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조선을 현재국사책은 지나치게 미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국사책을 배우고 자란 기성세대나 배우고 있는 세대나 리조선의 실체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세종대왕에 대하여 그렇습니다. 세종이 한글만들고 각종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고 농토를 확장하여 국부를 늘리고 북방을 개척하여 영토를 늘리는 등 모든 방면에서 천재적인 수완을 발휘하여 한국역사상 가장 훌륭한 임금이라고 추앙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세종의 다른 면의 실체를 들여다 보면 믿어지지 않는 사실들이 있습니다. 깨어있는푸른역사 cafe.daum.net/mookto
먼저, 세종임금을 낳은 리조선의 실체를 간략하게 언급하고 넘어갑니다. 리조선정권은 황제국 대륙고려를 멸망시키고 대륙의 광활한 고려영토를 명나라 원장이에게 넘겨주고 반도로 이사옵니다. 대륙고려의 흔적은 특히 한대륙 산동성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납니다. 문헌적 고고학적 증거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문헌적 증거는 송나라사람이 썼다는 '고려도경'에 나타나는 것들이고, 고고학적 근거는 산동성 봉래지역에 고려선박이 대략 발굴되고있는데 이 선박이 큰바다를 건널 수 있는 배들이 아니라, 인근해안이나 강에 적합한 배들이라는 것입니다.
황제국 고려를 멸망시키고 리조선을 개국한 리성개는 개국하여 왕노릇 하기 위하여 대륙의 고려영토를 차이나족 명나라 원장이에게 팔아 먹었습니다. 전도환이 정권탈취하면서 미국에게 핵개발포기하여 자주국방을 팔아먹었듯이 말입니다. 리조선정권이 대륙에서 반도로 이주한 것은 원나라가 명나라에게 밀려 몽골초원으로 돌아간것이나, 모택동과 장개석이 다투다가 중화민국 정권이 모택동 공산당 정권에게 패하여 대만으로 이주한것과 비교가 됩니다.
이렇게 한대륙의 고려영토를 팔아먹고 반도로 쫓겨온 리조정권은 후손들에게 이와같은 사실을 감추기위해 고려시대까지 이어온 대륙 황제국의 역사를 모조리 조작 날조하여 반도역사, 황제국을 섬기는 제후국(거수국)역사, 사대주의역사로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가 현재 배웠고 배우고 있는 한국사는 리조선정권하에서 발행한 역사서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 리조실록등입니다. 그러나 날조조작하였더라도 완전히 새로 역사를 창작할 수 없었기에 한대륙 황제국의 역사의 흔적들이 상당히 남아 있습니다.깨어있는푸른역사 cafe.daum.net/mookto
한반도로 이사온 리조정권은 세종대에 와서야 본격적으로 문물을 정비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세종임금대에 유난히 획기적인 정책들이 수없이 나타나는 겁니다. 이를 위해 한대륙에 있던 지명을 반도에 복사해서 심어 놓습니다. 즉, 반도의 지명을 새로 지어 버리게 됩니다. 현재 한대륙의 지명과 반도의 지명이 거의 복사한듯이 똑같은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반도에 있는 주요 지명은 그대로 한대륙에 다 있습니다. 한대륙에서 진행된 역사를 반도에서 벌어진 역사로 날조조작하려는 1차 작업이었던 것이죠.
세종이 소위 '훈민정음'을 내놓은 것도 이런한 맥락이었습니다. 반도로 이사해 와서 지명 복사 이외에 가장 시급한것은 글자소리 통일이었습니다. 각 지방마다 사투리가 있듯이 '한문'을 읽은 소리가 지방마다 다 달랐던 것이죠. 이는 원활한 통치를 거의 불가능하게 한 것이죠. 무슨 문서나 공문을 발송하려고 해도 글 읽는 발음이 통해야 가능한데 이런 기본적인 것 조차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결국 훈민정음은 중앙정부인 리조정권이 자기들 기준에 맞추어 소리글자를 정하고 이것을 전국각지에 보급하여 따라하라는 소리글자인 셈입니다. 따라서 '훈민정음' 관련글에서 나오는 "나랏 말쌈이 중국과 달라" 라는 문장의 중국은 현재의 한대륙 중국(China차이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세력인 리조정권의 한반도 수도서울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훈민정음 즉 '한글'이 세종임금이 독창적으로 만들었다고 널리 알려져 있는데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종실록에는 옛전자를 모방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이조성종때의 학자 '성현'이라는 사람이 쓴 용재총화 제7권에는 한글은 범자 즉 인디아의 산스크리트 문자를 본땃다고 나옵니다. 깨어있는푸른역사 cafe.daum.net/mookto
세종 102권, 25년(1443 계해 / 명 정통(正統) 8년) 12월 30일(경술) 2번째기사
훈민정음을 창제하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 이라고 일렀다.
