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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서평> 벤자민 블레크(Benjamin Blech) 랍비의 《Dear God, Why? (하나님, 왜입니까?)》

작성자phantom|작성시간26.06.07|조회수35 목록 댓글 0

 

#유다이즘

 

<서평> 벤자민 블레크(Benjamin Blech) 랍비의 《Dear God, Why? (하나님, 왜입니까?)》

 

인류의 가장 오래된 질문, "왜입니까?“

 

우리는 오늘 인류가 존재한 이래 가장 가슴 아프고, 가장 자주 던져졌으며, 동시에 가장 완전한 해답을 얻지 못한 하나의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바로 "왜(Why)?"라는 질문입니다.

 

선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이웃이 하루아침에 불치병 진단을 받을 때, 순수한 어린아이들이 전쟁과 자연재해로 목숨을 잃을 때, 그리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자들이 오히려 부와 권력을 누리며 반짝이는 구두를 신고 거리를 활보할 때, 우리 마음 깊은 곳에서는 거대한 비명이 터져 나옵니다.

 

"하나님, 공의로우시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당신이 전능하시다면 왜 이 비극을 침묵하며 바라만 보고 계십니까?"

 

유대교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교육자인 벤자민 블레크(Benjamin Blech) 랍비는 그의 저서 《Dear God, Why?》의 첫 페이지를 바로 이 절규로 시작합니다. 그는 상아탑에 앉아 추상적인 신학 이론을 펼치는 학자가 아닙니다. 수많은 이들의 임종을 지키고, 홀로코스트의 생존자들을 위로하며, 삶의 가장 어두운 밑바닥에서 피를 흘리는 인간의 고통을 온몸으로 마주해 온 목회자입니다.

 

그는 고통받는 이들에게 "다 신의 뜻이 있을 테니 무조건 믿으라"라는 식의 값싼 위로나 상투적인 답변을 건네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신을 향해 "왜?"라고 묻는 것은 불경죄가 아니라,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가장 인간다운 권리이자 영적인 몸부림임을 인정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블레크 랍비가 안내하는 깊은 영적 여정을 따라가고자 합니다. 전능한 존재의 침묵 뒤에 숨겨진 진실, 그리고 고통 속에서 우리가 발견해야 할 삶의 진짜 의미를 찾아 나서는 여정이 될 것 입니다.

 

신정론의 딜레마와 거부되어야 할 오해들

 

블레크 랍비는 본격적인 해답을 모색하기 전에, 우리가 흔히 범하는 심각한 영적 오해들부터 과감하게 걷어냅니다. 고통을 마주한 인간이 가장 쉽게 빠지는 함정은 ‘인과응보(Cause and Effect)의 기계적 적용’입니다. 즉, "네가 고통을 받는 것을 보니, 네가 알지 못하는 무슨 죄를 지었음이 분명하다"는 논리입니다.

 

이것은 욥의 친구들이 욥을 향해 퍼부었던 잔인한 정죄의 논리이며, 수많은 종교적 맹신자들이 오늘날에도 고통받는 이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방식입니다. 블레크는 단호하게 말합니다. 고통은 죄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만약 고통이 단순히 죄에 대한 형벌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선한 이들이 가장 끔찍한 비극을 겪는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즉각적으로 심판하는 기계적인 채점관이 아닙니다.

 

또 다른 오해는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거나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고대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신이 악을 없애려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신은 무능한 것이고,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다면 신은 악한 것이다."

 

그러나 블레크 랍비는 이 이분법적 덫에 걸려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능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인간이 하나님의 거대한 우주적 계획의 극히 일부분, 영화로 치면 단 한 프레임만을 보고 전체 스토리를 재단하기 때문에 오해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캔버스의 아주 작은 점 하나만을 보고 "왜 이리 어둡고 지저분하냐"고 불평하지만, 화가이신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거대한 마스터피스를 완성하기 위한 필수적인 음영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굳이 이러한 '음영'을 우리 삶에 허용하셨을까요? 블레크는 그 첫 번째 열쇠로 '인간의 자유의지'를 제시합니다.

 

자유의지라는 축복, 그리고 그에 따르는 대가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로봇이나 인형으로 창조하실 수 있었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이 세상에 범죄도, 전쟁도, 인위적인 고통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블레크 랍비는 묻습니다. "프로그래밍된 대로만 '사랑해'라고 말하는 로봇의 고백에서 여러분은 진정한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까?"

 

진정한 사랑, 진정한 선, 진정한 도덕성은 오직 '거부할 수 있는 자유'가 있을 때만 성립합니다. 하나님은 인간과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맺기를 원하셨기에, 인간에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도 있는 거대하고 위험한 선물, 즉 '자유의지(Free Will)'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 위대한 선물에는 끔찍한 책임이 따릅니다. 인간이 자유의지를 남용하여 탐욕을 부리고, 타인을 억압하며, 전쟁을 일으킬 때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개입하여 그 손을 부러뜨리지 않으십니다. 만약 인간이 악한 생각을 할 때마다 하나님이 번개를 내려 가로막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자유의지가 있는 인간의 세상이 아니라 공포정치가 지배하는 영적 수용소일 것입니다.

