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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주의 군현 중 낙랑과 대방의 한반도내 설치설은 날조 조작이다

작성자사천왕|작성시간26.06.05|조회수7 목록 댓글 0

유주(幽州)의 군현 중 낙랑과 대방, 현도의 한반도설은 날조 조작이다.

유주(幽州)의 역사, 유주의 일부는 원래 고조선 영토이었다

춘추전국 시절 소진 열전을 보면 연()나라의 동쪽에 조선(朝鮮)이 있다고 하였으며, 진시황 때는 만리장성의 밖에 조선 요동(朝鮮遼東)이 있다고 하였다.

춘추전국 시절 연()나라는 조선(朝鮮)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연나라의 왕자가 조선의 인질이 되고, 진개는 조선의 포로가 되었다. 진개가 조선에서 연나라로 돌아간 후 군대를 일으켜 조선을 침략하였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및 요동의 땅을 빼앗았다. 5개 지역에 연오군(燕五郡)을 설치하고 조선과의 경계에 연장성(燕長城)을 쌓았다.

연장성은 북쪽의 조양(朝陽)에서 남쪽의 양평(陽平)에 이르는 지역인데, 조양은 지금의 북경시 조양구(朝陽區) 지역으로 추정되며, 양평(陽平)은 지금의 천진시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나라를 멸망시킨 진시황은 이 연오군 지역에 진시황 10(AD 274) 중국 북부 유주(幽州)에 속했던 탁군과 대군 및 발해군 등의 북쪽에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동군 및 요서군 지역 5개 군() 지역에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 ()나라 때는 평주를 유주에 통합하기도 하였고, ()나라 때는 유주와 평주를 분리하기도 하였다.

북위(北魏: 후위) 때는 이 지역 중 평주 전 지역과 유주의 일부가 고구려의 영토이었다가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이곳을 유주로 통합하였다.

 

한서지리지(漢書地理志)의 유주(幽州)에 대한 기록

다음은 인터넷에 올려진 역사잡동사니 한서지리지의 유주(幽州) 등 우리역사 관련지명 번역의 글을 발췌 요악한 자료를 올린다.

출처: https://history-backup.tistory.com/

 

1. 유주(幽州)

탁군(涿郡) : 내용의 일부 생략

涿郡, 高帝置. 莽曰垣翰. 屬幽州. 戸十九萬五千六百七, 口七十八萬二千七百六十四. 有鐡官. 縣二十九.

 

발해군(勃海郡) : 일부 내용 일부 생략

勃海郡, 高帝置. 莽曰迎河. 屬幽州.[1] 戸二十五萬六千三百七十七, 口九十萬五千一百一十九. 縣二十六.....

 

발해군(勃海郡), 고제(高帝: 한무제)가 설치하였다. 왕망이 말하기를 영하(迎河)라고 하였다. 유주(幽州)에 속한다.[1] 가구수는 25,6377이고 인구수는 90,5119이다. 현은 26개이다.

1) 부양현(浮陽縣), 2) 양신현(陽信縣), 3) 동광현(東光縣), 4) 부성현, 5) 천동현(千童縣), 6) 중합현(重合縣), 7) 남피현(南皮縣), 8) 정현(定縣), 9) 장무현(章武縣), 10) 중읍현(中邑縣),

11) 고성현(高成縣), 12) 고락현(高樂縣), 13) 참호현(參戸縣), 14) 성평현(成平縣), 15) 석현(桞縣), 16) 임락현(臨樂縣), 17) 동평서현(東平舒縣), 18) 중평현(重平縣), 19) 안차현(安次縣), 20) 수시현(脩市縣), 21) 문안현(文安縣), 22) 경성현(景成縣), 23) 속주현(束州縣), 24) 건성현(建成縣), 25) 장향현(章鄉縣), 26) 포령현(蒲領縣)이 있다.

