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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평주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이후 고구려의 영토인 역사기록

작성자사천왕|작성시간26.06.06|조회수12 목록 댓글 0

고대 평주(平州)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이후 고구려 영토인 역사기록

평주(平州)는 본래 고조선 영토이었고, 광개토대왕 이후 고구려 영토

평주는 역사적으로 진시황 10(AD 274) 중국 북부 유주(幽州)5개 군을 분할하여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 중국 북부의 5개 군은 어디인가? 이 북부 5개 군은 연나라 때 진개가 고조선으로부터 빼앗은 후 연()나라가 설치한 오군(五郡 )인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및 요동(遼東) 지역에 진시황이 평주(平州)를 설치한 것이다.

이후 한나라 때는 분할되었던 유주와 평주를 유주로 통합하였고, 이곳에 10개 군() 1개 후국(侯國)을 두었다.

 

이후 유주와 평주에 대한 중국 기록(진서지리지)은 다음과 같다.

생각컨대 우공(禹貢)에서 기록하기를 평주는 기주(冀州)의 영역인데, 주국()에서는 유주(幽州)의 경계로 했으며, ()나라 때는 우북평군(右北平郡)에 속했고, 후한(後漢) 말엽에는 공손도(公孫度)가 스스로 평주목(平州牧)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이에 그의 아들 공손강(公孫康)과 공손강의 아들 공손연(文懿)이 요동을 병합하고 그곳에 의거하니 동이 9종이 모두 복속하였다.

 

유주(幽州)의 역사, 유주의 일부는 원래 고조선 영토이었다

춘추전국 시절 소진 열전을 보면 연()나라의 동쪽에 조선(朝鮮)이 있다고 하였으며, 진시황 때는 만리장성의 밖에 조선 요동(朝鮮遼東)이 있다고 하였다.

춘추전국 시절 연()나라는 조선(朝鮮)과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연나라의 왕자가 조선의 인질이 되고, 진개는 조선의 포로가 되었다. 진개가 조선에서 연나라로 돌아간 후 군대를 일으켜 조선을 침략하였고,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및 요동의 땅을 빼앗았다. 5개 지역에 연오군(燕五郡)을 설치하고 조선과의 경계에 연장성(燕長城)을 쌓았다.

연장성은 북쪽의 조양(朝陽)에서 남쪽의 양평(陽平)에 이르는 지역인데, 조양은 지금의 북경시 조양구(朝陽區) 지역으로 추정되며, 양평(陽平)은 지금의 천진시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나라를 멸망시킨 진시황은 이 연오군 지역에 진시황 10(AD 274) 중국 북부 유주(幽州)에 속했던 탁군, 대군 및 발해군 등의 북쪽에 위치한 상곡군, 어양군, 우북평군, 요동군 및 요서군 지역 5개 군() 지역에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

()나라 때는 평주를 유주에 통합하기도 하였고, ()나라 때는 유주와 평주를 분리하기도 하였다. 북위(北魏: 후위) 때는 평주(平州)의 전 지역과 유주의 일부가 고구려의 영토포 편입되었다.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 11(AD 401) “왕이 군사를 보내어 평주(平州)의 숙군(宿郡)을 치니 연의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라고 하였는데, 이 때 평주(平州) 땅 숙군(宿郡)이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되었음이 확실하다.

또 장수왕 23ᅟᅧᆫ(AD 435)에는 ()나라가 자주 연(: 北燕)을 공격하니 연은 나날이 위태로웠다. 연나라의 왕 풍홍(馮弘)이 위()나라의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고구려에 항복하였는데, 이 때 평주(平州)의 전 지역과 유주(幽州)의 일부 지역이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평주 전체와 유주의 발해군(渤海郡) 등 일부 지역도 고구려 영토로 된 사실은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할 당시 조서에서 분명히 평주 전체와 유주 발해군이 고구려 땅이 되었다고 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이후 고구려 멸망시까지 평주는 고구려의 영토이었다.

