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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7번 수도를 옮겼고, 지금의 평양은 평원왕 때 옮긴 장안성이다

작성자사천왕|작성시간26.06.11|조회수4 목록 댓글 0

고구려는 7번 수도를 옮겼고, 지금의 평양은 평원왕 때 옮긴 장안성

지금의 평양은 평원왕 때 옮긴 장안성이며, 이전의 수도는 평양이 아니었다.

고구려 수도 평양의 위치는 여러 번 변경되었다. 일본인이나 한국사학자들은 고구려의 평야이 지금의 평양이라고만 주장하지만, 지금의 평양은 고구려 때 장안성(長安城)이었다가, 25대 평원왕(AD 559~590) 때 장수왕 때의 집안시에서 26대 평원왕 때 지금의 평양인 장안성(長安城)으로 옮긴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의 수도 위치는 아래와 같이 7번이나 이동되었다.

1) 고구려 초대 동명성왕은 이십이년 졸본에 이르러 이 땅은 토양이 비옥하고 아름다우며, 산과 강이 험하게 둘러싸여 있으니 도읍으로 정하메 충분하다 하고 궁궐을 지었다. 이 때는 주몽왕 22(BC 15)이었다(與之俱至 卒本 觀其土壤 肥美 山下險古 遂欲都焉 而未遑作 宮室 時 朱蒙年 二十二歲)

 

2) 2대 유라명왕 2010월에 국내성으로 천도를 하고 위나암성을 쌓았다(二十二年 冬 十月 王 遷都 於國內 築尉那巖城)이라 하였고,

 

3) 10대 산상왕 1210월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겼다(冬 十月 移都 於丸都城)

 

4) 11대 동천왕 21((AD 247) 2월에 왕이 환도성이 전란을 겪으면서 도음을 복구할 수 없으므로 평양성을 축성하고 백성과 사직을 옮겼다. 평양이란 곳은 선인(仙人) 왕검의 살던 곳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왕검이 왕의 도읍을 삼았던 곳이라고도 한다(二十一年 春二月 王 以 丸都城 經亂 不可復都 築平壤城 移民 及 廟社 平壤者 本 仙人 王儉之宅也 惑云 王之都 王儉)이라 하였다.

 

5) 16대 고국원왕 12((AD 342) 이월 환도성을 수리하고, 국내성을 다시 쌍핬으며, 8월에는 환도성으로 옮겼다(十二年 春二月 修葺 丸都城 又築 國內城 秋八月 移居 丸都城)

 

6) 20장수왕 15(AD 427) 평양으로 수도를 옮겻다(十五年 移都 平壤)이라 하였고,

 

7) 25대 평원왕 20(AD 569) 수도를 장안성으로 옮겼다(二十年 移都 長安城)“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평원왕은 장수왕이 수도로 삼았던 지금의 길림성 집안의 평양성(平壤城)에서 지금의 평양(平壤)인 장안성(長安城)으로 수도를 옮긴 것으로 본다. 사학자들은 장수왕 때의 평양도 지금의 평양이고, 평원왕 때 옮긴 장안성도 지금의 평양 한 일부라는 이상한 논리를 펴고 있다.

 

고구려 수도를 옮긴 7곳에 대한 역사적 기록의 검토

고구려 초대 고주몽이 서울로 삼은 졸본(卒本)은 지금의 압록강변 집안시이 아니라, 요서 지방의 비류수 지역이었다. 비류수는 별도의 설명이 있겠지만, 압록강 중가 지류인 동가강이 결코 될 수 없고, 요서지방에 있었다.

이나라 때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루려를 침략할 당시 처음 나온 곳이 현도(玄菟)이었고, 현도 부근의 비류수(沸流水)에서 대 전투를 벌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도는 요수의 상류 지역으로 유주에 속한 현도군(玄菟郡)이어서 요서 지방이고, 수양제의 침략경로에 있던 땅이다. 또 비류수를 일본인이나 사학자들은 지금의 압록강 중류 동가강이라고 하는데, 관구검이 압록강 중류에서 최초의 전투를 함은 불가능하다. 비류수도 후술하겠지만, 요서 지방에 있었다. 그러므로 졸본은 압록강변이 아니라, 요서 지방에 있었다.

