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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자유를 대한 두려움

작성자phantom|작성시간26.06.10|조회수27 목록 댓글 0

 

#쉘라흐

 

자유를 대한 두려움

 

정탐꾼 사건은 토라 전체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였습니다. 누가 그들을 보냈고, 어떤 목적을 위해 보냈는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토라 본문은 하나님께서 모쉐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민수기 13:1–2)

신명기에서는 모쉐가 백성들이 요청했다고 말합니다. (신명기 1:22)

 

그 어느 쪽이든 결과는 재앙이었습니다. 온 세대가 약속의 땅에 들어갈 기회를 박탈당했습니다. 입성 자체는 40년이나 지연되었습니다. 현인들에 따르면, 이 사건은 먼 미래까지 그 그림자를 드리웠습니다. 즉 “그날 밤 백성들이 울었다”(민수기 14:1)는 구절에 대해 탈무드는 하나님께서 “나는 이 날을 대대로 울음의 날로 삼겠다”고 맹세하셨다고 전합니다. 그날은 티샤 베아브였으며, 이후 수세기에 걸쳐 제 1성전과 제 2성전이 파괴된 날이기도 합니다(타아닛 29a; 소타 35a).

 

모쉐는 정탐꾼들에게 가서 그 땅을 살펴보고 보고를 가져오라고 지시했습니다. 백성이 많거나 적은지, 강하거나 약한지. 땅 자체는 어떤지. 성읍들이 개방되어 있는지 요새화되어 있는지. 토양은 비옥한가? 그들은 또한 그곳의 열매를 몇 가지 가져오라는 임무도 받았습니다. 정탐꾼들은 그 땅 자체에 대해 긍정적인 보고를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곳은 참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며, 이것이 그곳의 열매입니다.”

 

그러자 유대 역사상 가장 유명한 ‘하지만’ 중 하나가 이어졌습니다. “하지만—그곳에 사는 백성은 강하고, 성읍들은 요새화되어 있으며 매우 큽니다. 우리는 거기서 아낙[‘거인’]의 후손들까지 보았습니다.” (민수기 13:28)

 

그들의 말이 백성들의 사기를 꺾고 있음을 감지한 정탐꾼 중 한 명인 갈렙이 안심시키는 말로 끼어들었습니다. “우리가 올라가서 그 땅을 차지해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정탐꾼들은 고집스럽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 백성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우리보다 강합니다. … 우리가 그곳에서 본 사람들은 모두 키가 거대했습니다. … 우리는 메뚜기처럼 보였습니다…” (민수기 13:30–33)

 

다음 날, 백성들은 그 도전이 자신들에게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확신하고, 출애굽을 시작했던 것을 후회하며 말했습니다. “지도자를 한 명 세우고 이집트로 돌아가자.” (민수기 14:4)

 

지금까지가 그 이야기의 개요입니다. 하지만 이를 이해하기는 지극히 어렵습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루바비치 레베는 이 사건에 대해 근본적으로 새로운 해석을 내놓게 되었습니다.

 

그는 당연한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어떻게 정탐꾼 열 명이 패배주의적인 보고를 가지고 돌아올 수 있었을까? 그들은 고대 세계 제국 중 가장 강력하고 가장 오래 지속되었던 이집트를 무릎 꿇게 만든 일련의 재앙을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것을 친목으로 목격했습니다. 그들은 최첨단 군사 기술인 말이 끄는 전차를 갖춘 이집트 군대가 바다에 빠져 죽는 것을 보았으며,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을 걸어 바다를 건넜습니다. 이집트는 그들이 그 땅을 정복하는 과정에서 맞서야 할 가나안 사람, 페리시 사람, 예부스 사람, 그리고 다른 소국들보다 훨씬 더 강했습니다. 게다가 이는 먼 옛날의 기억도 아니었습니다. 불과 1년도 채 지나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그 땅의 백성에 대해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스비다. 우리는 토라 부분의 하프타라로 읽히는 여호수아서의 구절에서 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정탐꾼들을 여리고로 보냈을 때, 그들을 숨겨 준 여인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이 오는 소식을 듣고 자기 백성이 느낀 감정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을 여러분에게 주셨다는 것을 내가 압니다. 여러분을 향한 큰 두려움이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여러분이 이집트에서 나올 때 주님께서 홍해의 물을 마르게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가 그 소식을 듣자, 우리 마음이 녹아내렸고, 여러분 때문에 모든 이의 용기가 꺾였습니다. 이는 여러분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늘 위와 땅 아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 2:9–11)

 

여리고 백성은 거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을 두려워한 만큼이나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했습니다. 또한 이는 나중에야 드러난 사실도 아니었습니다. 모쉐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바다의 노래’에서 이렇게 노래했었습니다:

 

백성들이 듣고 떨며, 블레셋 주민들에게 고통이 닥쳤도다.

이제 에돔의 지도자들은 당황하고, 모압의 통치자들은 떨며,

가나안의 모든 주민은 녹아내렸도다.

공포와 두려움이 그들에게 닥쳤으니,

주의 팔의 위대함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돌처럼 굳어졌도다. (출애굽기 15:14–16)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알고 있던 것을 어찌하여 잊어버렸나요?