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 其字倣古篆, 分爲初中終聲, 合之然後乃成字, 凡干文字及本國俚語, 皆可得而書, 字雖簡要, 轉換無窮, 是謂 《訓民正音》 。 世宗莊憲大王實錄卷第一百二終
【태백산사고본】 33책 102권 42장 A면
【영인본】 4책 533면
"세종께서 언문청(諺文廳)을 설치하여 신숙주, 성삼문(成三問) 등에게 명하여 한글을 짓게 하니, 처음에 초종성(初終聲)이 8자(八字), 초성이 8자, 중성이 12자였다. 그 글씨체는 범자(梵字)를 본받아 만들어졌으며, 우리 나라와 다른 나라의 어문 문자(語文文字)로써 표기치 못하는 것도 모두 막힘없이 기록할 수 있었다.
世宗設諺文廳。命申高靈成三問等製諺文。初終聲八字。初聲八字。中聲十二字。其字軆依梵字爲之."
-용재총화 중에서-
여기서 옛 전자篆字의 篆는 전서전자로 나오고 진나라 이사에서 그 뿌리를 두는데, 사실은 단군조선의 글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옛전자는 가림다 글자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용재총화에서 범자 즉 산스크리트문자를 본땃다고 하는 것도 산트크리트 문자도 강상원 박사의 실담어 연구를 종합해 보면 결국 우리글자에서 나간것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동방(한국)에는 옛날에 속용문자(俗用文字)가 있었으나 그 수가 갖추어지지 않고 그 모양도 정리되지 않아, 어떤 말을 형용한다거나 어떤 용처에 사용하기에는 부족하였다.( 東方舊有俗用文字 而其數不備 其形無法 不足以形一方之言 而備一方之用也.)"
- 『훈민정음운해(訓民正音韻解)』신경준, 1750
위 신경준이 말한 속용문자는 민간에서 쓰던 글자로서 아래 단군세기에 나오는 가림다 문자로 추정됩니다.
'단군세기' 에는 기원전 2181년 단군3세 가륵임금 때 "삼랑(三郞)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게 하니 이것이 가림다(加臨土)이다." 라는 기록이 나옵니다.
결국, 세종임금이 만들었다는 '훈민정음'은 세종임금의 독창적인 글자가 아니라, 그때까지 전해져 오는 글자를 축소 개량한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도 반도생민들을 원활하게 통치하기위해서 만든 것입니다.
