지나치게 많다. 최근 회사의 소유 지분이 동남아 투자가들에게 인수되기도 하는 등... ‘펠리칸’사의 앞날이 많은 위험이 있다. 그러나 펠리칸의 클립의 펠리칸은 불사조가 될 것이다.
라이온이 얻지 못한 미스 리와 아직도 총각인 라이온 생각에 펠리칸은 이루지 못한 사랑처럼 아쉽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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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一波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9.02.24 만년필로 맺은 인연은 마치 초등학교 동창 같다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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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kevin 작성시간 09.03.08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펠리칸 M400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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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모나미153 작성시간 09.07.15 잘 읽었습니다. 수필과 정보가 결합된 멋진 장르를 개척하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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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부싯돌 작성시간 11.02.06 사람의 인연이 만년필의 인연으로 넘어가는 훈훈한 모습이 선합니다 ^^
일파님은 물론이고, 라이온님도 기회되면 함께 뵙고 싶네요 ^^ -
작성자mogul 작성시간 11.02.09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