 

세상 고통의 상당 부분은 하나님이 내린 벌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악의 결과입니다. 홀로코스트의 비극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 계셨는가?"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인간의 도덕성은 어디로 갔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지켜주기 위해, 눈물을 흘리며 당신의 전능함을 스스로 제한(Tzimtzum, 수축)하시는 고통을 감내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연법칙의 필연성과 영혼의 제련소

 

인간의 악으로 인한 고통은 이해할 수 있다 칩시다. 그렇다면 지진, 쓰나미, 암세포 같은 '자연적 고통'은 어떻게 설명해야 합니까? 여기에는 인간의 자유의지가 개입할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이에 대해 블레크 랍비는 '자연법칙의 일관성'이라는 깊은 통찰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은 우주를 변덕스러운 마술 상자가 아니라, 정교하고 예측 가능한 법칙 위에 세우셨습니다. 중력은 우리가 땅을 딛고 걸을 수 있게 해주는 고마운 법칙이지만,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비극이 됩니다. 불은 음식을 익히고 추위를 막아주지만, 살을 태우는 고통을 주기도 합니다.

 

만약 하나님이 누군가의 사정을 봐주기 위해 수시로 중력을 없애고 자연법칙을 바꾼다면, 우주는 혼돈(Chaos)에 빠져 그 누구도 영위할 수 없는 공간이 될 것입니다. 자연재해와 질병은 이 물질세계가 완벽하지 않다는 증거이며, 완벽하지 않은 세상에 살아가야 하는 피조물의 필연적인 한계입니다.

 

그러나 블레크 랍비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고통은 단순히 자연법칙의 맹목적인 결과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고통은 인간의 영혼을 단련하는 '영적인 용광로'역할을 합니다.

 

"안락함은 우리를 잠재우지만, 고통은 우리를 깨운다."

 

랍비의 이 말처럼, 우리는 모든 일이 잘 풀릴 때는 삶의 본질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교만해지고, 타인의 아픔에 무감각해집니다. 그러나 극심한 시련을 통과할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유한함을 깨닫고 무릎을 꿇으며, 내면의 영적 심연을 마주하게 됩니다. 고통은 우리 안에 잠들어 있던 진정한 용기, 인내, 그리고 타인을 향한 깊은 자비심을 길러내는 거친 도구입니다. 진주가 조개 안의 상처를 통해 태어나듯, 인간의 가장 고결한 성품은 대개 눈물로 젖은 골짜기를 지나며 완성됩니다.

 

유대적 렌즈로 보는 세계 — '티쿤 올람'과 이 세상의 불완전함

 

벤자민 블레크는 유대교적 전통의 오랜 지혜를 빌려 이 세상을 '프로즈도르(Prozdor, 현관)'에 비유합니다. 이 세상은 그 자체로 완성된 거실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인 '올람 하바(Olam Ha-Ba, 오는 세상)'로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대기실이자 전주곡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 지상의 삶이 인간 존재의 전부라면, 의인의 고통은 영원한 불의이며 하나님은 실패한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삶이 거대한 영원의 여정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현세에서 받지 못한 공의의 보상과 온전한 치유는 반드시 하나님의 영원한 시간표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세상은 어차피 불완전하니 참고 견뎌라"라는 숙명론에 빠지라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유대 사상의 핵심은 바로 '티쿤 올람(Tikkun Olam)', 즉 '세상을 수선하고 치유하는 전령으로서의 인간'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일부러 100% 완벽하게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에 가난한 자가 있는 이유는 우리에게 나눔의 기쁨을 가르치기 위함이요, 병든 자가 있는 이유는 의학을 발전시키고 돌봄을 실천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통이라는 문제를 던져주심으로써, 우리가 창조주의 동역자(Partner in Creation)가 되어 이 깨어진 세상을 함께 고쳐나가기를 도전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불의를 보고 분노하며, 고통받는 이의 눈물을 닦아줄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이 땅에 신의 나라를 실현하게 됩니다. 고통의 존재는 신이 부재하다는 증거가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수행해야 할 영적 임무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이정표입니다.

 

"왜"에서 "어떻게"로 — 위대한 전환을 향하여

 

이제 글을 마무리하며 블레크 랍비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를 가슴에 새기고자 합니다.

 

결국 인간의 이성과 지성으로는 이 세상의 모든 고통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의 섭리는 인간의 뇌라는 작은 컵에 다 담을 수 없는 거대한 대양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블레크 랍비는 고통 앞에서 우리의 질문 체계를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고 촉구합니다.

 

과거를 향해 묻는 무기력한 질문인 "Dear God, Why? (하나님,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대신, 미래를 향해 달리는 결단력 있는 질문인 "Dear God, What? / How? (하나님, 이제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이 고통을 통해 제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합니까?)"로 나아가야 합니다.

 

고통은 선택할 수 없지만, 고통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철저히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고통 앞에 무너져 하나님을 저주하고 냉소적인 인간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그 불길을 통과하여 더 깊은 지혜와 자비를 가진 영적 거인으로 거듭날 것인가.

 

《Dear God, Why?》는 우리에게 고통이 없는 낙원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다만, 폭풍우 한가운데서도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물을 보게 하며, 그 고통을 디딤돌 삼아 더 높은 차원의 영혼으로 도약할 수 있다는 강력한 확신을 줍니다.

 

우리 삶에 찾아오는 이해할 수 없는 시련 앞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치 않고 오히려 깨어진 세상을 치유하는 '티쿤 올람'의 주역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고통의 밤은 깊을지라도, 그 너머에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영원한 새벽은 반드시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By Torah & Judaism Editor

 

※ Bnjamin Blech (born 1933): 미국의 정통파 랍비. 예시바 대학교에서 1966년부터 탈무드를 가르쳐 왔으며 37년 동안 오션사이드 영 이스라엘의 랍비 제직. 총 14권의 책을 저술. 2005년 1월, 랍비 배리 도브 슈워츠, 잭 벰포라드와 함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방문하여 축복을 내리면서 역사상 최초로 교황에게 공개적으로 축복을 내린 랍비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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