 

이후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이후 평주를 유주에 통합하였고, 옛 고구려의 수도인 요동 평양성에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이 옛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이론인들과 한국사학자들은 지금의 평양이라고 확고히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연남생의 묘비명에 연남생이 요동군 평양성 출린(遼東郡 平壤城人)이라고 분명히 기록된 사실과 같이 당시 고구려의 평양성은 요동군에 있었다.

 

통감지리석 권 10에는

()이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 후위(後魏) 시기에는 고구려가 그곳(晉 平州)에 도읍하였고 당()이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通鑑地理通釋10. 晉置平州 後魏時 高麗國都其地 唐置安東都護府)”라고 기록하고 있다. 통감(通鑑)에 기록은 평주(平州)에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이 있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으며, 연남생의 묘비명 평주 요동군 평양성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평주 요동군 평양성은 지금의 천진시 부근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의 안동도호부 역시 지금의 평양이 아니라, 천진시 부근에 설치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진서니리지(晉書地理志)의 위()나라 이후 평주와 그 군현(군현)

평주에 관한 내용을 다음의 <문헌 출저: 진서(晉書) 지리지 번역: 평주(平州)와 유주(幽州)>에서 발췌 요약 인용한다.

https://history-backup.tistory.com/

 

평주는... ()나라 때는 국경의 밖이었고, .한나라 때 우북평군이었고, 후한 말 공손도가 스스로 평주목사라고 칭하였다..... ()나라에서는 동이교위(東夷校尉)를 설치하여 양평(襄平)에 거하였고, (이를) 나누어 요동(遼東) 창려(昌黎) 현토(玄莵) 대방(帯方) 낙랑(樂浪) 5개의 군을 평주(平州)로 하였고 후에 유주(幽州)와 합하였다.

 

이에 공손연(文懿)이 망한 후에 호동이교위(䕶東夷校尉)로 하여 양평(襄平)에 거하였다. 함녕(咸寧)[1] 210월에 나누어 창려(昌黎) 요동(遼東) 현토(玄莵) 대방(帯方) 낙랑(樂浪) 등의 군국(郡國) 5으로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 현은 26이고 가구수는 18,100이다.

(平州. , 禹貢冀州之域, 於周為幽州界, 漢屬右北平郡. 後漢末, 公孫度自號平州牧. 及其子康 康子文懿竝擅㩀遼東, 東夷九種皆服事焉. 魏置東夷校尉, 居襄平, 而分遼東 昌黎 玄莵 帯方 樂浪 五郡為平州, 後還合為幽州. 及文懿滅後, 有䕶東夷校尉, 居襄平. 咸寧二年十月, 分 昌黎 遼東 玄莵 帯方 樂浪 等郡國五置平州. 統縣二十六, 戶一萬八千一百)

1.1. 창려군

창려군(昌黎郡), 한국()때에는 요동속국(遼東屬國) 도위(都尉)에 속했고, 위국(, 曹魏)에서는 군을 설치하였다. 관할하는 현은 2개이고 가구수는 900이다.

1) 창려현(昌黎縣). 2) 빈도현(賔徒縣).

昌黎郡, 漢屬遼東屬國都尉, 魏置郡. 統縣二, 戶九百. 昌黎. 賔徒.

1.2. 요동국

요동국(遼東國), 진국()에서 군()으로 세웠다. 한국() 광무(光武)는 요동(遼東) 등을 청주(青州)에 속하게 하였고 후에 되돌려 유주(幽州)로 하였다. 관할하는 현은 8개이고 가구수는 5,400이다.

1) 양평현(襄平縣), 동이교위(東夷校尉)가 있는 곳이다.

2) 문현(汶縣). 3) 거취현(居就縣). 4) 낙취현(樂就縣). 5) 안시현(安市縣). 6) 서안평현(西安平縣). 7) 신창현(新昌縣), 8) 역성현(力城縣).

(遼東國, 秦立為郡. 漢光武以遼東等屬青州, 後還幽州. 統縣八, 戶五千四百. 襄平, 東夷校尉所居. . 居就. 樂就. 安市. 西安平. 新昌. 力城.)

 

1.3. 낙랑군

낙랑군(樂浪郡), 한국()에서 설치하였다. 6개의 현을 다스린다. 가구수는 3,700이다.

