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일가 의병활동으로 탄압"(종합)
연합뉴스 | 입력 2006.08.14 17:49
의병장 신암 노응규, 대통령 종증조부
(양산=연합뉴스) 진규수 기자 = 일제 시대까지 경남 창녕에 거주하던 노무현 대통령 일가가 구한말 의병장을 친척으로 둔 탓에 일제의 핍박을 받고 지금의 김해 지역으로 이주한 것으로 밝혀졌다.
재야사학자이자 현직 고등학교 교사인 이태룡(51)씨는 구한말 의병장 활동을 한 신암 노응규 선생의 행적과 후손들의 행방을 추적하던 중 이같은 사실이 드러났다고 14일 밝혔다.
이씨의 연구에 따르면 노무현 대통령의 종증조부(증조부의 친척 형제)이기도 한 노응규 의병장은 1896년 1월 안의(지금의 함양군)에서 의병을 일으킨 뒤 경남 지역에서 1만이 넘는 의병을 이끌고 일제와 맞서 싸웠다.
김해를 공격해 양곡의 일본 반출을 저지하는 등 큰 활약을 펼쳤던 노응규 의병장은 이후 의병 활동을 계속하다 1907년 2월 일제에 의해 감호소에 수감된 뒤 일제의 밥을 거부하고 절식, 순국했다.
이씨는 "노응규 의병장은 국사책에도 소개될 정도로 의미있는 인물이지만 학계에는 이에 대한 논문다운 논문도 나와 있지 않은 형편"이라며 "창녕, 대구, 김해 등을 돌아다니며 노 의병장의 후손을 만나고 기록을 찾았다"고 밝혔다.
이씨는 노응규 의병장의 남겨진 수기 등을 모아 1993년 '신암 노응규 의병장 문집'을 엮었으며, 그의 행적을 기린 '신암선생 추모사업회' 결성을 주도하는 등 그간 노응규 의병장의 알려지지 않은 활동을 연구해 왔다.
이씨는 "93년에 발간한 노응규 문집은 노무현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2002년 청와대로 보냈으며 노무현 대통령에게 '고맙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고 말했다.
이씨는 또 "노 의병장의 직계 후손은 대가 끊겼으나 인척 형제들은 창녕군에서 대를 이어왔다"며 "대통령의 증조부가 포함된 이 일가는 의병장 전력을 못마땅히 여긴 일제에 의한 탄압을 받고 이를 피해 김해로 옮겨 지금까지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러한 연구결과를 밝히면서 "구한말 한국사의 중요한 부분 중의 하나인 의병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부족한 점이 아쉽다"며 "알려지지 않은 의병장들에 대한 평가가 올바로 이뤄지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씨는 20여년간 의병장에 대한 기록 추적과 지역 답사를 거쳐 최근 '한국 근대사와 의병 투쟁' 1.2권을 펴냈으며, 노응규 의병장이 활약과 후손들의 모습이 포함된 4권을 오는 8월25일께 출간할 예정이다.
nicemasaru@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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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응규(盧應奎, 1861년 3월 15일 ~ 1907년 1월 4일)는 구한말의 의병장이다.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노무현의 종증조부이기도 하다.
경상남도 함양 태생으로 아호는 신암(愼菴)이다. 유명한 유학자인 허전의 제자였으며, 위정척사론의 거두인 최익현과 송병선, 송근수에게서도 사사했다.
1895년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이 내려진데 분노한 유림 세력은 대거 거병하게 되었는데, 노응규도 1896년 함양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장수사의 승려인 서재기를 선봉장으로 삼은 노응규의 의병은 진주를 단숨에 함락시켰고, 진주 인근 세력을 합세시켜 진주의병진(총대장 노응규)을 구성하게 되었다. 진주의병진은 부산 방면으로 진공하여 김해까지 손에 넣는 성공을 거두었으나, 일본군의 개입에 밀려 결국 해산되고 말았다.
이 일로 가족들이 피살되는 불행 속에 노응규는 호남 지방에서 피신하던 중, 1897년 대한제국 선포 직후 상소를 올려 사면을 받았다. 이후 여러 나라의 세력이 대치하는 상황 속에서 고종은 을미사변에 대항하여 의병을 일으켰던 유학자들에게 벼슬을 주어 등용했고, 그도 규장각 주사와 동궁시종관 등의 직책을 맡아 고종과 가까운 거리에서 근무했다.
그러나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의 세력이 다시 강성해지면서 한일의정서와 을사조약 체결 등으로 국권의 피탈이 가시화되었고, 노응규는 1906년 전라북도 정읍에서 스승인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듣고 여기에 합류했다. 최익현의 의병은 순창에서 일본군에게 패하여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와해되었다.
이때 몸을 피한 노응규는 또다시 거사를 준비하여 그해 충청북도에서 서은구, 엄해윤, 김보운, 오자홍 등과 함께 의병 조직을 구성했는데, 밀정에 의해 이 일이 탄로나 12월 8일 체포된 뒤 한달이 채 지나지 않아 옥사했다. 그는 감옥에서 일제가 주는 밥을 먹을 수 없다며 단식하다가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음은 상세한 부산일보 기사(2008.8.9)입니다.
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8/0809/060020080809.1010162923.html
[이태룡의 의병장 이야기] (24) 배달겨레의 스승 노응규 의병장
의병 10여 명 주축으로 진주성 장악
상소 위해 상경하던 중 부친·형 비보 접해
고종 밀명으로 충북 황간서 거병하다 잡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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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음력 1월 7일, 당시만 해도 전국 4대 도시 중의 하나였던 진주관찰부가 의병 수중에 들어갔다. 임진왜란 때 고립무원의 상태에서도 왜군을 상대로 1년 이상 버틸 정도로 내·외성이 굳건했던 진주성을 진주로부터 170리나 떨어진 '안의'(현 함양군 안의면)의 의병들이 점령했다는 소식은 일본 아사히신문에도 날 정도로 깜짝 놀랄 일이었다.
