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기병사단의 역사적인 공중강습작전
1st Air Cavalry Division Air Assault
1기병사단(Airmobile) 1965-1972년 :
1기병사단은 1965년 공중기동(강습)사단으로 재편되어
베트남에 파병되었다. 명칭은 당시 1st Air Cavalry Division.
헬기로 모든 것을 운송하는 시스템이었다. 첫 번째 대규모
전투가 베트남 중부 이아드랑 전투로, 1기병사단은 베트남
전 최초 미 대통령 부대표창을 받았다.
1968년 1월 테트공세 당시에 고도 ‘후에’에서 전투했고,
68년 3월에는 미 해병대가 고립된 케산 진지에 육로로
도달하는 페가수스 작전에 실시, 사단 3개 여단이 모두
공중기동 강습작전에 참가했다. 지원으로 미 공군은 케산
진지를 포위한 월맹군 정예 304사단과 325사단에 엄청난
B-52 폭격을 퍼부었다. 4월 8일, 테트 공세 이후 고립되
었던 케산 진지에 9번 국도를 타고 1기병사단이 도착했다.
포위 77일만이었다.
케산 도달 후, 기병사단 2여단은 퇴각하는 북베트남군을
국경으로 추격했고, 1과 3여단은 케산 남쪽 어샤우 계곡
으로 공중강습을 했다. (1여단 + 3여단 : 약 11,000명에
헬기 300대.)
바로 공중강습이 역사적인 ‘델라웨어 작전’이다.
당시 어샤우 계곡에 들어와 있던 북베트남군은 훈련과
장비가 우수했다. PT-76 탱크까지 있었고, 레이더로
작동하는 37mm 대공포, 쌍열 23mm 대공포, 12.7mm
중기관총으로 무장했다. 항공기로 중계하지 않으면
무전기가 불통되는 협곡 지역이었다.
그러나 백여 대의 B-52 폭격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군은
미군 C-130 1대, CH-54 2대, 휴이 헬기 약 12대를 격추시
켰다. 모두 미슬이 아닌 지상사격에 맞아 떨어졌고, 델라웨어
작전에서 미군 100명이 죽고 530명이 다쳤다. 기상이 나빠
기병사단 작전이 힘겨운 가운데 북베트남군은 안전한 라오스
로 도주했다. 북베트남군 피해는 전사 800, 탱크 1, 트럭 70,
불도저 2대, 대공포 12문, 화염방사기 30개, 소총과 기관총
1천 정, 수많은 탄약과 보급품을 격파/노획했다.
68년 가을에는 교대해 사이공 근처로 이동했다가 1970년
5월 캄보디아 침공에 참가했다. 미 지상군은 철수하기 시작
하자 1기병사단 주력도 71년 4월 텍사스 포트 후드로 철수
를 완료했다.
베트남전쟁 동안 1기병사단은 다른 육군 사단들보다
피해가 컸다. 전사 5,444명, 부상 26,592명. 이에 반해
가장 격렬했다고 여기는 해병 제1사단도 전사 7,012명
에 부상 6,869명이었다.
이 1기병사단의 어샤우 계곡 대규모 공중강습은
미군 혹은 전 세계 역사상 최초였다.
이 1기병사단 공중강습에
참가한 헬기부대는 아래와 같다.
227 공격헬기대대
229 공격헬기대대
228 공격지원 헬기대대
478 중형 헬기중대
2/20 공중 로켓포병대대
9기병연대 1대대 기병전대
Operation Delaware
미군 피해 : 전사 142, 부상 530
북베트남군 : 사살 확인 869
델라웨어 작전은 어샤우 계곡에 대한 미군/월남군 합동
작전이었다. A Shau Valley는 폭 1.6km에 북에서 남으로
40km 길이로 라오스 국경과 수직으로 나란히 흐른다. 이
계곡은 북에서 비무장지대를 통해서 내려온 호치민 루트
로 이용되었다. 어샤우는 남베트남공화국 목에 가시였다.
1기병사단이 해병대에게 인수한 케산진지에서 남으로 48km
거리. 이 계곡을 따라 흐르는 국도에 북베트남군은 벙커와
터널을 파고 각종 대공포와 중기관총을 다수 배치해 대공망
을 형성했으며, 탱크까지 이 계곡에 들였다.
웨스트모얼랜드 사령관은 어샤우 계곡의 물자를 파괴하지
않으면 후에에서 고립되어 저항 중인 북베트남군에게 보급
품이 전달된다고 생각했고, 북베트남군도 후에에서 독전 중
인 부대에 보급품을 전달하려 필사적이었다. 게다가 광트리
공격도 여기서 시작되기에, 여기를 놔두면 케산도 항상 남쪽
에서 위협을 받게 된다. 상부는 어샤우 제압에 1기병사단이
가장 적당하다고 판단했다.