1) 조선현(朝鮮縣), 주국()이 기자(箕子)를 봉한 땅이다.

2) 둔유현(屯有縣). 3) 혼미현(渾彌縣).

4) 수성현(遂城縣), 진국()이 쌓은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2]

5) 누방현(鏤方縣). 6) 사망현(駟望縣).

(樂浪郡, 漢置. 統縣六, 戶三千七百. 朝鮮, 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 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

 

1.4. 현도군

현도군(玄菟郡), 한국()에서 설치하였다. 현은 3개이다. 가구수는 3,200이다.

1) 고구려현(髙句麗縣). 2) 망평현(望平縣). 3) 고현현(髙顯縣).

(玄菟郡, 漢置. 統縣三, 戶三千二百. 髙句麗. 望平. 髙顯).

 

1.5. 대방군

대방군(帯方郡), 공손도(公孫度)가 설치하였다. 현은 7이며 가구수는 4,900 이다.

1) 대방현(帯方縣), 2) 열구현(列口縣). 3) 남신현(南新縣). 4) 잠현(長岑縣). 5) 제해현(提奚縣). 6) 함자현(含資縣). 7) 해명현(海㝠縣).

(帯方郡, 公孫度置, 統縣七, 戶四千九百. 帯方. 列口. 南新. 長岑. 提奚. 含資. 海㝠.)

 

평주(平州)는 처음에 설치하여 모용외(慕容廆)가 자사(刺史)가 되었다가, 드디어 속하였다. 영가(永嘉)의 난에 모용외는 무리에 의하여 추앙되었다. 그 손자 모용준()에 이르러 계()로 도읍을 옮겼다. 그 후에 모용수(慕容垂)의 아들 모용보()는 또한 화룡(和龍)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유주(幽州)로부터 여부진(廬溥鎮) 남쪽의 땅이 위()로 편입됐다.

모용희(慕容熙)는 유주자사진(幽州刺史鎮)를 영지(令支), 청주자사진(青州刺史鎮)을 신성(新城), 병주자사진(并州刺史鎭)을 범성(凡城), 영주자사진(營州刺史鎮)을 숙군(宿軍), 기주자사진(冀州刺史鎮)을 비여(肥如)로 하였다.

고운(髙雲)은 유주목진(幽州牧鎮)와 기주목진(冀州牧鎮)을 비여(肥如), 병주자사진(并州刺史鎮)을 백랑(白狼)으로 하였고 후에. 후에 풍발(馮䟦)이 빼앗고 풍발은 화룡(和龍)에서 참람되이 불렸는데 이것이 후연(後燕)이며 위()에 멸망당하였다.

(平州初置, 以慕容廆為刺史, 遂屬永嘉之亂, 廆為衆所推. 及其孫儁移都於薊. 其後慕容垂子寳又遷于和龍, 自幽州至於廬溥鎮以南地入於魏. 慕容熙以幽州刺史鎮令支, 青州刺史鎮新城, 并州刺史鎭凡城, 營州刺史鎮宿軍, 冀州刺史鎮肥如. 髙雲以幽 冀 二州牧鎮肥如, 并州刺史鎮白狼. 後為馮䟦所簒, 䟦僭號於和龍, 是為後燕, 卒滅於魏.)

 

***참고: 이상이 진서지리지에 설명된 평주(平州)의 위치와 역사에 대한 내용이다. 위의 글은 아래 인터넷에서 인용 요악하였다.

평주의 地理志지리지)에 대한 부연 설명을 하면,

()나라 때는 유주까지 주나라 이고, 평주는 주나라 밖이었다. 한나라 때는 우북평군(右北平郡)에 속했고, 후한(後漢) 말엽에는 공손도(公孫度)가 스스로 평주목(平州牧)이라고 불렀다고 했다. 이에 그의 아들 공손강(公孫康)과 공손강의 아들 공손연(文懿)이 요동을 병합하고 그곳에 의거하여 자칭 연()나라의 자칭 왕위에 오른 것이다.