 

대군(代郡) : 내용 생략

 

상곡군(上谷郡) : 번조선의 땅이었던 지역, 내용 일부 생략

上谷郡, 秦置, 莽曰朔調, 屬幽州. 戸三萬六千八, 口十一萬七千七百六十二. 縣十五. 沮陽, 莽曰沮陰.[1] 泉上, 莽曰塞泉. , 莽曰樹武.[2] 軍都, 溫餘水東至路南入沽. , 庸有關. 雊瞀,[3] 夷輿, 莽曰朔調亭. , 西部都尉治莽曰博康. 昌平, 莽曰長昌. 廣寧, 莽曰廣康. 涿鹿, 莽曰抪陸.[4] 且居, 樂陽水出東南入海. 莽曰久居. , 莽曰榖武. 女祁, 東部都尉治. 莽曰祁. 下落, 莽曰下忠.

상곡군(上谷郡), ()에서 설치하였다. 왕망이 말하기를 삭조(朔調)라 하였다. 유주(幽州)에 속한다. 가구수는 3,6008이고 인구수는 11,7862명이다. 속한 현은 15개이다.

11) 탁록현(涿鹿縣), ()이 말하기를 포륙(抪陸)이라 했다.(*참고: 탁록현은 동이(東夷)의 치우(蚩尤)천왕과 중국의 헌원(軒轅)이 전투하였던 지역이다.

 

어양군(漁陽郡) : 번조선의 땅이었던 지역, 내용 일부 생략

漁陽郡, 秦置. 莽曰通路. 屬幽州. 戸六萬八千八百二, 口二十六萬四千一百一十六. 縣十二. 漁陽, 沽水出塞外, 東南至泉州, 入海. 行七百五十里. 有鐵官. 莽曰得漁. 狐奴, 莽曰舉符. , 莽曰通路亭. 雍奴, 泉州, 有鹽官. 莽曰泉調. 平谷, 安樂, 厗奚, 莽曰敦徳.[1] 獷平, 莽曰平獷.[2] 要陽, 都尉治. 莽曰要術.[3] 白檀, 洫水出北蠻夷.[4] 滑鹽, 莽曰匡徳.[5]

어양군(漁陽郡), ()이 설치하였다. 왕망은 통로(通路)라 하였다. 유주(幽州)에 속한다. 가구수는 6,8802이고 인구수는 26,4116명이다. 속한 현은 12이다.

 

우북평군(右北平郡) : 번조선에 포함되었던 지역, 일부 내용 생략

右北平郡, 秦置. 莽曰北順. 屬幽州. 戸六萬六千六百八十九, 口三十二萬七百八十. 縣十六. 平剛, 無終, 故無終子國. 浭水西至雍奴入海, 過郡二, 行六百五十里.[1] 石成, 廷陵, 莽曰鋪武. 俊靡, 灅水南至無終東入庚. 莽曰俊麻.[2] , 都尉治. 莽曰襃睦.[3] 徐無, 莽曰北順亭. , 榆水出東. 土垠,[4] 白狼, 莽曰伏狄.[5] 夕陽, 有鐵官. 莽曰夕陰. 昌城, 莽曰淑武. 驪成, 大揭石山在縣西南. 莽曰揭石.[6] 廣成, 莽曰平虜. 聚陽, 莽曰篤睦. 平明, 莽曰平陽.

우북평군(右北平郡), ()에서 설치하였다. 왕망은 북순(北順)이라 했다. 유주(幽州)에 속한다. 가구수는 6,6689이고 인구수는 32,0780명이다. 속한 현은 16개이다.....

 

요서군(遼西郡) : 번조선에 포함되었던 지역, 일부 내용 생략

遼西郡, 秦置. 有小水四十八, 并行三千四十六里. 屬幽州. 戸七萬二千六百五十四,口三十五萬二千三百二十五. 縣十四. 且慮, 有高廟. 莽曰鉏慮.[1] 海陽, 龍鮮水東入封大水. 封大水 緩虚水 皆南入海. 有鹽官. 新安平, 夷水東入塞外. 栁城, 馬首山在西南. 參栁水北入海. 西部都尉治. 令支, 有孤竹城. 莽曰令氏亭.[2] 肥如, 玄水東入濡水. 濡水南入海陽. 又有盧水南入玄. 莽曰肥而.[3] 賔從, 莽曰勉武. 交黎, 渝水首受塞外, 南入海. 東部都尉治. 莽曰禽虜.[4] 陽樂, 狐蘇, 唐就水至徒河入海. 徒河, 莽曰河福. 文成, 莽曰言虜. 臨渝, 渝水首受白狼, 東入塞外. 又有侯水, 北入渝. 莽曰馮徳.[5] , 下官水南入海. 又有揭石水 賔水 皆南入官. 莽曰選武.[6]

 

요서군(遼西郡), ()에서 설치하였다. 작은 강들이 48개이고 모두 합쳐 3416리를 흘러간다. 유주(幽州)에 속한다. 가구수는 7,2654이고 인구수는 35,2325명이다. 현은 14개이다....