 

게다가, 랍비는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정탐꾼들은 백성 중에서 무작위로 뽑힌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토라에는 그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지도자들이었던 자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쉽게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질문은 명료했지만, 랍비가 내린 대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습니다. 정탐꾼들은 실패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고 그는 말했습니다. 그들은 성공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 어느 민족도 하나님과 이토록 가까이 살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 땅에 들어간다면, 성소 주위에 진을 치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으며, 쉬키나와 끊임없이 교감하며 살아가던 그들의 생활 방식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들은 전쟁을 치르고, 군대를 유지하며, 경제를 세우고, 땅을 경작하고, 날씨와 농작물을 걱정해야 했을 것이며, 세상에 살면서 생기는 그 밖의 수천 가지 산만함들에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들의 하나님과의 친밀함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추구로 정신이 팔리게 될 것입니다. 이곳에서는 신성한 광채에 비추어 토라를 배우며 평생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저곳에서는 다른 모든 나라가 겪는 것과 똑같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문제를 안고 있는 수많은 나라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그 땅에 들어간다면, 그들의 생활 방식은 사라질 것입니다

 

그들은 성공과 그로 인해 뒤따를 변화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가능한 한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삶을 보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은, 미드라쉬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느님께서 “아래 세상에서의 거처”를 원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Midrash Tanchuma, parshat Naso 16)

 

유대교와 다른 종교들의 큰 차이점 중 하나는, 다른 종교들이 사람들을 천국으로 끌어올리려 하는 반면, 유대교는 천국을 지상으로 내려오게 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토라의 상당 부분은 일반적으로 종교적이라고 전혀 여겨지지 않는 것들, 즉 노사 관계, 농업, 복지 제도, 대출과 빚, 토지 소유권 등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막이나 수도원, 아슈람에서 강렬한 종교적 체험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종교에는 일상생활의 스트레스와 긴박함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성지와 성인들이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전혀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유대교의 목표도, 유대교의 사명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인간이 노예처럼 대우받지 않고, 통치자가 반신반인처럼 숭배받지 않으며,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고, 법이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며, 누구도 궁핍하지 않고, 누구도 고립되어 버려지지 않으며,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고, 삶의 어떤 영역도 도덕성이 배제된 구역이 아닌 모범적인 사회를 만들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가 필요하며, 사회에는 땅이 필요합니다. 경제와 군대, 농지와 가축, 노동과 기업 활동이 필요합니다. 유대교에서 이 모든 것은 우리 공동체의 삶이 펼쳐지는 공간에 쉐키나(Shechinah)를 모시는 방식이 됩니다.

 

정탐꾼들은 이스라엘이 그 땅의 주민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우려는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광야를 떠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지상의 수많은 나라들 중 하나에 불과한 나라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문명과 그 불만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메아리치는 사막의 고요 속에서 하나님과의 독특한 관계를 잃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독실한 신앙인들이 저지른 실수였지만, 어쨌든 실수였습니다.

 

분명히 이것이 본문의 문자적 의미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를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이는 마치 정탐꾼들의 무의식적 심리를 정신분석학적으로 해석한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의 경험, 즉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그 친밀함과 순수함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정탐꾼들은 자유와 그에 따르는 책임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토라는 자유가 수반하는 책임에 관한 것입니다. 유대교는 세상으로부터 은둔하는 수도원적 종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세상과 관여하는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당신의 현존을 드러내기 위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유대 민족에게도 사막 거주자들과 금욕주의자들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탈무드에는 라비 시몬 벤 요하이가 13년 동안 동굴에서 살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동굴에서 나왔을 때, 밭을 갈고 있는 등 세속적인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는 세상과의 관여가 근본적으로 높은 영성과 양립할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주류의 의견은 달랐습니다. “생계 없이 토라를 공부하는 것은 결국 실패하고 죄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Avot 2:2)

 

마이모니데스는 사회의 타락을 피하기 위해 사막에서 은둔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언급합니다. (Mishneh Torah, Hilchot Deot 6:1; Shemoneh Perakim, ch. 4)

 

하지만 이들은 예외일 뿐,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은둔자로서 시간과 공간 밖에서 살아가는 것이 이스라엘의 운명은 아닙니다. 루바비처 레베에 따르면, 자유와 그에 따르는 책임을 두려워하는 이러한 태도는 신앙의 지극한 경지에 이른 것이 아니라, 정탐꾼들의 죄와 다름없습니다.

 

그들은 유대교를 현실 세계와 접촉시킴으로써 오염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영원한 의존과 그분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사랑의 끝없는 품을 추구했습니다. 이러한 소망에는 고귀한 면이 있지만, 동시에 심히 무책임한 면도 있습니다. 정탐꾼들은 백성들의 사기를 꺾고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유대인의 사명—하나님의 주권 아래 유대 민족의 헌법인 토라—은 이스라엘 땅에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그토록 존중하는 사회를 건설하여, 언젠가 세상이 “이 위대한 민족은 참으로 지혜롭고 분별력 있는 백성이다”라고 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신명기 4:6)

 

유대인의 사명은 현실 세계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으로 들어가 변혁을 일으키며, 그 상처를 치유하고 종종 어둠에 가려진 곳들에 신성한 빛의 조각들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By Rabbi Lord Jonathan Sac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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