사마의가 공손연을 참살하고, ()나라 에서는 동이교위(東夷校尉)를 설치하여 양평(襄平)에 평주 치소를 두고 통치하였는데, 이때 이 땅에

1) 요동(遼東) 2) 창려(昌黎) 3) 현토(玄莵) 4) 대방(帯方) 5) 낙랑(樂浪)5개의 군()을 설치하였고, 이 지역을 평주(平州)라고 하였다.

 

평주는 후위(後魏) 때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통감지리석 권 10에는

()이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 후위(後魏) 시기에는 고구려가 그곳(晉 平州)에 도읍하였고 당()이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通鑑地理通釋10

晉置平州 後魏時 高麗國都其地 唐置安東都護府)”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후한서(後漢書) 104, ()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 654~684)<후한서> 에는,

양평(襄平)은 현()으로, 요동군에 속해 있었다. (양평의) 옛 성이 지금 평주(平州) 노룡현(盧龍縣) 서남에 있다

(襄平縣 屬遼東郡 故城在 今平州盧龍縣西南라고 하였다.

 

***참고: 위의 통감(通鑑) 기록을 보면 후위(後魏 AD 386-534))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북조(北朝) 최초의 나라이다. AD 386년에 선비족(鮮卑族)의 탁발규가 화북(華北) 지방에 세운 이후 AD 534년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하였다. 후위의 존속기간은 138년에 이른다. 이 기간 중 고구려가 그곳(晉 平州)에 도읍하였다고 분명한 기록을 하고 있다.

 

통감(通鑑)에 기록된 북위(北魏 AD 386-534)의 기간은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AD 391-413)과 장수왕(AD 413-490)의 시절이다. 이 시기에 고구려가 평주(平州) 땅을 점령하고 또 수도를 그곳에 두었다고 분명한 기록을 하고 있다.

또 당나라 때 장화태자 이현(李玄)은 후한서의 주석에서도,

낙랑군의 치소(治所)이었던 양평(陽平)은 요동군에 속한 땅이었다. 지금 당나라 땅인 평주(平州)의 노룡현(盧龍縣) 서남쪽에는 옛날의 성()이 남아있다라고 하였다. 이 옛날의 성은 여러 역사적 기록으로 볼 때 고조선에서 고구려에 걸쳐 사용되었던 옛 성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와 중국의 평주 전쟁 기록과 광개토대왕 이후 평주의 점령

후한 말 평주(平州)에 설치한 군()1) 창려(昌黎) 2)요동(遼東) 3) 현토(玄莵) 4)대방(帯方) 5)낙랑(樂浪)5개의 군이 있었고, 이에 속한 현()26개 현이었다.

이들 평주(平州)에 속한 군현 지역은 동쪽에 위치한 고구려와 수 많은 전쟁을 하였으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구려는 2대 유리왕 때 이미 요수(遼水: 지금의 조백하)의 발원지 부근에 있던 현도 고구려 현을 점령하고 있었다. 전한 말기 왕망은 이곳에서 고루려와 전투를 한 바 있다.

고구려 5대 모본왕은 후한(後漢)과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및 태원에서 전쟁을 하였다. 이는 고구려가 압록강 변 환인시(즙안)에서 건국했다는 일본인이나 식민샇학자들의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한다. 압록강에서 수천리 떨어진 지금의 북경보다 훨씬 더 먼 지역에서 고구려가 후한과 전쟁을 할 수는 없다. 고구려는 요서지방에서 건국되었이 확실하다.

 

6대 태조왕도 요서지방에 있는 후한의 요동군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정복하였는데, 이 서안평현도 평주 지역이다. 또 요서(遼西)10개의 성을 쌓았다. 요서 10성이 압록강 변일 수는 결코 없고,요동군 서안평현을 일본인들이나 한국사학자들이 지금의 단동이라고 하는데, 이는 역사를 왜곡 날조하고 있는 것이다.

 

15대 미천왕 3(AD 302) 9월에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현도군 (玄菟郡)을 침범하여 8,000명을 사로잡아 평양으로 옮겼다. 12(AD 311)에 장수를 보내어 요동군 서안평현(西安平懸)을 습격하여 이를 빼앗았다. 14(AD 313) 낙랑군을 침범하여 남녀 2천명을 사로잡았다. 15(AD 314)에 남쪽의 대방군(帶方郡)을 침범하였다. 16(AD 315) 현도성(玄菟城)을 공격하여 부수니 적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음이 매우 많았다.