 

신당서(新唐書) 동이열전(東夷列傳) 고구려(高句麗)요동성 안에 주몽의 사당이 있는데, 그 사당에 보존하고 있는 소갑(銷甲, 갑옷)과 섬모( 銛矛,)를 전연(前燕) 때에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 전해진다( [원문] 城有朱蒙祠, 祠有鎖甲·銛矛, 妄言前燕世天所降.)“

<인용: 동북아재단 자유게시판. 장수왕의 평양은 요동에 있었다>

 

2대 유라명왕 20(AD 1) 10월에 천도한 국내(國內) 위나암성(尉那巖城)으로 천도하였다.

일본인들이나 한국사학자들은 국내성(國內城) 또는 통구성(通溝城)은 고구려의 도읍지다. 현재 위치는 중국 길림성(吉林省) 집안시(集安市)) 일대의 통구성으로 비정되고 있다.“라고 하는데, 이는 옳지 않다.

 

그 이유는 2대 유리왕이 현도 고구려현에서 전한 말 왕망과 전투를 하였는데, 이 때의 현도(玄菟)는 요수(遼水: 지금의 조백하) 상류 발원지이며, 서한군국도나 서진군국도에 표시된 바와 같이 요수 상류는 만리장성에 인접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현도는 수양제의 고구려 최초 침략 목표 지점 중 하나로 만리장서의 안쪽에 있었다. 그러므로 국내성은 이 현도 가까운 지역에 있었다.

 

5대 모본왕은 한나라와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및 태원을 공격하였다. 상곡, 어양, 우북평은 지금의 북경보다 서쪽 지방이다. 또 태원(太原)은 지금의 중국 산시성(山西省)의 성도이며 옛날에는 용성(龍城)이라고도 불렀던 곳이다. 그러므로 주몽의 졸본과 2대 유리왕의 국내성은 만리장성 부근에 있었고, 천리나 동쪽인 길림성 집안시에 있지 않았다.

 

10대 산상왕 12(AD 208) 도읍을 옯겼다는 환도성(丸都城)으로 천도하였다.

일본인들이나 한국사학자들이 이 환도성을 길림성 집안시의 내성에서 서북쪽 약 2.5km 떨어진 험준한 지형에 자리한 도성이고, 그 이유는 관구검(毌丘儉)의 공적비(소위 관구검기공비)가 발견되어, 244년 조위(曹魏) 침공군에게 공략당한 당시의 고구려 도성이 이곳이며, 환도성으로 불리었음을 알려준다라고 일본인들과 한국사학자들이 주장한다.

 

그러나 10대 산상왕이 천도한 환도성 역시 당시 고구려가 요서 지방에서 활약하고 있었으므로 요서지방이다. 산상왕 이전 5대 모본왕 때 후한과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및 태원에서 후한(後漢)과 전투를 하였고, 6대 태조왕은 요동군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점령하였으므로 환도성 역시 요서 지방으로 추정할 수 있다.

 

11대 동천왕 21((AD 247) 환도성이 전란을 겪으면서 도음을 복구할 수 없으므로 평양성(平壤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이때 옮긴 평양성을 일본인들이나 한국사학자들은 지금의 평양성이라고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병도는 고구려가 4세기 중엽까지는 평양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되지 못했고 평양을에 낙랑군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이때 평양성(平壤城)을 국내성 동쪽의 강계지역으로 보고 동황성은 그곳의 성곽 명칭이라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이병도 1956: 1976, 370~373; 서영대, 90-91).

 

이병도는 낙랑이 고구려 15대 미천왕 14(AD 312) 낙랑군에 침입하여 남녀 포로 2000여 명을 잡아왔다는 기록과, 미천왕 15(AD 313) 남쪽의 대방을 침략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평양 낙랑과 황해도 대방을 미천왕이 빼앗았다는 삼국사기 기록을 근거로 낙랑군(樂浪郡)AD 312년까지 평양에 존재했고, 대방이 AD 313년까지 황해도에 존재했으므로 지금의 평양에 존재할 수 없고, 길림성 집안시에 위치한 국내성의 동쪽 한귀퉁이에 평양성을 도읍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를 보면

