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추위 부위원장 전종현입니다.
오랜만에 글을 씁니다. ^^;; 그간 바쁜 사회생활 가운데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은 간절하고 책도 보고 소개도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는데 막상 생업을 갖고 있는 직장인다보니 어려움이 한두가지가 아닌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일제의 침략기를 거쳐 8.15 광복을 맞은 후 당시 황실의 상황은 어떠했는가..하는 부분을 들여다 보려고 합니다.
그 첫 번째 이야기 입니다.
1945년 8월15일 무더운 날씨였던 그날. 정확히 정오에 일본 천황의 라디오 방송이 있었습니다.
모두 잘 아시다시피 日 천황의 '항복성명서'발표였습니다.
그로부터 불과 며칠 전인 1945년 8월 6일.
고종황제의 아들인 의친왕의 둘째 아드님이었던 '이우'공은 히로시마에서 말을 타고 아침 일찍 부대로 출근하다가 원자폭탄 세례를 맞고 꽃다운 나이인 34세에 사망하고 맙니다.
일찍이 항일정신이 제일 강하여 의친왕과 영친왕의 사랑을 독차지 하였고 가장 황실의 촉망받던 황족이었던 '이우'공은 이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뜨고 말았던 것이지요.
가장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위 사진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일본군에서 장교로 복무하던 당시의 이우 공 사진이고, 다음 사진은 박찬주 여사와의 결혼사진입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전부는 아니었습니다.
11살의 어린 나이로 볼모로 강제로 일본에 끌려간 뒤 일제식 교육을 받고 일본 사관학교를 거쳐 허울뿐인 일본 장성(중장)까지 했고, 결혼마저 일 왕족과 하여야 했던 영친왕의 아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사진은 영친왕의 9살 때 입니다.
1945년 일제로부터 해방은 되어 영친왕은 꿈에도 그리던 조국으로 돌아오고자 하였으나 한국에서는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져 정세가 혼란한 상황이었고, 일부에서는 영친왕을 일부에서는 의친왕을 모셔야 한다는 주장과 반대파로 인해 파벌 싸움까지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일제에 의해 왜곡되었던 황실에 대한 부정적인 부분들로 인해 영친왕을 일본의 앞잡이라느니 민족 반역자라느니 하는 일부의 주장(美 군정하 입법의원에서 '박건웅 의원'의 발언 등)까지 나와 영친왕에게 큰 마음의 상처를 주고 있었습니다.
또한 해방과 함께 일본과의 일체 교류가 단절되면서 영친왕은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외면받는 국제미아가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이 때의 비참한 생활고로 인해 의친왕의 첫째 아들로서 일본에서 거주하고 있었으며 일제의 강제 혼인정책으로 일본인과 결혼하였던 '이건'공은 시부야 역전 시장에서 부부(이건 공, 요시코 여사)가 함께 단팥죽 장사를 하면서 생활을 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영친왕비(이방자 여사)의 친정인 '나시모토 궁'은 공습으로 7백평의 건물이 불탔고, 창고는 도둑으로 인해 모두 털렸고, 영친왕비의 친정부모는 왕족임에도 불구하고 창고에서 겨우 기거하는 상황이었으며 영친왕 내외도 갖고 있던 골동품 들을 시장에 내다팔아 생계를 유지할 상황이 되었습니다.
또한 영친왕 내외는 1947년 10월 18일 신적강하(臣籍降下) 조치를 당하여 일본 왕족과 함께 이젠 왕족이 아닌 평민으로 추락하여 험난한 세상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초래되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더 상처가 되었던 것은 조국의 냉대였습니다. 꿈에서도 가장 보고파 하였던 조국에서마저도 이승만 정권의 영친왕에 대한 냉대로 인해 더 가슴 깊은 상처를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 사진은 일본 육군 장성(중장)으로 복무하던 영친왕의 모습과 영친왕비 '이방자'여사의 모습입니다.
1950년 2월 맥아더 원수에게 감사함을 표시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은 이곳에서 영친왕 부부를 만나게 되는데 이곳에서 이 대통령은 장차 자신에게 큰 장애물이 될 인물로 영친왕을 여기고 냉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승만 대통령 그 자신이 전주이씨 후손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니던 사람이었음에도 오히려 황실을 욕하고 왜곡하고 영친왕을 철저히 외면하는 짓을 저질던 것입니다.