 

18대 고국양왕 2(AD 385)에는 왕이 군사를 내어 요동을 습격하였다. 이때 연나라 왕 수는 대방(帶方)의 왕좌에게 명하여 용성(龍城)을 지키게 하였다. 고구려 군사는 이를 쳐부수고 드디어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켜 남녀 1만명을 사로잡아 왔다.

 

***참고: 위의 내용을 보면 일본인이나 한국사학자들이 AD 315년에 고구려에게 완전히 멸망되었다고 한 대방(大方)18대 고국원왕 때(AD 385)까지 70년이 지난 후에도 황해도에 살아 있어서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것인데, 일본인이나 한국사학자들의 AD 315년 대방군 멸망이란 주장이 역사 날조임을 증명한다. 이 때 고구려 고국원왕이 요동과 현도를 함락시킨 곳은 요서 지방에 위치한 평주의 요동군과 현도군이다. 고국원왕이 사로잡아 온 1만 여 명은 당시의 인구로 볼 때 어마어마한 인구이다. 또 당시의 용성(龍城)은 지금의 태원(太原)이라는 기록도 있다.

 

19대 광개토대왕 11(AD 401) “왕이 군사를 보내어 평주(平州)의 숙군(宿郡)을 치니 연의 평주자사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참고: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은 당시 북위(北魏)를 공격한 것인데, 숙군(宿郡)을 빼앗았고, 평주의 통치자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나 평주 숙군이 고구려 영토로 된 것이다.

전술하였지만, 평주(平州)는 진서지리지신보정(晉書地理志新補正) 권이(卷二)에 요서에 속하는 유주(幽州)와 접한 동쪽 지역이고, 또 요동(遼東), 창려(昌黎), 원도(元菟: 玄菟), 대방(帶方), 낙랑(樂浪)군을 합쳐서 평주라고 기록하였다.

 

이 평주에 속한 낙랑과 대방 및 현도가 결코 한반도에 있을 수 없고, 한반도 내에 낙랑과 대방과 현도가 설치된 역사가 결코 없다. 낙랑과 대방과 현도가 한반도 애에 있다는 일본인들의 고고학 발굴은 모두 중국에서 밀수입한 고고학 유물들을 무덤 발굴시 끼워 넣고, 그 곳이 낙랑과 대방의 영토였다고 날조한 일본인들의 고고학 날조 범죄 행위로 인한 것이다. 한국의 사학자들도 이제 일본인들의 범죄 행위에 더 이상 동조하지 말아야 한다.

 

20대 장수왕 23(AD 435) “(: 北魏)나라가 자주 연(: 北燕)을 공격하니 연은 나날이 위태로웠다. 연나라의 왕 풍홍(馮弘)이 말하기를, 만약, 일이 급해지면 동으로 가서 고구려에 의탁하고 후일을 도모하겠다.고 비밀히 상서 양이를 보내서 고구려에게 맞이해 주기를 청하였다....이듬해 위나라가 연의 백랑성을 공격하여 이기니 장수왕은 장수 갈로, 맹광을 보내어 군중 수만 명을 거느리고 양이를 따라 화룡에 이르러 연나라 왕을 맞이하게 하였다. 5월에 연왕은 용성(龍城)의 호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피난을 하게 되었다...장수왕은 그를 평곽에 있게 하였다가 얼마 안 되어 북풍으로 옮겼다...

***참고: 위의 고구려 2대 유리왕, 5대 모본왕, 6대 태조왕, 15대 미천왕, 18대 고국원왕, 19대 광개토대왕 및 20대 장수왕에 이르기 까지 고구려는 중국과 수많은 전쟁을 하였으며, 이때 전쟁을 한 곳은 평안도나 황해도가 결코 아니다. 요서 지방에서 싸웠고, 19대 광개토대왕 및 20대 장수왕 이후에는 만리장성의 안쪽 평주(平州)에 속한 지역 전체와 유주에 속한 지역 발해군 등을 점령하였고, 이후 고구려가 멸망하기까지 이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이었다.