”11대 동천왕 20년 위()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이 침입하였을 때 현도(玄菟)로 진출했다고 하였으나며... 비류수상에서 대패하여 삼천여 명이 참살 당했고.... 다시 싸워서 3천여 명이 죽거나 포혹되었지만...3번째 싸움에서 관구검이 결사항전하여 고구려 군이 궤멸되었다고 하였다. ....동천왕이 남옥저(南沃沮)로 피난하였는데, 이때 뉴유(紐由)가 적장에게 위장 항복하면서 음식뭄 중 물고기의 뱃속에 감춘 칼로 적장을 죽였다. 위군이 혼란한 틈을 타서 동천왕이 군대를 3갈레로 나누어 적을 공격하니 위군이 패퇴하여 스스로 낙랑(樂浪)으로 물러났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위의 기록을 보면 유주자사 관구검이 침입한 지역은 고구려 땅 현도(玄菟)이고 동천왕이 피난한 곳은 옥저의 남쪽(南沃沮)이고, 관구검이 패퇴하여 물러간 곳은 낙랑(樂浪)으로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일본인이나 한국 사학자들은 이때의 현도(玄菟)가 지금의 압록강에서 가까운 무순(撫順)이고, 동천왕이 피난한 남옥저(南沃沮)는 낭림산맥 넘어 함경도 지방이라 하며, 관구검이 물러난 곳 낙랑(樂浪)은 당시 낙랑이 평안도에 있었으므로 평안도라고 지금까지 주장해 왔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이 지금까지 우리나라 역사서에 그대로 실리고 있지만, 이 기록은 역사 날조, 왜곡이다.

 

특히 일본인들이나 하국사학자들은 옥저가 함경도와 연해주에 걸쳐서 있었다고 하는 주장은 궤면이다.

일본인과 한국인을 비롯한 18명의 역사학자가 옥저(沃沮)()자가 원래 ()”자인데, “부조(夫租)”옥저(沃沮)”로 잘못 기재한 것이라고 비정을 하였다. 이들은 옥저(沃沮)=부조(夫租)”라는 연구 논문과 글을 20여 편이나 발표하였다.

<출처: 나무위키 옥저’>

https://namu.wiki/w/%EC%98%A5%EC%A0%80

그러나 옥저(沃沮)”는 일본인들이나 한국사학자들이 말하는 낙랑군의 25개 현 중 하나인 부조현(夫租縣)”과 동일한 명칭의 오기(誤記)일 수도 없고 또 동일한 지역일 수도 없다. 또 관구검이 처음 침략한 현도도 압록강 가까운 무순(撫順)이 결코 아니고, 옥저(沃沮) 역시 함경도나 연해주가 결코 아니다.

 

그 이유눈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략할 당시 내린 조서에서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 들어나기 때문이다. 수양제는

돌아보니 아름다운 땅 낙랑(樂浪)과 현도(玄菟)와 요동(遼東)이 오랑케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고, 고구려가 갈발지간(碣渤之間: 낙랑군 갈석현과 유주 발해군)을 삐앗았으며(崇取), 요서(遼西)를 침공하였다...”라고 하였다. 이 조서에서 밝힌 바와 같이 평주(平州)에 속한 낙랑군과 모든 속현 및 대방군과 모든 속현이 이미 고구려의 영토이었고, 유주에 속한 현도군(玄菟郡)과 발해군(渤海郡)도 고구려 영토이었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낙강군과 이에 속한 모든 속현 및 대방군과 이에 속한 모든 속현이 수양제의 24() 침략경로에 있었다. 이 수양제 24군의 침략경로에 속한 낙랑군과 속현, 대방군과 속현 및 요동이나 현도는 모두 만리장성의 안쪽 조백하 및 영정하 부근에 밀집된 지역이었다.