게다가 안의 출신 신암(愼菴) 노응규(1861~1907) 의병장과 그의 제자인 정도현·박준필, 전 사과(司果) 임경희, 그리고 안의 장수사 승려 서재기 등 14~15명에 불과한 의병을 주축으로 진주성을 장악했으니 더욱 놀랄 사건이었다. 물론 진주향교 장의였던 한진완 등 유림의 도움이 있었지만.
노응규 의병장이 거병 직후 올린 상소도 여느 유학자나 의병장이 올렸던 그것과 사뭇 달랐다.
"비록 무지한 남녀라도 차라리 죽을망정 금수가 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전하의 형세가 명나라 의종(명의 마지막 황제)과 같은 운명이니, (임금은) 사직을 위해 몸을 바쳐야 하고, 신하는 임금을 위하여 죽고 백성은 관장(官長)을 위해 죽어야 할 것입니다."
놀랄 일은 또 있었다. 정한용 의병장이 진주 사람들로 구성된 의병을 일으켜 호응하자, 진주성을 점령한 지 불과 10여 일만에 진주로 몰려든 의병이 1만 명을 넘어섰던 것. 게다가 진주성에서 허겁지겁 달아난 관찰사와 경무관의 요청으로 급파된 대구감영의 관군마저 속수무책으로 의병들에게 무너지고 말았다. 500여 명의 의병들이 진주에서 100여 리 떨어진 의령에서 4차례 전투를 벌여 얻어온 승전보였다.
의병을 일으킨 지 1개월도 안되어 진주관찰부 관할 22군을 의병천하로 만든 진주의진은 일제 침략의 교두보였던 부산 진격을 위해 김해로 별동대를 보냈다. 의병들은 김해에서 4월 11일과 12일 접전을 벌인 끝에 일본군 4명을 살상시켰지만 의병 역시 4명이 전사하고 20여 명이 부상을 당해 진주로 철수하고 만다. 그러면서 노 의병장은 서재기와 정한용 의병장으로 하여금 각각 육십령 고개 아랫마을인 안의와 대구로 통하는 길목인 삼가에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토록 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의병을 해산하라는 국왕의 명을 받은 선유사가 곧 도착한다는 소식이었다. 의진 수뇌부는 놀라움과 당혹감에 휩싸였다. 의병을 일으키라던 밀조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이러한 소식을 접하게 되었으니…. 국권회복의 명분을 내걸고 창의했던 노 의병장도 의병을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이 4월 19일(음력 3월 7일)이었다. 의병을 일으킨 지 꼭 2개월 만이었다.
한편 노응규 의병장은 국왕에게 상소를 올리기 위해 삼가를 거쳐 서울로 향하던 중, 부형의 비보를 듣게 된다. 진주성 의병 해산이 있던 다음날 저녁, 안의 서리(胥吏)들이 흉계로 서재기 의병장을 살해한 후 노 의병장 집을 불태웠다는 소식이었다. 이를 말리던 형(응교)은 총살되고, 부친마저 화상을 입고 이튿날 숨졌던 것이다. 노 의병장은 피눈물을 흘리며 서울로 향하던 길을 재촉했지만 국왕이 파천한 러시아 공사관 주변에는 일본군이 삼엄하게 경비를 하는 바람에 국왕에게 상소마저 올릴 수 없었다. 상소는 우여곡절 끝에 국왕에게 올라갔고, 노 의병장은 고종이 내린 비답과 묘전(墓田) 1천평, 묘지 500평으로 부형의 장례를 치르고, 초계(현 합천군 초계면)에서 제자들을 길렀다.
고종은 충의로 일어섰던 노응규·민용호·허위 등 의병장에게 벼슬을 내렸다. 이들 모두 '독립신문'이 '비도 괴수'로 공격했던 의병장들이었다. 노응규는 규장각 주사에 배임되어 벼슬길로 나아간 뒤 경상남도 사검 겸 독쇄관, 중추원의관을 거쳐 동궁시종관에 오른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그는 고종의 밀명을 받고 경상도·전라도·충청도 경계 지역인 충북 황간(현 영동군 황간면)에서 의병을 일으킨다. 장차 서울로 진공해서 일제 통감부를 쳐부술 계획으로 문태서·이장춘 등 덕유산 의병부대와 합동 훈련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부왜인의 밀고에 의해 충북 청산 경무분서 소속 순사들에게 의진의 장령들과 함께 붙잡히고 말았다.
노 의병장은 경성경무감옥서로 이감되었는데, 옥중에서도 시종 뜻을 굽히지 않아 심한 고문을 당했다. 동지들이 들여주는 음식 이외에는 어떠한 관급식도 거부한 채 투옥된 지 1개월도 안된 1907년 2월 16일, 옥중에서 절식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그는 국권회복기 전·후기 의병장이자 올곧은 삶을 실천한 겨레의 스승이었다. 경술국치 직후 노 의병장 가문을 없애기 위해 가혹한 행위가 행해져 두 아들은 모두 비명으로 갔고, 노 씨 문중은 오랜 세거지인 초계를 떠나 창녕 이방면으로 옮겼다가 다시 부산·김해 등지로 옮겼으니, 노무현 대통령 증조부도 이때 김해로 왔다.
김해건설공고 교사·문학박사(의병문학 전공)
원문 주소 -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table=seoprise_12&uid=58009