 

낙랑이 AD 313년에, 대방이 315년 미천왕 때 멸망되었다는 날조된 학설

일본인들이나 한국사학자들은

공손강(公孫康)은 후한(後漢)의 헌제(獻帝) 건안 연간(建安年間 : 196220)에 낙랑군 소속 둔유현(屯有縣 : 지금의 黃海道 黃州) 이남의 땅을 떼어서 새로 대방군을 설치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예전에 없던 둔유현 이남의 땅 황해도에 대방군을 AD 200년 쯤에 설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옳지 않다. 대방현(大方縣)이나 대방군(帶方郡)연나라를 멸망시킨 진시황이 10(BC 274) 중국 북부 유주(幽州)에 연()나라가 고조선으로부터 빼앗은 연오군(燕五群)을 통합하여 유주로 하였다. 이후 한()나라에 이어졌다. 그러므로 공손강이 대방군을 설치했다는 AD 200년 경보다 무려 470여 년 전 진시황 때부터 대방군은 요서지방에 존재하고 있었다.

식민사학자들은 공손강이 낙랑군 둔유현 이남의 땅을 떼어서 새로 대방군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는데, 이것도 사실이 아니다. 대방군의 속현으로는

진서(晉書) 지리지에 따르면 대방현(帶方縣), 열구현(列口縣), 남신현(南新縣), 장잠현(長岑縣), 제해현(提奚縣), 함자현(含資縣), 해명현(海冥縣)이라 하였다. 이 대방군의 속현이 둔유현 이남 땅을 새로 떼어서 새로운 명칭의 현을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서(漢書)에는 이미 낙랑군에 29개의 현을 설치하였는데, 이들 29개의 현()에 포함되어 있었던 대방현, 열구현, 장잠현, 제해현, 함자현 및 햄명현을 합쳐서 대댕군으로 이름 붙인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대방군은 진시황 때부터 한라라를 거쳐서 공손강 시대 및 진나라까지 요서 지방에 존재했던 것이고 일본인이나 식민사학자들이 말하는 공손강의 황해도 대방군 설치설은 역사를 날조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 번 설명하였지만, 대방군과 대방군의 속현들은 모두 수양제의 고구려 침략경로에 있어서 만리장성의 안쪽 조백하와 영정하 부근에 밀집해 있었던 군현이 역사적으로 명백하다.

 

평주는 후위(後魏) 때 고구려의 영토이었던 역사기록

통감지리석 권 10에는

()이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 후위(後魏) 시기에는 고구려가 그곳(晉 平州)에 도읍하였고 당()이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通鑑地理通釋10

晉置平州 後魏時 高麗國都其地 唐置安東都護府)”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 후한서(後漢書) 104, ()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 654~684)<후한서> 에는,

양평(襄平)은 현()으로, 요동군에 속해 있었다. (양평의) 옛 성이 지금 평주(平州) 노룡현(盧龍縣) 서남에 있다

(襄平縣 屬遼東郡 故城在 今平州盧龍縣西南라고 하였다.

 

***참고: 위의 통감(通鑑) 기록을 보면 북위(北魏) 또는 후위(後魏 AD 386-534)라고 칭한 나라)는 중국 남북조 시대의 북조(北朝) 최초의 나라이다. AD 386년에 선비족(鮮卑族)의 탁발규가 화북(華北) 지방에 세운 이후 AD 534년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하였다. 존속기간은 138년이다. 이 기간 중 고구려가 그곳(晉 平州)에 도읍하였다고 통감에는 분명히 기록 하고 있다.

 

중국의 북위(北魏 AD 386-534) 때의 기간은 고구려 19대 광개토대왕(AD 391-413)과 장수왕(AD 413-490)의 시절로 이 시기에 고구려가 평주(平州) 땅을 점령하고 또 수도를 그곳에 두었다고 분명한 기록을 하고 있다.

 

또 당나라 때 장화태자 이현(李玄)은 후한서의 주석에서도,

낙랑군의 치소(治所)이었던 양평(陽平)은 요동군에 속한 땅이었다. 지금 당나라 땅인 평주(平州)의 노룡현(盧龍縣) 서남쪽에는 옛날의 성()이 남아있다라고 하였다. 이 옛날의 성은 여러 역사적 기록으로 볼 때 고조선에서 고구려에 걸쳐 사용되었던 옛 성으로 추정된다.

