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도는 죽기 직전 최태영과 공저 <한국 상고사입문>에서 한사군 요서 존치설을 썼다
이병도는 죽기 직전, 죽던 해인 1989년 최태영과 공저 <한국상고사입문>에서 한사군 대륙존치설을 썼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병도의 한반도내 한사군설이 한국사학계를 주름잡고 있다. 한국 역사학자들도 이병도가 죽기 직전 자신의 학설을 뒤엎은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 최태영과 이병도 공저 <한국상고사입문>의 달라진 한사군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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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영 박사는 이병도씨를 설득하여 “한국상고사입문”이라는 저서를 출간합니다.(1989) 최태영 박사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 바 있다.
한사군위치 국사대관(1948년,이병도)
한국상고사입문(1989년,이병도,최태영공저)
“내가 젊었을 때만 해도 한국땅에서 단군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실증사학을 내세워 단군을 가상인물로 보기 시작한 것은 이승만 정권 때부터이지요. 그리고 이미 세상을 떠난 친구이지만 이병도 박사의 잘못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이박사는 말년에 건강이 나빴는데, 어느 날 병실에 찾아갔더니 죽기 전에 옳은 소리를 하겠다며 단군을 실존인물로 인정했어요. 그 사실을 후학들이 모르고 이박사의 기존학설에만 매달려 온 것입니다. (서울대법대 초대학장을 역임한 상고사연구가 최태영 박사, 2000년 1월3일자 문화일보특별대담)
이병도는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 죽었으니 ? 그나마 용서가 가능할까?
***참고: 한사군은 최초 진번, 임둔, 현도 및 낙랑은 BC 108년 한무게가 설치하였다고 하였는데, 필자는 앞서 여러 글에서 진번의 위치는 열하특별구경(熱河特別區境)에 기록된 지금의 열하(熱河)를 경계로 하여 그 서쪽에, 임둔은 임둔태수 인장이 발굴된 요령성 금서시를 경계로 그 서쪽에 위치해 있었다고 비정하였다. 또 현도는 요수인 지금의 조백하 상류 지역에, 낙랑은 만리장성의 안쪽에, 낙랑은 패수(지금의 대릉하) 북쪽으로부터 연장성의 남쪽 끝에 있었던 양평(지금의 천진시 부근)으로 비정하였다.
한사군 설치된지 25년 후 진번군은 토착민들에게 쫓겨 서쪽으로 밀려나면서 낙랑군에 흡수되었다고 하였다. 이후 흡수된 진번의 자리인 낙랑군 둔유 남쪽에 대방군을 설치했다고 하였지만, 후에 설치된 대방은 황해도가 아닌 요수(遼水) 부근에 있었다.
즉, 공손강이 설치한 대방(이전의 진번)은 고구려 침략당시 수양제가 내린 조서에서 대방이 모두 수양제 침략경로에 포함되어 있는 고구려 서쪽 국경지역의 조백하 부근에 밀집해 있었다. 이 사실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수양제의 칙명이므로 어느 역사서보다 가장 확실한 역사적 사실이다.
한나라, 후한 및 진나라 때 역사서에 기록된 낙랑군과 대방군 및 이의 모든 속현들이 수양제의 침략 경로인 고구려 서쪽 국경지역 조백하 부근에 있었다.
◉ 대방군도 황해도가 아닌 지금의 조백하 부근에 밀집한 역사적 사실
수양제는 고구려 침략 당시 그의 조서에서
”아름다운 땅 낙랑, 현도 및 요동이 오랑케 고구려의 땅이 되었고, 고구려가 갈발지간(갈석과유주 발해군 지역)을 점령하였으며, 요서(요수인 지금의 조백하 서쪽)을 침략했다고 분개하는 조서를 내렸다. 또 그는 좌 12군과 우 12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국경지대를 평양으로 향하는 침략 경로로 삼았는데 그중 진서에 기록된 대뱡군이 모두 이 수양제 침략 경로에 있었다.