 

6) 비여현(肥如縣), 현수(玄水)가 동쪽으로 유수(濡水)로 들어간다. 유수(濡水)는 남쪽으로 해양현(海陽縣)으로 들어간다. 또한 로수(盧水)가 있어 남쪽으로 현수(玄水)로 들어간다. 왕망은 비이(肥而)라고 하였다.

 

요동군(遼東郡)

遼東郡, 秦置. 屬幽州. 戸五萬五千九百七十二. 口二十七萬二千五百三十九.縣十八. 襄平, 有牧師官. 莽曰昌平. 新昌, 無慮, 西部都尉治.[1] 望平,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 入海, 行千二百五十里. 莽曰長說.[2] , 候城, 中部都尉治. 遼隊, 莽曰順睦.[3] 遼陽, 大梁水西南至遼陽, 入遼. 莽曰遼隂. 險瀆,[4] 居就, 室偽山, 室偽水所出, 北至襄平, 入梁也. 高顯, 安市, 武次, 東部都尉治. 莽曰桓次. 平郭, 有鐵官鹽官. 西安平, 莽曰北安平. , 莽曰文亭. 番汗, 沛水出塞外, 西南入海.[5] 沓氏,[6]

 

요동군(遼東郡), ()에서 설치하였고 유주(幽州)에 속한다. 가구수는 55,972이고 인구수는 272,539명이다. 현은 18개이다.

1) 양평현(襄平縣), 목사관(牧師官)이 있다. 왕망은 창평(昌平)이라 했다.(*참고양평현은 진개가 고조선에서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및 요동을 빼앗은 후 연장성을 쌓았는데, 그 남쪽끝이 양평현이었다. 양평현은 지금의 천진시 부근으로 비정되고 있다....

 

7) 요대현(遼隊縣), ()은 순목(順睦)이라 했다.(***참고: 요대현은 수경에서 요수(遼水)가 지나는 현이라고 하였다. 이 요수는 일본인이나 식민사학자들이 말하는 지금의 요수가 아니라, 북경을 흐르는 조백하이다)

 

8) 요양현(遼陽縣), 대량수(大梁水)가 서남쪽으로 요양현(遼陽縣)에 이르러 요수(遼水)로 들어간다. 왕망은 요음(遼隂)이라 했다.(**참고: 대량수는 요수의 한 지류(支流)이며, 수셩(水經)에 기록된 지금의 조백하이다)

 

9) 험독현(險瀆縣): 아래 기록이 있다.

應劭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臣瓉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曰, 瓚説是也. 浿音普大反.

응초(應劭)가 말하기를 조선(朝鮮)의 왕() 위만이 도읍인데 강물의 험한 것을 의지하였기에 험독(險瀆)이라 한 것이라고 했다. 신찬(臣瓉)이 말하기를 왕험성(王險城)은 낙랑군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는데 험독현()은 자연적으로() 올바른() 험독이라고 했다.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신찬의 말이 옳다고 했다. 浿의 음은 배(普大反)이다.“...

 

12) 안시현(安市縣): (**참고: 한서(漢書)에 기록된 유주 요동군 안시현은 당태종이 요수(遼水: 지금의 조백하)를 건너자 마자 빠로 공격한 성()이었다. 식민사학자들은 이 안시성을 지금의 요하(遼河) 부근인 요령성 영성자(英城子)로 비정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이는 조백하 부근에 있는 안시성을 동쪽으로 천리나 떨어진 요령성 영성자라고 왜곡하고 있다.)

 

15) 서안평현(西安平縣)8 , ()은 북안평(北安平)이라고 했다.