 

위에서 기록된 광개토대왕은 븍얀(北燕) 공격하여 평주(平州)의 숙군(宿郡)을 점령하자, 평주의 통치자 모용귀가 성을 버리고 달아나 평주 숙군이 고구려 영토로 된 것이다. 또 고구려 19대 광개토왕 때 평주를 공격하여 숙군(宿郡)을 점령하였다.

 

20대 장수왕 23(AD 435) “(: 北魏)나라가 자주 연(: 北燕)을 공격하니 연은 나날이 위태로웠다. 연나라의 왕 풍홍(馮弘)은 고구려에 항복하여 북연의 영토 중 평주 지역은 고구려의 영토가 된 것이며, 이후 고구려 보장왕 때까지 이 평주지역은 고구려 영토로 유지되었다. 이후 평주지역의 전 지역은 고구려 멸망시까지 고구려의 영토이었다.

이 평주지역 전체가 고구려 땅이었음은 수양제의 침략 당시 수양제 침략경로에 평주 전 지역이 포함된 사실이 역사적으로 평주가 고구려 영토이었음을 증명한다.

 

수양제의 침략경로는 평주에 속한 전 지역에 걸쳐 있었다.

후한 말 평주(平州)에 설치한 군()1) 창려(昌黎) 2)요동(遼東) 3) 현토(玄莵) 4)대방(帯方) 5)낙랑(樂浪)5개의 군이 있었고, 이에 속한 현()26개 현이 있었다. 이 평주에 속한 요동, 현도, 대방, 낙랑 및 창려가 모두 수양제의 침략경로에 있어서 평주 전 지역은 고구려 영토이었음을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삼국사기 영양왕 조 기록을 보면,

수양제는 고구려를 침략하기 전 고구려 침략을 위한 조서를 내렸는데,

수양제는 조명을 내리기를 고구려는 작고 추잡한 것들이(小醜) 혼미하고 불공하여 발해와 갈석 사이를 점령해 있고(碣發之間 崇聚), 요동 예맥의 땅을 잠식했으며...글안의 무리와 해변을 지키는 수나라의 사병을 죽이고, 또 말갈의 항복자와 요서를 침범하였다....

요동(遼東), 현도(玄菟), 낙랑(樂浪)의 아름다운 강토를 돌아보니 이제 모두 오랑케의 땅이 되었다라고 분개하면서 한탄하였다.

이 수양제의 침략경로는 예전 한나라 말기 평주로 설치하였던 요동, 현도 및 낙랑뿐 아니라, 대방까지 모두 고구려의 영토이어서 수양제가 침략의 1차 목표로 삼은 지역이 된 것이다.

 

수양제는

이에 친히 6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려고 한다....12(左十二軍)1) 누방(누방), 2) 장잠(長岑), 3) 명해(溟海), 4) 개마(蓋馬), 5) 건안(建安), 6) 남소(남소), 7) 요동(遼東), 8) 현도(玄菟), 9) 부여(夫餘), 10) 조선(朝鮮), 11) 옥저(沃沮), 12) 낙랑(樂浪) 등의 길()로 나아가고,

 

우십이군(右十二軍)1) 점선(黏蟬), 2) 함자(含資), 3) 혼미(渾彌), 4) 임둔(臨屯), 5) 후성(후성), 6) 제해(提奚), 7) 답돈(답돈), 8) 숙신(肅愼), 9) 갈석(碣石), 10) 동이(東𦖮), 11) 대방(帶方), 12) 양평(陽平) 등의 길()로 나아가 계속 진군하여 평양에 총 집합하라고 하였다.