한편, 한국방송공사 제1티비에서 얼마전까지 방영한 '대왕세종' 은 세종임금에 대하여 엄청난 역사왜곡을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지도자의 모범이라는 전갈이었습니다. 신기전등 각종 과학발명품을 만들고, 훈민정음을 내놓으며, 차이나족 명나라의 방해공작등 반대때문에 난관에 부딛치지만 끝내 명나라를 무시하거나 제치고 성공하였다는 내용은 참으로 눈뜨고 볼 수 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다음의 세종실록기록을 보면 위와 같은 명나라에대한 태도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충격 그 자체입니다. 아래와 같은 한겨레에 대한 죄 외에 북한 구월산에 있었다는 단군신전을 파괴하는 만행까지 벌이는 자라는 것이 세종실록에 낱낱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명나라 왕(황제)이 죽자, 마치 부모가 죽은 것 처럼 상을 치루는데 동서고금에 없는 27일 상복입는 의례를 세종임금이 '창제'까지 하여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곧대고 우기며 끝내 상복을 입고 27일을 버팁니다. 이때는 리조정권이 들어선지 겨우 50년도 안된 때였습니다. 명나라 차이나족에 대한 사대주의가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리조정권의 유학자들에 의해서 라기보다는 리조왕이라는 자들이 리조개국 국시로 시작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음은 세종실록 원문:
예조에서 계하기를,
“지난 7월 18일에 황제께서 승하하셨사오니, 이번 9월 초하루 소복(素服)과 흑각대(黑角帶)와 오사모(烏紗帽)로 거애(擧哀)하시고, 초4일에 성복(成服)하시고, 초7일에 복을 벗으시는 것입니다. 거애하는 날로부터 복을 벗으시는 날까지 조회와 저자를 정지하고, 형륙(刑戮)을 정지하고, 음악을 금지하고, 도살(屠殺)을 금하고, 혼인하고 시집가는 것도 금지하고, 크고 작은 제사를 정지하게 하소서. 또 상복은 일체 홍무(洪武) 32년에 태조 고황제 의 상례(喪禮)에 따라, 서울에서는 4품 이상, 외방(外方)에는 대소 사신(使臣)· 수령 은 최복(衰服)을 입고, 그 나머지 각 품의 관리들은 흰 옷에 검은 사모에 흑각대로 상례를 마치게 하고, 연변(沿邊)의 장수나 군관들은 이 예에 따르지 아니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8책 25권 21장 A면
【영인본】 2책 620면
【분류】 *외교-명(明) / *의생활(衣生活)
禮曹啓: “去七月十八日, 皇帝升遐, 今九月初一日, 以素服、黑角帶、烏紗帽擧哀, 初四日成服, 初七日除服。 自擧哀日至釋服日, 停朝市、去刑戮, 斷音樂、禁屠殺, 禁婚嫁、停大小祀。 且喪服, 一依 洪武 三十二年爲 太祖高皇帝 喪禮, 京中四品以上、外方大小使臣、守令着衰服, 其餘各品官吏, 以白衣、烏紗帽、黑角帶終制, 沿邊將帥及軍官, 不用此例。” 從之。
세종 25권, 6년(1424 갑진 / 명 영락(永樂) 22년) 9월 2일(갑술) 1번째기사
임금이 상복을 3일만에 벗지 않고 27일의 제도를 실행하다.
임금이 지신사 곽존중 에게 명령하여 말하기를,
“ 태조 황제 의 유조(遺詔)에, ‘천하 신민은 상복을 입은 지 사흘 만에 벗으라.’ 하신 것은 그것이 주현(州縣)의 이민(吏民)을 위하여 말씀하신 것이요, 조정에서는 반드시 그와 같지 아니하리라. 군신(君臣)의 의리가 지극히 무거운 것인지라, 대행 황제의 상복을 나는 차마 사흘 만에 벗지 못하겠고, 또 고례(古禮)에 외정(外庭)에서는 역월(易月)의 제도를 행하였지만, 궁중에서는 삼년상을 실행하였으니, 이제 여러 신하들은 3일 만에 벗지만, 나는 3일 후에 권도(權道)로 흰옷을 입고 정사를 보다가 27일에 이르러 길복(吉服)을 입을 것이니, 근신(近臣)도 역시 마땅히 27일에 벗게 하되, 영의정 유정현 · 성산 부원군(星山府院君) 이직(李稷) · 좌의정 이원(李原) · 우의정 유관(柳觀) · 대제학 변계량 · 병조 판서 조말생 · 이조 판서 허조 · 예조 판서 신상(申商) · 참판 이명덕 과 함께 의논하게 하여 아뢰라.”하니, 허조 · 신상 · 명덕 등이 의논을 올려 말하기를,
“주상의 교지가 모두 옳습니다.”
하고, 유정현 · 이직 · 이원 · 유관 · 변계량 · 조말생 등은 의논을 올려 말하기를,
“27일에 벗는다는 것은 그것이 예전의 예문(禮文)이요, 또 전하께서 인군을 위하시는 정성이 매우 두터우시나, 그러나 태조 고황제 의 유조(遺詔)에 ‘천하 신민이 3일 만에 복을 벗으라.’ 하였고 지금 대행 황제의 유조(遺詔)에서도 역시 말씀하기를, ‘중외의 신민이 상복을 입는 예의는 한결같이 고황제 의 유제(遺制)에 따르라.’ 하였으니, 시왕(時王)의 제도는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정현 등의 의논을 옳게 여겼으나, 끝내 27일의 제도를 실행하였다.