 

17) 번한현(番汗縣), 패수(沛水)가 새() 밖에서 나와서 서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참고: 번한현은 패수(지금의 영정하로 추정)가 국경의 밖에서 나와 서남쪽의 바다로 들어가는 위치에 있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천진 지역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현도군(玄菟郡)

玄菟郡, 武帝元封四年開. 髙句驪, 莽曰下句驪. 属幽州.[1] 戸四萬五千六, 口二十二萬一千八百四十五, 縣三. 髙句驪, 遼山, 遼水所出, 西南至遼隊, 入大遼水. 又有南蘇水, 西北經塞外.[2] 上殷台, 莽曰下殷.[3] 西蓋馬, 馬訾水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 入海, 過郡二, 行一千一百里. 莽曰玄菟亭.

()

[1] 應劭曰故真番朝鮮胡國. 응초(應劭)가 말하기를 옛 진번조선(真番朝鮮) ()의 나라이다.

[2] 應劭曰故句驪胡. 응초(應劭)가 말하기를 옛 구려(句驪) ()이다.

[3] 如淳曰台音鮐師古曰音胎. 여순(如淳)이 말하기를 의 음은 태()이다.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음은 태()라고 했다.

 

현도군(玄菟郡), 무제(武帝) 원봉(元封) 4년에 열었다. 고구려현(髙句驪縣)11 은 왕망이 하구려(下句驪)로 고쳤으며 유주(幽州)에 속한다. 가구수는 45,006이고 인구수는 221,815명이다. 현은 3개이다.

 

1) 고구려현(髙句驪玄), 요산(遼山)에서 요수(遼水)가 나오는데 서남쪽으로 요동군 요대현(遼隊縣)에 이르러 대요수(大遼水)로 들어간다. 또한 남소수(南蘇水)가 있는데 서북쪽으로 새() 밖을 지난다.

 

2) 상은태현(上殷台縣), ()은 하은(下殷)이라 했다.[3]

3) 서개마현(西蓋馬縣), 마자수(馬訾水)가 서북쪽으로 염난수(鹽難水)로 들어가는데, 서남쪽으로 요동군 서안평현(西安平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이 강은) 2개의 군()을 지나고 110012를 흐른다. 왕망은 현도정(玄菟亭)이라고 했다.(***참고: 서개마현 역시 수양제 침략경로이므로 조백하 부근일 것이다.)

 

낙랑군(樂浪郡)

樂浪郡, 武帝元封三年開. 莽曰樂鮮. 屬幽州.[1] 戸六萬二千八百一十二, 口四十萬六千七百四十八. 有雲鄣. 縣二十五. 朝鮮,[2] 䛁邯,[3] 浿水, 水西至増地, 入海. 莽曰樂鮮亭.[4] 含資, 帶水西至帶方, 入海. 黏蟬,[5] 遂成, 增地, 莽曰增土. 帶方, 駟望, 海㝠, 莽曰海桓. 列口, 長岑, 屯有, 昭明, 南部都尉治. 鏤方, 提奚, 渾彌,[6] 吞列, 分黎山, 列水所出, 西至黏蟬, 入海, 行八百二十里. 東暆,[7] 不而, 東部都尉治. 蠶台,[8] 華麗, 邪頭昧,[9] 前莫, 夫租.

()

[1] 應劭曰故朝鮮國也師古曰樂音洛浪音狼. 응초(應劭)는 옛 조선국이라고 했다 사고(師古)의 음이 락()이고 의 음은 랑()이라 했다.

 

낙랑군(樂浪郡),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에 열었다. 왕망은 낙선(樂鮮)이라 했다. 유주(幽州)에 속한다.[1] 가구수는 62,812이고 인구수는 406,748명이다. 운장(雲鄣)이 있다. 현은 25개이다.

 

1) 조선현(朝鮮縣), 2) 염감현(䛁邯縣), 3) 패수현(浿水縣), 4) 함자현(含資縣), 5) 점선현(黏蟬縣), 6) 수성현(遂成縣), 7) 증지현(增地縣), 8) 대방현(帶方縣): (**참고: 후한 때 공손강이 대방군을 설치하기 전부터 태방군은 있었으며, 대방군은 수양제 침략경로 조백하 부근에 있었다.)

