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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리아 대칸 윤복현 작성시간13.07.29 현재 전하는 비석의 크기는 길이 약 25.8cm, 너비 약 26.4cm이며, 비문의 서체는 예서체이고, 각 글자의 간격은 약 2.7cm이다. 244년(동천왕 18) 8월 위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해 전쟁에 이긴 기념으로 세운 것이라고 전한다. 비석의 일부분이 1906년 길림성 집안현 반스링[板石嶺]에서 발견되었다. 비의 좌우와 아래가 떨어져나가 내용을 완전하게 알 수는 없으나, 남아 있는 부분을 보면 "正始三年高句驪反 督七牙門討句驪五 復遣寇六年五月旋 討寇將軍巍烏丸單于 威寇將軍都亭侯 行裨將軍領"이라고 씌어 있다./관구검비를 통해서도 국내성이 집안이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출토 유물은 진실을 말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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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리아 대칸 윤복현 작성시간13.07.29 처음에는 동천왕이 거느리는 보기병(步騎兵) 2만에게 6,000여 명의 군사를 잃는 등 고전을 하다가 비류수(沸流水:渾江)에서 고구려군을 대파하고 국도(國都) 환도성(丸都城)을 함락시켰으나 동천왕이 남쪽으로 달아나 항복을 받지는 못하였다. 그는 이듬해에도 현도태수(玄娠太守) 왕기(王슛)를 시켜 침공하게 하여 동천왕은 남옥저(南沃沮)까지 쫓기며 위기에 빠졌으나, 유유(紐由)의 기습작전이 성공하여 위군은 회군하고 말았다. 관구검에 관한 기록은 《위지(魏志)》의 〈고구려조(高句麗條)〉와 〈관구검조〉 및 《삼국사기》 등에 전하는데, 1906년 길림성 집안현에서 발견된 관구검기공비(볘丘儉紀功碑)에도 나타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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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리아 대칸 윤복현 작성시간13.07.29 환도성마저 함락된 다음에는 동천왕은 위군의 추격을 피해 매구루까지 도망쳐야 했다. 남옥저로 피신했다고 하니 매구루는 함경도 동해 연안지역이다. [삼국사기]에는 환도성이 함락되자마자 고구려는 왕이 잡히지 않기 위해 처절하게 저항했다. 밀우는 결사대를 이끌어서 선봉장인 왕기가 이끄는 위군과 맞서 싸웠다. 유유는 적군에게 거짓항복을 해서 적 선봉장을 살해했다. 이런 안습한 일화가 기록될만큼 동천왕은 궁지에 크게 몰렸다.동천왕은 국내성을 복원하는 동안 북한 평양성(장안성)을 임시 수도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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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코리아 대칸 윤복현 작성시간13.07.29 위나라 관구검은 국내성을 유린한 후에 고구려의 본거지 국내성(집안)를 불내성(不耐城)으로 비하하면서 관구검기공비를 세웠다. 동천왕이 즉위한 시절에 국내성이 유린되고 고구려가 망하기 직전까지 몰려 있던 역사. 쓰라린 굴욕에 확실히 속하지만 그런 시련이 있었기 광개토태왕이란 위대한 군주가 출현할 수가 있었다.고구려의 치욕사를 기억하고 있었던 광개토태왕은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백제를 응징,항복을 받았고, 국내성을 유린한 유주자사 관구검이 다스린 유주지역을 차지해서 다스렸고, 모용선비족을 응징하여 고연을 세워 제후국으로 만들었다.고로 과거의 치욕을 잊지 않는 나라와 민족만이 미래가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