【태백산사고본】 8책 25권 22장 B면
【영인본】 2책 621면
분류】 *외교-명(明) / *왕실-의식(儀式) / *의생활-예복(禮服)
世宗 25卷, 6年(1424 甲辰 / 명 영락(永樂) 22年) 9月 2日(甲戌) 1번째기사
甲戌/上命知申事 郭存中 曰: “ 太祖皇帝 遺詔天下臣民, 喪服三日而除, 此爲州縣吏民而言, 朝廷必不如此。 群臣終始之義至重, 大行皇帝之喪, 予不忍三日而除。 且古禮, 外廷行易月之制, 宮中實行三年之喪。 今群臣三日而除, 予則三日後權着白衣視事, 至二十七日卽吉, 近臣亦宜二十七日而除。 其令領議政 柳廷顯 、 星山府院君 李稷 、左議政 李原 、右議政 柳觀 、大提學 卞季良 、兵曹判書 趙末生 、吏曹判書 許稠 、禮曹判書 申商 、參判 李明德 同議以聞。” 稠 、 商 、 明德 等議云: “上敎皆是。” 廷顯 、 稷 、 原 、 觀 、 季良 、 末生 等議云: “二十七日而除, 是古之禮文。 且殿下爲君之誠甚厚, 然 太祖高皇帝 遺詔天下臣民三日而除, 今大行皇帝遺詔亦曰: ‘中外臣民喪服禮儀, 一遵 高皇帝 遺制。’ 時王之制, 不敢不從。” 上是 廷顯 等議, 然竟行二十七日之制。
【태백산사고본】 8책 25권 22장 B면
【영인본】 2책 621면
【분류】 *외교-명(明) / *왕실-의식(儀式) / *의생활-예복(禮服)
世宗 29卷, 7年(1425 乙巳 / 명 홍희(洪熙) 1年) 閏7月 8日(乙巳) 2번째기사
議政府率百官, 詣 景福宮 釋喪服, 上率群臣, 素服凡二十七日。 【태백산사고본】 10책 29권 12장 B면
【영인본】 2책 684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의정부에서 백관을 거느리고 경복궁 에 나아가 상복을 벗었다. 임금이 모든 신하를 거느리고 소복(素服)하기 무릇 27일 동안이었다.
【태백산사고본】 10책 29권 12장 B면
【영인본】 2책 684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세종실록 출처: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주요참고출처:
'대륙에서8600년 반도에서600년' 이병화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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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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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entropy 작성시간 10.08.18 분명한것이상 더 분명한것!!
만일 대륙 조선이 맞다면 그곳에 속한 사람은
한국말을 써야하는데 ....
참 아이러니 아니유?
증거는 과학적으로.
과학은(천문학) 통일 신라초기 이미 대륙에서
지금 경상도 지역으로 쫒겨왔음을 말해주지요. -
답댓글 작성자토박기 작성시간 11.09.22 쉽게 칼켜드리죠. 미국 나라세운지 겨우 이백년 넘었느데...세계 최강국....지금 망해가지만.....인디언 아메리카 주인....1억명 학살돼고....일부 혼열에 인디언 보호구역에 원숭이처럼 살고있음 그리고 영어쓴다.....조선이 망하기전 만주 간도 상해 난징 수없이 많은 사람이 중국에 살았지...근데 죽고 숨고 동화됀거여...일본에 조선인 수도 없이 많았지만....벌써 몇십년만에 모국어 잃어버리고 거의 일본사람이지....사람 몇대 지나면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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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코레일 작성시간 10.09.29 중국=>국중(나라의 중앙, 곧 임금이 있는 궁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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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디아블로 작성시간 10.10.17 훈민정음은 세계 1위의 문자와 음자. 두말하면 헛소리. 누가 만들었던 결국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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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토박기 작성시간 11.09.22 말은 바로하시지.....세종대왕님이 외곡한게 아니고 당신들이 왜곡한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