9) 사망현(駟望縣), 10) 해명현(海㝠縣),

 

11) 열구현(列口縣): (**참고: 이병도는 열구현을 황해도 황주라고 왜곡)

12) 장잠현(長岑縣),

13) 둔유현(屯有縣) :(*참고: 이병도는 둔유를 황해도 황주를 왜곡)

14) 소명현(昭明縣),

15) 루방현(鏤方縣) : (**참고 : 일본인들은 평안도에서 무덤발굴시 루방현 자료를 끼워넣고, 루방현이 펴안도에 있다고 왜곡).,

16) 제해현(提奚縣), 17) 혼미현(渾彌縣), 18) 탄렬현(吞列縣),

19) 동이현(東暆縣) : (*참고: 이병도는 동이현이 황해도 왕주라고 왜곡)

20) 부이현(不而縣), 21) 잠태현(蠶台縣), 22) 화려현(華麗縣), 23) 사두매현(邪頭昧縣), 24) 전막현(前莫縣), 25) 부조현(夫租縣) :

이상은 한서지리지의 유주(幽州) 등 우리역사 관련지명 번역을 요약한 것이다.

출처: https://history-backup.tistory.com/

 

이상에서 유주(幽州)에 속했던 10개의 군()에 대하여 상세히 설명을 하였는데, 10개의 군()은 다음고 같다.

1) 탁군, 2) 발해군, 3) 대군, 4) 상곡군, 5) 어양군, 6) 우북평군, 7) 요서군, 8) 요동군, 9) 현도군, 10) 낙랑군이다.

 

낙랑군 부조현과 옥저에 대한 여러 학설은 날조이며, 쓰레기이다.

일본인 다수와 중국인 다수 및 한국인 다수인 18명의 역사학자가 유주 낙랑군 부조현을 한반도 내 평안도에 있었다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이들이 발표한 논문은 일본인들이 발굴한 금속제 부조예군은인(夫租薉君銀印)“에 근거를 두고 낙랑군 부조현 평안도 존치설이란 논문을 썼다.

 

한서지리지, 평양 정백동 1호분 출토 부조예군인장 등에 적혀 있는 부조(夫租)에서 와전된 것일 가능성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실제로 '沃沮''夫租'의 오기 혹은 '夫租'에서 파생된 표기라는 설이 존재한다. (藤田亮策(1936; 1948), 이병도(1976), 임기환(1992), 張博泉(1998), 田中俊明(1999; 2009), 이현혜(2002; 2010), Gardiner(2012), 김선숙(2019), 동북아역사재단(2020), 김성한(2021), 이승호(2021), 박대재(2021), 甘懷眞(2023).)

위 학설과 달리 부조(夫租)가 요조(夭租)의 오기라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池內宏(1941), 金元龍(1986), 日野開三郞(1998), 林沄(1999; 2002), 孫慰祖(2008), 윤용구(2024).)

 

***참고: 위의 논문이나 책자의 발표를 보면, 한서 지리지에 낙랑군 속현 25개의 현() 중에서 25번째 마지막으로 기재된 부조현(夫租縣)이 있다. 일본인들은 평양 정백동 1호 무덤(소위 부조예군 묘)에서 <부조예군>이라고 새겨진 인면(印面) 2.05cm 크기의 금속제 부조예군은인(夫租薉君銀印)이 발굴되었다고 보고하였다.

 

실제는 낙랑군 부조현(夫租縣)이 평양 부근에 있을 수가 없고, 낙랑군 25개 현 모두가 수양제 침략경로 만리장성의 안쪽에 있었음에도 일본인들은 무덤 발굴시 중국에서 밀수해온 <부조예군>의 인장을 슬쩍 끼워넣고, <부조예군>이 이 무덤에서 발굴되어다고 위조 날조한 것이다.

 

이후 이 오염된 고고학 유물을 근거로 일본인, 중국인, 한국인은 물론 외국인 까지 18인이 20여편의 논문을 발표하면서 낙랑이 평양 부근 평안도에 있었다는 낙랑군 평안도설을 논문으로 발표하고 일본인의 날조된 평양 무덤 출토품 <부조예인>을 뒷받침한 것이다.