진서(晉書)에 기록되 대방군(帶方郡)은 그 속현은
1) 列口 열구, 2) 長岑 장잠, 3) 提奚 제해, 4) 含資 함자. 5) 冥海 명해, 6)呑列 탄열의 6개 현이 있었다.
삼국사기의 영양왕 22년(AD 611년) 수양제는 고구려 침략시에
”좌12군(左十二軍)은 1) 누방, 2) 장잠, 3) 명해, 4) 개마, 5) 건안, 6) 남소, 7) 요동, 8) 현도(玄菟), 9) 부여, 10) 조선, 11) 옥저(沃沮), 12) 낙랑(樂浪) 등의 길(道)로 나아가고,
우십이군(右十二軍)은 1) 점선, 2) 함자, 3) 혼미, 4) 임둔(臨屯), 5) 후성, 6) 제해, 7) 답돈, 8) 숙신, 9) 갈석, 10) 동이, 11) 대방(帶方), 12) 양평 등의 길(道)로 나아가 계속 진군하여 평양에 총 집합하라.“고 하였다. 또 탁군태수 최홍승은 수성(遂成)으로 나아가 고구려 평양으로 진격하라고 하였다.
위의 수양제 침략 전격로를 보면
낙랑군에 속한 거의 모든 속현이 수양제의 침략경로에 있어서 낙랑군은 평안도에 있지 않고, 요서 조백하 부근에 밀집해 있었다.
또 대방군의 경우, 진서(晉書)에 기록된 치소인
1) 대방군(帶方郡)은 우 12군의 11번째)을 비롯하여
2) 장잠(長岑)은 좌12군 2번째에,
3) 제해(提奚)는 우12군 6번째에
4) 함자(含資)는 우12군 2번째에,
5) 명해(溟海)는 좌12군 3번째에
각각 이들의 군현들이 모두 수나라에서 평양으로 진격하는 진격로의 고구려 땅에 있었다. 진서에 나타난 열구(列口)와 탄열(呑列)이 빠진 이유는 이 두 현이 중요한 지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서한군국도(西漢郡國圖)와 서진군국도(西晉郡國圖)에 낙랑군과 대방군은 모두 지금의 만리장성 안쪽에 표시되어 있다.
이상과 같은 여러 역사적 기록을 볼 때 낙랑과 대방은 평양이나 황해도에 결코 설치한 적이 결코 없다.
처음에는 열하(熱河)와 요령성(遙寜省) 서쪽까지 점령했다가 30년이 채 못되어 모두 쫓겨나 결국은 만리장성의 안쪽 조백하(요수) 부근에 밀집한 낙랑과 대방만이 존재햇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만리장성의 안쪽의 낙랑이나 요동이 완전히 모두 고구려의 땅이 된 것은 고구려 장수왕 때 북연이 고구려에 항복하면서 북연의 땅 중 일부가 고구려에 흡수되어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러므로 장수왕 이후에는 수양제가 그의 조서에서 ”아른다운 땅 낙랑과 현도 및 대방이 오랑케 고구려의 땅이 되었다고 하고 고구려가 갈발지간(喝渤之間: 낙랑군 갈석현과 유주 발해군)을 빼앗고 있다(崇取)”한 수양제 조서 기록을 검토하고, 또 수양제의 침략경로를 검토할 때 낙랑군과 그 속현 및 대방군과 그 속현은 모두 요서 조백하 부근에 밀집해 있었다.
최대영과 이병도 공저 <한국상고사입문>의 지도에 한사군이 지금의 난하(灤河) 서쪽에 그려진 그림과 같이 한사군은 한반도에 설치된 역사적 사실이 전혀 없고 난하 서쪽에 설치되었다가
그것도 한사군 설치 33년 후에는 한사군이 만리장성 안족으로 완전히 퇴각한 것이 역사적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