 

그해 3월 고구려 국경 지역인 요수(遼水: 지금의 조백하)에 도착하여 강을 건널 부교를 건설하여 고구려 공격을 개시했다. 그러나 부교가 불과 1(:3m)이 모자라서 강을 건너기엔 짧았고, 고구려 군의 반격으로 인해 1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수양제는 요수(遼水: 조백하)를 건너와서 6월 말에야 겨우 요동성 남쪽에 도착하였다. 고구려 침략 5개월 후에야 겨우 수양제가 요동성에 도착한 것이다

 

***참고: 위의 수양제 침략경로를 보면, 한서(漢書)에 기록된 유주(幽州)25개 현과 진서(晉書)에 기록된 낙랑과 대방의 군현 중에서,

먼저 진서(晉書)에 나타난 대방군에 관련된 침략경를 보면,

진서(晉書)에 기록된 치소인

1) 대방군 대방현(帶方郡 大方縣)은 우 12군의 11번째)을 비롯하여

2) 장잠(長岑)은 좌122번째에,

3) 제해(提奚)는 우126번째에

4) 함자(含資)는 우122번째에,

5) 명해(溟海)는 좌123번째에

각각 이들의 군현들이 모두 수나라에서 평양으로 진격하는 진격로의 고구려 땅에 있었다. 진서에 나타난 열구(列口)와 탄열(呑列)이 빠져 있는 것은 이 지명이 중요지역이 아님을 나타낸다.

 

또 대방군 외의 한서(漢書)에 기록된 낙랑군의 군현으로는,

1) 현도는 수양제의 침략 경로 좌128번 째에,

2)요동은 좌127번 째에

3) 낙랑은 좌1212번 째에,

4) 옥저는 좌1211번째에,

5) 점제(黏蟬: 점선)는 좌12군 첫 번 째에

6) 임둔은 우124번째에,

7) 혼미는 우123번째에 있었으며,

8) 중지는 검교우어위 호분 낭장 위문승의 진격로에,

9) 낙랑군 수성(遂城)은 탁군태수 최홍승의 진격로에

각각 설정되어 있어서 낙랑군, 대방군, 요동군, 현도군이 모두 수양제 침략경로에 있었다. 한서에 기록된 25개 군 중에서 일부 군의 명칭이 없고, 대방군도 7개군현에서 5개만 기록되었는데, 빠진 군현은 중요한 지명이 아니어서 침략경로 명칭에 기재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한서와 진서에 기록된 평주의 모든 군현과 일부 유주(幽州)에 속했던 군현들이 고구려 땅 수양제 침략경로에 있었다.

 

위와 같은 역사적 사실은 삼국사기는 물론 수서(隋書)에도 상세히 기록된 내용이다. 수양제의 조서는 일반 역사서와 달리 절대적 권위를 갖는 역사 기록이다.

 

낙랑 평안도설과 대방 황해도설의 쓰레기 논문과 글은 소각되어야 한다

위의 기록을 볼 때 낙랑과 대방은 일본인들이나 한국 식민사학자들이 주장한 평안도나 황해도에 설치한 사실이 전무하다. 오직 조백하와 영정하 부근 요서지방에 낙랑과 대방, 현도 및 요동이 모두 존재했던 것이 명확한 역사적 사실이다.

 

일본인들은 평안도와 황해도에서 수십개소의 무덤과 성터를 발굴하면서 중국과 북경 우리창에서 밀수 또는 구입한 골동품을 끼워넣고 고고학을 날조 오염하면서 낙앙과 애방이 평안도와 황해도라고 발표하였다. 또 이를 동조한 수많은 일본인 역사학자들과 이를 추종한 한국의 식민사학자들이 다투어 낙랑과 대방이 평안도와 황해도에 있다는 논문과 서적을 수백 편 발표하였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낙랑이 평안도에 설치된 일은 역사적으로 전혀 사실무근(事實無根)으로 낙랑은 평안도에 설치된 사실이 없다. 또 대방도 역사적으로 황해도에 설치된 사실이 전혀 없고, 요서 조백하 뿌근 고구려 국경지역에 있었다.

 

낙랑이 평안도에 있었고, 대방이 황해도에 있었다고 발표한 수백 편의 글과 논문은 모두 허위 사실을 기록한 쓰레기 보다 못한 글이다. 이같은 쓰레기 보다 못한 글이나 논문은 앞으로 작은 불씨로 태워버려야 할 때가 도래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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