 

<부조예군> 인장을 근거로,

실제로 '沃沮''夫租'의 오기 혹은 '夫租'에서 파생된 표기라는 설위 학설과 달리 부조(夫租)가 요조(夭租)의 오기라는 견해로 모두 한()나라 낙랑군 부조현의 부조(夫租)는 옥저(沃沮: 옥조라고 읽어야 하나 식민사학자들이 옥저로 표기)()“자와 ()자는 전혀 다른 한자임에도 부조와 옥저가 같은 글자라고 한 자가 일본인과 중국인은 물론 외국인과 한국인을 합쳐서 1820여 편이 발표되었다. 역사에 대한 기록은 글자 한 자도 중요한데, 전혀 다른 글자인 부()자와 옥()와 같은 글자라고 주장한 역사학자들이 무려 18명에 달한다.

 

그러나 위의 일본인이나 중국인 또는 한국인의 논문 20여 편은 정말 쓰레기만도 못한 날조 조작된 논문이다. 왜냐하면, 낙랑군 속현 옥저는 수양제의 평양을 향한 침략경로 11군 옥저도(沃沮道)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편, 통감지리석 권 10에는

()이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 후위(後魏) 시기에는 고구려가 그곳(晉 平州)에 도읍하였고 당()이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通鑑地理通釋10. 晉置平州 後魏時 高麗國都其地 唐置安東都護府)”라고 기록하고 있다.

 

***참고: 위의 통감(通鑑) 기록을 보면 후위(後魏)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북조(北朝) 최초의 나라이다. AD 386년에 선비족(鮮卑族)의 탁발규가 화북(華北) 지방에 세운 이후 AD 534년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하였다. 후위의 존속기간은 138년에 이른다. 이 기간 중 고구려가 그곳(晉 平州)에 도읍하였다고 분명한 기록을 하고 있다.

 

이 기간은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AD 391-413)과 장수왕(AD 413-490)의 시절로 이 시기에 고구려가 평주(平州) 땅을 점령하고 또 수도를 그곳에 두었다고 분명한 기록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는 평주에 속한 낙랑의 모든 군현과 대방에 속한 모든 군현이 고구려의 영토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낙랑군에 속한 옥저도 요서 조백하 부근이며, 결코 낙랑군 옥저가 함경도에서 연해주에 이르는 땅에 존재할 수 없고 또 이곳에 존재한 사실이 없다.

 

***참고: 현재 한국의 국립박물관에는 평양시 락랑구역(樂浪區域) 정백동(貞柏洞, 구 정백리) 부조예군묘(夫租薉君墓)에서 발굴되었다는 <부조예군은인(夫租薉君銀印)>을 보관하고 있다. 또 이 무덤에서 중국식의 세형동검(細形銅劍)과 동모(銅矛), 동탁(銅鐸), 철제장검·단검·대도, 철부(鐵斧) 및 다수의 마구류, 수레부속이 출토되었다라고 정부기관인 국가유산지식처에서 설명하고 있다.

 

벌거벗은 왕이란 우화와 같이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날조된 허위 사실을 쓰레기보다 못한 논문으로 발표를 하고 있는데, 언젠가 거짓은 반드시 밝혀질 것으로 믿는다. 온갖 쓰레기가 불씨 하나로 완전히 타 버리듯이 온갖 한사군 내 낙랑과 대방군 존재설 쓰레기는 올바른 역사가의 불씨 하나로 완전히 불타벌릴 때가 오기를 기다린다.

 

부조현=옥저현에 따른 낙랑군 부조현이 함흥에서 연해주까지

지금 한국 역사학계는 한()나라의 낙랑군 부조현이 옥저현이라고 한다. 이 옥저현은 함경남도에서 간도를 거쳐 러시아땅까지 뻗쳐 있었다고 지도에 그려놓고 있다. 지도에 표시된 지역은 북한 국기 북한 함경도, 중국의 길림성(지린성), 러시아의 프리모리예 지방이라고 표시하고 있다.

 

현재 한국 역사학계는 한무제 원봉 2(BC 109)에 조선을 정벌하였다. 위만의 자손 우거를 죽이고 그 땅을 나누어 4군으로 삼았다(BC 108). 옥저성으로 현도군을 삼았는데, 후에 이맥의 침입을 받아 (현도)군을 구려의 서북 방면으로 옮기니(BC 75), 지금 소위 '현토고부'라는 곳이다라고 하고 있다.