1968년 1월, 베트남 미군 부사령관 클링톤 아브람스 장군은
중부 고원지대에 있던 1기병사단에게 북부로 올라가 해병대
를 지원하라고 명령했다. 1기병사단은 공중기동사단으로 병력
2만 명에 헬기 450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화력과 기동성에서
베트남 주둔 미군 사단 중에서 가장 강력했다.
테트 공세를 시작으로, 고립된 케산을 기병사단으로 구원
하고, 이어 케산 하단의 어샤우 평정으로 이어진 것이다.
기병사단장 존 톨슨 소장은 어샤우에 대한 작전을 델라웨어
라고 명명했다.
1966년 특전단 기지 철수 이후 어샤우를 장악한 북베트남군
은 일대에 레이더 유도 37mm 대공포로 강력한 대공망을 형성
하고 일대를 벙커와 터널로 요새화했다. 방공망에는 쌍열 23
mm 대공포와 12.7밀리 중기관총이 보강되었다. 어샤우는 지리
적으로 고립되고 가파른 산악이 계곡 양쪽에 병풍처럼 서 있어,
1군단 지역을 책임지는 해병대도 손을 못 댔고, 레인저와 특전단
장거리 정찰대가 유도하는 공중폭격 외에는 발길조차 드물었다.
1968년 4월 초, 북베트남군은 테트와 케산 진지 공격으로 약
4만 명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남베트남 북부 1군단 지역에서
는 영향력이 여전히 막강했다. 40km 거리 라오스에서 어샤우
로 보급품이 계속해서 들어왔기 때문이다. 테트와 케산에서
큰 피해를 입은 북베트남군은 어샤우에서 병력과 물자를 모
으며 새로운 전투를 준비했다.
B-52 예비 폭격을 시작으로 1968년 4월 19일 델라웨어 작전
은 시작되었다. 1기병사단이 어샤우 계곡 북쪽에 공중강습했
고, 미 101사단 1여단/월남군 1사단 3연대도 투입되고, 월남군
3공수사단 1여단이 후에 방향에 차단군으로 투입되었다. 그러
나 나빠진 기상과 적 대공포는 극도의 위험으로 떠오른다.
1기병사단 1여단과 3여단 11,000명이 헬기 300대로 계곡 북부
와 남부를 공중강습했고, 2여단은 케산 진지에 남아 라오스 국경
으로 퇴각하는 북베트남군을 추격했다. 각 여단의 무선보고를
사단본부가 있는 캠프 에반스로 모야야 했고, 항공기 무선중계도
사용했으나, 어샤우 계곡 중간에 있던 약 1,500고지에 ‘Signal Hill’
이라 불린 고지 정상 중계국을 52연대 장거리 정찰대원 30명이
만들었다. 이 시그널 힐을 공고히 하기 위해 고지 주변에서 이틀
간 북베트남군과 전투를 벌였다.
Signal Hill
또한 어샤우 계곡 중간에 버려진 루이 비행장을 C-130으로
보급-거점화했다. 북베트남군은 교전을 회피했고 미군은 대
규모 식량 탄약 병기를 노획했다. 루이 비행장은 과거 남베트
남 특전단이 진지화해서 사용했었고,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이 비행장은 과거 프랑스인들이 만들었다.
백여 대의 B-52와 전폭기 폭격에도 불구하고 적은 많은
미군기를 대공포로 격추시켰다. C-130 한 대, CH-54 한
대, CH-47 치누크 두 대, UH-1 휴이 헬기 24대가 떨어졌
다. 적 대공포가 큰 이유였지만, 계곡 지상에서 쏘는
대공사격에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작전을 지속할 수 없어 미군과
월남군이 어샤우에서 철수하자, 북베트남군은 다시
돌아와 재빨리 계곡을 장악했다.
사단장 톨슨 소장. "이 넓은 지역의 기상은 오래된 프랑스
기록에 의존했고, 이를 통해 어샤우 계곡에서 가장 기상이
좋은 한 달 4월을 작전 시기로 정했다. 예상대로 그 한 달은
다른 시기보다는 좋았다. 그런대도 기상은 최악이었다.”
5월 11일 톨슨 소장은 작전을 종료하고 사단 철수를 명령
했다. 가장 중요한 보급점인 루이 비행장은 비가 오면 활주
로가 무릎까지 빠지는 진창으로 변했고, 곧 다가올 폭풍으로
인해 보급에 지장이 생길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미 해병대는 다음 해인 1969년 1월 다시 어샤우를 공격하는
‘듀이 협곡 작전’을 발진했고, 5월에 101공수사단이 ‘아파치
스노우’ 작전으로 어샤우에 들어온다. 아파치 스노우에서 그
유명한 햄버거힐 전투가 벌어진다. 햄버거힐이라 명명된 동
압 비아 산은 1년 전 1기병사단 무선중계로 사용했던 시그널
힐에서 남서쪽에 가까웠고, 다만 계곡 건너편이었다.
101사단이 들어갈 때는, 북베트남군이 과거 1차대전
프랑스군이 했던 것처럼 주요 고지에 참호선을 길게
축성했다. 어샤우는 두고두고 미군의 골칫거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