 

일본인들이나 이를 추종하는 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낙랑은 평양에 설치된 역사적 사실이 전무하며, 대방도 황해도에 설치한 사실이 전무하다. 그럼에도 평안도 낙랑군 설이나 황해도 대방군 설이 굳어지게 된 것은 일본인들이 중국이나 북경 유리창에서 구입 밀수입한 골동품을 이 지역 무덤 발굴 시 끼워널호 이 지역이 고고학적으로 낙랑 지역이고, 대방 지역이라고 날조하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뿐 아니고, 중국의 역사기록인 수서(隋書)에서도 삼국사기보다 더 자세하게 침략한 장수의 이름까지 기록하였는데,

수서(隋書)에 의하면,

1) 관구검이 최초 고구려를 침략한 현도(玄菟)는 좌8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 신신세웅(辛世雄)의 현도도(玄菟道)로 기록되어 있고

2) 동천왕이 피난한 옥저는 좌12(12) 우익위대장 설세웅(薛世雄)의 진격 로 옥저도(沃沮道)로 기록되어 있고

3) 관구검이 패퇴하여 물러간 낙랑(樂浪)은 좌12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우중문(于仲文)의 낙랑도(樂浪道)로 기록되었다.

 

위와 같이 삼국사기나 수서에 기록된 수양제의 침략경로를 볼 때, 관구검이 처음 침략한 현도, 동천왕이 피난한 옥저, 관구검이 되돌아 간 낙랑 세 지역이 모두 수양제 침략시 최초 침략 목표 지점이며, 만리장성의 안쪽 조백하 부근 지역에 밀집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인이나 이을 추종하는 사학자들의 현도 압록강 주변설, 옥저 함경도 및 연해주설, 낙랑 평양설응 날조이므로 반드시 폐기되어야 한다.

 

***참고: 동천왕이 환도성에서 평양성(平壤城)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평양이란 곳은 선인(仙人) 왕검의 살던 곳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왕검이 왕의 도읍을 삼았던 곳이라고도 한다(平壤者 本 仙人 王儉之宅也 惑云 王之都 王儉)”이라고 하였다.

일본인들이나 사학자들은 동천왕이 옮긴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이병도는 이때까지 평양은 낙랑군이 존재하고 있어서 지금의 평양이 아닌, 즙안시 한쪽 귀퉁이라는 주장을 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옥저(沃沮)가 수양제 침략 경로이어서 만리장성의 안쪽이라는 사실이 확실하므로, 동천왕이 옮긴 평양성(平壤城)이 중국의 사서에 기록된 평양 왕검성이 요서 창려(昌黎)에 있었다는 기록과 연남생의 묘비명에 연남생이 요동군 평양성 출신(平壤城人)이란 기록에 비추어 요동군 창려현의 평양성으로 옮겼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16대 고국원왕 12((AD 342) 8월에는 환도성으로 옮겼다(十二年 秋八月 移居 丸都城)”라고 기록되너 있다. 환도성은 어디인가?

일본인들과 사학자들은

환도성은 삼국시대, 고구려의 도성이다. 유적은 중국 길림吉林성 집안集安시에 있다. 지안시 북쪽의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으로 비정된다라 하고 있다. 그 이유는 관구검(毌丘儉)의 공적비(소위 관구검기공비)가 발견되어, 244년 조위(曹魏) 침공군에게 공략당한 당시의 고구려 도성이 이곳이며, 환도성으로 불리었음을 알려준다라고 일본인들과 한국사학자들이 주장한다.

그러나 가로 26.4cm, 세로 25.8cm, 두계 약 27cm의 작은 돌조각이 1906년 만주의 집안현(輯安縣) 판석령(板石嶺)에서 도로공사 중에 발견되었다고 하였는데, 단재 신채호나 정인보 선생은 이 돌조각이 위조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중국인들이 돈벌이 수단으로 고고학 발굴물이라고 위조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정시삼년고구려반(正始三年高句驪反)’,

2행의 독칠아문토구려오(督七牙門討句驪五)’,

3행의 부견구육년오월선(復遣寇六年五月旋)’,

4행의 토구장군외오환선우(討寇將軍巍烏丸單于)’,

5행의 위구장군도정후(威寇將軍都亭侯)’,

6행의 행비장군령(行裨將軍領)’,

7행의 비장군(裨將軍)’ 뿐이다.

 

그러나 16대 고국원왕이 옮긴 환도성(丸都城)10대 산상왕 12(AD 208) 도읍을 옯겼다는 환도성(丸都城)과 동일한 지명이며 동일한 지역이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요서지방에서 도읍하였고, 5대 모본왕 때는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및 태원에서 후한(後漢)과 전투를 하였고, 6대 태조왕은 유주 요동성 서안평현(서안평현을 점령하였고, 11대 동천왕 때도 서안평현을 점령한 사실에 비추어 10대 산상왕 때의 환도성이나 16대 고국원왕 때의 환도성은 요서 지방에 있었다. 환도성이 압록강변 집안(集安)이라는 일본인이나 사학자들의 주장은 옳지 않다.