즉 전술한 함경도에서 연해주에 이르는 땅을 한무제가 BC 108년부터 BC 75년 까지 옥저를 지배했는데, 이 지역이 옥저의 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전술한 바와 같이 낙랑군 속현 옥저는 함경도가 아닌, 수양제의 침략경로 11군 옥저도(沃沮道)라고 분명히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요서지방 조백하 부근에 있었으며, 일본인이나 중국인 또는 한국인의 옥저가 함경도에서 연해주에 걸쳐 있었다는 논문 20여 편은 모두 정말 쓰레기보다도 못한 날조 조작된 논문이다.

<참고 출처: 나무위키 옥저’>

https://namu.wiki/w/%EC%98%A5%EC%A0%80

 

유주의 여러 군() 중 절반이 고구려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유주에 속했던 10개의 군 이름은,

1) 탁군, 2) 발해군, 3) 대군, 4) 상곡군, 5) 어양군, 6) 우북평군, 7) 요서군, 8) 요동군, 9) 현도군, 10) 낙랑군이었다.

이 중에서 발해군, 7) 요서군, 8) 요동군, 9) 현도군 및 10) 낙랑군 등 5개의 군이 고구려의 영토에 속해 있었다.

 

그 이유는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하기 전 고구려 침략을 위한 조서를 내렸는데 그 내용은

고구려는 작고 추잡한 것들이(小醜) 혼미하고 불공하여 발해와 갈석 사이를 점령해 있고(碣發之間 崇聚), 요동 예맥의 땅을 잠식했으며...글안의 무리와 해변을 지키는 수나라의 사병을 죽이고, 또 말갈의 항복자와 요서를 침범하였다...... 요동(遼東), 현도(玄菟), 낙랑(樂浪)의 아름다운 강토를 돌아보니 이제 모두 오랑케의 땅이 되었다라고 분개하면서 한탄하였다.

 

이 조서의 내용에서 낙랑군 이외의 유주(幽州)에 속했던 땅으로 갈발지간(碣發之間)이라고 말한 지역은 낙랑군 갈석현(碣石縣)과 유주 발해군(渤海郡)을 고구려가 삐앗았다(崇取)고 말한 것이며, 요서를 침범하였다는 것은 유주(幽州) 요서군(遼西郡)을 침범하였다는 것이다.

요동, 현도, 낙랑의 아름다운 땅을 돌아보니 오랑케의 땅이 되었다고 한 요동은 유주 요동군이었고, 현도 역시 유주 현도군이었으며, 낙랑은 후에 평주에 속하게 되었으나, 원래 유주에 속했던 땅이다.

그러므로 이 기록을 보면 유주의 10개 군 중에서 낙랑을 포함한 6개 군이 고구려 영토에 속해 있어서 수양제는 이 영토를 다시 빼앗겠다고 하면서 고구려를 침략하였다.

수양제의 조서는 일반 역사서와 달리 절대적 권위를 갖는 역사서이다. 이 권위있는 수양제의 조서에 발해군, 요서군, 요동군, 현도군 및 낙랑군 등 5개의 군이 고구려의 영토에 속해 있었음이 분명한 역사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이들 수양제 침략 경로는 결코 평안도나 황해도가 될 수 없다.

 

유주의 절반이 고구려 영토로 편입된 시기

광개토대왕은 븍얀(北燕) 공격하여 평주(平州)의 숙군(宿郡)을 점령하자, 평주의 통치자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나 평주 숙군이 고구려 영토로 된 것이다. 또 고구려 19대 광개토왕 때 평주를 공격하여 숙군(宿郡)을 점령하였다.

20대 장수왕 23(AD 435) “(: 北魏)나라가 자주 연(: 北燕)을 공격하니 연은 나날이 위태로웠다. 연나라의 왕 풍홍(馮弘)은 고구려에 항복하여 북연의 영토 중 평주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가 된 것이며, 이후 고구려 보장왕 때까지 이 유주 지역의 절반이 낙랑군(대방 포함), 현도군, 요동군, 발해군 및 후에 요서군까지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이 땅이 고구려 영토이었음은 수양제의 조서가 명백히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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