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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Rosh Chodesh Tammuz (로쉬 호데쉬 탐무즈)

작성자phantom|작성시간26.06.16|조회수28 목록 댓글 0

 

#탐무즈 월삭

Rosh Chodesh Tammuz (로쉬 호데쉬 탐무즈)

 

왜 탐무즈월과 아브월은 민족적 파멸과 고통의 달이 되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달들이 훗날 어떻게 주요 명절로 변모하게 될 운명인가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그 안의 물질적인 것들조차 신성한 거룩함으로 양육되도록 하셨기에, 모든 음식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담겨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리(Arie)는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라는 구절이 빵 속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고 설명했습니다. 또한 코츠(Kotz)의 아드모르(Admor)는 비르카트 하모찌(birchat hamotzi, בִּרְכַּת הַמּוֹצִיא: ㅡ빵의 축복)의 목적이 빵에서 세속적인 요소를 제거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거룩함이 하찮은 물질주의를 입는 것은 모욕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온 창조의 목적은 바로 물질적 존재를 거룩하게 만드는 데 있습니다. 게마라가 “사람은 많은 곡식을 거두기 위해 땅에 씨를 뿌린다”(페사힘 87b)고 말한 것처럼, 이를 통해 빵을 얻듯이, 영혼은 인간 몸의 모든 세속적인 부분을 영적이고 거룩하게 만들기 위해 내려왔습니다.

 

한 해의 달(Month)들도 이와 같은 구조를 띠고 있습니다. 첫 3개월 동안 영성과 거룩함은 높은 곳에서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이 물질 세계에서 기적들이 드러난 니산월,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인 만나가 있었던 이야르월, 그리고 시반월에 하나님께서 물질 세계로 내려오셔서 토라를 주셨습니다.

 

그 뒤를 이어 탐무즈와 아브 달이 오는데, 이때 그 거룩함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을 반영하여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것을 영적이고 거룩한 것으로 변화시켜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흙으로 지어진 아담의 죄가 창조의 본래 계획을 왜곡하여, 그의 육신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 거룩함을 반영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그 안에 있는 거룩함이 하늘로 승천하기 위해서는 고통과 죽음이 필요했으며, 설령 그러했다 하더라도 육신 없이 영혼만이 승천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그 죄가 이 달들 또한 왜곡시켜, 이 달들이 물질적인 것을 변화시킬 수 없게 만들었고, 위에서 내려온 거룩함만을 발산할 수 있게 했을 뿐, 비극과 고통 속에 있는 물질적인 것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에서 쏟아져 내려와 우리에게 허락된 케두샤(קְדֻשָּׁה: 거룩함)의 은혜로만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차 아담의 죄가 바로잡힐 때, 아래로부터 하늘로 올라가는 거룩함인 정의의 공덕이 우세해질 것이며, 할라카는 베트 샤마이(בֵּית שַׁמַּאי: 할라카 학파)의 ‘미다트 하딘(מִדַּת הַדִּין: 정의의 속성)’에 따라 정해질 것입니다. 그렇기에 광야에서의 진영 깃발 순서에 따르면, 타무즈월은 르우벤 지파의 달입니다. 르우벤은 테슈바(회개)가 변화의 힘을 지녔음을 보여주었듯이, 타무즈월 또한 변화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 비극과 재앙의 날들은 종말의 날에 축제로 바뀔 것입니다.

 

‘키두시 하코데쉬(신월 성별)는 실제로 초승달을 목격한 증인들을 통해 행해야 한다’(로쉬 하샤나 20a). 이와 관련하여 르우벤의 이름 또한 ‘보는 것’과 연관되어 있는데, 이는 그가 태어났을 때 레아가 “하쉠께서 나의 수치를 보시고… 아들을 주셨으니… 그녀는 그를 르우벤이라 불렀다”(베라코트 29:32)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이번 달은, 클랄 이스라엘(전체 이스라엘)과 관련된 이 미쯔바에 요구되는 ‘보는 행위’를 통해 메라글림(정탐꾼)의 죄를 바로잡는 시기입니다. 모쉐가 그들에게 땅을 보라고 명령했을 때, 그들의 죄의 근원이 바로 그들의 눈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담의 죄도 ‘보는 힘’을 통해 유발되었는데, 토라에 “여자가 그 나무가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도 아름답다고 생각하니라”(창세기 3:6)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시(Rashi)는 이에 대해 “나하쉬(נָחָשׁ: 뱀)의 말이 그녀의 눈에 호감을 샀다는 뜻입니다. ‘내가 그 말을 보노라’는 것은 ‘그 말이 내게 호감을 준다’는 의미이다”라고 주석하고 있습니다(케투봇 109a).

 

미드라쉬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자기 땅에서 쫓겨난 갈루트(유배)는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쫓겨난 것과 유사하므로, 이스라엘이 에레쯔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것은 아담이 에덴 동산에 들어간 것과 유사해야 합니다. 따라서 그들의 입성이 온전한 진실함 속에서 이루어졌다면, 그들은 아담의 죄를 속죄했을 것입니다.

 

이 속죄는 물질적인 에레쯔 이스라엘에 깃든 거룩함을 보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즉 그들의 눈에 그 땅이 호감을 사야 했습니다. 이는 눈은 마음의 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그들과 시력의 힘에 달려 있으며, 그것이 선이든 악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아인 토바(Ayin Tovah, 선한 눈)’를 통해 모든 선한 요소가 마음에 들어와, 거기서부터 몸 전체로 스며듭니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도 사실입니다. 우리가 읽은 바와 같이, “삼손은 부모에게 여인에 대해 ‘그녀는 내 눈에 합당하다’고 말함으로써 눈으로 죄를 지었으므로, 블레셋 사람들이 가자에서 그의 눈을 파냈습니다”(소타 9b). 따라서 정탐꾼들이 눈의 힘을 선한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면, 그들은 이스라엘이 모든 영적 감정과 열망을 온전히 갖춘 채 그 땅에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마련했을 것입니다.

 

‘헷(Chet)’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나와 내 아들 솔로몬이 없어질 것’[חֲטָאִים 하타임] (열왕기상 1:21)에서처럼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솝(우슬초)으로 정결하게 [תְּחַטֵּאנִי, 테하테니]하소서’(시편 51:9)나 ‘그가 그 집을 정결하게 할 것이라’(레위기 14:42)와 같이 정화나 정결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는 선을 위한 것이든 악을 위한 것이든 시력의 힘이 지닌 바로 그 이중적 성질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순수한 마음을 갖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오직 선한 것만 보도록 자신의 눈을 훈련해야 합니다.

 

By Rabbi Meir Tamari and Torah.org.

번역/편집: Torah & Juda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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