 

20장수왕 15(AD 427) 평양으로 수도를 옮겻다(十五年 移都 平壤)이라 하였다. 이 평양성은 어디인가?

일본인이나 사학자들은 장수왕 때 옮기 평양이 지금의 평양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이후 25대 평원왕 때(AD 569) 평양에서 장안성(長安城)으로 옮긴 후 고구려 멸망시까지 계속 장안성이 평양이었으므로 장수왕의 평양성은 지금의 평양과 다른 지역이다.

필자는 장수왕 때 옮긴 평양성이 지금의 길림성 집안 지역으로 추정을 한다. 그 이유는 장수왕의 부친인 광개토대왕의 능()과 광개토대왕 능비(陵碑)가 집안에 남아있고, 또 장군총(將軍塚)이라고 일본인들이 이름지은 돌 피라밋 능이 광개토대왕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는데, 이 장군총은 비하된 칭호(卑稱)이고, 장수왕능(長壽王陵)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고구려 능묘(陵墓) 중에서 가장 거대한 이 묘는 왕의 능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25대 평원왕 20(AD 569) 수도를 장안성으로 옮겼다(二十年 移都 長安城)“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장안성은 어디인가?

사학자들은 장수왕의 평양성도 지금의 평양이고, 평원왕의 장안성도 지금의 평양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짜맞추기에 불과하다.

이 장안성은 장수왕이 수도로 옮겼던 평양성(平壤城)에서 옮겨진 것이므로 장수왕의 평양성과 분명히 다른 지역이다. 장수왕의 평양성이 지금의 평양이라면 이 장안성의 위치는 지금의 평양이 아닌 지역이어야 하나 그런 지역이 없으므로 같은 평양의 한쪽 변도리로 치부하고 있다.

평원왕이 장안성으로 수도를 옮긴 이후 멸망시까지 계속된 평양 지역이므로 이 지역은 지금의 평양(平壤)으로 보아야 한다.

 

결론

고구려 초기인 2대 유리명왕이 옮긴 국내 위나암성은 요수의 상류인 현도 부근이므로 요서 지방이었다.

10대 산상왕 12(AD 208) 도읍을 옯겼다는 환도성(丸都城)은 당시 고구려가 요서지방에서 후한과 대립하던 시기이므로 요서지방에 위치해 있었다. 결코 지금의 압록강변 집안(集安)이 아니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요서지방에서 도읍하였고, 5대 모본왕 때는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및 태원에서 후한(後漢)과 전투를 하였고, 6대 태조왕은 유주 요동성 서안평현(서안평현을 점령하였고, 11대 동천왕 때도 서안평현을 점령한 사실에 비추어 10대 산상왕 때의 환도성이나 16대 고국원왕 때의 환도성은 요서 지방에 있었다. 환도성이 압록강변 집안(集安)이라는 일본인이나 사학자들의 주장은 옳지 않다.

11대 동천왕이 옮긴 평양성(平壤城)은 요동군에 고구려 평양성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요동군 평양성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

16대 고국원왕이 천도한 환도성은 10대 산상왕 12(AD 208) 도읍을 옯겼다는 환도성(丸都城)과 동일한 지명이며 동일한 지역이다.

20대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ㅇ(平壤城)은 광개토대왕의 능과 능비가 집안에 남아 있고, 장수왕능으로 추정되는 장군총(將軍塚)이 집안에 남아 있는 점을 고려할 때 지금의 집안일 가능성이 있다.

26대 평원왕이 옮긴 장안성(長安城)은 지금의 평양일 가능성이 높다.

 

일본인들과 이를 추종하는 사학자들은 고구려의 수도를 압록강변 집안시(集安市)와 지금의 평양(平壤) 2곳만 있다고 wnwked하며, 고구려의 초기 수도가 요서에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핮지 않고 있다. 앞으로 고구려의 수도에 대한 올바른 연국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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