또한 6.25 전쟁이 발발하여 낙선재에 거주하고 계시던 '순정효황후 윤씨'는 피난 후 돌아와 다시 상궁들과 함께 기거하던 낙선재로 들어가시고자 하였으나 못들어가게 하고 정릉 골짜기에 있던 과거 '백락승'이라는 사업가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별장으로 쓰라고 선사한 집에 들어가게 하여 인적 없는 그곳에서 4.19가 날 때까지 10여년을 귀양살이 하듯이 사셔야 했던 것입니다.
순정효황후 윤씨는 순종 융희황제의 둘째 황후인 분입니다. 흔히 과거 70년대까지도 윤대비 마마로 불리웠던 분입니다.
사진을 보겠습니다. 몇 번 소개한 사진인데요, 맨 왼쪽부터 영친왕의 외아들 '이 구' '순정효황후 윤씨' 그 옆은 영친왕비 '이방자 여사', 맨 오른쪽은 이구 의 부인이었던 '줄리아 여사'입니다. 줄리아 여사와는 나중에 종친들의 반대에 부닥쳐 결국 이혼을 하게 되죠.
이 일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제가 '황실과 역사' 게시판에 일전에 올린 '순정효황후'를 기리면서 올렸던 글을 참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황실탄압은 이미 해방후 6.25가 나기 이전부터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집요하게 진행이 되고 있었습니다. 즉, 이승만 대통령은 해방이 되자마자 토쿄에 있던 영친왕의 집을 한국 정부에 내놓으라는 압력을 가해오기 시작했고 6.25 이후에는 주일대표부를 통해 협박과 압력을 계속 해오고 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덕혜옹주의 정신병원 입원비 조차도 한국정부에서는 지급치 않아 영친왕 부부가 그 비용을 대야했고 생활비 충당을 위해 사유재산 이었던 집을 팔아야 했으나 한국 정부는 사유재산이었던 영친왕 부부의 집을 막무가내로 뺏으려다 결국 그 집은 엉뚱한 사람에게 넘어가고 말았고, 대신 영친왕의 재산이었던 수많은 미술품과 도자기들도 황족의 재산은 정부 것이라면서 모조리 몰수해갔습니다.
이러한 일을 왜 이승만 정권을 벌여야 했던 것일까요?
정치는 돈이 있어야 합니다. 즉, 이승만 정권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에게 가장 큰 적이 될 수 있는 황실의 어떠한 자금원도 남겨두지 않음으로 인해 황실궤멸 작전을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승만 정권의 결정판이 바로 '구황실 재산처리법'이라는 법입니다.
이 법으로 인해 황실의 모든 재산인 동산과 부동산은 완전히 국유화한다면서 몰수하고 이로 인해 수많은 귀중 문화재가 수없이 멸실되었고, 수많은 황실재산이 이승만 독재정권의 자금원으로 전락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전주이씨 종약원의 '이해문 청년이사'의 말.. [안천 서울교재 교수著, 일월오악도 4권 p.174]
"일제강점 때에도 일제는 조선 황실의 체면유지를 위한 배려를 해서 1억만평 이상의 황실토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많던 토지가 거의 다 없어지고 황릉만 약 800만평 남은 것이 현 실정입니다. 이승만 정권의 구황실재산 처리법에 의해 허망하게 없어졌으니, 오천 년 문화민족을 자랑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동구릉 앞의 갈비집, 서삼릉의 목장 등은 모두 되찾아야 할 성역입니다."
이때, 구 황실재산처리법이 제3대 국회에서 통과되었는데 이 내용에 따르면 매월 구왕족에게는 생활비를 지급토록 하고 있는데 이 돈으로는 제대로 살림을 하기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이 나마도 제대로 지급치 않아 곤궁하게 지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바로 그 악명 높은 '구 황실재산처리법'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舊皇室財産處理法案 (단기 4287년 9월23일 법률 제339호)
이 내용은 다음 시간에 소개하겠습니다.. 다음편을 기대해주세요.
융희98년(서기 2004년) 12월11일
대한제국 황실복원추진위원회 [황추위]
The Society for the Restoration of the Korean Royalty [SRKR]
http://cafe.daum.net/1392roy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